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1. 개요
2. 호칭
2.1. 실명과 무함마드의 의미
2.2. 국내 표기법
3. 생몰년월
4. 위상
5. 일대기
5.1. 출생 당시 환경
5.1.1. 부족
5.1.2. 메카의 상황
5.2. 어린 시절
5.2.1. 청년기
5.3. 각성
5.4. 헤지라(聖遷[1], 이슬람 기원)
5.5. 지하드(聖戰)
5.6. 귀환
5.7. 정복 이후 죽음까지
5.8. 사후
6. 연표
7. 후손
8. 오해: 창시자? 신?
9. 주요 평가
10. 논란
10.1. 사생활
10.2.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
10.3. 유대인 문제
11. 이야깃거리
12.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image][2]

'''하나님이 보낸 자'''[3]

사람들이여! 하나님도 한 분이요, 우리의 선조도 한 분으로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손입니다. 알라께서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인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아랍인이 비아랍인에게 우월한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합니다.

무함마드(مُحَمَّد‎‎, 570년 ~ 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창시자이다. 본명은 '아불카심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압둘무탈리브 이븐 하심(أَبُوٱلْقَاسِم مُحَمَّد ٱبْن عَبْدٱللَّٰه ٱبْن عَبْدٱلْمُطَّلِب ٱبْن هَاشِم)'이다. 일생을 바쳐 아라비아 반도의 제부족을 이슬람의 기치하에 통합하여, 이슬람 정복의 초석을 두었다. 이슬람에서 파생된 드루즈교, 알라위, 시크교 등에서도 존경받는 예언자이다.

2. 호칭



2.1. 실명과 무함마드의 의미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실제 사용한 이름이 아니라 자칭이며, 실제 이름은 쿠삼(قُثَم, Qutham)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당시 아랍 기독교계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라는 복음서 구절(요한 14,16)을 두고 '협조자(Ο Παράκλητος)'를 '무함마드'라 번역하고, 이름을 '무함마드'라고 하는 선지자가 오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 즉 스스로 '무함마드'라고 자칭함으로써 자신이 예수가 말한 그 협조자라고 할 의도였다는 것이다.

2.2. 국내 표기법


국내에서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식 표기를 음역한 '마호메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국립국어원에서는 마호메트와 무함마드 두 가지 표기를 다 인정한다.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라는 표현에는 그를 '악마(Mahound)'로 여기는 서구의 경멸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여긴다. 유럽에서 말하는 악마 바포메트가 무함마드의 이름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이런 주장과 달리, 유럽에서 무함마드를 마호메트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무함마드의 오스만 튀르크어 표기 '메흐메트(محمد, Mehmet)'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유럽 대륙에 직접 발을 걸치고 있던 이슬람 국가였으며, 유럽에서는 주로 터키를 통해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다. 사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면 유럽이 이슬람 세력과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한 이후였다. 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5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권 인물이었다.
어쨌든 현재는 아랍어 발음을 반영한 '무함마드'라는 표기가 더 많이 쓰인다.

3. 생몰년월


전승에 따라 무함마드의 대략적인 생몰년월을 570년 4월 22일?~ 632년 6월 8일? 정도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생년은 더욱 불확실하여 앞뒤로 1-2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다.[5] 무함마드의 정확한 사망일자도 확언할 수 없지만 사망년도가 632년임은 분명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처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에게[6] 친정 아버지 아부 바크르가 "선지자께서 돌아가신 날짜가 언제인가?" 묻자, 아이샤가 "월요일입니다." 라고 답했다 한다. 아이샤조차 요일만 기억할 뿐 날짜는 몰랐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무함마드가 죽은 날이 이슬람력으로 라비 알-아우왈 달이었다고 말한다. 대중적으로는 라비 알-아우알 달 12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역시 수니파 전승에서 무함마드의 생일로 여기는 날짜이다. 대중적인 속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무함마드는 자기 생일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라비 알-아우왈 달의 다른 날짜를 지목하는 이슬람 학자들도 많기고, 시아파는 아예 그 달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함마드가 양력으로 6월 8일에 죽었다는 설명은 수니파의 대중적인 통설에 따라 서기 632년의 라비 알-아우왈 달 12일에 죽었다고 가정하여 환산한 것이다.
코끼리의 해에 탄생하였다고 하는데[7] 코끼리의 해라 부름은 그해에 메카가 코끼리 부대의 침공을 받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는 친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한다. 저쪽 사람들 문화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은 무함마드가 서기 570년에 태어났다고 간주하고 나이를 헤아리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많거나 적을 수 있다고 여유롭게 생각해 두자.[8]

4. 위상


이슬람을 타 종교로 보는 비무슬림 입장에서야 쉽게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이슬람 기준으로는 무함마드가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므로 무슬림들은 '''결코'''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이 우주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으나, 잘못된 방법으로 인류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보내었으나 이후 다시 종교가 기존의 순수함을 상실하자 그를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무함마드를 내려 보냈다고 가르친다.[9]
이슬람 기준으로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꾸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예언자나 사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0]

5. 일대기



5.1. 출생 당시 환경



5.1.1. 부족


알라께서는 이브라힘의 자손 중에서 이스마일을 택하셨고, 이스마일의 자손 중에선 키나나를, 키나나의 자손 중에선 쿠라이쉬를, 쿠라이쉬 가문에서는 하쉼의 자손들을, 그리고 하쉼의 자손들 중에선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ㅡ 무함마드

고대 아랍 역사에서 개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족이다. 아랍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족(부족)에 속하게 되며 이에 속하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한다.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혼자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무함마드는 상어를 토템으로 삼은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씨족으로 태어났다. 가계도에 따르면 하심이 압둘무탈리브(본명은 샤이바)를 낳고 압둘무탈리브가 압둘라를 낳고 압둘라가 무함마드를 낳았다. 가계도를 그대로 믿는다면 무함마드는 하심의 적통 증손자이지만, 이슬람 측 사료에서 전하는 무함마드의 가계도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메카의 으뜸가는 미남이었다고 하며, 아미나와 결혼하여 무함마드를 낳았다. 무함마드는 압둘라의 외모를 이어받은 듯하다. 그러나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여행 중에 사망한다. 그리고 '아미나' 가 빛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빛으로 태어나는 건 예언가의 필수요소인 듯 싶다. 예수를 두고 라틴어로 lumen de lumine(빛에서의 빛), nata lux de lumine(빛에서 난 빛)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 측 사료에 따르면 아미나는 평생 동안 남자라고는 압둘라만 만나 무함마드 만을 낳았다. 그러나 아미나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 중에 "무함마드를 임신했을 때는 다른 어떤 임신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라고 하여, 다른 아이를 낳은 적이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도 있다.[11] 또다른 의구점으로는 압둘라가 아미나와 결혼하는 바로 그날, 할아버지 압둘무탈리브가 아미나의 사촌누이 할라 빈트 우하이브와 결혼하여 함자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압둘라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고 하므로, 압둘라 부부와 같은 날에 결혼한 압둘무탈리브-할라 사이에서 태어난 함자는 무함마드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어려야 한다. 그런데 함자는 무함마드보다 4살이 많다고 전한다. '''무함마드가 아예 압둘라의 핏줄이 아닐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이슬람계에서는 이 문제를 피하고자 여자의 임신기간이 최대 4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 아미나는 어린 아기였던 무함마드를 베두인에게 보내 키워달라고 하였다. 당시 사막의 베두윈들은 시인이 많은 걸로 유명했는데, 아미나가 아들에게 좋은 어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베두윈에게 육아를 맡겼다고 추정할 수도 있고, 인구가 밀집된 메카 시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이 더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년 뒤 베두인족은 무함마드를 돌려보내지만 아미나는 아들을 다시 베두인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6살이 되었을 때 아미나마저 죽었다. 그녀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에 있는 아브와(الأبواء / Al-Abwaʾ)라는 지역에 묻혔다.[12]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인 압둘무탈리브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무함마드가 11살일 때 할아버지가 죽고 압두마나프(무함마드의 숙부. 후에 아부 탈리브로 불린다.[13])'가 족장이 되었다.
이슬람에선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여긴다. 사실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당시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 살던 아랍 씨족들도 다 이스마일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무슬림들은 이스마일아브라함이 그 이전 선지자들과 무함마드를 연결해주는 고리라 믿고 중요하게 여긴다.

