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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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만화가.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 만화가 중 한 사람'''이자 요괴 만화의 최고봉으로 불리며 일본 요괴물의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일본 요괴 만화의 상징이자 일본의 국민 만화인 《게게게의 키타로》이며 요괴 만화 이외에도 본인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전쟁 만화들과 쇼와 시대 당시 일본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내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일본 만화의 신으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보다 6년 앞서 태어난 일본 만화계 최고 원로 중 한 명이었으며 9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 현역'''으로 만화를 그렸다.[4]
2. 생애
3. 특징 및 평가
3.1. 영향력
그의 만화는 대표작이자 요괴 만화의 대명사인 게게게의 키타로를 대표하는 요괴 만화와 자신의 전쟁 체험을 토대로 한 전기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풍자적인 단편 작품, 요괴에 얽힌 이야기 수집이나 인물전, 자전적 에세이 등 다양한 만화를 그렸다. 그 중에서도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만화가 바로 요괴 만화다.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에서 결코 뗄 수 없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요괴다. 미즈키의 생활은 요괴와 일본 문화 전반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미즈키를 이해하려면 요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는 평생을 요괴 연구에 바쳤으며 평생을 요괴와 함께 살았다. 또한 그의 최대 업적은 멸종할 뻔했던 일본 요괴를 현대에 되살린 것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현대 일본 요괴문화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일본 요괴문화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인물 중 하나이다.#'''현대의 요괴 문화의 선도자.'''
― 코마츠 카즈히코[5]
(문화인류학자)#
당시 일본에서 요괴는 강, 산, 숲, 바다에서 서식하는 형체 변형 생물과 동물들의 이야기이자 구전 전통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일본 생활의 일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현대 교육의 확산과 "바보 같은 대중적 믿음"을 근절하려는 캠페인이 요괴를 대중의 의식에서 벗어나게 했다.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은 본인 혼자서 이 전통적인 공상적인 생물들인 요괴들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역사와 학계로부터 부활시켰고 대중을 위한 대중문화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 요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그가 '''일본 문화사에서 높게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 생전 일본 문화계에서 온갖 훈장과 권위있는 상을 많이 받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대의 일본에서 요괴를 다룬 작품은 대부분 '''미즈키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또한 그는 친구 데즈카 오사무를 시작해 어시스턴트를 맡은 이케가미 료이치나 츠게 요시하루, 장르외에서는 제자를 표방하는 쿄고쿠 나츠히코나 아라마타 히로시 등, 많은 크리에이터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 그의 대표작인 게게게의 키타로는 전통적인 요괴에 미즈키 자신의 발명품을 혼합한 작품으로 한 나라의 가치 있는 민화를 한데 엮어 일본인들의 일상 생활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한 생물들로 가득 찬 매력적인 세계로 만들었다. 게게게의 키타로의 대성공은 수 많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에 영향을 끼쳤고 더 뉴요커는 "포켓몬스터", "요괴 워치"를 포함한 수많은 요괴 프랜차이즈의 로드맵을 제공했다고 평했다.#
그래서 현대의 일본 요괴물에서 미즈키 시게루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오늘날 현대의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요괴의 이미지는, 미즈키의 작품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미즈키 시게루는 그때까지 구두 전승으로만 전해지던 요괴를 캐릭터화해 엄청난 영향을 일으켰다. 현재 일본인이 상상하는 요괴의 모습은 거의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디자인이다. 전승의 유례를 일반화한 공적은 문화 수준으로 보아도 헤아릴 수 없는 공적이다. 그의 대표작 게게게의 키타로는 일본 전역이 오로지 풍요로움을 추구한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일본인의 마음에서 거의 잊혀져 가던 요괴에게 캐릭터성을 부여해 살아나게 했으며 작품을 접한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어려웠던 대본 시절부터 미즈키와 함께 걸어온 게게게의 키타로는 다른 만화가는 물론 문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사에 남을 일대 작품이 되었다.''' 또한 게게게의 키타로는 일본 만화사의 불멸의 작품이 되어 반세기 이상에 걸쳐 애니화가 되고 있으며, 2020년 방송 비평 간담회는 "50년 동안 6번이나 애니메이션화 된 것은 텔레비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라고 평했다.[6]#
키타로의 흥행은 시대의 변화에 묻히려던 일본열도 각지의 요괴와 민간전승을 부활시켜 민속학이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되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히트를 뒷받침한 것은 요괴에 대한 미즈키의 공들인 연구였고, 인터넷이 없는 시대, 요괴 정보를 수집하며 꾸준한 답사와 고서 등의 문헌을 통해 미즈키와 스태프 및 관계자들의 노력은 대단했다. 미즈키는 엄청나게 가난했던 대본 시대부터 요괴의 그림과 이야기와 정보를 세밀하게 스크랩해 수집했다. 자금에 여유가 생긴 뒤에는 18세기 민속 화가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이 그린 화도 백귀야행의 본격적인 연구서를 입수해 옛 스크랩과 대조하며 연구를 거듭했다. 그 성과는 후에 화집으로서 결실을 맺게 된다. 미즈키는 키타로의 성공 이후에도 세계요괴협회를 만들어 전세계에 요괴를 조사해 일본 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즈키의 작업 모습과 성과는, 당시 1960년대 초부터 이미, 민속학등을 연구하는 기관과 전문가로부터 '전승의 전도사'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요괴라는 말이 일본의 이렇게까지 널리 침투한 것은 야나기타 쿠니오가 학술용어로 사용한 공적이 크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시점에서 야나기타의 정의는 일반인에게까지 내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요괴라는 말이 이토록 많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야나기타의 말과 정의를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가 작품에 적용한 덕이 크다. 회화사적으로는 토리야마 세키엔, 타케하루 슌초사이(竹原春朝斎) 같은 요괴화를 그린 천재들을 재평가한 것도 미즈키의 공적이다. 에도 시대에 크게 융성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에 야나기타 쿠니오의 민속학은 주목 받지 못했다. 에도의 요괴문화를 전후 서브 컬쳐라는 형태로 부활시킨 것은 미즈키 시게루의 업적이다. 미즈키는 본인의 요괴 그림을 데뷔 초에 종이연극 작가부터 시작한다. 이후 만화로 표현 방식을 옮기고 대본 만화가를 거쳐 주간의 소년만화 잡지를 중심으로 활약하게 된다. 