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식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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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본군의 신군도. 장식적/계급장적 요소가 강했던 94/98식에서, 보다 실전 지향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군도이다.
기존에 채용되었던 98식 육군장교용군도는 기본적으로 지휘도였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타치(太刀)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험악한 전장환경과 더불어 장식적인 부품들의 마모와 손상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또 중국군은 항일대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우회 기습을 주특기로 하여 자연히 군도를 사용한 교전도 자주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98식은 다양한 문제를 드러냈다. 칼날을 고정하는 대나무 못이 부러져 칼날이 사출되거나 손잡이 끈이 밀리거나 끊어지고, 장식이 빠져서 손망실되거나 칼날이 휘어지고, 먼지와 오물이 칼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들이었다.
북지나방면군 군도수리반에서 군무원으로 일하던 전문가이자 무술인이었던 나루세 칸지는 이런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이 생각한 해결 방안을 육군본부에 상신했으며, 중일전선에서 빗발치는 요구를 수용한 육군본부는 보다 실전적이고 험악한 환경에서도 문제없는 신형 군도의 개발에 나섰으며, 나루세 칸지가 제안한 해결책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군도의 제식을 규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3식 군도이다.
1941년(쇼와 16년)초두에 각 일간지를 통하여 개선점과 채용소식을 대대적으로 공표한 것도 특징이다. 칼날은 2척 1촌(63cm) 2척 2촌(66cm) 2척 3촌(69cm)의 3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황동부품인 하바키를 뺀 수치이므로 여기에 3cm정도를 더하면 한국식의 날길이에 해당한다.
3식 군도는 기본적으로 타치(太刀) 형태를 띠던 94식과 98식에 비교하여 보타 우치가타나(打刀)에 가까워진 외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칼집에서는 칼집 끝을 보강하는 금속제 뚜껑인 코지리가 크게 단순화되었으며, 칼집 중간을 보강하는 금속 테인 세메가네가 폐지되었다. 물론 장식도 거의 사라져 황동이나 알루미늄 주조에 도금되어 만들어진 94/98식 전도의 장식들에 비하면 코지리의 경우 그냥 국화문양만이 붙어있는 것에 불과했고, 칼집과 색도 같아 잘 구별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치가타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 제식 규정에 맞추어 94/98식과 동일한 패용 고리(하이칸)를 달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우치가타나와 타치의 모습이 혼재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자루 끝의 형상은 막부 말에 서양 스타일을 수용했던 돗페이(突兵) 양식의 것을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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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바(鍔:가드)의 경우 많게는 1개의 쯔바와 8장의 셋빠(切羽:쯔바 양쪽에 끼우는 일종의 와샤)를 가지던 94/98식 전도에 비해 아무런 장식도 없는 원형 쯔바 1개에 황동 셋빠 2장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변화되었고 손잡이의 카시라와 후치(칼자루의 끝과 앞을 보강하는 금속 장식)도 마찬가지로 크게 단순화되었으며, 계급을 나타내어 자루 끝에 묶던 도소(Tassel) 끈을 따로 묶던 링도 폐지되어 카시라의 구멍에 직접 끼워 넣게 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공정이 더 단순화되는데, 주조 제작에서 철판 프레스 방식으로 도장구 제조 방식이 바뀌고, 이에 따라 코지리와 후치의 국화문양이 삭제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실전에 대응하여 츠카마키(자루에 끈을 감는 것)도 X자 형상의 히네리마키에서 벗어나, 더욱 튼튼하게 중간 부분은 츠카이토가 교차하지 않는 카타테마키(一貫巻)으로 바뀐 것도 특징이다. 끈과 손잡이 전체에 옻칠을 해서 과거 끈이 끊어지는 문제와 밀리는 문제를 보완하고 습기에 영향받는 문제를 해결했으나, 잡는 느낌은 더 나빠졌다.