5.1.2. 메카의 상황


당시 메카의 인구구조는 소수의 거상과 절대다수의 노예로 구성되었다. 해방노예라도 사실상 주인이 있는 어쨌거나 노예인 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장사 혹은 용병일 등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방문한 기독교인(외국인), (가난한) 장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몇 몇 여성들이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거상이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무함마드와 재혼하여 첫 무슬림이 되는 카디자이다.

5.2. 어린 시절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도 전, 즉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던 시절에 여행길에서 죽었다. 무함마드는 어머니 아미나(Aminah)의 뜻에 따라 태어난 지 7일 만에 사막으로 보내져, 베두인 여인 할리마(Halima)의 손에서 자랐다.[14]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2세 때에 할리마의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뛰어와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함마드를 눕혀 배를 가르고 엎드리게 했다”는 말을 할리마에게 전했다.
무함마드는 6세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는 그를 데리고 메디나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병이 들어 아브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15]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와 함께 살았으나, 80세가 된 조부마저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 아부 탈리브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5.2.1. 청년기


가난한 고아인 무함마드는 사드 가문의 양을 돌보며 목동으로 지내다가 삼촌 아부 탈리브를 따라 대상 무역에 종사하였다. 12세 때에 시리아의 보스라에서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보스라 문서 참고). 20세 때에 메카에선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고 무함마드도 쿠라이쉬 부족 편에 섰는데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나이가 무려 25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노총각이었다. 사촌누이에게 청혼한 적이 있지만 그 아버지(즉 삼촌)에게 퇴짜맞았다. '''사촌간 결혼이 당시 기준에는 이상적인 결혼'''이라, 무함마드도 나름대로 자기가 결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퇴짜를 맞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상단의 주인 카디자 빈트 쿠와일리드(555- 619)와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카디자는 부유한 상단의 여주인이었으나 40세의 과부라 무함마드와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카디자의 집안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 결혼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카디자의 적극적인 구혼[16]과 공작에 힘입어 가까스로 두 남녀는 결혼할 수 있었다. 이때 카디자는 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헤롱거리고 있을 때 번개같이 무함마드와 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디자의 아버지는 술이 깬 뒤 사실을 알고 불같이 분노했으나, 결국 결혼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595년쯤, 무함마드의 나이가 25세 무렵일 때였다.
무함마드-카디자 부부 사이에서 자식이 6명이 있었으나 이들 자식들이 모두 무함마드의 친자식인지는 의문이 있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모두 무함마드의 친자식들이라고 설명하지만, 시아파 전승에서는 장녀 자이납을 포함하여 딸 3명은 무함마드가 카디자와 결혼한 후 입양한 딸이라고 설명한다. 카디자와 전 남편 사이에서 생긴 딸을 무함마드의 자식으로 입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수니파 전승에 입각하되, 무함마드와 결혼할 당시 카디자가 40세보다는 좀 더 젊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 40대 여성이 아이를 6명이나 낳기란 절대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6명씩이나 자식을 낳았다는 말 자체가 과장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무함마드가 나중에 젊은 아내들을 많이 들였을 때에는 자식을 1명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얻은 아들 한 명도 무함마드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말 다했다. 또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하던 시절 '고자'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어, 과연 카디자가 낳은 6명의 자녀가 과연 무함마드의 자식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중동 문화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완성', '완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카디자의 나이가 40세로 알려진 것도 이 부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 자료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에게 존경받은 사람인 듯이 묘사한다. 하지만 삼촌에게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고, 카디자와 결혼할 때에도 카디자의 아버지가 극렬하게 결혼을 반대했음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전혀 인망이 없고 천시받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함마드는 꾸라이시는 물론 하심 씨족에게서마저 "우리 집안 혈통이 아니다"라며 비꼬는 소리, 혹은 시(詩)를 들었고, 이는 두고 두고 컴플렉스가 되어 자기 혈통을 의심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극도로 분노했다. 이때 무함마드를 비하하며 지은 시들도 100년 넘게 전해졌으나, 선지자에게 불경한 짓이라 하여 이슬람 역사가들이 이런 시를 없앴기 때문에 지금은 한 수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지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카디자와 결혼한 후 무함마드의 인생은 고속도로를 탄다. 다만 외동아들 한 명이 일찍 죽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졌으므로 양자를 들여 잇게 했다고 한다.