메이저 만화가로서 활약의 폭을 넓혀가면서 미즈키는 대본 만화가 시절부터 자주 다루어 온 요괴를 캐릭터로서 본격적으로 그리게 된다. 대표적으로 코단샤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무덤의 키타로가 그러하다. 미즈키는 무덤의 키타로에 에도시대의 요괴를 등장시켰다. 예로부터 비주얼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실제 어떤 요괴인지는 알지 못했던 요괴들에 미즈키의 독자적인 해석을 넣어 그려낸 것이다. 미즈키가 특히 다룬 것은 에도시대 화공이자 하이쿠인이기도 했던, 토리야마 세키엔이 그린 요괴화였다.'''다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요괴가 각광받는 것은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입니다. 이것은 미즈키 시게루의 존재가 큽니다. 1968년 '게게게의 키타로'라는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자 큰 붐이 일어났습니다. 미즈키 시게루에 시작되는 현대의 요괴 문화는 '요괴 재발견'이라고 바꾸어 말하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 특징은 엔터테인먼트와 아카데미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게게게의 키타로에 나오는 요괴의 대부분은 야나기타 쿠니오[7]
의 '요괴담'에 소개된 것입니다. 미즈키 시게루는 분명 민속학의 성과를 이용해 이를 엔터테인먼트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 카가와 마사노부 (효고현립 역사박물관 주사, 요괴 연구가)#
세키엔은 그동안 그림 두루마리 등에 흩어져 있던 요괴 그림을 모아 다시 그려 자신의 포맷에 떨어뜨려 도감적인 것을 만들었다.『화도백귀야행』을 비롯한 요괴화집 4작은 당시 대단한 인기였다. 미즈키는 당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책의 요괴들을 키타로와 싸우는 적의 요괴로 아이들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미즈키의 이 방법에 의해서, 에도의 요괴 문화는 훌륭히 쇼와 시대로 전해지게 된다. 요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모습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미즈키는 요괴를 형상화할 때 먼저 과거에 그려진 요괴 그림을 디자인을 바꾸지 않고 그려냈다. 그는 요괴를 그릴 때의 포인트로 요괴는 옛 사람이 남긴 유산이니 그 틀을 존중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민속학에는 각지를 취재하고 얻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역할이 있다. 미즈키는 요괴화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자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규칙에 따라 토리야마 세키엔을 비롯해 에도에서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시기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그림과 판본, 와판 등에 그려진 도깨비를 차례로 그려냈다. 미즈키가 그리는 대상은 평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조각이나 탈 등 입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통째로 그림으로 만들어 일으켰다. 일례로서 미즈키가 그린 요부코라고 하는 우산을 쓴 하나의 허수아비 같은 요괴가 있다. 요부코란, 야마히코의 돗토리현에서의 호칭이다. 산에서 외치면 반향을 일으켜 자신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산언현상을 옛 사람들은 요괴의 소행으로 삼았다.
토리야마 세키엔 요부코를 귀있는 짐승 같은 모습으로 그렸으나 미즈키는 전혀 다른 허수아비 같은 요괴로 그렸다. 사실 이 요괴의 모토는 야마나시현의 향토완구 작가인 2대 도카타레이(道方令)가 만든 야마히코의 인형이다. 미즈키는 그것을 요부코로서 그려[8] , 미즈키가 이 인형을 입수한 것이 돗토리현이었기 때문에, 이 야마히코 인형을 훌륭한 향토 완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미즈키는 평면, 입체, 작가 신구를 막론하고 뛰어난 요괴 장인은 적극적으로 그려나갔다. 그리하여 깨어난 요괴는 세밀하게 묘사된 배경화 속에 배치되었다. 민속학에서 다루는 요괴는 토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미즈키는 요괴를 그릴 때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묘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구도에 집착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그려냈다. 모습을 입은 요괴들은 있어야 할 자리를 부여받고 소생한 것이다. 만화의 세계에서 옛 요괴들과 상대하는 키타로에게는 우리 편이 되어 함께 싸워주는 요괴들이 있다.키타로 패밀리라고 불리는 레귤러 요괴다. 미즈키는 레귤러 멤버로는 야나기타의 요괴명휘에 적힌 요괴를 골랐다.지금은 유명한 '코나키지지', '스나카케바바', '잇탄모멘', '누리카베' 등의 요괴들이다. 이 요괴들은 각지에서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 모습은 그려지지 않은 요괴들이었다. 미즈키는, 그런 축적된 요괴라고 하는 기록들, 문자 정보에, 독자적인 감성으로 모습을 주어 갔다. 그는 요괴를 형상화할 때 '물건'으로서의 존재감에 집착했다. 그림으로서 모습이 남아 있지 않은 요괴라도 조각이나 민예품 같은 입체물로 남아 있으면 그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하여 그 요괴로 제시하였다. 또 요괴의 원화가 없을 때는 그 요괴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을 독자적인 감성으로 끌고 와 콜라주처럼 화면에 담았다. 수중에 넣는 소재는, 불교 문헌이나 뿌리내림과 같은 민예품은 물론, 서양회화나 사진, 민족의상 등 그의 감성에 걸리는 것은 어떤 것이든 소화되어 요괴화되었다.
예를 들면 오카야마현의 스네코스리라고 하는 요괴. 비오는 밤에 나타나는 개와 같은 요괴로 행인의 정강이를 문지른다. 이 요괴에게 미즈키는, 둥글게 뭉친 개나 고양이 같지도 않은, 도저히 재빠르게 움직일 것 같지도 않은 생물의 모습을 준다. 실은 이것은 뿌리 달린 세공의 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둥글게 굳어 보인 것은 원래가 조각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둥글게 된 개가, 빗속에서, 사람의 발밑에 서 있는 모습은 괴상하고, 요괴로서의 존재감이 있다. 이것이 만약 혈육을 느끼는 생물로 그려졌다면 이 고즈넉한 의아함은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즈키의 감성으로 빚어진 '물건'들은 미즈키에 의해 요괴로 제시되는 시점에서 그 자체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 미즈키 요괴의 공통된 것은, 생물로서의 존재감보다, 물건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진 요괴들이었다. 야나기타가 심령적인 것을 나누어 생각하자고 정의한 요괴는 애니미즘적인 요소가 강한 인상을 주었다. 어린이용 매체로 많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요괴에 대한 미즈키 시게루라는 사람의 미의식이 반영됐다. 미즈키가 그리는 요괴는 이런 야나기타의 정의에 잘 맞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미즈키의 손에 의해 보내진 요괴들은 일본 고유의 캐릭터로 인지되게 된다. 요괴라고 하는, 색다른 캐릭터가 활약하는 게게게의 키타로는 대히트해 미즈키 시게루는 요괴 만화가로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미즈키 이전에도 다양한 작가들이 요괴를 그림이나 형상화했지만 미즈키가 그린 요괴만큼 세상에 침투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작가들에게 화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확실히 미즈키 시게루는 매우 화가인 만화가이다. 그러나 단지 화력이라고 하기만 한다면, 미즈키 이상으로 그릴 수 있는 인간은 많았다. 그의 요괴가 다른 작가와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은, 요괴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었다. 화력 있는 많은 화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괴라는 존재에 실체감을 갖게 하기 위해 보다 생물적인 묘사에 주력했다. 갓파리의 돼지부리와 등딱지에 현존하는 생물의 리얼리티를 갖게 하고 육체는 인체를 의식한 골격과 근육을 붙여 표현되었다.