과거에는 대나무 못을 1개밖에 쓰지 않았으나 대나무 못 구멍(目釘穴:메구키아나)을 2개로 확장하여 과거에 대나무 못이 부러져 칼날이 날아가는 등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손잡이 전체로 충격이 분산되기 때문에 내구성이 좋아졌다. 이 점 때문에 일정 길이 이상의 슴베(茎:나카고)를 가져야만 했기 때문에 슴베가 짧은 전통 칼날이 잘 쓰이지 않고 새로 생산된 칼날이 사용되었다. 대나무 못이 아닌 철제 볼트를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칼자루의 내구성이 매우 강화되었다.
칼집 입구의 금속 보강물인 구치가네는 2분할되어 칼자루에 고정된 구치가네가 칼집의 구치가네를 덮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전통 방식의 칼집 입구 사이로 먼지나 물이 들어간다는 불평에 대응한 구조. 또한 잠금장치 버튼이 칼자루뿐만 아니라 칼집에도 붙었는데, 발도술을 할 때 칼자루의 버튼을 누르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칼집에도 붙었으며, 발도 시 왼손이 칼집을 감싸 쥐므로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필요 없이 발도 자세만 취하면 자연스럽게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장점이 있었다.
과거에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어피를 사용하여 손잡이를 감싸고 그 위에 끈을 감았지만, 보다 염가를 추구하여 삼베를 어피 대신 감은 경우라든가, 아예 목제 손잡이만 사용한 경우도 보이는 것이 3식의 특징. 우치가타나의 요소를 추구한 칼의 전체적인 모양새와 그 수수함 때문에 이전에는 별개의 제식이 아니라 98식 전도가 물자 부족으로 간략화된 것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3식 군도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미군이나 중국군에게 다량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그 숫자는 98식에 비해 적은 편인데, 비교적 나중에 제정되기도 했지만 군도 가격에 부담이 크던 신규 장교들이 이왕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98식을 선호한 탓이 크다. 3식이 나왔음에도 98식이 점차 간소-단순화되면서까지 전쟁 말기까지 생산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현대에는 98식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매물로 나오고 있으며 상태가 매우 좋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각주]
1. 개요
구 일본군의 신군도. 장식적/계급장적 요소가 강했던 94/98식에서, 보다 실전 지향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군도이다.
2. 상세
기존에 채용되었던 98식 육군장교용군도는 기본적으로 지휘도였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타치(太刀)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험악한 전장환경과 더불어 장식적인 부품들의 마모와 손상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또 중국군은 항일대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우회 기습을 주특기로 하여 자연히 군도를 사용한 교전도 자주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98식은 다양한 문제를 드러냈다. 칼날을 고정하는 대나무 못이 부러져 칼날이 사출되거나 손잡이 끈이 밀리거나 끊어지고, 장식이 빠져서 손망실되거나 칼날이 휘어지고, 먼지와 오물이 칼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들이었다.
북지나방면군 군도수리반에서 군무원으로 일하던 전문가이자 무술인이었던 나루세 칸지는 이런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자신이 생각한 해결 방안을 육군본부에 상신했으며, 중일전선에서 빗발치는 요구를 수용한 육군본부는 보다 실전적이고 험악한 환경에서도 문제없는 신형 군도의 개발에 나섰으며, 나루세 칸지가 제안한 해결책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군도의 제식을 규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3식 군도이다.
1941년(쇼와 16년)초두에 각 일간지를 통하여 개선점과 채용소식을 대대적으로 공표한 것도 특징이다. 칼날은 2척 1촌(63cm) 2척 2촌(66cm) 2척 3촌(69cm)의 3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황동부품인 하바키를 뺀 수치이므로 여기에 3cm정도를 더하면 한국식의 날길이에 해당한다.