5.3. 각성


[image][17]
무함마드는 부유한 여자 상인인 카디자의 3번째 남편으로 십수년간 무탈하게 살았다.[18] 그러나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610년부터 뜬금없이 바위가 자기에게 인사를 했다는 둥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 현대의 우리야 자료가 없으니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무함마드의 정신에 이때 알려지지 않은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카디자의 공인 아래 무함마드는 다른 일에서 손을 떼고 메카 북쪽 교외 자발 안누르[19] 산에 있는 히라 암혈[20]에 머물며 기도하고 명상하는 등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라마단 하순의 어느 날밤, 무함마드가 히라 암혈에서 혼자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더니 뜬금없이 외쳤다.
"읽어라!"[21]
무함마드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면서 대답하였다.
"읽을 수 없습니다."[22][23]
그러자 남자는 무서운 힘으로 무함마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꽉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다시 외쳤다.[24]
"읽어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무함마드를 강하게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스스로 말하였다.
"읽어라, 삼라만상을 지으시고 응혈(凝血)[25]한 방울로 인간을 만드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주님께서는 관대하시고 그분은 깃털(펜)로 가르치셨으며, 인간에게 그들이 모르는 것도 가르쳐주셨노라."
이 남자가 한 말은 훗날 쿠란 96장(알라끄)의 첫 5 구절로 정리되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무함마드조차 몰랐으나, 나중에 메디나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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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히라 암혈의 모습.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생활할 만한 좁고 불편한 공간이나, 무슬림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곤 한다.
무함마드가 처음 히라 암혈에서 지브릴을 만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라마단 달의 하순이었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라마단 달 21일부터 29일까지 홀숫날 중 어느 날이라고 한다. 인터넷상에서는 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이슬람력간 날짜 변환을 해주는 사이트들도 있으나, 헤지라 이전의 아랍 역법에는 이슬람력과 달리 윤달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력을 그대로 헤지라 이전 시대로 확장하여 환산할 수는 없다.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는 서양의 역법으로는 7-8월 중 언젠가였다.
사피 아르 라흐만 알 무브락푸리가 쓰고 최영길이 옮긴 <마지막 예언자 인간 무함마드>에서는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날이 라마단 21일, 서기 610년 8월 10일이라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천문학자 이마드 앗딘 아흐마드(Imad-Ad-Din Ahmad) 박사는 저서 천상의 표징들(Signs in the Heavens, 1992년 초판발행)에서 호킨스 등의 선행연구를 인용하여,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가 서기 610년 (율리우스력) 7월 23일(그레고리력으로는 7월 26일) 목요일 일출 전 새벽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사가 쓴 다른 논문에 다른 학자의 논문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실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그날 메카 시간으로 오전 4시 반 동쪽 하늘에 그믐달과 금성이 보였다. 아마 당시의 아랍 역법으로는 라마단 달 25일일 거라고...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그 밤을 이슬람에서는 권능의 밤(라일라트 알카드르)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라마단이 되면, 특히 권능의 밤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보내면 그 보상이 매우 각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므로, 그냥 라마단 하순 전체를 그날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자기가 보고 겪은 것에 대하여 매우 놀라 자신이 사탄에게 홀렸을지 모른다고 몹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였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절망하여 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천사가 무함마드를 설득하며 막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불안과 공포에 휩쌓여 집으로 돌아가 아내 카디자와 상담하였다. 카디자는 남편의 말을 듣고 놀랐지만, 무함마드에게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나면 자기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무함마드가 얼마 뒤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났다면서 카디자를 부르자, 카디자는 무함마드를 자기 무릎 이쪽 저쪽에 앉게 하면서 그 남자가 계속 보이냐고 물었다. 무함마드가 계속 보인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카디자가 옷을 벗었다. 무함마드가 그제서야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카디자는 아마 그 남자는 천사였을 것이며, 당신은 정말로 알라의 사도가 된 것이리라고 설명하며 무함마드를 안심시켰다. 카디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남자가 사탄이었다면 자기가 옷을 벗어도 전혀 피하려 들지 않았겠지만, 천사였으니까 여자가 옷을 벗은 모습을 보고 피했으리라는 것이었다.[26] 카디자는 남편 일에 대하여 자기 친척이며 네스토리우스교 사제인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상담하였는데, 와라카 역시 카디자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선지자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3년 뒤인 613년부터 비로소 공개적인 포교활동에 뛰어들었다.[27] '''나이 43살 아저씨가 되고 난 뒤에'''. 우선 아내인 카디자(58세), 두 양아들, 친구 아부 바크르 등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포교했다. 포교활동은 부자, 명문가의 딸, 가난뱅이 등 가리지 않았으나 노력에 비하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게다가 메카의 주류세력인 쿠라이시는 노골적으로 무함마드의 주장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포교하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 제안할 정도였다.
숙부 아부 탈리브 역시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래도 키운 정인지 무함마드를 씨족 단위로 지켜주었다.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려고 할 때마다 "니네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하심 가문이 단체로 일어서겠다."는 식으로 무함마드를 두둔해줬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이야기하는 동안 공공의 적이 되어 아내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콧 대상이 되어 파산하였다. 당시 순례는 상인들의 짭짤한 소위 '''대박상품'''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 당시 성행하고 있던 수많은 다른 종교의 우상숭배와 순례행위를 규탄했으니 당연히 이슬람은 탄압대상일 수밖에.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설파하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침을 뱉고 흙을 뿌리며 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우크바 이븐 아비 무이드라는 자가 다가와서 무함마드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가 아부 바크르의 제지로 실패한 적도 있었다.
거기에 파산의 영향으로 619년, 무함마드가 50세이던 때에 아내 카디자가 향년 65세로 죽고 이틀 후 숙부 아부 탈리브가 죽었다. 즉 무함마드는 3일 동안 강력한 후원자 2명을 잃어버린 셈. 그리고 아부 탈리브의 이복형이었던 아부 라합이 족장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무함마드를 비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무함마드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카디자가 없는 상태로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타이프라는 마을로 가서 포교를 시도했으나, 사람들에게 돌을 얻어맞는 등 처참한 대우를 받고 몹시 실망한 채 메카로 돌아왔다.
615년경부터 쿠라이쉬 지도부는 무슬림을 박해하였는데, 막상 힘있는 우스만이나 우마르 같은 세력가들이 개종하면 그들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결국 빈곤하거나 보호자가 없는 무슬림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평등을 강조한 무함마드의 특성상 대다수의 무슬림은 가난한 약자였다. 박해가 계속되자 에티오피아 등지로 망명하는 일도 있었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부 바크르의 6살 난 딸 아이샤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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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년(52세)쯤의 어느 날 밤, 알라의 권능으로 메카에서 멀리 떨어진 사원으로 옮겨진 뒤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과 역대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메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먼저 가브리엘이 나타나 잠자는 무함마드의 가슴을 열고 잠잠 우물물로[28] 심장을 씻은 뒤 믿음과 지혜를 넣고 봉하고, 무함마드를 깨워 카바 신전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부라크(Buraq)라는 네발 짐승이 있었는데, 노새보다는 작지만 당나귀보다는 크고 얼굴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등에 날개가 달렸다.[29] 처음에 부라크는 무함마드를 등에 태우길 거부하였으나, 가브리엘이 부라크를 달래며 "알라의 종이 네 등 위에 타기는 무함마드가 처음이다. 네가 이러는 것은 큰 실례다."라고 말하자 순순히 등에 태웠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부라크를 타고 '멀리 있는 사원'으로 갔는데 여기까지를 이스라(Isra)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멀리 있는 사원'에 도착하자 그곳에 모인 다른 선지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자신이 예배 인솔자가 되어 먼저 예배를 보았다. 그 뒤 하늘로 승천하여 또다른 선지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네들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미라지(Miraj)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직 잠자리가 따뜻했다고 한다.
흔히들 말하는 무함마드의 승천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와 미라지를 뜻한다. 보통은 서기 621년에 있었다고 하지만 620년이라고 쓴 책도 있다. 혹은 헤지라 6개월 전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미라지는 헤지라 5년(626)쯤에 있었으며 이스라와 별개의 사건인데, 후대에 나중에 마치 하룻밤에 있었던 이야기인 양 합쳤다는 주장도 있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알라의 권능으로 옮겨진 '멀리 있는 사원'은 예루살렘성전산, 알 아크사 모스크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 자료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하지 않고 그저 '멀리 있는 사원'이라고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터로 특정된 때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100년은 지난 뒤였다.

5.4. 헤지라(聖遷[30], 이슬람 기원)


야스리브라 불리는 땅이 있다. 비옥하고 기름진 이 땅은 아라비아에 토착한 유대인, 아랍 부족 등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당장 내일을 보장할 치안이 없었다. 당장 같은 아랍 부족들끼리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 끝에 이슬람의 무함마드를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를 초대했다.
출발 당일 밤에 무함마드의 침대가 습격받았지만 무함마드 측은 이미 이를 예상해 무함마드를 대피시킨 상태였다. 습격 당시 침대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양자인 알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신 누워 있었다. 습격자들은 낚였음을 알고 분노했지만 알리를 죽이진 않았다.
알리의 희생과 여러 동료들 덕분에 무함마드는 야스립의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낚시를 했으나 메카인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숨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준 거미, 그들이 숨은 곳에 둥지를 튼 비둘기 등의 여러 기적 덕에 메카인들로부터 간신히 탈출해 야스립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야스립의 이름은 '마디나트 안나비(선지자의 성읍)'로 바뀌었는데 영어로는 '''메디나'''라고 불리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메카에서 헤지라에 함께한 교우는 무하지룬(المهاجرون‎), 메디나에서 이슬람에 귀의한 교우는 안사르(الأنصار‎)로 불린다.
이것이 '헤지라(聖遷)'이다. 헤지라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이 아니라 '''메디나에 도착한 날'''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기 622년 (율리우스력) 7월 2일라고 추정한다.[31] 훗날 이슬람력의 '''이슬람 기원[32] 원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타고 입성한 낙타의 이름인 카스와(Qaswa, 뜻은 '귀의 1/4이 잘린')'까지 역사에 남았다.
그곳에서의 삶도 험난했는데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들이 여러 가지 암적 요소로 작용했다.

5.5. 지하드(聖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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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갈 때부터 메카를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랍 부족들은 무함마드가 자기 소속 부족인 꾸라이시를 공격하겠다는 것을 패륜적인 행위로 여겨 손을 잡기를 거부했고, 무함마드는 결국 사막의 도적떼와 손을 잡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메디나의 유태인들은 어느 아랍 부족과 원한을 지는 것을 걱정하여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비록 메카로부터 탈출해 땅을 얻었으나 메디나 원주민들에게도 갑자기 증가한 인구는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갑자기 줄 땅이 땅에서 솟아날 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굶어야 했다. 결국 선지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출입하는 대상들에 대한 약탈 명령을 내렸다. '''지하드의 시작'''이었다. 또한 유태인 남자와 무슬림간 충돌을 빌미로 삼아 해당 유태인 부족을 메디나에서 축출하고 빈 집을 자기 편에게 돌렸다.
곧 메카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625년 봄 병력 3천여 명을 이끌고 원정온 것이다. 메디나 근처 오호드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는 병력 천 명 남짓으로 대항했다. 그러던 중 위선자 3백 명이 탈영해 버렸지만 기세로 메카인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팔려 진영이 무너졌고 역공당해 패배했다.
결국 메디나에서의 입지까지 위험해져 버렸다. 유대인, 위선자, 이민족 등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시인은 메카에 항복하고 무함마드의 목을 팔자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무함마드는 이번에는 천사의 계시로 유태인이 자기를 암살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면서 역시 아직 메디나에 있던 유태인 유태인 부족 중 하나를 축출하고 재산과 집을 압류하였다. 압류된 재산은 무슬림들에게 돌렸다.
627년 메카에서 1만 명이 쳐들어오자 무함마드는 살만 알 파르시[33]의 충고를 받아들여 참호를 파고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대치하였으며, 결국 '''우연한 모래바람''' 덕분에 승전했다.
그리고 적대세력의 청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 중 메카의 편을 든유대인 천여 명, 메카에 항복하자고 말한 시인 등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전에는 축출하는 정도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남자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았다.
628년엔 도망간 유대인들을 추격하여 카이바르에서 이들을 학살하고 조공을 받게 된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과거엔 베두인족에게 바치던 것을 무슬림들에게 바친 걸 볼 때 이거나 저거나 큰 차이는 없었던 모양.

