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피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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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년 아므르 이븐 알 아스의 이집트 '재정복' 이후의 정세

1. 개요


아랍어 فتنة مقتل عثمان [1]
1차 무슬림 내전 (656 ~ 661년)이라고도 한다. 라쉬둔 칼리파 조의 멸망과 우마이야 왕조 성립의 과도기이다. 3대 칼리파 우스만의 석연치 않은 피살과 4대 칼리파 알리의 계승에 대한 반발로 벌어졌다.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가 이끈 낙타 전투와 우스만의 6촌 동생이자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 1세가 이끈 시핀 전투가 양대 전장이었다. 알리의 정규군은 전자에서 승리했고 후자에서도 승기를 잡았지만 이어진 무아위야와의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이며 전선은 소강 상태로 이어졌다. 다 이긴 전투를 결정짓지 못하는 알리에 실망한 급진파 카와리지가 결국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알리는 양면전선의 부담을 안았고, 나흐라완 전투에서 카와리지를 괴멸시켰으나 그 잔당에게 암살되었다. 뒤를 이은 장남 하산은 이라크를 거점으로 버텼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무아위야의 관대한 제안에 응하여 칼리파위를 넘기고 은퇴하였다. 이로써 무아위야 1세가 단독 칼리파가 되며 5년간의 내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무아위야의 칼리파위 세습화는 재차 반발을 유발, 알리의 차남 후세인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2차 피트나로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 우스만 피살


우마르에 이어 그가 선임한 6인 위원회 중에서 칼리파로 선출된 우스만은 기득권 쿠라이쉬 부족 출신이었다. 그는 전임 칼리파들과 달리 무슬림들에게도 토지세를 거두며 정부를 꾸렸고 친족들을 각지의 총독으로 봉하며 중앙 집권화를 꾀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고, 이집트의 무슬림들이 지나친 과세에 항의하며 메디나로 몰려가 우스만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스만은 그들에게도 명망이 있던 알리에게 중재를 부탁하였고 알리는 그에게 식수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일단의 군중이 우스만의 저택에 난입해 기도하고 있던 그를 베어 죽이며 우마르에 이어 우스만까지 암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연이어 유력한 칼리파 후보였던 알리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1] 피타나트 무크탈 우쓰만 (우스만 피살 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