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칸지

 


나루세 칸지(成瀬関次)
1. 개요
2. 나루세 칸지가 제시한 일본도의 문제점
3. 관련 항목


1. 개요


중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 북지나방면군 군도 수리반에서 활약했던 인물로, 전쟁터에서 다양하게 발생한 일본도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폭로하여 일본도의 한계와 전쟁터에서 좋은 진짜 칼이란 무엇인지 서술했다는 점에서 군도 연구 측면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원래부터 무술가로서 쿠와나번(桑名藩)에서 전해진 야마모토류 거합(山本流居合)의 종가였으며, 네기시류(根岸流)수리검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즉 상당한 수준의 무도인. 그러면서도 일본도에 많은 관심을 가져 칼을 수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무원으로써 지원, 북지나방면군 군도 수리반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군도의 다양한 문제점을 정리하여 육군성에 회신하기도 했고,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정리한 서적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와 <실전도론:実戦刀譚>을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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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장교이자 시인 옐로쉔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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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방면에서의 사진. 오른쪽이 나루세 칸지. 그는 자신이 애용하던 장척도를 들고 다녔다.)

2. 나루세 칸지가 제시한 일본도의 문제점


  • 나루세 칸지 저 <싸우는 일본도>에서 발췌
도검계에서는 잘 알려졌고 평가도 놓은 마사무네(正宗)가 있었으며, 그 검은 최초의 일격으로 구부러졌다. 마사무네를 선조로 하는 소슈(相州) 물건은 유연하게 지나가는 공통적인 지점이 있어 모두 쉽게 구부러졌다. 마사무네가 대중에 명성이 높아진 것은 무로마치 막부 중기부터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기까지다. 그 뒷면에는 정치적, 영리적으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 일종의 특혜가 주어져 의도적으로 명성을 높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마사무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간에 알려진 명도의 대부분은 실용성보다 관상용 미술품으로써 귀중하게 여겨진 점이 많다. 세상의 도검 감정가들이 칼에 우열 등급을 붙인다는 것이 참으로 대충스럽다는 점을 전장의 실사용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소장도검가가 걱정하는 그런 신뢰는 나에게는 도저히 가질 수 없다. 군인이 목숨을 맡기는 군도의 적합여부를 미술 골동품의 영역에서 거하는 도검 감정가가 선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좋은 칼, 와자모노(業物)라 칭하는 검은 달리 실전 결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태평성대의 망나니의 시참실험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칼이 즉시 전투에서 쓸모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고도(古刀)들은 전국 병란 중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을뿐더러, 칼몸이 탄력 있다. 칼날의 사용 여부와는 관계없다. 군진에 필요한 검이란 <탄력 있고 강한 검>이다. 신도(新刀) 중에서도 제법 있다.
나루세 칸지는 이 이외에도 다양한 손상 사례를 들면서 전통 일본도에 대한 환상을 깨고 있다. 