5.6. 귀환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순례'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꾸라이시 부족과 협상한 끝에 3일간 메카에 체류할 수 있다고 허락받았다. 그 다음해인 629년엔 자신의 씨족과 화해하였고(아부 라하브가 죽은 터라 수월하였다) 630년엔 무슬림의 죽음을 이유로 1만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무혈 정복'''하였다. 메카에 들어 오면서 "'''진리가 이제 왔으니 거짓은 무너졌도다!'''"라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카바 성전을 이슬람의 성소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그는 '''통치자'''가 되었다.

5.7. 정복 이후 죽음까지


귀족들에게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귀족 자리도 없다고 협박한 끝에 귀족들이 모두 무슬림이 되었고 이슬람권[34]의 규범이라 할 만한 신앙고백, 기도, 지즈야, 순례, 금식 등 이슬람 기본 5개조를 포함한 규칙을 공포했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한 뒤 처음으로 어머니 아미나의 묘소를 찾아가 어머니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알라는 무함마드가 어머니 묘소를 찾아감은 허락하였으나, 죄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거부하며, 아미나는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하였다. 이 일화는 무슬림들이 이교도 친지들을 위해 알라에게 용서해달라고 기도함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슬람계에서는 '아미나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무함마드가 직접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상숭배의 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미나는 무함마드가 소년 시절에 죽었으니 이슬람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무함마드의 부모가 살아나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죽어서 낙원에 갔다고 설명하거나, 무함마드가 실은 자기 어머니 아미나에게 원래부터 분노하는 감정이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었다. 무함마드에 대해서 근대 서구에서는 탐욕스럽고 호색한이며 편협하고 잔인한 혹세무민의 정복자 정도로 폄하하였다. 하지만 William Montgomery Watt, Richard Bell, Bernard Lewis, Alford T. Welch, John L. Esposito, Colin Turner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무함마드를 사회개혁 운동가로서의 면모와 박애주의,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을 겸비한 인격자라고 재평가하며, 무함마드의 종교적 환상에서 비롯된 믿음이 이슬람교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했다고 보고 있다.
무함마드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는데 통치자가 되고 나서도 거친 깔개 위에서 잠을 청했고 한 되도 안 되는 보리와 물, 약간의 대추야자로 끼니를 때웠으며 그가 죽고 나서 남은 것은 생전에 끌고 다니던 당나귀 한 마리와 죽고 나서 기부하기 위해 남겨놓은 약간의 땅밖에 없었다고 한다. 뒤에 2대 칼리파가 되는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이런 생활상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로마페르시아의 황제[35]들은 현세를 즐기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알라의 사도이신 당신께서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가지고 계신다' 라고 말하자 '그들이 누리는 것들은 보잘 것 없는 현세의 향락의 일부일 뿐이다. 내세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니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이슬람의 예언자답게 독선적인 면은 있어서 유대인들과의 종교논쟁에서 여러 번 논파당하자 예루살렘을 향해 절하던 규칙을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다. 무함마드는 유대교 교리에 그다지 박식하지는 않았고, 유대인 율법학자들 시선에선 '웬 아랍인이 요상하게 변형한 유대교'를 상대하느라 좀 잔인하게 찍어눌렀을 것으로 보인다. 논쟁 전까지는 꾸란에서 유태인들이나 그리스도교인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이 시점을 계기로 꾸란에서는 유태인들과 이교도를 사악한 자들이라고 서술하며 투쟁을 명령한다. 이런 꾸란 구절은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반유대주의의 종교적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슬람 호교론자들이 이슬람을 방어하며 드는 꾸란 구절은 대게 무함마드가 약자였던 메카 시절의 계시이며, 반대로 이슬람을 공격하는 자들이 예로 드는 꾸란 구절은 무함마드가 강자가 된 헤지라 이후의 계시이다.
그는 새로운 규칙과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으며, 과거 개인의 능력과 행실 대신 지연과 혈연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하는 고대 아랍 사회[36]를 능력 본위의 사회로 개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후대 아랍인들의 대팽창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다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 집행에서는 종종 이중잣대를 보였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정한 원칙에 따라 가차없이 형벌을 집행하였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에게는 명백히 사형, 혹은 중형을 선고받아야 할 경우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 내렸다. 그런 점에 있어서 무함마드는 명백히 권력적이고, 실용주의자였다.
그 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뒤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롭더니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자기가 곧 쾌차하리라 생각한 듯하지만 병세가 위중해지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때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유언장을 쓸 테니 종이와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말했으나[37] 우마르는 "알라의 선지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라고 하며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결국 자택에서 애처 아이샤가 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주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였다.
무함마드의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기 전에 유대인 여자(노예로 추정된다)가 준 상한 양고기 음식(혹은 독을 탄 음식)을 먹고 몸이 몹시 괴롭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함마드가 그 음식을 받아먹은 때가 죽기 3년 전인 카이바르에서였다. 심지어 무함마드가 죽기 4년전에는 메카에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무함마드가 그들의 재산을 뺏고 모조리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말이라고 전하는 하디스를 곧이 믿기 힘들다. 무함마드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함마드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했으며, 시아파는 범인이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와 그 아버지 아부 바크르라고 믿는다. 무함마드가 알리를 공동체의 지도자로 내세울까 걱정되어 알라의 곁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에 아이샤는 하디스를 2천 개가 넘게 증언하며, 아버지 아부 바크르에게 뭔가 종교적 정당성이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하디스를 제공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시신을 아야사 집에 내둔 채 당시 무슬림 공동체의 주요인사들이 모여 누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칼리파로서 공동체를 이끌지 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결국 아부 바크르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양자대결로 수렴하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결국 알리는 반강제로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다툼이 있었던 정도라고만 설명하지만,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는 칼을 빼들고 알리에게 "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예수처럼 사흘 만에 부활할지 모른다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칼리파 직위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를 가까이 보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을 것이다.[38]
시신은 관에 넣어 본인이 사망한 그 자리, 즉 아이샤의 집에 봉안하였다. 그 자리가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의 초록색 돔 아래이다. 훗날 1대, 2대 정통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의 관도 무함마드의 왼편에 안치하고, 무덤을 보호하고자 삼중으로 벽을 쌓았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예언자의 모스크로 가서 무함마드의 무덤에 참배해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관이 안치된 공간을 둘러싼 벽뿐이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예수가 언젠가 다시 온 뒤에 이 무덤 안에 같이 안치되리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무함마드의 최후에 관하여 '죽었을 때 승천했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있다. 승천 전설(미라즈)은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도움으로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를 경유하여 천국에 승천한 뒤 여러 옛 예언자들을 본 후 계시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내 카디자가 죽고 메디나로 도망치기 전인 620년, 혹은 621년의 일이다.

5.8.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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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제국이 중세 최고의 이슬람 제국이 될 줄. 그의 사후 이슬람칼리파 통치 체제가 되었고 유능한 장군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가득찬 군인들의 활약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슬람/정복 문서 참고. 3대 라쉬둔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의 사후엔 시아파수니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고작 20여 년 만에 그 방대한 아라비아 반도를 손에 넣었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그 손에 의해 중세 최고의 제국이 태동하였다.
알리의 사후엔 무함마드의 후손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며 무함마드의 혈족 하심 가도 이를 주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 이후에도 이들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근대에 영국에 의해 세워진 이라크, 요르단의 국왕은 하심 가의 일원이다.

