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한국의 역사왜곡자유사역사학자
백지원
김대령
이덕일
이주한
김상태
문정창

1. 소개
2. 저작목록
3. 유사역사학 세력들의 추종과 현실
3.1. 유네스코 기록물을 다 봤다는 거짓권위의 진상
3.2. 실제 김대령이 본 쪽수
4. 5.18 최고학자라는 거짓권위의 진상
4.1. 김대령 이전엔 학계에서 5.18에 대한 진지한 조사가 없다?
4.2. 5.18에 대한 기본왜곡
5. 김대령의 사료 수집 방식
6. 김대령식 논리들
7. 왜곡 행적
7.2. 만주국 독립국설
7.3. 간도 조선영토설
7.4. 동영상 편집술
8. 현황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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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자이자, 기독교 우파 목사. 김대오라고도 알려져 있기도 하다. 역사학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복음주의적 신앙노선에 근거한 전문 신학, 심리학, 선교 교육 기관[1]에서 철학분야 인식론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2] 사학학위는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 받았다는 학사학위 뿐이며 박사학위(Ph.D.)는 사학과는 아무 관계없는 분야의 연구로 받은 사람이다.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사 관련 과목도 HIS319 하나뿐인데[3] 이것도 필수가 아니라 선택과목이다. 외국 대학의 한국사를 간략하게 접한 뒤, 신학대에서 철학 관련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이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부분을 왜곡하고 다니며, 그 가운데 특히 5.18 민주화운동/왜곡을 벌이는 세력이 5.18 최고전문가라 추종하는 인물이다.
거기다 만주국까지 독립국이라는 왜곡을 하며, 만주국의 주권 중 하나에 조선족에게 있으니 간도는 한국 영토라 한다.
'역사학도' 또는 '샤론의 필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다.
5.18을 왜곡하는 인터넷의 자료들은 김대령의 블로그에서 소스를 따온 것들이 많다.

2. 저작목록


종이책 출판은 하기 2종이 전부다. 전부 비봉출판사에서 펴냈다.
  • 역사로서의 5.18 (2013) - 총 4권으로 구성.
  • 임을 위한 행진곡 (2015)

3. 유사역사학 세력들의 추종과 현실



3.1. 유네스코 기록물을 다 봤다는 거짓권위의 진상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4]

3년만에 공개된 5·18 광주사태의 진상. 본서는 201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광주 5·18사태에 관한 전체 기록을 기본 자료로 5·18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본부에서는 5·18 광주사태에 시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과 당시 작성되어 배포되었던 유언비어 벽보나 선동삐라 등 모든 자료들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이제 광주사태의 진상은 전 세계인에게 공개되었다.

유네스코 등재 날짜는 2011년 5월이다. 그런데 김대령이 책을 낸 날짜는 2013년 5월이다. 2년동안 유네스코 기록건 80만건을 보려면 하루에 1000쪽은 기본으로 봐야한다. 거기다 책까지 써야한다(....) 상식적으로 초인이 아닐 바에야 그게 가능할까? 뭐 실제로 뉴타입이라 그럴수도 있다고 쳐도 문제가 남는게,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기록물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열람할 수 없다.
[image]
일부 유네스코 5.18 기록물은 5.18기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대령은 5.18기념재단에 열람 요청을 한 적이 없다!
[image]
결국 저 출판사에서 소개한 것은 거짓말이다.
'이거 다 거짓말이다라는 것이 거짓말입니다.'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3.2. 실제 김대령이 본 쪽수


김대령이 본 문헌들 전체목록이다. 참고글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3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1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2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4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8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9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8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5 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 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50권. 광주시 광주광역시 5 18 사료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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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erson, terry. 2000. Remembering Kwangju. In The Kwangju uprising. Henry Scott-Stokes and Lee Jae Eui eds, 43-52. Armonk, new York: M.E. Sharpe.

Henry Scott-Stokes and Lee Jae Eui eds. 2000. the Kwangju uprising. Armonk, New York: M.E. Sharpe.

Martin, Bradley. 2000. Yun Sang Won: The Knowledeg in those eyes. In The Kwangju uprising. Henry Scott-Stokes and lee Jae Eui eds, 87-105. armomk, new York: M.E. Sharpe

Thorpe, Norman. 2000. Let’s live and meet again. In The KwangJu uprising. Henry Scott-Stokes and Lee Jae Eui eds, 117-127. Armonk, New York: M.E, Sharpe.