그러나 미즈키의 요괴는, 별로 그러한 곳에는 힘이 쏠려 있지 않다. 그려져 있는 요괴에 따라서는 생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또한 요괴 자체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간단하며 배경만이 극명하게 묘사된 것도 있다. 미즈키는 요괴에게 모습을 줄 때 물건으로서의 실체감은 갖도록 했지만 생물적 리얼리티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우키요에의 화면 구성과 같이, 그림 나누기를 기대어 사물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원근법이 도입돼 3차원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생각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본 회화는 독자적인 시각과 표현 방식으로 만물을 형상화했다. 요괴화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 회화적인 표현 방식은 요괴화 같은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괴이는 그것을 이해하고 극복하기까지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문명개화 이후의 일본에서 괴이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미신으로 여겨져 왔다. 요괴는 그러한 근대의 이치에서 해석되기 이전에 인식된 존재다. 고로 낡은 일본의 습속을 걸치고 있다. 미즈키가 민속학이라는 분야에서 요괴라는 존재를 학술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
이 낡은 일본의 습속을 감싼 요괴를 서양적인 회화 표현으로 실체감을 갖게 해도 일본의 요괴답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미즈키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현상으로 일어난 형체 없는 괴이를 그릴 때 생물감이나 입체감보다는 공간이나 사물이 갖는 질감을 고집했다. 그 결과 그것을 볼 때 향수 비슷한 원시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즈키 요괴화의 매력이 되었다. 이 점이 미즈키가 그리는 요괴가 다른 요괴 표현과 달리 널리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중요한 요소다. 생김새는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요괴들은 그 의장을 전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린다. 문자정보는 있지만 그림이 되지 않은 요괴들에게는 독자적인 감성으로 모습을 입힌다. 그리고 그 요괴들은 극명하게 묘사된 각각의 차분한 풍경 속에 배치된다. 미즈키는 잊혀져 가던 요괴라는 정보를 압도적인 질감을 가지고 일본인들의 눈에 비치는 형태로 멋지게 재생시킨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미즈키의 요괴화가 야나기타 이후 정의되어 온 요괴라는 것이며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처럼 인식되어 이후의 요괴 표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요괴 문화는 대부분 미즈키 시게루 유일인의 손으로 기초적인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즈키가 없었다면 에도 시대의 흥성한 요괴는 멸망해 버렸을 것이고, 야나기타가 정립한 민속학의 요괴도 박물관에 전시된 단순한 컬렉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엘프와 요정이 활약하는 하이 판타지 장르의 시조가 톨킨이라면, 오늘날 일본 서브컬쳐에서 요괴나 그와 비슷한 존재가 활약하는 일본식 판타지 장르는 미즈키 시게루의 공로가 가장 크다.#
다만, 키타로 이후 요괴가 상품으로서 주목받아 어린이용 캐릭터로서 소비되게 된 점으로 미즈키 시게루를 비판하는 일부의 의견도 있다. 미즈키의 작품을 접한 것이, 미즈키 작품에 그려져 있는 모습과 특징이, 그 요괴의 표준이라고 생각해 버릴 위험이 있는 것 등이, 자주 그 논점이 되고 있다. 또 미즈키가 창작한 오리지널 요괴가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요괴라고 생각되고 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그의 저서인 소학관에서 간행된 입문 백과 시리즈 서적에는 백 베어드를 비롯해 포비, 두 등 쇼와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요괴가 실려 있다. 단, 이것은 "작중에 등장하는 요괴는 미즈키 시게루의 눈을 통해 재편집 된 것이다"라고 하는 주의사항을 붙이지 않고 계속 사용한 편집·출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또한 미즈키의 요괴 화집에는 현대의 창작 요괴도 별다른 말이 없이 수록돼 있다. 그가 요괴의 끼친 영향이 워낙 크다 보니 그가 창작한 요괴가 틀림없이 전승의 존재인 줄 알고 작품에 써버린 만화가도 있다. 요괴 중에는 미즈키가 그린 디자인이 일반화돼 정착된 것도 적지 않다. 또 미즈키가 창작한 오리지널 요괴가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요괴라고 생각되고 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또 그가 그린 요괴는 출처가 밝혀지지 않고 있어, 이 요괴가 미즈키의 창작인가 아니면 전승에서 내려저 오는 요괴인가 하는 등 요괴 연구가들도 미즈키 시게루에게 휘둘리는 처지가 되고 있다.[9] 무엇보다 '요괴'라는 것을 자세히 알아 가면 어디에서 어떻게 들어가도 확실히 미즈키 시게루에 봉착하고 만다. 그래서 요괴 연구를 하려고 하면 어느새 미즈키 시게루 연구가 되어 버리는 딜레마가 있다.
어쨌든 이런 의견은 모두 미즈키 시게루라는 만화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3.2. 장르와 화풍
한쪽 팔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꼬박 하룻밤을 자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그의 경력에서 놀라운 수의 만화들을 만들어냈다. 한 팬 사이트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선언하면서도 그가 만든 작품이 약 76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만화는 위에서도 설명한 "게게게의 키타로"였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고통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요괴 친구들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있는 외눈박이, 반인간의 아이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영감을 얻기 위해 미즈키는 사랑하는 연로한 이웃이 시골에서 젊었을 때 그에게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를 캐냈다. 미즈키가 전근대적인 시골 마을에서 자란 이 이야기는 등장인물들만큼이나 팬들에게 신화의 일부이다. "키타로"의 성공에 따른 재정적 방편으로 미즈키는 전시 경험의 깊이를 좀 더 성숙한 관객들을 위한 자유를 누렸지만, 그의 전쟁 이야기들 중 어느 것도 거의 일본 내에서 국내적인 찬사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0]'''또한 디즈니와는 달리, 미즈키는 가족 이야기에만 국한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총원 옥쇄하라!", 8권으로 된 "쇼와: 일본의 역사"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삽화를 포함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시대와 일본의 행동에 대한 처참하게 직설적인 일련의 묘사들을 썼다. 자서전적이고, 연구되고, 픽션화된 그 작품들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조 사코의 만화 저널리즘 작품과 같은 각색들의 혼합물처럼 읽힌다.'''
