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만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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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는 '카운터 컬처' 대안 만화 잡지로 한국으로 치면 새만화책이나 고래가 그랬어와 비슷하다.
정식 명칭은 월간만화 가로. '가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1964년 12월호를 창간호로 발간하고 그 후 휴간기를 거쳐 2002년까지 간행되었다.
창간의 목적은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을 연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잡지의 간행에 시라토에게서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겸사겸사 편집자들의 인맥이 닿는 만화가들에게 연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가로가 배출한 유명작가로는 미즈키 시게루와 츠게 요시하루(1965~1970)이 있다.
사실상 오직 카무이전만을 위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카무이전 자체가 표현의 강도가 높은 만큼 편집자나 출판사의 참견없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낸 고육지책인 셈. 당초에는 목적대로 카무이전의 인기만으로도 잡지를 발간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카무이전의 연재가 끝나자 구매층이 대거 빠져나가서 적자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낸 궁여지책이 바로 일단 재미만 있든 없든 뭐든지 상관없이 작가가 그리고 싶은 것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는 편집방침으로 이 때 가로를 대표하는 작가주의적인 작품이 대거 발표되었다. 그 때문에 예술적인 평가는 더 높아졌지만 잡지자체의 판매부수는 변함없이 늘지 않았고 오히려 각 작품의 팬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 골라 보기 위하여 단행본만을 구입하여 높은 작품성의 평가과는 달리 상업적으로는 고전을 계속하게 된다.
창간후 약 20년이 지난 1980년대에는 이미 판매부수가 3천부에 불과했으며 고작 그것만으로는 단행본의 판매를 감안하더라도 잡지사의 운영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서 편집장 나가이 카츠이치는 원고료와 사원에 대한 월급의 지불을 일절 중단하고 나중에 경영이 회복되면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높은 작품성에서 오는 일부의 컬트적인 지지자들하고, 편집의 간섭을 받을 바에는 공짜로 만화를 연재하겠다는 작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작가등의 사정이 맞물려 잡지의 발간은 강행되다가 마침내 가로의 단골작가인 츠게 요시하루의 팬이었던 컴퓨터 소프트 개발회사 짜이트의 사장 야마나카 쥰에 의하여 인수된다.
야마나카의 대폭적인 지원하에 일시적으로 가로의 경영상태는 회복되지만 그 후에 짜이트가 윈도우체제로 이행하는 것에 늦어서 경영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야마나카가 그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인터넷판 가로가 구나가이체제의 사원들에 의하여 반발을 사는 바람에 몰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나가이체제 사원들의 반발을 억누르는 형태로 강행된 디지털 가로는 결과적으로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이 여파에 야마나카는 병상에 눕는 신세가 된다. 그 틈을 타서 나가이체제의 사원들이 만화가들의 원고를 들고 튄 데다가 그것을 매스컴에 알려서 가로는 그대로 경영타격을 받아서 가로는 폐간되고 만다. 전설적인 잡지의 말로치고는 추잡하기 그지 없는 결말이었던 셈.
그 후로도 몇번인가 체제를 바꾸어서 재간행이 시도되긴 했지만 가로의 편집방침과 작가들이 시대에 뒤따라갈 수 없게 된 것도 있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 후에 가로 2.0이라는 IPAD용 전자북이 발매되긴 했지만 편집방침도 작가도 겹치는 것은 전혀 없어서 그저 이름만 빌린 것에 불과하다.
한 편으로 원고를 들고 도주한 사원들은 후에 세이린코게이샤(青林工藝舎)란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들이 가로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액스(アックス)란 이름으로 예전의 작가들을 어느 정도 이어서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창간시에 보인 추태나 작품의 질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 작가들의 실력 저하나 은퇴등의 문제때문에 가로만한 명성은 얻지 못했다.
원래 가로의 출판사였던 세이린도(青林堂) 역시 1999년 우익 성향인 카니에 미키히코(蟹江幹彦)가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극우 노선으로 이미지가 완전히 더렵혀졌고, 사장이 열정페이를 저질렀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극우만화가로 악명높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평(천황의 세자비가 군중들에게 화염병 던지는 것)은 극우잡지에서 싣기를 꺼려서 가로에 게재했다는 엄청난 전설이 있다.
아즈마 히데오도 여기에 응모하려 했다고 한다.