해당 책들을 쪽수로 바꿀경우 약 20,810쪽[5]
예를 들면 임천용이 들어간 자유북한군인연합이 낸 '화려한 사기극'도 포함. 이런것까지 따지면 실제 유네스코에 등재된 건 훨씬 적을 거다. 반면, 같은 5.18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영택 전 동아일보 기자는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문서의 쪽수를 다 합치면 10만8519쪽[6]이다. 질적인 문제를 안 따지더라도 이미 양에서 밀린다.

4. 5.18 최고학자라는 거짓권위의 진상



4.1. 김대령 이전엔 학계에서 5.18에 대한 진지한 조사가 없다?


[7]
결론부터 말하자면, 학계에서는 5.18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6월 항쟁부터 지금까지. 학계의 흐름도 모르는 인간들은 5.18이 학계에서 본격연구가 없다는 착각 혹은 왜곡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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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89년부터 학술대회를 했는데 연구가 없었다고 하는 건 학계 흐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8]
5.18을 자기 입맛대로 끌어다쓰는 여러 정치 세력의 해괴한 해석을 반박하고 걸러낸 것도 학계였다. 요즘 5.18 관련 역사왜곡을 하는 극우파나 주사파 뿐 아니라 5.18 관련 거의 모든 글에 팩트 체크가 이뤄졌고, 오류가 지적되었다. 실제 참가자의 글에서도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작정하고 왜곡하지 않더라도, 인간 경험과 인지의 한계, 당시 정보의 한계, 확증편향, 정치적 이용 등 때문에 제대로 된 실태파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대령이 자기 홈페이지에 글을 쓰기 전부터 학계에는 5.18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들이 나왔다. 논문1, 논문2
2005년에 이미 김영택이 5.18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낸 바 있다. 논문 이 박사논문을 기반으로 2010년에 최초로 5.18을 본격 연구한 거대분량의 학술도서가 나왔다. 학술원에서 2011년 우수학술도서로 뽑히기까지 한 책이다. 김영택 문서 참고, 김대령 이전에 5.18 연구가 없다는 주장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과거에 연구를 했던 역사가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이다.

4.2. 5.18에 대한 기본왜곡


김대령은 보배드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데아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이것은 사실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공수부대는 5월 21일 저녁 때 비로소 시위진압에 동원되었습니다. 김경철군이 낮에 구타당하였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광주에서 종종 폭행사건이 일어나고 있지요? 만약 그런 평상시 폭행 사건이 아니라면 시위대에 맞은 것입니다.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politic&No=45141&bm=1

공수부대는 21일에 동원되었다고 말하질 않나, 광주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난다는 소리를 했는데, 이건 기본사실부터 왜곡한 것이다.
예1)

그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건물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라 출근한 사람은 적었다. 거기에서 가만히 일하던 직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정은철 총무는 바깥일에 신경도 안 쓰고 앉아서 '태연'하게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대를 잡으러 건물을 수색하던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총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정총무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졌고, 두 군인에게 짓밟히고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았다. 당시 다른 동아일보 기자가 봤을 때 그 모습은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수준이었다. 정총무는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초죽음 되어있는 정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머리는 땅바닥에서 끌린 채였고,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군인들은 또 올라왔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려고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 군(광주공고 1년)이 그 표적이 되었다. 박준하군 공수부대한테 갑자기 구타당하고 실신했다. 두 군인은 끌고 가다가 박군을 계단에 내팽개쳐버리고 내렸다. [9]

예2)

길거리에 어느 택시가 지나갔다. 이 택시엔 남자는 젊고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고 여자는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신혼부부인 듯한 커플이 있었다. 이 택시 역시 공수부대원들한테 붙들렸는데 군인들은 그 두 커플을 택시에서 끌고 내려왔다.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 고속버스 터미널, 광주역으로 빠져 나가는 길목이다. 신혼여행을 위해 가려는 듯했다. 신랑은 택시에서 끌려 나오자마자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받았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엉망이 된 채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질렀다. . 군인들은 "이 쌍년"이라 말하며 신부를 걷어차며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10]

예3)

또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한테 옷을 입혀주는 행위조차 막고 잔인한 일들을 벌였다. 예로 하얀색 투피스 옷을 입었던 여자는 공수부대한테 얻어맞아 윗옷과 아랫옷이 피투성이가 되고 공수부대원이 억지로 옷을 잡고 일어나게 하려다 옷이 찢어져서 윗옷은 젖가슴이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 이 때 바로 옆 서석병원에서 병원장 김상수(24) 박사는 사무장을 시켜 가운과 팬티를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사무장은 옷을 들고 여자한테 다가왔는데 군인들한테 붙잡혔고 군인들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먹였다.[11]

약한 여자를 향해 벌인 폭력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여자한테 옷을 입히려는 의사한테까지 두들겨 팬건 도저히 시위진압으로 볼 수 없는 행위였다.

