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위야 1세
1. 개요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아랍어: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602~680년(재위 661~680). 우마이야 왕조의 개국 군주이자, 1대 칼리파.'''나는 왕 중의 왕이노라'''
2. 생애
무아위야는 쿠라이쉬 부족 출신이자, 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의 친척이었고 무함마드가 메카에 입성하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후 아부 바크르 시대에 등용된 뒤 우스만 재임기에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기독교도들에 대한 차별 완화로 세력을 키웠고, 1차 피트나(무슬림 내전)에서 계략을 써서 불리한 전세에도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 진영과 휴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하리지 파의 반발로 알리가 암살되자, 661년 무아위야 1세로 칼리파에 즉위하였다.
그는 이슬람 제국을 통일하고 이프리키야(튀니지, 리비아), 에게 해로의 팽창를 주도하며,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1차 콘스탄티노플 포위를 지휘하였다. 무아위야 1세는 자신의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파 지위를 세습하였고, 이에 680년 2차 피트나가 일어나게 된다.
3. 치세
3.1. 중앙 집권화 시도
드넓은 제국의 효과적인 통치와 안정(내전 방지)을 우선 과제로 선정한 무아위야 1세는, 시리아의 구 비잔틴 행정 관료들을 중용하여, 로마식 관료 기구인 디완을 만들었다. 디완의 중심 업무는 우편(명령 전달)이었다고 한다.
3.2. 적을 중용하다
알리가 칼리프였을 때인 659년, 이란 파르스 지방의 페르세폴리스에서 조로아스터 교도/이란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해방 노예 출신의 지야드가 잔압하였고, 알리는 그를 파르스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후 칼리프로 즉위한 무아위야는, 그때의 공적을 높이 사서 지야드를 다마스로 초빙하였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지야드 앞에 나타난 무아위야는, 그에게 의형제 제안을 하였고, 따라서 지야드에게는 무아위야의 부친 이름인 수피안 칭호가 더해져, 지야드 이븐 수피안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아 출신 노예로서 아버지 성함도 모르고 자랐던 지야드는 감격, 이후 바스라 & 쿠파 총독을 역임하며 그곳의 반 우마이야 정서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쿠파에 대 모스크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래도 적대감을 드러내던 쿠파 시민 5만 명을 671년 호라산의 메르프로 이주시켰다.
지야드는 673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우바이둘라가 이라크에 호라산까지 책임지었다. 그는 674년에 부하라를 약탈하기도 하며, 옥수스강(아무다리야)를 도하한 첫 무슬림 장군이 되었고, 그 역시도 무아위야 1세에게 충성을 다하며, 적어도 무아위야 1세 치세 기간까진 동쪽이 안정되게 된다.
3.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항목 참조.
3.4. 야지드로의 세습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하며 칼리파를 아들인 야지드에게 세습하자 기존 세력은 크게 반발하였다. 원래 다수의 부족으로 구성되었던 아랍 세계의 특성상 선출로 지도자를 뽑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븐 주바이르가 이에 들고 일어나며 2차 피트나가 발발하게 된다.
4. 여담
무아위야는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기독교도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기독교도인 마이순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며 기독교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야지드가 다음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따라서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이 실행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5대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리아를 기반으로 하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까지도 수니파와 시아파는 기독교보다 서로 간의 사이가 훨씬 안 좋다.
독서가 취미였으며 하루 일과가 끝나면 주로 역사서를 탐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