[각주]
가로는 '카운터 컬처' 대안 만화 잡지로 한국으로 치면 새만화책이나 고래가 그랬어와 비슷하다.
정식 명칭은 월간만화 가로. '가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 1964년 12월호를 창간호로 발간하고 그 후 휴간기를 거쳐 2002년까지 간행되었다.
창간의 목적은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을 연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잡지의 간행에 시라토에게서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겸사겸사 편집자들의 인맥이 닿는 만화가들에게 연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가로가 배출한 유명작가로는 미즈키 시게루와 츠게 요시하루(1965~1970)이 있다.
사실상 오직 카무이전만을 위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카무이전 자체가 표현의 강도가 높은 만큼 편집자나 출판사의 참견없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 낸 고육지책인 셈. 당초에는 목적대로 카무이전의 인기만으로도 잡지를 발간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카무이전의 연재가 끝나자 구매층이 대거 빠져나가서 적자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낸 궁여지책이 바로 일단 재미만 있든 없든 뭐든지 상관없이 작가가 그리고 싶은 것에 일체 관여를 하지 않는 편집방침으로 이 때 가로를 대표하는 작가주의적인 작품이 대거 발표되었다. 그 때문에 예술적인 평가는 더 높아졌지만 잡지자체의 판매부수는 변함없이 늘지 않았고 오히려 각 작품의 팬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 골라 보기 위하여 단행본만을 구입하여 높은 작품성의 평가과는 달리 상업적으로는 고전을 계속하게 된다.
창간후 약 20년이 지난 1980년대에는 이미 판매부수가 3천부에 불과했으며 고작 그것만으로는 단행본의 판매를 감안하더라도 잡지사의 운영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서 편집장 나가이 카츠이치는 원고료와 사원에 대한 월급의 지불을 일절 중단하고 나중에 경영이 회복되면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높은 작품성에서 오는 일부의 컬트적인 지지자들하고, 편집의 간섭을 받을 바에는 공짜로 만화를 연재하겠다는 작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작가등의 사정이 맞물려 잡지의 발간은 강행되다가 마침내 가로의 단골작가인 츠게 요시하루의 팬이었던 컴퓨터 소프트 개발회사 짜이트의 사장 야마나카 쥰에 의하여 인수된다.
야마나카의 대폭적인 지원하에 일시적으로 가로의 경영상태는 회복되지만 그 후에 짜이트가 윈도우체제로 이행하는 것에 늦어서 경영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야마나카가 그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인터넷판 가로가 구나가이체제의 사원들에 의하여 반발을 사는 바람에 몰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나가이체제 사원들의 반발을 억누르는 형태로 강행된 디지털 가로는 결과적으로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이 여파에 야마나카는 병상에 눕는 신세가 된다. 그 틈을 타서 나가이체제의 사원들이 만화가들의 원고를 들고 튄 데다가 그것을 매스컴에 알려서 가로는 그대로 경영타격을 받아서 가로는 폐간되고 만다. 전설적인 잡지의 말로치고는 추잡하기 그지 없는 결말이었던 셈.
그 후로도 몇번인가 체제를 바꾸어서 재간행이 시도되긴 했지만 가로의 편집방침과 작가들이 시대에 뒤따라갈 수 없게 된 것도 있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 후에 가로 2.0이라는 IPAD용 전자북이 발매되긴 했지만 편집방침도 작가도 겹치는 것은 전혀 없어서 그저 이름만 빌린 것에 불과하다.
한 편으로 원고를 들고 도주한 사원들은 후에 세이린코게이샤(青林工藝舎)란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들이 가로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액스(アックス)란 이름으로 예전의 작가들을 어느 정도 이어서 잡지를 만들고 있지만 창간시에 보인 추태나 작품의 질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 작가들의 실력 저하나 은퇴등의 문제때문에 가로만한 명성은 얻지 못했다.
원래 가로의 출판사였던 세이린도(青林堂) 역시 1999년 우익 성향인 카니에 미키히코(蟹江幹彦)가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극우 노선으로 이미지가 완전히 더렵혀졌고, 사장이 열정페이를 저질렀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극우만화가로 악명높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평(천황의 세자비가 군중들에게 화염병 던지는 것)은 극우잡지에서 싣기를 꺼려서 가로에 게재했다는 엄청난 전설이 있다.
아즈마 히데오도 여기에 응모하려 했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