나스부대(那須部隊)의 모 대위가 소유한 스테인리스도는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자 크게 날이 우그러들었으며, 이에 비해 야스다 부대(安田部隊)의 모 기병 상병은 현대 강재로 만들어진 검을 소유하였는데 6명의 적을 베었음에도 날이 나가거나 휘어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고미야 부대(後宮部隊)의 모 소위는 세키(關) 시에서 만들어진, 이름이 새겨진 검으로 싸웠는데 상당히 휘어졌으며, 같은 부대의 모 부대장이 소유한 도검도 휘어졌고 날이 나갔지만 부러지지는 않아 전투를 속행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조병창에서 대량 생산한 조병도나, 현대 강재로 만든 무라타도는 비록 일본 내에서는 혹평을 받으나 날이 나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으며 이러한 도검이야말로 진정한 실용 도검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그는 고도(古刀)[1]와 현대도, 소화도(現代刀, 昭和刀)[2]를 칭찬하고, 신도와 신신도(新刀, 新々刀)[3]를 비판하고 있는데, 도신 수리 비율 중 고도가 25%, 현대도와 소화도가 15%인데 비해 신도와 신신도는 60%에 달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른 저서 <실전도론>에서는, 칼날뿐만 아니라 외장 손상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군도 수리반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도형 군도(신군도, 이종군도)[4]의 높은 손잡이 손상 비율과 구군도의 낮은 손상 비율을 제시하고 있다. 전체 수리 입고된 도검의 비율 중 일본도형 신군도의 손잡이 손상률은 41.5%, 구군도는 10%, 이종군 도는 48.5% 라고 제시하며, 일본도형 군도의 손잡이 파손율이 높다는 것을 진단하고 있다. 또 국내에 있을 때에는 자신이 경험한 손상은 대부분 칼몸에서 생겼는데, 실전에 임해 보니 외장의 손상률이 근 70%(손잡이 손상 60%, 칼집 손상 10%)에 달했다는 것도 적고 있다.
그는 여러 경험에 의거해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인 실전 손잡이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손잡이 길이는 7촌 5분(약 23cm)에서 8촌(약 24cm)이 이상적. 슴베도 같은 길이로써 자루 끝까지 가도록 해야 한다. 슴베가 짧은 것은 슴베 끝부분 근처에 손잡이가 부러지고, 손잡이 끈 매듭 끝부분의 구멍 근처도 같으며 예외 없이 둘 다 그 부분에서 자루가 부러진다. 슴베를 길게 해서 도소(刀緒:자루 끝에 감아 늘어트린 장식용 끈 매듭) 구멍과 슴베 끝의 구멍을 일체화시키는 게 이상적이다.
  • 손잡이 재질로 쓰이는 후박나무는 약하다. 엄선된 고른 결의 나무는 좋지만 의외로 확보가 어려우며, 신군도에 쓰이는 저질 불량 후박나무는 안된다. 유자나무, 가래나무, 호두나무, 떡갈나무 등이 좋다.
  • 메쿠기(손잡이 고정에 쓰는 대나무 못)는 대나무 마디에 가까운 두꺼운 것을 써야 한다. 가느다란 메쿠기는 쉽게 부러진다.
  • 츠카이토(손잡이 끈)는 무명을 비단으로 싼 것이 90%를 점하고 있었다. 예외 없이 메누키(손잡이의 금속 장식) 쪽에서부터 끊어지기 시작한다.
  • 히네리마키(흔히 말하는 X자 감기의 기본형식) 꼬아놓은 부분이 금방 마모된다. 잇칸마키(카타테마키)가 좋다. 메누키는 크고 긴 것이 손잡이 보강에 유리하다.
  • 손잡이의 형태는 입고형(立鼓型:손잡이 중간이 살짝 폭이 좁아지는 형식)이 좋다. 손잡이의 어피는 물에 젖으면 약해지므로 옻칠을 한다. 츠카이토에는 옻에 편뇌유(캠퍼 오일을 정제한 휘발성 기름)를 섞어 묽게 한 것을 바르면 좋다. [5]
  • 손잡이는 금속박판으로 감싸는 게 좋다.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한 실전군도는 일본에서는 칼 취급도 안 해주는 95식 부사관도였으며, 금속 케이스로 만들어진 손잡이와 조병창 생산된 현대 강재를 쓴 도신 등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나루세 칸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육군성에 회신하기도 했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한 3식 군도가 신형 장교용 군도로써 채택되기도 하였다.

3. 관련 항목


[1] 987~1597년까지에 걸쳐 만들어진 일본도들.[2] 현대 공업력을 이용해 만들어진 일본도. 신 무라타(新村田), 소화신도(昭和新刀)라고도 부른다. 만철도나 공업도 등이 이에 속한다.[3] 1597~1760년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도, 1760~1867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을 신신도라 한다. 대체적으로 고도에 비해 품질이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편이며, 신신도는 고도의 양식을 모방한 풍조가 있었다.[4] 이종군도란 군도 부족 현상에 의해 군도가 아닌 보통 일본도를 가져다 군도처럼 칼집을 가죽으로 감싸서 패용한 도검들의 총칭이다. 커다란 대도에서 작은 와키자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장교나 부사관도 사용했지만 최대 사용자층은 규정상 도검 패용 대상이 아니었던 조장(상사) 이하의 부사관들과 일반 병들이었다. 군대에서도 이들의 도검 패용은 묵인하는 편이었다.[5] 전통적인 손잡이 끈 보강 기법이기도 하다. 물에 젖거나 끈이 밀리는 것을 막는 방법 중 하나. 다만 이렇게 하면 손잡이의 그립감이 이전보다 좋지 못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