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마른 전투

 

'''Second Battle of the Marne
2차 마른 전투'''

제1차 세계대전서부전선의 일부
'''기간'''
1918년 7월 15일 ~ 1918년 8월 6일
'''교전 지역'''
마른강, 수아송, 랭스
'''교전국'''
[image] 프랑스 제3공화국
[image] 영국
[image] 미국
[image] 이탈리아 왕국
[image] 독일 제국
'''동원 병력'''
[image]:사단 44개
[image]:사단 8개
[image]:사단 4개
[image]:사단 2개
[image]:사단 52개
'''피해'''
[image]:95,160명
[image]:45,807명
[image]:16,552명
[image]:9,000명
[image]:168,000명
포로 27,021명
대포 612문
박격포 221문
기관총 3,330정
'''결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
'''영향'''
백일 전투의 시작, 독일 제국의 몰락 시작
1. 개요
2. 배경
2.1. 독일군
2.2. 연합군
3. 전투
3.1. 7월 15일~7월 18일: 독일군의 공격
3.2. 7월 18일~7월 22일: 수아송 전투
3.3. 7월 22일~8월 3일: 독일군의 퇴각전
4. 결과


1. 개요


1차 세계대전 후반인 춘계 공세의 끝무렵에 일어난 전투. 과거 1914년 9월 6일에 일어난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은 패배의 쓴맛을 보며[1] 신속한 승리를 잃어버리고 참호전으로 돌입하였는데, 약 4년뒤 다시 마른 강 유역에서 2차 마른 전투를 거친 결과 독일군은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승리의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1차 마른 전투가 독일군의 신속한 승리를 저지했다면, 2차 마른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 가능성 자체를 박살내버린 결정타였다.

2. 배경


독일군의 4차 춘계 공세[2]가 끝난 뒤, 독일군과 연합군은 서로 한차례 소강상태를 거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3]. 독일군은 앞서 춘계 공세에서 두차례의 공격에서 상당한 전술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연합군을 둘로 분열시켜 영국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활력 넘치는 미군이 증원되고 있었기에 독일군 입장에서는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독일군은 다섯번째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서, 연합군은 그에 알맞게 대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2.1. 독일군


독일군은 다시 마른 강 돌출부로 눈을 돌렸다. 마른 강 돌출부는 블뤼허 공세[4]에서 얻어낸 전술적 성과로, 이곳에는 55km에 달하는 깊이의 돌출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른 강 돌출부에 배치된 독일군의 보급 상태가 워낙에 형편없었다는게 큰 문제였다. 당시 마른 강 돌출부의 교통망 상황이 매우 열악했는데, 돌출부 남쪽까지 물자를 수송할수 있는 주요 루트는 수아송-샤토 티에리를 연결하는 대로가 끝이었다. 랭스 지역을 거치는 철도가 있었으나 랭스 지역이 연합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공세 목표를 마른 강 돌출부의 동쪽으로 결정하였으며, 제7 군과 제1, 제3 군을 바탕으로 양쪽에서 랭스 지역을 포위하여 연합군으로부터 뺏아 핵심 철도망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에페르네 지역과 샬롱 지역까지 진출하여 연합군의 빠리-베르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만약 독일군이 이를 성사시킨다면 수아송-샤토 티에리 도로망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며, 열악한 보급로 여건을 완화시키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가능했다.

2.2. 연합군


독일군의 4차 공격까지 막아낸 연합군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연합군 수뇌부의 상황은 우울했었다[5]. 그리고 연합군(특히 프랑스군) 수뇌부의 고위 지휘관들간의 의견 차이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 수뇌부의 인물들 상당수가 빨라도 1919년은 되어야 전쟁을 끝낼수 있다고 여겼으며,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필리프 페탱은 1918년에 방어전 위주로 전개하여 최대한 전력 모으기에 집중한 뒤, 1919년에 결정타를 날리는게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방어전의 성공 직후 신속하게 반격전으로 전환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으며, 물자와 병력 증강을 마냥 기다리기보단 독일군의 공격이 막힐 시점에 순식간에 포지션을 전환하여 주도권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페르디낭 포슈는 독일군이 마른 강 돌출부에서 재차 공격을 한다면, 공격 지점은 동부지역이 될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목표는 랭스 지역을 포위섬멸하는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고 위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정확했었다. 그러나, 당시에만 해도 아직 확정된 것이 없었기에 정보를 모으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슈의 예상에 힘입어 독일군의 공격을 카운터 칠 반격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슈는 페탱에게 적합한 반격전 지역을 물색하게 하였으며[6], 페탱은 수아송 지역을 추천하였다. 1918년 7월 5일, 프랑스 제10 군 사령관 샤를 망쟁은 반격전에 관한 게획을 작성하여 제시하였으며, 포슈와 페탱은 이에 동의했다. 따라서 망쟁의 제10 군은 400대가 넘는 전차와 대포 1545문, 항공기 581대와 군단 4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정보전에서 프랑스군 정보부의 활약이 돋보였다. 항공 정찰의 개선과 독일군 포로를 노획함으로써 얻은 기밀들로 인해 독일군의 공격이 랭스 지역을 향할 것이라는게 확실해졌으며, 이로써 독일군의 '기습' 효과는 사라졌고 적잖은 예비사단을 프랑스 제4, 제5군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마른 강 돌출부에서 연합군의 배치는 양익에 집중된 양상이었다.

3. 전투



3.1. 7월 15일~7월 18일: 독일군의 공격



3.2. 7월 18일~7월 22일: 수아송 전투



3.3. 7월 22일~8월 3일: 독일군의 퇴각전



4. 결과



[1] 전략적으로 패배했으나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이 깊숙히 들어와 온전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려웠음에도 연합군에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2] 작전명 "그나이제나우"[3] 소강상태란 언제까지나 대규모 공격이 없었다는 거지 전선 곳곳에서 소규모 충돌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4] 춘계 공세의 세번째 공격[5] 미군이 계속 증강되고 있었으나 그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6] 사실 본인도 반쯤 정해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