6. 연표


570년: 무함마드 탄생
576년: 어머니 아미나 사별
583년: 상인이 되어 로마령 시리아 방문
595년: 카디자와의 결혼
610년: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받아 이슬람 전도 시작
614년: 메카 귀족들의 무슬림 박해 시작
615년: 일부 무슬림들의 에티오피아 피신
616년: 우마르의 개종
619년: 아내 카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의 별세
620년: 야스리브[39]가 분쟁 조정자로 무함마드 초청
621년: 미라즈 (무함마드의 승천 기행)
622년: '''헤지라''' (성천: 마카야스리브)
623년: 봉쇄에 대항하여 무슬림들이 메카의 카라반을 습격, 이후 메카 군대가 야스리브의 가축을 약탈.
624년: 바드르 전투 (승) [40]
625년: 우후드 전투 (패) [41]
627년: 한다크 (참호) 전투 (승) [42]
628년: 후다이비야 협정 (메카 - 무슬림 간 휴전)[43]
629년: 문다 전투 (패)[44]
630년: [45] '''메카 입성''', 후냔 전투 (승)[46] 아무타스 전투 (승)[47], 타이파 포위[48], 타북 함락[49]
631년: 1차 두마툴 잔달 원정[50]
632년: 마지막 순례 여행 후 영면

7.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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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가문
알라위 왕조
요르단 국왕
모로코 국왕
압둘라 2세
무함마드 6세
역사상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이맘들이 무함마드의 후예로 알려져 있거나 스스로 주장해왔다.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다 요절하여 부계 자손은 내려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후손들은 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사이에서 나왔다. 이 둘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고, 역사 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단수형으로는 '샤리프(شريف, Sharīf)', 또는 동일한 어근을 지니는 '아슈라프(أشراف‎, Ashrāf)'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하산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후세인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سيد, Sayyid)'라고 불린다. 또, 무함마드의 후예는 알리의 후손이기도 하므로, '알리 씨족(العلويين, al-ʿAlawiyyīn)'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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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각 세력들의 계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파티마)
'''·'''
(수니파의 제4대 칼리파)
'''·'''
(시아파의 초대 이맘)
하산 이븐 알리
'''·'''
(수니파의 제5대 칼리파)
'''·'''
(시아파의 제2대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
'''·'''
(시아파의 제3대 이맘)
<^|1>
* 알라비 왕조
* 알라위 왕조
* 하심 가문
* 이드리시 왕조
* 예멘 자이드파이맘
* 예멘 왕국
<^|1>
* 이후 시아파이맘
* 이스마일파
* 파티마 왕조
* 어쌔신
* 사파비 제국(단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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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가문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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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위 왕조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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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리시 왕조의 계보

8. 오해: 창시자? 신?


실로 그대는 경고자일 뿐으로 인간을 감독하며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ㅡ 쿠란 88장 21~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선지자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주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3)’을 말하지는 말라.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벽에 새겨진 쿠란 구절 중에서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이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함마드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무슬림들도 무함마드의 완전성을 믿지 않으며, 그도 인간이기에 몇개의 실수를 하였다고 인정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결점이 없는 신이자 사람이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양측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극단적인 와하비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부모의 무덤, 심지어 무함마드의 무덤을 폭파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반)
이슬람은 유일신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신은 하나(ahad)로, 몇개로 분할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불변의 절대자로 여긴다. 따라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성부, 성령, 성자가 동일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신교로서 배척해야 하는 사상으로 여긴다고. 오히려 유대교는 일신교로 인정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이슬람에는 성직자 계급이 없으며, 타 종교인에 대한 포교는 원칙적으로 권장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개인과 신간의 직선적인 연결을 주장한다.

9. 주요 평가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인물들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무함마드 전기 제2권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이 위대한 생애에 대해 더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슬펐다. - 마하트마 간디 -


10. 논란



10.1. 사생활


11번째 아내인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본디 유대인 부족인 카이바르의 부족장인 케나나 이븐 알-라비(Kenana ibn al-Rabi)의 아내였으나,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카이바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케나나를 고문해서 살해하고 아내 사피야와 결혼한다. 샤피아는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했고, 무함마드는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서 우호적인 세력을 늘렸다. 역사가 John L. Esposito는 이 결혼을 마치 알렉산더 대왕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한 것처럼 유대인 부족과의 화해를 위한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해석했다.
양자의 부인이었다가 9번째 아내가 된 무함마드의 사촌 여동생 자이납 빈트 자흐시의 경우,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는 자이납이 이왕이면 무함마드 본인과 결혼하고 싶어했던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의붓아들 자이드와 자이납의 부부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의붓아들 자이드는 이를 눈치채고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하자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체면상 일단 거절하는데, 눈치 빠른 자이납은 이후 남편에게 대놓고 개기며 순종하지 않았고, 이혼당한 뒤 무함마드에게로 바로 가서 결혼한다.
또한 3번째 아내 아이샤가 6살일 때 결혼했다. 이는 '''첫째 아내인 카디자가 죽자마자 한 결혼'''이었다. 아이샤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무함마드의 정략적 의도라고 하는 해명도 있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에게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온 직후에 개종해 무슬림이 된 인물이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정통 칼리파로써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게 되는 아부 바크르인데, 이슬람의 전파에 그의 재력과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던, '''무함마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하던 아내와 부족장 삼촌이 이틀 간격으로 죽고 새로 부족장이 된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아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무함마드로서는 현실적으로도 기댈 데가 아부 바크르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정략결혼.
역사가 Colin Turner에 의하면 미성년자 조혼이 많던 당시 시대 가치관으로는 별로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함마드 시대에서 5백 년이 넘게 흐른 서유럽 사회에서도 조혼이 있었다. 안티오크 공국의 레몽 드 푸아티에는 보에몽 2세의 딸인 콩스탕스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그는 20대였고 그녀는 9살이었다.[51] 그리고 중세 기사의 표본으로 불리는 윌리엄 마셜 (1190년생)도 1224년에 존 왕의 9살배기 딸인 엘레노어 (1215년생)와 결혼, 1231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적극적인 성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18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13세 소녀와 결혼하기도 했다.[52]
다만 무함마드가 진짜 권력자가 되었을 때 취한 여자들이 전부 성인이었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자기 양자의 며느리를 취한 일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샤피아의 사례를 보건데 오히려 성숙한 유부녀 취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미드 압둘 사미드 박사는 저서 <무함마드 평전>에서 무함마드의 성적 취향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경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나이 많은 여자들을 좋아한 것은 '어머니를 대체하려는 무의식적 욕구', 아이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욕구'의 대상이었다는 주장으로, 하미드 박사는 무함마드가 아머니 아미나를 무의식중에, 어쩌면 '의식에서도' 미워했으리라고 본다.
코란에서는 아내를 구타해도 된다고 하고 (쿠란 4:34) 어린이의 결혼을 허용하는 구절도 있다. (쿠란 65:4). 그나마 아동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아동을 결혼시키는 것이 금기시되어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와는 달리, 중동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인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진지한 논의가 있지 않았다. 때문에 설령 무함마드와 그가 이끈 이슬람교 교단이 아동의 결혼을 엄금했다고 해서 오늘날 중동에서 조혼 풍습이 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재의 이슬람권에서 보이는 악랄한 조혼풍습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책임을 어떻게 7세기 중세 시대에 살았던 무함마드에게 물을 수 있는가?