예4)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제일고등학교 까지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이곳은 일본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왜경들은 적어도 교장실에 들려 사전 양해는 구하고 연행해갔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군화를 신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받던 학생들을 구타하고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서 있던 학생들은 만학 과정을 이수하기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성인 학생들이다. 이들도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학자금이 없어 정규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 생계 때문에 공부하지 못 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복을 입고 있던 한 육군 간부도 두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재빨리 뛰쳐나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다. 눈물이 난건지 눈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12]

예5)

그날 광주제일고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이 린치에서 그는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13]

기본사실부터 너무 대놓고 왜곡한다.

5. 김대령의 사료 수집 방식


김대령의 글에는 '한동석 중위'라는 인물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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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y21.org/518/doc/Chungu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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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y21.org/518/video/auditing_518li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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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y21.org/518/doc/518movie04.htm
그의 설명에 의하면 한동석 중위는 7공수여단에게 실탄을 전달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인 중위였다. 한동석 중위 증언의 출처는 어디일까? 시민군의 증언과 같이 인용되어 있어 마치 전남대 5.18 연구소에서 제공하고 있는 증언과 같은 출처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김대령의 다른 글을 살펴보면 '한동석 중위' 증언의 출처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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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y21.org/518/doc/5-21-bulle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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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y21.org/518/doc/518movie0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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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그가 시민군 선제 발포설의 근거로 인용한 한동석 중위 증언의 출처는 논문도 아니고 인터뷰도 아닌, 블로그 덧글이었다 물론 저 아이디 이용자가 본인 실명인증이나 경력인증을 하면 인용할 수 있겠지만 저 덧글은 실명인증제 같은걸로 검증한 것도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김대령은 증언의 출처로 논문이나 인터뷰 자료도 아닌 블로그 덧글을 당당하게 링크하고 있다(...). 엄청난 사료수집이다. 자칭 5.18 최고 역사학자라는 양반이, 블로그 덧글을 증언 사료로 내놓는다. 게다가 그의 홈페이지에서는 한동석 중위와 같은 대대에 소속이었다는 ROTC 장교의 증언까지 인용하고 있는데, 그 증언의 출처는 김대령의 다음 카페 덧글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이 한동석 중위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헷갈려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글을 출처로 쓰는 증언 수집 방식 자체부터 역사학자의 자세로서는 틀린 것이다. 이러면서 역사로서의 라는 책 제목을 잘도 쓴다.[14]
이런 엉터리 사료수집을 통해 쓴 책이 '유네스크 기록물을 다 본' 책이며 '공식자료를 근거로 했다' 라고 주장하는게 유사역사학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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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대령식 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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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차에서 서있는 시민군은 잠시 목으로 내린 복면과 양쪽 귀 옆의 장발을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진짜 공수부대원으로 혼동할 만하다. 아무 민간인에게나 공수부대원 군복을 입힌다고 강인하고 날렵한 공수부대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농사꾼이 저렇게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공수부대원이 외모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래서 20사 지프차들을 탈취한 농민들의 정체가 수상한 것이다. 여하튼, 공수부대원들에게 누명을 씌울 작전으로 공수복장을 한 시민군 숫자가 저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이 사진으로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의 주장이 허술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런 추측식 표현이다. 공수부대원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든지 흰색 수건을 둘렀다고 해서 수상해 보인다고 한다면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대령이 보기에 "공수부대처럼 위장한 것 같다"는 정도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걸 참으로 전제하고 "시민군이 공수부대로 변장하고 민간인들을 폭행해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근거없는 가설을 근거로 쓴 것이다. 최루탄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라든지 민주화운동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신상이 노출되었을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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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에 들어가면 수건도 비표가 되고 다 찢어진 장갑도 특수장갑이 된다(...) 손등의 일명 찍찍이로 부착하여 안벗겨지는 장갑형을보면 기존 장갑을 잘라낸것이 아닌 완성품 장갑이 헤져서 그래 보이는것이다. 이는 당시 보통 반장갑 이라고 불렸고, 특수 장갑취급은 아니고, 징등을 부착하여 영화의 깡패역들의 소품으로 활용될 정도로 흔한 물건이었다. 문방구에서도 팔던. 복면 역시 기존 천에 구멍만 낸 것이다. 마감처리를 보면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잘 보이지도 않는 사진을 들이 대면서 비슷한 장갑이라고 주장해대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비슷한 복면, 수건을 두른 사람들을 계속해서 수상하다고 주장해 대는데 사진 몇장으로도 알아챌 수상함이라면 사진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곳에는 그런사람이 최소한 수백여명은 됐을것이고 주민들이 눈치를 못챘을리가 없다. (규격화된 보급품은 어딜 가도 눈에 띄게 되어있다.) 단적인 예로 같은 반에 노스페이스를 입은 학생이 2~3명만 있어도 유행이라는 것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또 참으로 전제해서 근거로 쓴다. 역사학자라면 당연히 할 수 없는 행동이다.