그가 전쟁 만화를 썼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일본 팬들은 해외에서 미즈키가 요괴 만화가 아닌 전쟁 만화로 유명하다고 말하면 놀란다. 미즈키의 찌그러지고 양식화된 인간 캐릭터들은 전문 드래프트맨의 크로스 해칭으로 정교하게 음영 처리된 그의 매우 현실적인 배경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현실주의와 만화 사이의 이러한 분열은 그가 사회적 비판에 몰래 빠져들게 하면서 그의 이야기 줄거리의 부조리를 증폭시킨다. 그는 일본의 만화가 중 마지막으로 전투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고, 그들을 미화하려는 일본의 우익들을 밀어내는데 그의 경력을 보냈다. 1991년 그는 일본군이 중국과 한국에서 난동을 부리는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묘사해 책 전쟁과 일본(戦争と日本)이라는 짧은 작품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과 같은 수정주의 만화에 대한 강력한 대척점 역할을 하며, 나아가 미즈키가 일본의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길도 제공한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그는 코믹 쇼와 역사 시리즈에서 같은 접근 방식을 따르고 개인적인 일화들과 결합된 쇼와 역사를 묘사한다.
일본 만화계가 간토를 중심으로 한 만화 진영과 간사이를 중심으로 한 극화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경향에서 자유로웠던 만화가 중 1명이기도 했다. 귀향 이후 그림연극 일에 임했던 것과 더불어 전후 일본에 전파된 미국 코믹스에 영향을 많이 받아 초창기 그림체는 극화체에 가깝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극화에 '''가까운''' 그림체였을뿐, 그가 '극화공방'[11] 의 회원이나 기타 극화 단체에 참여한 경력이 없고, 소년만화 잡지로 만화 연재를 옮긴 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결정한 판단이기 때문에 섣불리 한쪽 진영의 만화가로 단정지을수 없다.[12] 고풍스러운 만화조와 아메코미와 서양동 판화에 영향을 받은 섬밀하고 농후한 배경을 합친 당대 일본에서 유일무이한 화풍이다.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 어시스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점묘법을 많이 사용하고, 초목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쓰여진 화면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북돋우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독자 노선을 걸은 인물로 평가받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천재 만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미즈키 시게루는 만화가는 화력도 중요하지만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데즈카 오사무의 지론과 동일하다. 그는 현대의 일본 만화를 보고 '요즘은 그림은 잘 그리는데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들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중요한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줄수 있느냐로, 그건 아무리 그림 연습을 해도 안돼.'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즈키 시게루는 '나는 만화가가 되지 않아도, 소설가가 되면 나오키상을 탈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어 원래 소설가 지망생이기도 해서 스토리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게 스토리라는거지 미즈키는 그림 실력도 출중해 당대의 그림을 잘 그린 만화가 중 한 명이다. 미즈키의 그림이라고 하면 한눈에 '미즈키 시게루'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로 대부분의 일본의 만화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봐도 미즈키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 버릴 정도의 오리지날리티가 뛰어나다. 호불호의 취향도 넘어서 그의 개성적인 터치는 너무 독특해서 당대의 만화가들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개성 있는 그림체였다.
초기 대본 만화가 시절엔 주로 전기 장르[13] 와 개그 장르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다. 여러 필명들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 만화들이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못하면서 점차 그로테스크한 경향이 늘어나 출판사한테 외면당하는 등 점점 상황이 불우해져 갔고, 한땐 다른 필명을 사용한 작품들이 자기 의사에 상관없이 멋대로 필명이 바뀌기도 했다고 한다. 대본소 만화가 시절의 작품들# 1966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소년 선데이 연재의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요괴 그림이나 관련된 전승들을 실은 요괴 도감 만화들을 연재했었다.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요괴는 직접 모습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인한테 그런 요괴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데 대해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로 꼽히며, 1995년 세계 요괴 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연재했고, 또다른 대표작인 '총원 옥쇄하라!'는 내용의 90% 이상이 실제 자신의 경험으로 그려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어시스턴트였던 이케가미 료이치는 인터뷰에서 "미즈키 선생님이 캐릭터나 스토리를 혼자서 만드신 건가요?"라는 질문에 "그렇습니다. 대본 버전에서 이야기를 꺼낼 때는 좋지만, 새롭게 스토리를 만들 때는 굉장히 고심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주간지라 그림은 한 3일이면 주는데 3일째는 밤을 새거든요. 그러니까 총 4일 정도. 미즈키 선생님은 '네임'[14] 을 끝까지 짜고나서 작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러프를 그리고는 어시스턴트에게 건네주어, 점점 진행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또 인터뷰어가 "미즈키 선생님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인상도 받는데요."라고 질문. 이케가미는 "아니요. 그건 다르네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물론 그림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미즈키 선생님의 작품의 근본은 대화의 재미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재능입니다. 미즈키 선생이 원래 가지고 있던 낙관적인 성격과 역시 전쟁에서 왼손 하나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독특한 철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허무적이라고나 할까. 가타가나로 유머가 아니라 한자로 해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맞는 것 같아요. 뜻은 같을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만화의 스토리 자체는 간단합니다만, 간사하쥐든, 키타로든, 제대로 된 철학이 하나 있어서 거기에 따라 말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요기전 같은 초기 작품이 특히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나오는 대사들은 이후 계속 그려지는 미즈키 작품의 대사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그림은 수업하면 누구나 잘하지만 줄거리는 그렇지 않아.' 재능이 90%이고 나머지는 노력이라고요.(웃음) 아무리 노력해도 미즈키 선생님의 세계는 그려지지 않네요. 나는 소심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생활 방식에 영향은 받지 않았습니다만, 훌륭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총원 옥쇄하라!와 같은 전쟁 만화들은 스토리 전개에서 맨발의 겐과 동일한 사실주의 경향의 전쟁 체험담을 그려낸다. 동남아시아로 배치되었을 때 보았던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묘사해내기 때문에 전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만화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를 목격한 것을 그렸는데 # 위안부 여성들은 수십 명의 남성을 상대하다 성기에 정액이 가득차서 화장실에 가서 이를 내뿜어야 할 정도였다고 하며 자신은 여성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동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위안부는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격침되어서 모두 죽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걸 두고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마무리하였다. 작가가 그린 위안부 관련 묘사는 한국 인터넷상 기준으로 8페이지 정도 되며 번역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본인이 죽을 때까지 그걸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위안부 묘사에 대한 질의는 현재까지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중일전쟁에 대한 만화도 그렸다. 제목은 쿠냥.# 이 만화는 중국까지 처들어간 일본인이 중국인들을 학대하고 여자애들을 징발해가서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폭로를 담았다. 다만 이는 들은 얘기이며 미즈키 시게루는 중국까지 갔던 적은 없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생애에 언급된대로 미즈키 시게루는 남방전선의 라바울에 있었다.코믹 쇼와역사나 총원 옥쇄하라!를 그린 것은 전쟁을 겪은 만화가로서 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죽은 사람들의 원통함, 패전은 멸망이었다. 끼니를 거리지 않고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는 현대는 천국과 같다.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평화주의, 반전주의 성향은 그의 작품의 애니메이션 제작진도 이어받아서 게게게의 키타로는 매 시즌 사회문제와 일본 과거사를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갔으며 특히 미즈키 시게루 사후 제작된 게게게의 키타로 6기는 일본이 우경화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묘사를 담아서 넷 우익들에게 방영될 때마다 까이는 작품이 되었다.# 넷 우익들은 까기에 바빴지만 이 작품은 아침 방송인데도 시청률도 잘나오고 작품의 평가도 훌륭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3.3. 그에 대한 평가들
'''어쩌면 미즈키 시게루의 최고 걸작은 미즈키 시게루일지도 몰라.'''