3. 특징
3식 군도는 기본적으로 타치(太刀) 형태를 띠던 94식과 98식에 비교하여 보타 우치가타나(打刀)에 가까워진 외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칼집에서는 칼집 끝을 보강하는 금속제 뚜껑인 코지리가 크게 단순화되었으며, 칼집 중간을 보강하는 금속 테인 세메가네가 폐지되었다. 물론 장식도 거의 사라져 황동이나 알루미늄 주조에 도금되어 만들어진 94/98식 전도의 장식들에 비하면 코지리의 경우 그냥 국화문양만이 붙어있는 것에 불과했고, 칼집과 색도 같아 잘 구별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우치가타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 제식 규정에 맞추어 94/98식과 동일한 패용 고리(하이칸)를 달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우치가타나와 타치의 모습이 혼재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자루 끝의 형상은 막부 말에 서양 스타일을 수용했던 돗페이(突兵) 양식의 것을 채용했다.
[image]
쯔바(鍔:가드)의 경우 많게는 1개의 쯔바와 8장의 셋빠(切羽:쯔바 양쪽에 끼우는 일종의 와샤)를 가지던 94/98식 전도에 비해 아무런 장식도 없는 원형 쯔바 1개에 황동 셋빠 2장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변화되었고 손잡이의 카시라와 후치(칼자루의 끝과 앞을 보강하는 금속 장식)도 마찬가지로 크게 단순화되었으며, 계급을 나타내어 자루 끝에 묶던 도소(Tassel) 끈을 따로 묶던 링도 폐지되어 카시라의 구멍에 직접 끼워 넣게 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공정이 더 단순화되는데, 주조 제작에서 철판 프레스 방식으로 도장구 제조 방식이 바뀌고, 이에 따라 코지리와 후치의 국화문양이 삭제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실전에 대응하여 츠카마키(자루에 끈을 감는 것)도 X자 형상의 히네리마키에서 벗어나, 더욱 튼튼하게 중간 부분은 츠카이토가 교차하지 않는 카타테마키(一貫巻)으로 바뀐 것도 특징이다. 끈과 손잡이 전체에 옻칠을 해서 과거 끈이 끊어지는 문제와 밀리는 문제를 보완하고 습기에 영향받는 문제를 해결했으나, 잡는 느낌은 더 나빠졌다.
과거에는 대나무 못을 1개밖에 쓰지 않았으나 대나무 못 구멍(目釘穴:메구키아나)을 2개로 확장하여 과거에 대나무 못이 부러져 칼날이 날아가는 등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손잡이 전체로 충격이 분산되기 때문에 내구성이 좋아졌다. 이 점 때문에 일정 길이 이상의 슴베(茎:나카고)를 가져야만 했기 때문에 슴베가 짧은 전통 칼날이 잘 쓰이지 않고 새로 생산된 칼날이 사용되었다. 대나무 못이 아닌 철제 볼트를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칼자루의 내구성이 매우 강화되었다.
칼집 입구의 금속 보강물인 구치가네는 2분할되어 칼자루에 고정된 구치가네가 칼집의 구치가네를 덮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전통 방식의 칼집 입구 사이로 먼지나 물이 들어간다는 불평에 대응한 구조. 또한 잠금장치 버튼이 칼자루뿐만 아니라 칼집에도 붙었는데, 발도술을 할 때 칼자루의 버튼을 누르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칼집에도 붙었으며, 발도 시 왼손이 칼집을 감싸 쥐므로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필요 없이 발도 자세만 취하면 자연스럽게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장점이 있었다.
과거에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어피를 사용하여 손잡이를 감싸고 그 위에 끈을 감았지만, 보다 염가를 추구하여 삼베를 어피 대신 감은 경우라든가, 아예 목제 손잡이만 사용한 경우도 보이는 것이 3식의 특징. 우치가타나의 요소를 추구한 칼의 전체적인 모양새와 그 수수함 때문에 이전에는 별개의 제식이 아니라 98식 전도가 물자 부족으로 간략화된 것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3식 군도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미군이나 중국군에게 다량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그 숫자는 98식에 비해 적은 편인데, 비교적 나중에 제정되기도 했지만 군도 가격에 부담이 크던 신규 장교들이 이왕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98식을 선호한 탓이 크다. 3식이 나왔음에도 98식이 점차 간소-단순화되면서까지 전쟁 말기까지 생산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현대에는 98식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매물로 나오고 있으며 상태가 매우 좋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3.1.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