7. 왜곡 행적



7.1. 12.12 군사반란 범인 장태완, 정승화


허술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점점 더 이해받지 못할 주장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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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라는 것이 정승화와 장태완 등 김재규의 부하들이 김재규의 군사혁명을 완성시킬 목적으로 군사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재규의 부하들의 부하들, 즉 4년제 육사 출신 영관급 장교들이 김재규의 부하들에게 항명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34년이 지난 지금도 님이 12.12사태가 뭔지 모르고 잘못 알고 계셨는데, 12.12사태 직후에 기자들이 무엇을 안다고 보도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보도된 내용이 무엇이었나요?[15]

12.12 군사반란장태완 장군과 정승화 총장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5.18 민주화 사건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역사왜곡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본인이 저지르지도 않은 쿠데타로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로 종신형을 받고 대통령 예우도 박탈당한 전두환은 진작에 항소해서 사면이 아니라 무죄판결을 받았어야 했다.[16] 특히 정승화와 장태완이 김재규의 부하라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5.18은 북한 개입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9일만에 일단락된 사건이지만 12.12 사태의 판결은 전두환을 반란수괴로 결론내렸고 그때서야 비로소 5,18이 시민군이 반란군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으로써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상기 캡처 이미지에도 나오는 것 처럼 당시 언론에서 12.12 군사반란을 보도하지 않아서 김영삼 정권 이전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괴상망측한 주장은 덤. 당장 반란보다 몇배는 더 온건하게 선거로 정권교체를 했어도 대서특필되는데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중무장 전투 사단들이 시퍼렇게 대치를 하고 그 과정에서 한강 대교들이 봉쇄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피부로 사태를 체감했는데,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 tv와 신문에 나오던 정승화 총장이 갑자기 전두환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매체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아서 김영삼 정권이 끄집어내기 전까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12월 12일마다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 언론인들이 수치스러움에 대성통곡을 할 일이다. 그리고 결국 전두환이 언론통제를 해서 본인의 치부를 감췄다는 뜻이니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하다.

7.2. 만주국 독립국설


만주국이 괴뢰가 아닌 독립국이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만주국은 괴뢰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런 어거지 주장은 박정희가 만주국군 군관으로 석 달 복무하였으니 일본군이요, 고로 친일파요, 고로 친일파 박정희를 척결하기 위해 친일청산법을 제정하여 된다고 주장해온 좌익사관에서 두드러진 주장이다.

우리가 만주국이 괴뢰국이었다는 주장은 전면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완전 독립국, 정통성을 백 퍼센트 완전하게 구비한 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 이렇듯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통성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돈다. 따라서, 좌익들이 주장하듯, 한 국가를 칼로 무 자르듯이 괴뢰국과 비괴뢰국으로 가름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역사학적 판단은 보다 객관적인 준거를 요하는 것이다.[17]

아마 이 글의 제목에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만주국이 괴뢰국이었다는 주장은 우파 내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국이 일본이었다고 우기며, 고로 박정희는 일본군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과 더불어 박정희 척결을 위해 친일청산법을 제정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은 좌익 입장을 대변하기에 이 글에서 좌익사관으로 간주하였습니다.[18]


7.3. 간도 조선영토설


이토록 몰상식한 좌익도 간도가 본래 우리 민족 땅이라는 견해에는 반대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좌익은 만주가 바로 간도(연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200만 인구의 조선인이 만주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그 중 조선인이 가장 많은 지역을 간도 혹은 연변이라 부름.)[19]

일본 정부는 만주국은 완전 주권을 가진 온전한 독립국이라는 외교적 선언을 한결같이 했었는데, 혹자는 이 선언에 반대하는 것이 항일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주국이 주권국가였다는 것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주국은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중국인 및 일본인 5호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는데, 이 중 엎치락 덮치락 점령군을 파병하고 있던 중국인과 일본인은 당연히 만주국 주권국민에서 제외되며 몽골족은 소수민족이었다. 그렇다면, 만주국의 주권은 만주족과 조선족에 있었다는 역사 논리가 분명하기에 간도는 우리 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좌익은 왜 엉터리 역사 논리로 간도를 공산당 떼놈에게 통째로 넘기려 하는가?[20]