― 구레 도모후사(呉智英)[15]
(일본의 유명 만화 평론가)#
'''그리고 타당한 이유와 함께, 그는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만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60년 이상의 경력에서, 그가 받은 상들의 무게는 평범한 예술가들의 진열대를 산산조각 낼 것입니다. (중략)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영향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엄청나게 인기 있는 키타로 시리즈는 요괴와 그들의 영혼, 신, 그리고 괴물들에게 오락의 세계를 소개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포켓몬스터나 디지몬 카드를 던지거나,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미즈키의 손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장난감과 만화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최고의 현대 화가이자 슈퍼 플랫 매니페스토의 창시자인 무라카미 다카시는 하퍼즈 바자회와의 인터뷰에서 미즈키의 어린 시절 작품을 읽는 것이 "나의 남은 인생의 기초를 형성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미즈키는 만화 아티스트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였습니다. 예지력 있는. 일상의 생동감. 야나기타 쿠니오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민속학자 미즈키는 무자라라 불리는 12권의 세계 민속 시리즈를 쓰고 삽화를 그려서 일본 문화 인류학 협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쇼케이칸 아카이브 박물관의 옹호자로서, 그는 일본에서 장애인과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명성을 무기처럼 사용한 반항적인 정치 급진주의자였습니다.'''
'''미즈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해 백지화를 원하는 우익 정치인에게 결코 그의 팔뚝을 흔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위안부와 전시의 매춘부들의 가슴 아픈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쇼가쿠로쿠넨세이에서 비난적인 일본과 전쟁 만화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일본 전체가 부유해지고 행복해지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나쁜 것들을 무시하려고 했던 일본의 버블 시대 한복판에 폭탄과 같은 신랄한 쇼와 일본의 역사를 떨어뜨렸습니다. 그의 비판은 일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키타로의 '베트남 전쟁 일기'에서 그는 인기 있는 인물들을 이용해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격했습니다. 미즈키 시게루가 누구였는지, 무슨 의미였는지 정확히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감동적인 작별인사를 통해, 도쿄에 기반을 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제이크 아델스타인은 그를 일본의 양심의 소리라고 불렀습니다. 작가이자 정치평론가인 로널드 켈츠는 미즈키가 진정한 'Sui generis(고유한)'로, 자신만의 장르를 정의하며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가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를 2010년에 부여한 공식 직함인 문화 유공자로 간주했습니다. 저는 보통 미즈키를 월트 디즈니, 하워드 진, 윌 아이스너, 잭 커비, 찰스 애덤스, 마이크 미뇰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길고 복잡한 비슷한 것입니다. 그는 비범한 삶을 살았던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뛰어난 예술가였기 때문에, 우리는 운이 좋게도 그와 그것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미즈키의 이름은 사실상 "키타로"와 요괴와 동의어이다. 반세기 이상 동안 지속적으로 등장해 온 이 오랫동안 운영되어 온 어린이 프랜차이즈의 엄청난 성공을 생각하면, 미즈키를 일본 괴물들의 디즈니라고 부르는 것은 유혹적이다. 그러나 미즈키는 아이들의 운임조차 인간의 어두운면을 희게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일본의 보네거트에 더 가깝다. 그의 만화는 자신과 다른 나라의 전쟁에 대한 섬세하고 미묘하지 않은 언급, 신뢰할 수 없는 권위주의 인물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폭력적인 해결책의 지속적인 실패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미즈키상은 돌아가신적이 없네요. 인간으로서는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은 분이었어요. 미즈키상을 볼 수 없는 것은 외롭지만, 미즈키 시게루는 영원히 우리를 지배할 수 있지 않을까요.'''
'''11월 30일, 미즈키 시게루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수많은 매체가 추모 특집을 짜서 그 업적을 소개했다. 신문과 TV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미즈키 씨가 일본의 요괴 문화를 체계화했다거나 만화로 전쟁의 비참함을 호소했다는 논조였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미즈키 씨가 없었다면 이토록 일본의 요괴 문화 연구는 퍼지지 않았을 것이고, 상이군인[16]
의 눈으로 본 전쟁을 그토록 생생하게 담은 만화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일본 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거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이시이 코타 (일본 유명 작가)#
'''일본만큼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가득 찬 나라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이나 독특한 특징에서 미즈키씨와 견줄 만한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 그는 아마 아톰의 창시자이자 아마 일본에서 가장 찬사를 받은 애니메이션 제작자인 데즈카 오사무와 함께 나란히 한다.'''
4. 작품 목록
5. 수상 경력
만화가로서 받을 수 있는 만화상은 거의 다 수상했다고 될 정도로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일본에서 권위 있는 상은 물론이고 서양권의 권위있는 만화상까지 다수 수상한 몇 안되는 만화가다. 또한 일본 문화계 최고상 중 하나인 아사히상과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영예인 자수포장, 욱일소수장, 문화공로자, 명예 도민까지 수상한 만화가다.