10.2.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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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전투 당시 배신한 바누 쿠라이자에 대한 처벌
메디나에 있던 시절, 초기 무슬림들은 타 부족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웠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시리아를 오가는 무역 대상들의 상품을 습격해서 '''강도질'''하는 것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또 무함마드는 이슬람화 되기 이전의 메카에 있는 꾸라이시 부족과 싸워 승리한 후 꾸라이시 부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이웃 부족민들에게 꾸라이시 부족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 죽이라는 말을 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신의 판결이라며 옳다고 칭송'''한 뒤 대학살을 자행했다. 역사가 William Montgomery Watt에 의하면 이는 가족 내지 부족 단위로 무언가 피해를 당하면 이에 대해 대를 물려서라도 보복하는 아랍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고, 인권이 확립되지 못한 전근대 문화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복수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중근동 문화권부터 멀리보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의 관점에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0.3. 유대인 문제


초기의 무함마드는 유대인을 높게 평가했으며 친해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는 유대인을 두고 알라가 택한 백성이며 알라가 그들에게 땅을 약속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야트리브 Yathrib(메디나)로 이동한 후 상황이 달라진다. 이곳은 원래 유대인이 터를 닦은 곳으로,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모여 살고 있던 장소였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만든 새로운 종교로 유대인을 포섭하기 위해 무슬림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자신에게 끝까지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살육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이 아라비아의 유일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기도 역시 무슬림들은 예루살렘 대신 메카를 향해 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이때부터 아랍인과 유대인의 싸움이 시작된 셈. 무함마드가 등장하기 전에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서로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지만, 유대인이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자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이슬람의 통치 아래서 수세기를 살았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엄청난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 무슬림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그 모욕과 박해의 강도는 달랐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전근대에는 확실히 기독교보다 이슬람교를 더 지지했다. 서고트 왕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즉 기독교도들의 박해가 좀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살해되고 추방되자 많은 무슬림들이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도피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모로코, 이집트, 터키 등지의 관리가 되기도 하였고 일부는 바르바리 해적이 되어 기독교 세력에 복수하였다.

11. 이야깃거리


무슬림들의 기록에 따르면 언변이 뛰어나고 배가 나오지 않고 날씬했던 미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식욕을 통제하라는 충고나 건강 유지를 위해 적게 먹으라는 말씀을 몇 차례 남긴 걸 보면 기록대로 날씬한 사람이었을듯 하다. 뚱뚱한 게 미덕이던 중세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저서로는 23년간 알라에게 받은 계시들을 기록한 책인 쿠란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쓴 건 아니고 구전되던 내용들을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낸 것.(논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수가 신약성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 쿠란의 시적 구조 덕분에 그는 종종 시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쿠란은 아랍이 낳은 최고의 문학 중 하나라고 한다.
단테신곡에서는 기독교를 분리/내분시켰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다. 알리도 와있는데, 아마도 수니파시아파가 분리되게 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주류 교파의 신자가 사이비 교파의 신자를 보는 느낌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단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 사기 지옥에 있다는 것. 이런 서술로 볼 때 그 당시에도 이슬람을 기독교의 연장으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어떤 직위건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데, 수니파시아파의 칼리파 직위 계보를 보면 다른 칼리파들은 다 그냥 랜덤생성 얼굴이지만 무함마드만은 정말 종교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어, [53] 역설사의 역덕 기질이 정말 잘 발휘되었다.
쿠란의 의하면 아내를 4명만을 두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계시에 따라 13명을 두었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까지만 한 여자들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통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애처 아이샤가 "무함마드는 기도향수, 여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는 하디스가 있다.
  • 첫 아내 카디자 빈트 후와일리드(خديجة بنت خويلد) : 사이가 좋았던 걸로 유명. 무함마드는 그녀의 생전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을 두었다.
  • 사우다 빈트 자마(سودة بنت زمعة)
  •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عائشة بنت أبي بكر‎)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6살 때 결혼하고 9살에 부부관계를 맺었다.
  • 하프사 빈트 우마르(حفصة بنت عمر)
  • 자이나브 빈트 후자이마(حفصة بنت عمر)
  • 힌드 빈트 아비 우마이야(هند بنت أبي أمية)
  • 자신의 양아들 자이드 이븐 하리타의 부인[54], 그러니까 며느리이자 무함마드의 고종사촌 자이납 빈트 자흐시(زينب بنت جحش)
  • 주와이리야 빈트 알-하리스(جويرية بنت الحارث)
  • 몇몇 유대인 부족 정복 중 얻은 라이하나 빈트 자이드(ريحانة بنت زيد)
  • 유대인 여자 사피야 빈트 후야이(صفية بنت حيي) 그녀의 남편이었던 키나나(Kinana)는 재산을 감춰 놓은 곳을 말하지 않아 무함마드는 키나나를 고문하라고 명령했고, 잔인하게 고문 당한 뒤 살해당했다.
  • 라믈라 빈트 아비 수프얀(رملة بنت أبي سفيان)
  • 이집트 콥트 정교회 신자 마리아 빈트 샤문(مارية بنت شمعون) 무함마드의 막내 자식인 이브라힘을 낳았다고 한다.
  • 삼촌의 처제 마이무나 빈트 알-하리스(ميمونه بنت الحارث)
이중 일부는 정략적인 의미에서(사우다나 6살 난 아이샤), 일부는 과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얻은 아내들도 있다.
그의 아내 사랑은 당시 '''아랍의 모범'''이었다고 한다. '''철저히 평등의 이름 아래''' 매일 밤 여자 한 명씩과 잤다. 그러나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말도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8번째 아내 마리아 빈트 샤문이 아들을 낳자, 너무 기쁜 나머지 마리아하고만 계속 어울려 다른 부인들의 질투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아이샤가 질투하여 마리아가 이집트 출신 남자 노예와 바람을 피워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하자, 무함마드가 분노하여 마리아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알리가 손수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그 노예가 거세되었음을 알게 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존 아랍의 전통을 깨고 부인을 '''딱 4명까지만''' 가지라고 했다. 원래 이슬람은 일부일처제가 원칙인데,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4명까지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이다.[55][56] 또한 여성의 유산상속권을 종교적 권위로 재확인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이슬람의 규칙으로 남아있다. 여자의 유산상속권은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무함마드가 규정하기 전에도 이미 보장되는 권리였는데, 무함마드는 이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간음과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는 시대적 한계의 탓인지 그는 뚜렷한 남성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한 아내가 남편이 바람 피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를 입증하려면 반드시 증인 4명이 필요하고 만약 4명을 못 찾으면 허위사실이라고 해서 채찍 20대를 맞아야 했는데, 남편이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아낸다면 증인 1명만 있어도 된다는 차별적인 규정을 제정한다거나, 간통을 했다고 돌팔매질로 여자를 죽이는 당시의 관습을 용인하고, 이 점이 쿠란 및 하디스에 기록되게 했는데 이후 이슬람권에서 대대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데, 중세 시대에 무함마드가 용인했던 여자가 결혼 전에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면 샤리아에 따라 돌팔매로 여자를 죽이는 관습이 천년 넘게 지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이슬람권 보수주의 국가들의 상당수에선 지금도 강간을 당한다 해도 남자가 문제가 아니고 강간을 당한 여자가 문제라고 해서 여자를 죽이거나, 죽이지는 않더라도 여자가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최소한의 증인 4명을 못 찾아서 되려 억울하게 자신이 처벌당하고도 자기들은 '무함마드가 도입한 훌륭한 이슬람적 법/허용한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잔인한 건 위의 조혼과 관련한 이야기에서의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무함마드가 없다고 해도 이런 남성주의적 관습이 고쳐진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생전에 무에자(معزة)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대단히 아꼈다고 한다. 기도를 하던 도중 무에자가 와선 옷자락 위에서 잠이 들자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며 옷자락을 잘라내곤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영향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무슬림들 중 상당수는 고양이를 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양이가 마시던 물로 손을 씻기도 할 정도이다.
그에 반해서 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하게 생각해서 "개가 있는 집에는 천사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것을 더럽게 여기고, 개가 실내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일곱 번 닦아내야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진다고 본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가 들어오면 무효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2014년도에는 이란 보수파 의원 32명이, 애완견을 소유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킨 사람은 태형 74대를 맞고 벌금(한화로 약 35만~350만 원 상당)을 물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표결을 추진하다는 영국 신문 가디언의 기사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같은 경우 오래전, 미국 버스회사 그레이 하운드가 진출하자 회사 상표나 다름없는 개 그림을 지워야 영업을 인정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나라가 그런 게 아니라 터키아제르바이잔이나 유라시아, 동남아 이슬람 다수 나라들은 얼마든지 개를 키우고 개에 대하여 이런 이질감이 없다.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스탄불을 여행한 안데르센이나 마크 트웨인도 떠돌이 개랑 고양이가 많아서 신기했고 더더욱 신기한 건 이런 동물들을 맡아 관리하는 공무원도 있다는 점을 기록에 남겼다. 더불어, 무함마드는 목축견은 예외로 여겼기에, 유목민 무슬림이 목축견을 반려동물처럼 거리낌없이 키우는 경우도 많았다. 하긴 유목민들에겐 개는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돌보고 지키는 만큼 매우 유용했으며 이는 과 같다.
무함마드는 와인과 곡주를 금기시했지만 대추야자로 만든 술은 즐겼기에 대추야자술은 술이 아닌 음료라고 받아들이던 무슬림도 있으며 유목민들에게는 가축 젖을 발효시킨 술이 물이나 다를 게 없었기에 이들에게도 술은 금지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쪽으로 가는 전개의 역사적 가정도 존재한다. 해리 터틀도브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처럼 아랍 세력이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중동을 제패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랬더라면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여전히 서로 이단이라며 죽어라 싸우고 있으며 역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을 한다. 어느 유럽 대체역사소설에선 과거로 간 기독교 과학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자신이 가브리엘이라고 속여(첨단 기술을 동원) 그가 기독교 교역자가 되게 하는데 미래로 와보니 십자군 전쟁도 그대로 벌어졌으며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9.11 테러도 아랍 기독교 과격파로 달라졌을 뿐인 탈레반이 일으켰고 여전히 미국이 아랍에 주둔하며 아랍 기독교와 갈등을 빚는다. 결국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더라도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과학자는 절망하며 끝난다.
무함마드의 행적은 순나(Sunnah)라고 부르며 무슬림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간주된다.[57] 굉장히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기록으로 남아 순나로 여겨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무함마드는 아침식사를 식초를 적신 빵을 먹고 대추야자로 만든 네비즈라는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이 대추야자 술은 현재도 할랄 마크를 붙인 채로 생산되고 있다.[58] 그리고 이 순나의 터키어인 쉰네트(Sünnet)는 할례를 뜻하는 용어로 돌려 사용되고 있다. 할례 또한 무함마드가 행한것이므로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만 무함마드가 좋아하고 행했다는 것 때문에 구태여 이를 똑같이 하려 하는 바리사이파 같은 사례도 있다.