이덕일처럼 과격 국가주의에 근거해서 간도를 조선영토라 왜곡한 적이 있다. 차이점은 이덕일은 식민사학자로 몰기도 하고, 김대령은 좌익사관으로 몰기도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둘다 중국세력으로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7.4. 동영상 편집술


동영상편집술도 시전한 적이 있다. 00:08:56~00:11:37분과 00:19:29~00:24:59 부분을 편집해서 오려붙였다. 의도는 시민군 무장 시점을 앞당기기 위해서.

8. 현황


5.18 관련 단체에 의해 기소 되었지만, 응하지 않고 미국에 도피해서 기소중지 상태이다. 하지만 5.18 왜곡 활동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하고 있다. 미국에서 다니엘 김 (Daniel Kim)이라는 이름으로 목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Facebook 계정에서 행적을 볼 수 있다. (삭제됨)
페이스북에 “선교사도 독립운동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2017년 5월 10일부터 나의 주된 사역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5월 10일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날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정당한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부정하고 현 정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말이다.
최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에 김대령이 저술한 단행본 '문재인의 5·18 눈물로 뒤집힌 광주사태'가 판매 도서로 등록되어 있다.# 해당 도서에는 기존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주장뿐 아니라, 최순실 태블릿PC 조작설에 해당하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1] http://www.jauj.com/fuller/aboutus/schoolintro.asp[2] http://blog.naver.com/ceb4747/60192428389[3] 게다가 이건 한국사가 아닌 '동아시아사'이다. 한국은 말그대로 곁다리로, 거의 없다고 할정도...[4]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603969[5] 737+772+710+762+743+790+778+271+682+694+766+720+311+12+15+404+3+2+7+13+319+1+13+352+451+419+13+300+214+5+21+15+5+5+15+259+450+11+86+3+12+14+41+15+4+27+48+42+24+397+11+10+13+8+3+4+28+7+360+18+14+29+10+27+5+5+5+5+7+7+440+5+152+337+30+9+7+7+9+30+739+119+47+58+5+393+5+253+295+9+35+3+4+326+20+6+23+1005+376+361+10+1652+26+9+310+26+14+30+9+239+18+10. 다만 여기서 일부 기사는 포함하지 못했고,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북한책 몇 권도 제외됐다.[6] 38343+290+570+78+342+1052+2274+1005+1652+541+436+432+558+376+876+972+1002+155+1053+404+539+223+794+319+398+428+648+350+478+345+435+780+700+352+451+1260+683+390+708+724+1237+112+288+188+228+654+721+611+659+576+652+690+353+438+450+600+688+433+1124+1038+348+438+408+319+326+428+690+384+176+273+391+430+692+582+298+360+877+3198+301+318+216+436+360+369+344+502+399+370+302+462+290+300+932+356+415+337+198+255+324+456+353+562+353+293+490+262+297+331+366+312+831+208+380+584+481+352+403+1722+272+296+325+295+312+254+326+262+446+608+342+338+586+151+619+23+259+92+27+60+30 = 108519[7]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0515[8]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17492630&dir_id=1&field=0&unFold=false&gk_adt=0&sort=0&qvt=1&query=%EA%B4%91%EC%A3%BC%EB%AF%BC%EC%A3%BC%ED%95%AD%EC%9F%81&gk_qvt=0&citedSearch=false&page.page=1&ndsCategoryId=10110[9] 동아일보 기자인 김영택 기자가 취재가 한 내용. 출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7쪽[10] 동아일보 기자인 김영택 기자가 취재가 한 내용. 출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8~39쪽[11] 동아일보 기자인 김영택 기자가 취재가 한 내용. 출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9~40쪽[12]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03쪽[13]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71쪽[14]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때도 문제의 교학사 교과서가 엔하위키, 디시인사이드, 싸이월드 및 각종 개인블로그 등을 사료로 쓴게 논란이 된 이유도 간단하다. 공신력이 없는 인터넷의 글이기 때문이다.[15]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415 에서 2013.11.30 09:46 리플[16] 그리고 김대령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해서 1년 넘게 침묵하고 있다. 반박하는 댓글들에 대해서 반박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넌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로 일관하고 있다.[17] http://blog.daum.net/sionvoice/6158034[18] http://blog.daum.net/sionvoice/6158034[19] http://blog.daum.net/sionvoice/6158034[20] http://blog.daum.net/sionvoice/6158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