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1. 주장
“5.18 시민군의 증언 중 고려대학교 및 연세대학교 학생 600명이 내려와 시위를 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계엄 상황에서 서울의 대학생이 대규모로 내려오기는 불가능하고 이후에도 연고대생의 시위 참여가 확인된 적이 없다. 이후에 대규모의 복면을 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그 '연고대생'이며 곧 북한군이다”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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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이 한 주장[1] 에 따르면 연고대생이 300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에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다하며 그런 것 들을 전옥주나 김영택 박사가 증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광주현장에는 "수상한" 인물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북한 간첩일 수도 있다는 주장인데……
김영택 당시 광주주재 동아일보 기자의 검찰 증언 참고.(#)
문)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답) 5월 22일 15시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이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2. 사실
2.1. 증언의 날조/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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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대생이 300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에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다."라고 하며 전옥주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증언을 원본을 확인하면 다르다.그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전옥주의 증언을 보면 전옥주는 연고대생이 오고 있다는 쪽지를 읽기만 했을 뿐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거기다 막상 가보니 없다는 증언까지 했다.
김영택박사의 증언을 인용한 경우도 지☆☆이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서 "대학생이 300명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500명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 숫자가 300명이 되는지 30명이 와서 300명이라고 했는지는 좌우간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 지☆☆과 김대령은 이 증언의 '''일부만 발췌'''해서 편집한 것이다. 1995년 대한민국 검찰 조사보고서의 600명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서울지방검찰청, 1995, 92-93)
즉 연고대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건 확인이 되지만, 그 수를 봤다는 증언은 없다. 그러니 그 수를 600명이라고 특정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전옥주의 증언에선 '''아예 규모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김영택의 증언에서도 '''당시의 풍문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500명이 최대치이고 최소는 3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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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언론에선 "증언자에 따르면 5.18은 연고대생이 주도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이뭐병 [2]
전옥주의 증언 원본:
- 전춘심, 「혜성처럼 나타난 여자 선동가」,
- 나의갑,「그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전옥주는 누구인가?」,『월간예향』, 1988,
- 전옥주,「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월간경향』, 1988,
- 5.18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1권에서도 확인 가능,
김영택 기자의 증언 원본:
- 김영택,「「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 」,『신동아』, 1987,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속기록, 19880126, 27p
2.2. 당시 투입된 신군부의 공작원들
유사역사학세력들은 연고대생의 정체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이 북한군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증언을 한 전옥주와 김영택 모두 당시의 연고대생들을 군의 '프락치'로 생각했다. 이건 학계에서 가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김영택 기자는 훗날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거기에서도 당시 "연고대생"의 정체를 '''군의 프락치'''라 판단했다. 이건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나오는 가설이다.[3] 북한 간첩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그리고 '''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한 활동'''은 '''팩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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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구보안대 상사였던 허장환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505 보안대에서 사복을 입고 수사하는 수사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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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군 문서를 확인해보면 나온다.[4] 이들의 임무가 단순한 첩보·정보수집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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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고 탈취 이틀 전인 5월 19일에는 2군사령부에서 농민, 행상 등으로 가장한 '편의대'를 운용했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항쟁지도부가 만들어지던 5월 25일에는 선무공작요원 300여명을 파견했다.[* 정승호·이형주,「“신군부, 5·18때 민간인 위장 군인 300명 광주 보내 선무공작”」,『동아일보』, 201305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2435635&sid1=001]
해당 내용은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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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문서에 따르면 제606대대로 추정되는 1개 대대가 특수훈련을 받았다한다. '''소속병력 모두가 머리를 기르고 있고 입은 군복이 아닌 옷을 입었다.'''고 한다.[5]
'''신군부가 공작원을 파견'''했다는 건 보다시피 팩트다. 그러나 G만원이나 김대령같은 연고대생 간첩설자들은 이런 팩트는 무시하며 "북한간첩"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3. 기타
이 내용을 가지고 '''연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열혈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침에 경찰이 와서 돌려보내도 낮에 보면 또다시 와서 경찰이랑 실랑이를 하고 있는 수준. 조잡하게 만든 입간판 몇 개 세워놓고 소리만 지르는 수준이지만 대부분의 연대생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보니 좋게 보일 수가 없다.
[1] 8.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2859&sfl=&stx=&sst=wr_hit&page=224[2] 일단 저 사이트가 여길 저작권을 명분으로 고소할 수 있으니 링크는 하지 않고 네이버 검색창으로 간접으로만 올린다.[3] 자세한 건 김영택 항목 참고[4] 오승용·한선·유경남,『5·18 왜곡의 기원과 진실』, 5·18 기념재단, 2012, 193쪽 ~ 194쪽[5] 문서스캔은 여기참고 http://digikey.tistory.com/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