6. 기념지
6.1. 사카이미나토시
그의 고향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에서는 돗토리현과 사카이미나토시가 배출한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으로 대접을 받고 있으며, 고향 사카이미나토시는 도시 전체가 그의 작품과 캐릭터를 이용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즈키 시게루 로드(水木しげるロード)는 돗토리현 최고 인기의 관광지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돗토리 사구나 다이센조 등을 능가하는 관광객 수를 보여주며, '''현재 돗토리현 최고 인기의 관광지'''라고 불린다.#
마을의 요괴 동상이 가득해 요괴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카이미나토시 지역은 인구 감소와 더불어 오랜 불황으로 상권이 점점 줄어가고 있었는데,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공무원의 제안으로 미즈키 시게루의 캐릭터를 적극 활용해 유명 관광지로 거듭났다. 당시에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는 수산업에 활기가 있는 한편, 사카이미나토역 앞의 상가는 셔터 상가(영업 휴지중으로 셔터가 닫혀 있는 상가)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사카이미나토시는 그의 창작물들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가는 방법은 JR사카이선을 타고 사카이미나토역으로 오면 된다. 도시 전체의 그의 캐릭터가 있을 정도이며 거리 곳곳에 키타로 요괴 동상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코앞에 있는 요나고 공항[30] 에도 관련 조형물이 있다. 1993년부터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 시에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23개의 청동상이 설치되어 미즈키 시게루 로드가 오픈했다. 2003년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 개관과 더불어 완공되었다.거리 이미지
같은 해에 요나고역에서 사카이미나토역 사이를 달리는 사카이 선에서 기타로 열차의 운행도 개시되었다. 거의 10년간의 세월이 걸려 1997년에는 당초의 목표였던 80개의 상이 설치되었고, 2003년에는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도 완성되었다. 2006년에 요괴를 디자인한 가로등 군을 신설하는 '요괴 가로등 증식 계획'이 발표되어, 네코 무스메의 가로등이 제1호로 설치되었다. 이 가로등은 유지의 기부에 의해 증식하여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진다고 하며, 그리고 점차 동상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2018년에는 거리 전체를 리뉴얼했으며 요괴 동상의 수도 대폭 늘었다. 2025년부터 5년간에 걸쳐 리뉴얼 사업에 착수. 보도를 이전의 2배의 6미터로 확대하는 한편, 차도는 일방통행으로 해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환경을 정비. 요괴 동상을 그룹으로 나누어 재배치하고, 밤에는 요괴의 그림자를 도로에 비추는 연출을 시작하여 야간 집객도 목표로 하고 있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돗토리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인기를 증명 하듯 2019년 10월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애니메이션 관광 협회가 선정하는 일본 국내외의 애니메이션 팬 투표를 참고로 한 '방문해보고 싶은 일본 애니메이션 성지(2020년판)'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또 매년 평균 25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으며[31] '''2019년 한 해에만 관광객 300만명 돌파[32] '''#, 누계 4,000만명을 돌파했다.# 2008년 8월에 1,000만명, 2012년 5 월에 2,000만명, 2016년 5월에 3,000만명을 돌파했다. 연간으로 보면, NHK 아사도라가 방영한 '게게게의 여보'가 방영 된 2010년이 사상 최대인 약 372만명을 기록했으며, 2019년에는 8년 만에 연간 300만명을 돌파했다. 관광지가 많이 없는 돗토리현 입장에서 그야말로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효자인셈이다.인기를 끌게 된 역사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사카이미나토 역 앞부터 혼마치 아케이드까지 이어지는 약 800m에 달하는 거리 곳곳에 177개(2018년 기준)의 요괴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각각의 동상에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동상들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장 키무라에 의하면 "당초, 청동상이 도둑맞는 사건이 잇따라, 전국 뉴스가 되어 지명도가 올랐다"라고 말한다. 밤이 되면 야간 조명과 어우러져 낮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요괴 오브제가 인상적인 ‘갓파노이즈미’를 비롯하여 요괴 점괘를 볼 수 있는 ‘요카이진자 신사’[33] , 요괴 소인이 찍혀진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요괴 우체통’이 놓여 있는 등 마치 요괴 마을에 와 있는 듯 한 느낌을 주게 꾸몄다.
민간에서는, 시 관광 협회등이 2017년에 요괴 동상을 늘리기 위한 스폰서 제도를 도입. 지금까지 58구가 스폰서의 이름과 함께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 설치됐다. 또 요나고 사카이 항을 잇는 JR 사카이선을 달리는 열차는 키타로 열차로서 키타로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지역 상공회의소나 청년회의소 등 선창을 통해 이 곳을 무대로 행사를 펼치게 되었고, '게게게의 키타로 날리기 대회', '요괴검정', '토요일 야시장' 등이 계속해서 실시되게 되었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기념관도 있다. 잉기념관은 2019년 기준 누계 방문자 수가 400만명을 돌파하며 역시 대표 관광 명소가 됐다.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에서는 미즈키 시게루가 만들어낸 독창적이고 다양한 작품 세계 그리고 미즈키 시게루의 철학과 그가 만들어낸 요괴들의 세계를 전시와 영상 등 방식으로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2012년의 리뉴얼에 의해 대폭 달라졌다. 요괴들이 많이 있는 일본 가옥이며 미즈키의 가정생활을 재현한 방시설 등 새로운 전시품도 많이 추가되어 이전에는 없었던 전시물들을 풍부히 했다.[34]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덕에 유명해진 지역인만큼 사카이미나토에 들어오는 열차들은 대부분 키타로, 눈알아저씨, 간사한 쥐, 고양이 소녀가 그려진 요괴열차다. 2005년에는 경계선의 요나고역에서 사카이미나토역까지의 역명에 게게게의 키타로에 등장하는 요괴 이름이 애칭으로 붙여지게 되었다. 2006년에는 '네코무스메 열차'와 '네즈미오 열차'가 운행됐고, 2007년에는 '네코짱 열차'가 운행됐다. 열차외관은 물론 내부 천장과 의자, 창문 등 모든 곳에 키타로 캐릭터들이 새겨져있다. 안내방송 역시 키타로의 성우들의 더빙으로 만화처럼 방송된다. 요나고역 및 사카이미나토역을 잇는 JR 사카이선에서 '키타로 열차'가 운행되고있다. 또한 동선의 연선 16역에는 '쥐남자역'(요나고역), 키타로역'(사카이미나토역) 외에 전국 각지의 요괴를 모티브로 한 애칭이 부여되어있다.[35]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박도 있다. 이름은 키타로선. 돗토리현에서 운행된다.#
6.2. 쵸후시
사카이미나토시 외에도 미즈키가 50년 가까이 거주했던 도쿄도 쵸후시는 미즈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8년에 미즈키를 명예 시민으로 선정했으며, 2011년에는 도쿄도에서 그를 명예 도민으로 선정했다. 시내에는 미즈키와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해 연고지를 소개하는 성지 순례 지도를 발행하는 등 관광면에서의 지역 진흥에 힘쓰고 있다. 쵸후역 남쪽 출구에있는 '쵸후시 문화회관' 1층에는 미즈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게게게 갤러리'가 설치되어있다. 쵸후시의 커뮤니티 버스 '쵸후시 미니 버스'에는 게게게의 키타로의 캐릭터가 차체에 그려진 애칭 '키타로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2016년부터는 그의 기일인 11월 30일을 '게게게기(忌)'로 명명하고, 미즈키 시게루의 공적을 기리는 행사 등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공식 홈페이지
2003년 10월부터 현재까지 키타로 차야(찻집)를 운영하고 있다.홈페이지 트위터 본사는 돗토리현 요나고시. 쵸후시 신다이지 문전에 재현했다. 요괴과 자연의 공존을 그린 '게게게의 키타로'의 세계를 재현해 "원조 캐릭터 카페"라고도 할 수있는 곳이다. 안에는 요괴 카페가 있으며, 건물 입구 1층 쇼핑 구역에는 요괴 샵이 있어 식품 및 잡화에 T셔츠, 끈 달린 가방,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와 에세이 등 온갖 키타로 상품이 대집합했다. 여기에서 밖에 구할 수 없는 한정 상품도 있고 가게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요괴 상품들이 있다. 또한 2층에는 '요괴 갤러리'도 있어 미즈키 시게루가 그린 요괴 그림과 '요괴 일본 지도'와 함께 요괴들의 세계와 '미즈키 월드'를 감상할 수 있다.