12. 매체에서의 모습


이슬람을 숭상하는 문화권에서는 무함마드의 초상화나 그의 동상 같은 것은 잘 찾아볼 수 없는 편이며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그림이더라도 얼굴은 묘사되지 않는 편[59] [60]이 많지만 시아파에서는 수니파보다 이런 부분에서 관대한 편이며, 이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묘사한 초상화나 우편이 팔릴 정도이다. 이슬람 쪽에서 무함마드 얼굴이 직접 나온 그림이 있으면 십중팔구 시아파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슬람에 대한 영화를 보아도 무함마드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대기 영화인 The Message[61]에서는 카메라맨이 무함마드인 것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식으로 연기한다. 무함마드의 우상숭배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쿠란 안니사(여성) 장의 80절을 보면, "선지자(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 곧 하나님(알라)께 순종하는 자라(من يطع الرسول فقد أطاع الله)"라고 한다.

[1] '성천',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으로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무슬림(회교도)은 으레 이렇게 부른다.[2] 지나친 숭배를 금지하기 위해 대부분 무함마드의 얼굴을 묘사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보통 흰색으로 덮어 놓으며 가끔 흰 천으로 덮어놓은 듯하게 묘사하거나 검정으로 덮기도 한다.[3] 아랍어로는 '라술룰라(رسول الله, Rasūlullāh)'인데, 무슬림의 다섯 가지 의무(이슬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샤하다(신앙고백)이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라는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간단하게 '사도'로 번역하기도 하고, 정수일의 저서에서는 성사(聖使)로 번역되기도 한다.[4] 실제 아랍어 성경에서는 "وَأَنَا أَطْلُبُ مِنَ الآبِ فَيُعْطِيكُمْ مُعَزِّيًا آخَرَ لِيَمْكُثَ مَعَكُمْ إِلَى الأَبَدِ،ـ"로 번역하며, '위로자'를 위미하는 'المُعزّي'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관련 링크 1, 관련 링크 2.[5] 수니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코끼리의 해 라비 알-아우알 달(이슬람력 3월) 12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시아파 전승에서는 동년 동월 17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코끼리의 해를 보통 서기 570년이라고 보지만, 568년이나 569년, 혹은 571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라비 알-아우왈 달 12일을 환산한 날짜도 4월 20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22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수니파 내부에서도 무함마드의 생일이 라비 알 아우알달의 12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환산하기가 더욱 어렵다.[6] 결혼 당시 무함마드는 53세, 아이샤는 6세로 사실상 부녀처럼 지냈던 정략결혼 관계였다.[7] 570년에서 전후로 1-2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은 570년을 유력하게 본다.[8] 당장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기 한국에서도 실제 나이와 공식적인 나이가 서로 다른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실제 생년월일을 알기라도 하면 다행이고, 이재명처럼 아예 실제 생년월일조차 모르는 경우도...[9] 이슬람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무슬림은 아담(آدم)과 하와(حواء)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는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그 뒤로 주요 예언자들이 메카를 다녀갔다고 여긴다. 가령 메카 카바 신전 바로 옆에 있는 '잠잠'이란 우물은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카바 사원의 벽 모서리에 박힌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내려온 운석이라고 전한다. [10] 예언자(나비)와 사도(라술)는 혼용되어서 쓰이지만 엄밀하게는 두 단어는 의미가 다르다. 사도가 예언자보다 더 좁은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예언자보다는 사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예언자는 이전에 전해진 알라의 말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도는 예언자의 역할과 동시에 알라의 말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무사(موسى, 모세)의 구약, 다우드(داود, 다윗)의 시편, 이사(عيسى, 예수)의 신약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쿠란을 계시받아 전달하여 사도의 역할을 다했다.[11] 이에 대해 무함마드 낳기 전에 유산을 경험했었다고도 한다.[12]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다. 또한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 메카라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아브와라는 주장도 있다.[13] 아랍인의 자식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예이다. '아버지'란 뜻을 가지는 단어의 주격 형태인 아부#s-4(ابو) 뒤에 자신의 아들 이름을 넣는다. 즉 아부 탈리브란 '탈리브 아범' 이라는 의미.[14] 이슬람 자료에서는 이를 전통이라고 설명하지만,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 무함마드처럼 베두인족 손에서 컸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15]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었다. 아미나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2천 년대 들어 무덤 위에 조성한 돌무더기를 없애버려 아슬아슬하게 흔적만 남았다.[16] 먼저 친구 나피사에게 마음을 전하게 했다고 한다.[17] 천사 지브릴에게 알라의 말씀을 전해받는 무함마드의 모습을 그린 페르시아 세밀화인데, 무함마드가 사도가 되기 전의 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같다 하여 그 모습을 그리는 것에 대해 딱히 제한이 없다.[18] 그 사이인 605년, 홍수로 카바 신전이 파괴되자 재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검은 돌을 누가 옮기느냐를 두고 분쟁이 일었다 한다. 다음 날 먼저 신전에 들어오는 사람이 수행하기로 했는데 예상했듯이 무함마드가 먼저 와서 그가 검은 돌을 옮겼다고.[19] 아랍어로 빛의 산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산의 이름이 '히라'였지만, 무함마드 이후 '자발 안누르' (빛의 산)로 바뀌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해발 642 m의 산으로,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20] 보통은 동굴이라고 하지만, 실제 장소를 보면 절대 동굴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산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 틈에 난,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일어설 만한 공간에 불과하다. 동굴보다는 암혈(巖穴)이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정확하다.[21] 보통 '읽어라'라고 번역하지만, '낭송하라' 혹은 '선언하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라'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22] 보통 이 말을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읽으라는 말이냐?'라는 뜻으로 한 대답으로 보기도 한다. 무함마드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일이었을 테니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다. 또한 무함마드의 언행에 대한 기록에서는 무함마드가 글을 어느 정도는 읽을 줄 알았음을 보여주는 내용들도 있어서, 무함마드가 완전 문맹이라는 주장과 충돌한다. 