히메지마 린치 살인사건
姫島村リンチ殺人事件
1. 개요
1962년 일본에서 발생한 집단 폭행치사 사건. '히메지마 린치 사건(姫島リンチ事件)'이라고도 한다.
2. 사건 경위
1962년 3월 29일 밤 오이타현 쿠니사키 반도에 위치한 히메지마에서 마을 남성 39명이 유치원 앞 공원에 모여 두 남성을 집단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벳부에서 히메지마로 이주하여 영화관을 운영하던 A(당시 27세)와 그의 동생 B(당시 23세)로, 몽둥이 등을 들고 집단으로 덤벼드는 39명에 맞서서 삽 등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완전히 밀릴 수밖에 없었던 형제는 결국 그대로 끌려나와 남성들에게 한참 동안 집단구타를 당했다. 이후 A는 움직임이 멎었고, B는 가까스로 기다시피 해서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 힘이 다해 쓰러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39명은 그 자리를 떠났고, 직후 A의 가족이 현장으로 달려와 형제를 진료소로 옮겼으나 두 사람 모두 끝내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두개골 골절이었으며, 특히 머리와 턱 부위가 완전히 파열된 처참한 상태였다.
사건 다음날인 3월 30일 히메지마 청년단원 7명이 경찰서에 출두, 자신들이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수했다.
3. 집단폭행에 이르게 된 원인
한 마을 사람들이 2명을 집단폭행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끔찍한 사건이지만, 사실 이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피해자 형제였다. A와 B 형제는 원래 히메지마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벳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사건 발생 6년 전인 1956년 형제는 마을 의회의 의원으로 지역의 유력자인 숙부에게 의탁해 사업을 해 볼 요량으로 먼저 A가 히메지마로 귀향하여 '히메지마 극장'이라는 영화관을 개업한다. 섬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상당히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3년 전인 1959년에는 동생인 B도 뒤이어 히메지마로 내려와[1] 히메지마 극장 옆에 다방을 개업했으나 실패했고, 그 후에는 파칭코점을 열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여 폐업, 사건 발생 당시에는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도시인 벳부에서 자란 형제의 눈에 히메지마의 젊은이들은 시골뜨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이들은 점차 마을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벳부에 있을 당시 폭력단 관계자들과 교류가 있었으며, 눈에 거슬린다 싶은 사람이 보이면 온갖 트집을 잡아 괴롭히는 등 마치 자신들이 야쿠자라도 된 양 행패를 부리고 다닌 터라[2] 히메지마의 주민들 사이에서 형제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특히 사건 발생 약 1년 전부터는 그 정도가 한층 심해졌다. A는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폭력 그룹을 조직해서[3] 더욱 심하게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경찰에 체포된 적도 여러 차례였으나 지역 유지인 숙부의 영향인지 금방 풀려났고, 풀려나기가 무섭게 신고자들에게 보복 폭행을 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사건 당시 형제에게 폭력 피해를 당한 섬 주민이 무려 100여명에 달했을 정도였으나 이들은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했는데, 형제가 벳부의 폭력단이 자신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사건 발생 약 15일 전 마을 청년단이 니시우라 항구 개항 3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소녀 가극단의 무료 공연을 개최했는데, 형제는 이 공연 때문에 극장에 손님이 줄어 손해를 보았다며 앙심을 품고 청년단을 협박했다. 이에 보복을 우려한 청년단원들은 마을 공민관에 모여 단체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 당일 아침 형제가 공민관에 난입하여 주민 9명을 폭행하는 사태가 터졌고, 이에 오후 7시경 공민관에서 주민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경찰에 신고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형제가 숙부의 지위와 벳부의 폭력단의 위세를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린 탓에 이들의 눈치만 살피는 경찰은 더이상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주민들은 그 동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더 이상 형제의 횡포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이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고, 39명의 장정들이 형제를 공원으로 불러내 집단으로 폭행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당초 긴급 회의에서 형제를 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맞으나 어디까지나 이들을 '혼내주기 위해서'였을 뿐, 살해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집단폭행의 리더격이었던 소방단 부단장(당시 45세)도 사건 이후 "어째서 (형제가)죽을 때까지 때렸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술회했다.
4. 재판
사건에 관련된 39명 중 15명이 상해치사로 기소되었다. 오이타 지방법원은 피고인들이 모의 단계에서 형제를 살해할 의사가 없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행위에 가담하면서 제어가 불가능했다는 점, 피해자인 형제 측에도 사건의 일부 책임이 있음을 들어 주모자 격인 2명에게는 징역 2년의 실형, 그 외에는 집행유예라는, 집단폭행 살인사건 치고는 이례적으로 가벼운 판결을 내렸다.
5. 그 외
1964년 TBS 테레비 계열의 '킨테츠 금요극장[4] '에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단막극 '목격자'가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