2019년 5월 18일에는 키타로 광장이 공개됐다. 그의 대표작 게게게의 키타로에 등장하는 캐릭터 조형물과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개원했다. 장소는 게이오선 쵸후역과 니시쵸후역의 딱 중간 지점이다. 2012년에 쵸후역이 지하화되었을 때 선로가 있던 지역에 만들어졌으며 무료입장이다. 입구를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키타로 동상이 있다. 이것은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기증한 조각상이다.
7. 그가 한 말들
그런 만화(총원 옥쇄하라!)를 그리는 것은 죽어간 전우들에 대한 위령이다.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젊은 나이에 죽어간 자들에게 공양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전쟁을 살아내고, 전후에 만화가로서 펜 하나로 먹고 살 수 있게 된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꿈에서 자주 꾼다.(정말로 살아있는 동안은 잊을 수가 없다.)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고, "전사"한 "전우"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
굶어죽은 젊은이들.
나는 한쪽 팔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3배는 일을 해왔다. 만약 두 팔이 있었다면 다른 사람보다 여섯 배는 더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을 잃느니 한 팔을 잃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더 가치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마다, 저는 제게 치솟는 격렬한 분노를 어쩔 수 없어요. 제 추측으로는 이 분노는 모든 전사자들의 유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같아요.#
자주 종군위안부에 관한 기사가 실리는데 이 일은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면 절대로 모를일이다.... 역시 "지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배상은 해야된다.....라고 언제나 생각한다.
만화 「총원 옥쇄하라!」에서#
매일 50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 예술은 어느 정도인가? 종교는 어떤 점인가? 우리는 심지어 이런 것들을 고려할 수조차 없다. 화가나 철학자가 되거나 문학 학자가 되려면 노동자들만 있으면 된다. 지금은 묘지의 흙빛으로 칠해진 시대다. 사람들이 땅속 덩어리인 매몰된 인류의 시대. 나는 가끔 이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 더 나쁜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치 있는 것은 모두 버려졌다. 남아있는 것은 폭력, 정치적 권위, 그것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내 유일한 안도는 음악과 그림에 빠져드는 것이다. 전쟁을 생각하면 얼굴이 창백해지지만, 그게 내가 이기는 방법이다.
우리 군대에서 군인과 양말은 소모품이었다; 한 군인은 고양이보다 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자 결국 우리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하루에 몇 시간씩 자는 거에요. 그것을 며칠이고 계속합니다. 인생관이 일변합니다.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실컷 잠도 안자고 뭐가 인간이야! 무엇이 행복한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난 것이다.#
행복의 일곱 조목
제1조. 성공이나 영예나 승패를 목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제2조. 안하고는 못 배길 일을 계속해라.
제3조.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라.
제4조. 좋아하는 힘을 믿는다.
제5조. 재능과 수입은 별개, 노력은 사람을 배신할 줄 알아라.
제6조. 게으름뱅이가 되라.
제7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는다.
저서 「미즈키씨의 행복론 요괴 만화가의 회상」에서[36]
#
제 직업인 만화가는 팔리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냉혹한 세계예요. 어떻게든 팔리게 된 후에도 히트작을 만들어 내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보통 심장이 아니에요.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가 없어요, 정말로.#
나는 득의 양양한 성격으로 힘들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즐거웠던 일만 기억한다.#
적당히 해야지. 만화가는 죽지. 자야 돼. 먹고 싶은 거 먹어야 돼. 피곤하면 쉬어야 돼.#
아직 현역 만화가다. 아득바득까지는 아니지만, 슬슬 일을 하고 있다. 창작 의욕이라든가 무엇을 그리고 싶다든가 그런 차원을 초월해 버려서 무의식중에 그리고 있는 것 같아.#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게 찾으려고 하면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그것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찾는 데는 요령이 있습니다. 간단한 일이에요. 호기심을 소중히 하면 됩니다. 호기심이 생기면 끝까지 열중해 보면 됩니다. 이것이 지름길.#
불행한 얼굴을 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은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공 안 해도 됩니다. 온몸을 바칠 수 있는 것을 찾으세요.#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좋아하는 일, 즉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죠. 초심으로 돌아가서 일에서 다시 기쁨을 찾는 것도 좋고, 계속 하고 싶었는데 참았던 취미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남의 속셈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산다. 다른 세상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면 된다#
동업자의 집에 갔는데 책이라곤 한 권도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재미있고, 즐기면서 좋아하는 만화를 그려 즐겁게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좋아해"의 파워가 약했던것 같습니다.#
동서고금의 '저승'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모습은 장소나 민족에 따라서 여러가지가 다르고, 각각 박력과 현실감으로 가득 차 있는데 비해, 천국은 온 세상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참 단순한 겁니다-천국에는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얇은 옷을 입은 미녀가 있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넘쳐납니다. 환경이 나빠졌는데도 눈을 감으면 그야말로 오랜 불황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지금의 일본이야말로 천국이잖아요.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비장한 얼굴로 악착같이 일합니다.#
비장한 얼굴을 한 사람들은 성공이나 영예나 승패를 고집할 뿐, 일이든 취미든 연애든 열중하는 것을 잊어버렸잖아요!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 자체가 행복일텐데……#
세상의 상식을 알려주는 학교는 소중한 장소다. 그러나 학교 성적은 떨어질지 몰라도, 흥미를 갖거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주변에서 아무리 하찮다고 해도 끝까지 따지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넋을 잃고 몰두할 수 있다는 것, 진심으로 열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것이라도 좋아..#