아마도 시대정황상 전문 필경사가 아니었던 그가 유창하게 읽고 쓰는 수준은 아니고 더듬 더듬 글을 읽는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에는 체계적인 공교육을 전국민들에게 시행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고, 이 때문에 고급교육은 커녕 읽고쓰기같은 간단한 교육도 받을려면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문맹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대개 자기 이름하고 한두 문장 정도만 간신히 쓰는 수준에 그쳤다.[23] 이슬람 초기자료에는 "읽을 수 없습니다."가 아니라 "무엇을 읽을까요?"라고 답했다고 서술한다고 한다.[24] 보통은 이 남자가 무함마드를 꽉 껴안았다고 하는데, 역시 초기 자료에서는 남자가 무함마드의 목을 졸랐다고 설명한다고 한다.[25] 응결된 피. 하지만 정액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응결된 피가 정액을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듯?[26] 이후 무함마드는 카디자를 비롯, 어떤 여자와 부부관계를 맺을 때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예외인 부인이 한 명 있었는데 (무함마드가 소아성애자 아니냐는 악담을 듣는 이유인) 아이샤였다. 아이샤와 부부관계를 할 때만큼은 천사도 피하지 않고 그냥 계시를 준다고... 다른 부인들은 아이샤에 대해서 매우 질투했다.[27] 당시 메카에서는 일신교를 믿지는 않을지언정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때문에 알고는 있었고,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3년이나 지나서야 공개포교를 했다는 말을 불신하기도 한다. 굳이 3년이나 비밀리에 포교하며 간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28] 잠잠 우물은 오늘날 메카의 카바 신전 옆에 있다.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메카까지 왔다가 갈증 때문에 고통받고 절망했을 때 잠잠 우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오늘날도 잠잠에서는 물이 흘러나오지만, 하도 순례자들이 많으니 사우디 정부는 우물을 덮고 수도관을 연결하여 순례자들이 수도 꼭지로 물을 받아가도록 한다.[29] 위 이미지에서 무함마드가 탄 짐승이 부라크이다. 부라크란 이름은 '하얗게 빛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30] '성천',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으로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무슬림(회교도)은 으레 이렇게 부른다.[31] 서기로 622년임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날짜에 대해선 이론이 없지 않다. 영어판 위키백과의 헤지라 문서에 따르면 율리우스력 9월 24일에 메디나에 도착했다고 계산한 사람도 있으며, 그 외에도 5월이나 11월로 보는 사람도 있다.[32] 예수 탄생을 원년으로 잡는 서기, 단군의 고조선 개국(개천)을 원년으로 삼는 한국의 단기(檀紀)와 비슷한 이슬람의 연호이다. 그러나 역법은 윤달이 없는 음력에, 각 달의 시작을 국가별로 이맘들이 초승달을 확인하여 정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예를 들어 초승달이 떴을 날에 구름이 껴서 이맘이 육안으로 확인을 못했다면 다음 달이 하루 늦춰지는 것. 이슬람 내부에서도 육안확인이 아니라 천문계산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이슬람계에서는 육안확인을 시행한다.[33] 페르시아 출신으로 사산 왕조에프탈족들이 서로 기병을 견제할 목적으로 참호를 파던 일을 떠올린 듯 하다.[34]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교 우세 지역은 다르 알이슬람(دار الإسلام‎), 이슬람 교세가 약한 지역은 다르 알하르브(دار الحرب)로 부른다. 이슬람 교세가 약하지만 무슬림을 적대하지 않는 지역은 다르 알아흐드(دار العهد‎) 또는 다르 알술흐(دار الصلح)로 구분한다.[35] 당시 아랍인 관점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세계최강의 강대국이면서 세상의 전부였다. 당나라는 너무 멀었고 프랑크 왕국은 미개인에 불과했다.[36] 고대 아랍인들은 영혼이 개인에 있는게 아닌 부족에 있다 여길 정도였다.[37]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주장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쿠란을 내려받은 이후 어느 시점에서 글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38]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내부에서는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이슬람도 이제 끝났다'''고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아부 바크르가 나서서 "'''니들이 지금까지 주님(알라)을 믿었지, 무함마드를 믿었냐?'''"라는 말로 진정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런 아부 바크르의 일갈이 무슬림들에게 먹힌 이유가, 무함마드 자신이 생전에도 누누히 "'''나는 주님(알라)의 말씀을 전하는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라며 '''무함마드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39] 후에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의 메디나로 개칭[40]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41]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42] vs 메카 쿠라이쉬 기득권 세력[43] 원래 10년 기한이었다.[44] vs 가산 왕국 + 동로마 제국[45] 629년에 동로마 군대가 크테시폰까지 밀어붙인 후, 이 해에 로마와 사산 제국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렇다고 두 세력이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양국은 아랍 무슬림 세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의 속국이자 방패인 가산 왕국과 라흠 왕국의 간곡한 권고를 양측 모두 레반트를 둘러싼 싸움에만 집중하다보니 귀담아 듣지 않았다.[46] vs 베두인[47] vs 산악민족[48] 함락에 실패했지만 이후 주민들이 자진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항복하였다.[49] 10월, 북부 아라비아[50] 서북부 아라비아[51] 1136년에 결혼했는데 콩스탕스는 1128년생이다.[52] 18세기의 조선 영조만 해도 66세 때에 무려 51세 연하인 15세의 정순왕후와 결혼하기도 했다.[53] 포트레잇이 없고 그자리에 "محمد 무함마드" 라 쓰여있는 심볼이 박혀있다.[54] 자이드의 결혼 순서상으로 5번째.[55]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어렵기에 이슬람 법학자들은 웬만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한다. 쿠란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구절에서도 바로 뒷부분에 '''너희는 그 많은 아내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상 하지 말라는 소리. 그래서 실제로 부인을 2명 이상 둔 사람은 약 2%도 되지 않는다. 사실 지참금 문화 때문에 돈을 못 내서 결혼을 못하는 남성들이 이슬람 세계엔 수두룩하다.[56] 현대에 들어와선 일부다처제에 대한 여성들 본인의 반발도 거세다. 터키의 경우 약 98%의 혼인적령기 여성들이 일부다처제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유명한 사우디조차도 이 응답률은 80%대이다. 또한 일부다처를 하려면 무조건 기존의 아내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 또한 문제. 어찌어찌 새 아내를 맞는 데 동의한다 치더라도, 이슬람법상 여러명의 아내를 한 집에 함께 거주하는 것 또한 불법이다. 결국 새 아내를 위한 집과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하고, 기존의 아내들에게 자동차가 있었다면 똑같은 자동차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아내들이 "남편이 우릴 불공평하게 대한다"라고 법정에 소송을 걸고, 막대한 위자료를 뜯어낼 수 있기 때문. 여기까지만 봐도 웬만큼 돈이 있어선 일부다처를 꿈꾸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57] 이 순나를 따르는 자에서 따온 이슬람의 다수파가 바로 수니파다.[58] 그리고 이 내용을 들어 근대 이전까지 무슬림들은 와인은 술로 여겨 금지했지만, 대추야자술이나 무함마드 시절엔 없던 위스키, 맥주, 코냑 같은 술도 잘만 마셨다. 보수반동주의의 대표주자인 오스만 제국의 압뒬하미트 2세도 위스키와 샴페인을 즐기던 칼리파였다.[59] 보통은 얼굴 대신 불의 형상으로 그려놓는다. #.[60] 무함마드의 전기를 다룬 'The message'(1977)에서는 아예 무함마드의 시점, 즉 1인칭으로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61] 한국판 제목은 '예언자 마호메트'. 다만 DVD에선 메세지란 원제로 나왔다. 1976년작으로 사막의 라이온 감독이자 할로윈 시리즈 제작자인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