일이 많아지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영광이나 평가도 바라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그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한 거예요. 내 경우 그것은 만화를 그리는 것이었어요.그 행위가 반드시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결과가 좋고 나쁨에는 운이 따릅니다.#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어, 재능이 성장해 자꾸 자꾸 성장했다고 합시다. 근데 먹고살기 힘들죠. 좀처럼 벌이가 못됩니다. 노력에 걸맞는 돈은 좀처럼 얻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하거나 비관하거나 푸념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행복하다는 말은 오래 살고 훈장 받아서 잘났기 때문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길에서 60년 이상이나 분투해서 마침내 다 먹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노벨상을 받는 것보다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줄거리를 따지는 것이 만화가의 생명선입니다. 저는 분명히 그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어요. 워낙 만화를 좋아하니까요. 제가 팔리지 않았던 시대에도 원고료의 절반은 만화의 줄거리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나 요괴 작화를 위한 자료 등을 사들이는데 사용했습니다. 먹을 것을 살 돈도 넉넉하게 남지 않았지만 그만큼 '좋아해' 힘이 강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게으름 피우면 안 돼요! 하지만 중년을 지나면 유쾌하게 게으름 피우는 버릇을 붙여야 해요.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 연재 편수를 줄여, 온 세상의 낙원이나 요괴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 세계 요괴 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운이란 것은 없다. 있는 건 돌격력뿐. 약한 사람은 도망가지만, 인간은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돌격력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나에게는 놀라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컸습니다. 81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흐핫!" 놀라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거죠. 이런 능력은 공부해도 늘지 않습니다. 재능이에요.#
행복이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나는 좋아하는 만화를 그려서 계속 행복했다. 하기야, 처음에는 수입이 적어서 힘들었지만. 평생에 걸쳐서 행복의 계단을 점점 올라갔다.#
나에겐 남을 위해 그린다는 생각이 없었던 게 다행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얘기를 만들고 자기를 위해서 재밌게 그립니다.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던 거죠.#
나는 내 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방 중상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싸움은 배가 고프기만 합니다.#
자연과 타세계에 대한 두려움, 외경심을 잃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뿐. 요괴의 기미를 느끼지 못하는 어린이는 분명 마음 한 켠이 희미해져 행복을 느끼는 힘이 약해진다.#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일이나 사람 일 따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는 50세, 60세가 되어 있다. 그럼 아깝지.#
인생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내버려둘 일입니다. 인생을 어설프게 주물러 봤자 아무 해결도 안 돼요. 닥친 불행은 이제 어쩔 수 없어요. 그렇다면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즈키 씨는 기인변인의 타이카(대가)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동서고금의 기인변인을 연구한 결과 그들에게는 행복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물이라고 칭하는 일련의 만화「0전은 야토」라든가「시덴개이의 타카」「나는 하늘의 아이」에서의 한 발의 총은 무엇을 위해서 발사하는가, 라고 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며, 말하자면 모험활극 만화이지, 본래의 의미에서의 전쟁 만화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전쟁의 비판적 의견은 조금도 없고, 만사가 순조롭게 탄환이 날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고, 비행기도 날라 만사가 경사스럽다. 식량도 늘 있고, 감격이 있어,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전쟁을 갈망하고 싶을 정도다. (중략) 그러나 나는 진짜 전쟁물이라는 것은 "전쟁의 무서운 것", "무의미한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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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 이른바 '수면은 모든것의 원천'이라는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만화가 중에서는 드물게 수면시간을 충분히 유지하는 만화가였다. 아무리 바빠도 10시간 이상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2쪽 단편 만화 '수면의 힘'의 내용으론 데즈카 오사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어느 출판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철야 작업 진행 중임을 알리자 자신이 수면시간에 의한 수명 연장을 설파해 경고하기도 했다고.참조 그러나 1970년대 전성기 시절 매우 바빴을 때는 밤을 새가며 작업한것 때문에 현기증과 이명 증상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는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수상 연설에서 '자신보다 연하인 데즈카 오사무와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잠을 안자고 야간 작업만 계속했기 때문에 요절했다'라고 연설에서 말했다. 미즈키 시게루와 마찬가지로 장수 만화가로 알려진 날아라 호빵맨의 작가이자 선배 작가 야나세 타카시도 미즈키의 수면을 많이해야 장수한다는 지론에 찬성하기도 했다. 야나세 타카시 역시 향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장수한 만화가의 아이콘이었다.
- 그의 대표작 게게게의 키타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요괴 만화다. 2020년 일본인 11,761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요괴 애니메이션 인기 랭킹에서는 압도적인 1위(4,085표)를 기록했다. 2위는 요괴워치(890표).# 2019년에는 진정한 국민 만화 랭킹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위는 드래곤볼, 2위는 도라에몽.#
-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을 '미즈키 상'이라고 3인칭화했다. 본인을 하나의 캐릭터로서 의식하며 부른것이다. 이전엔 와타시나 오레, 보쿠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할때는 '베비(베이비)'라고 호칭했다. 팬들에게는 '미즈키 대장(御大)'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또 그의 제자 아라마타 히로시는 큰 선생님(大先生)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하는 팬들도 있었다.
- 한쪽 팔을 잃은 것에 대해 "나는 한쪽 팔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3배의 일을 해왔다. 만약 양팔이 있으면, 타인의 6배는 일할수 있었을 것"임을 말했으며, 왼팔을 잃은 것에 대해 슬프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는 질문에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한쪽 팔이 없어도 살아있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제작 당시, 요괴에 대한 자료 제공에 이노우에 히사시 등과 같이 참여한바 있다. 동시에 영화에 단역으로 등장한 미즈키 선생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2005년, 미즈키는 아라마타 히로시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미이케 타카시 감독의 "위대한 요괴 전쟁"에 카메오 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적대자의 싸우는 방식을 비난하고, 평화롭고 장난기 많은 존재로서의 요카이 역할을 재확인하는 평화주의적인 캐릭터이다.
- 자신의 작품을 매우 애정하고 아꼈기 때문에 저작권 관리는 엄격하게 했다. 자신의 만화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저작권료를 청구했다. 또한 행사에 만화를 기고하는 경우에도 무료 또는 저렴한 원고료는 응하지 않고 반드시 상응하는 금전을 청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