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 히데오
吾妻ひでお[1]
1950년 2월 6일 ~ 2019년 10월 13일
일본의 만화가.
홈피, 일본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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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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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은 애니화까지 된 적이 있는 나나코SOS
로리물의 원조격이 되는 작가로 현대 모에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만화업계에서도 그를 가히 전설적인 인물로 꼽고 있다.
홋카이도 토카치 우라호로정 출신[2] 으로 만화잡지 COM[3] 의 홋카이도 지부에 참가하여 만화계에 입문,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쇄소에서 한 달간 일한 뒤에 1969년 만화가로 데뷔한다.
원래는 SF 성향의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으나 나가이 고의 파렴치 학원이 대히트하자 아즈마 히데오도 비슷한 만화를 그릴 것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잡지사를 옮겨서 자신이 좋아하는 로리, SF, 넌센스 개그 등의 요소가 들어간 만화를 그렸다. 특유의 작고 귀여운 그림체로 어린 소녀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만화를 주로 그렸기 때문에 '로리콘' 계열의 시초격인 만화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독특한 그림체는 아사리 요시토, 그리고 타카하시 루미코[4] , 그 외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78년에는 부조리일기라는 작품으로 성운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으며 이 작품의 히트로 일본 내에서 부조리 개그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작가는 아사리 요시토, 아이하라 코지, 요시다 센샤[5] , 쿠메타 코지 등이 있다. 1979년에는 코믹마켓에 일본 최초의 로리콘 동인지인 'シベール'를 발매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코미케에서는 로리 동인지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당시에 아즈마 히데오는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중요한 만화가라는 평가를 받던 오토모 카츠히로에 비견될 만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아즈마와 오토모의 작품에 SF 요소가 강하게 녹아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평론가들이 이들을 만화업계의 뉴웨이브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일본내에서 대대적으로 '로리 붐'이 유행하자 아즈마 히데오는 이 계열의 시초격으로 대접받으며 각종 잡지에 그림, 칼럼, 인터뷰 등이 가릴 것 없이 실리는 등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한마디로 아즈마는 80년대의 유행을 이끄는 메이저 작가였다. 당시 일본의 로리 붐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그 미야자키 하야오가 "로리콘이란 단어를 대놓고 입에 올리는 사람은 싫어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로리콘'이란 단어를 일본에 최초로 퍼뜨렸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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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생활은 꽤 재밌습니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만화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의 명성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심해져 결국 1989년 산에서 목을 매달다 실패한다. 그 뒤로 집에서 돌아가지 않고 홈리스 생활을 시작했다가 경관에게 발견되어 귀가하게 된다.[7] 그러나 아즈마는 2년 뒤인 1992년 택배를 보내러 가다가 다시 가출하여 행방불명된다. 그 후 배관공으로 일하다 아는 사람이 타고 있던 자전거가 도난자전거(일본은 자전거 등록제가 있다)여서, 경찰 조사(경찰이 그의 팬이었다)를 받다가 다시 귀가하게 된다. 귀가 뒤에도 반년간 배관공 일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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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캐.
귀가 후 만화가로 복귀하게 되지만 변화한 만화업계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알콜의존증에 빠졌고 자신의 실종과 알콜의존증 치료를 유쾌하고 담담하게 풀어낸 논픽션 만화 '''실종일기'''를 발표한다. 한 때 저명한 만화가였던 그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에 의하여 실종일기는 곧 커다란 화제작이 되어 제 34회 만화가 협회상 대상,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만화 부분 대상, 제 10회 데즈카 오사무문화상 만화 대상, 37회 일본 SF대회 성운상 논픽션부분을 수상하며 왕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그 덕인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이후에는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렸다. '실종일기'는 한국에도 정발이 되었다.
'실종일기'가 발매됐을 무렵인 2005년경 "개그 만화가 은퇴" 선언을 했다. "일도 없고 한계이다. 자신을 괴롭게만 할 뿐이라 개그만화를 그만둔다"고 공언하면서 이제부터는 어두운 작품만 그릴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해서 개그가 넘쳐나는 만화를 그렸다(...).
2000년대 후반에는 케이온!을 비판해서 화제가 되었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판에 대한 불만 토로로서 애니화가 되면서 여성 스태프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여 원작만화에 있던 에로함과 유머가 죽어버렸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시청자들은 대체로 "?"라는 반응만을 보였다. 특히 "케이온 원작에서 에로함이 있었나?" 라는 평. 게다가 실종일기 정발 전에 일어난 일이라 작가 인지도가 떨어지는 한국에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80년대 초부터 활동(?)해온 오덕들 중에는 이 사람의 팬이 제법 있으며, 이들은 이 발언에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2012년 1월부터 석달 간격으로 "아즈마 히데오 베스트 셀렉션"을 발매하고 있다. 아즈마 히데오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들 표지에는 우시지마 이이니쿠가 표지모델로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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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와 같이...
2013년 9월에 발표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선언에 대한 팬의 질문에 "아마 거짓말일거라 생각해"라고 답변. "미야자키씨도 실종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에는 "미야자키씨는 사회성이 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가끔 곤란한 걸 만들지만."이라 답변하였다.
2017년 3월, 자신의 트위터에 '식도암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다' 는 글을 올렸다. 결국 식도암 투병 도중 2019년 10월 13일 타계했다. # 향년 69세.
1950년 2월 6일 ~ 2019년 10월 13일
1. 개요
일본의 만화가.
홈피, 일본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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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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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은 애니화까지 된 적이 있는 나나코SOS
로리물의 원조격이 되는 작가로 현대 모에물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만화업계에서도 그를 가히 전설적인 인물로 꼽고 있다.
홋카이도 토카치 우라호로정 출신[2] 으로 만화잡지 COM[3] 의 홋카이도 지부에 참가하여 만화계에 입문,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쇄소에서 한 달간 일한 뒤에 1969년 만화가로 데뷔한다.
원래는 SF 성향의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으나 나가이 고의 파렴치 학원이 대히트하자 아즈마 히데오도 비슷한 만화를 그릴 것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잡지사를 옮겨서 자신이 좋아하는 로리, SF, 넌센스 개그 등의 요소가 들어간 만화를 그렸다. 특유의 작고 귀여운 그림체로 어린 소녀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만화를 주로 그렸기 때문에 '로리콘' 계열의 시초격인 만화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독특한 그림체는 아사리 요시토, 그리고 타카하시 루미코[4] , 그 외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78년에는 부조리일기라는 작품으로 성운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으며 이 작품의 히트로 일본 내에서 부조리 개그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작가는 아사리 요시토, 아이하라 코지, 요시다 센샤[5] , 쿠메타 코지 등이 있다. 1979년에는 코믹마켓에 일본 최초의 로리콘 동인지인 'シベール'를 발매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코미케에서는 로리 동인지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당시에 아즈마 히데오는 데즈카 오사무 이후로 중요한 만화가라는 평가를 받던 오토모 카츠히로에 비견될 만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아즈마와 오토모의 작품에 SF 요소가 강하게 녹아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평론가들이 이들을 만화업계의 뉴웨이브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일본내에서 대대적으로 '로리 붐'이 유행하자 아즈마 히데오는 이 계열의 시초격으로 대접받으며 각종 잡지에 그림, 칼럼, 인터뷰 등이 가릴 것 없이 실리는 등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한마디로 아즈마는 80년대의 유행을 이끄는 메이저 작가였다. 당시 일본의 로리 붐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그 미야자키 하야오가 "로리콘이란 단어를 대놓고 입에 올리는 사람은 싫어한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로리콘'이란 단어를 일본에 최초로 퍼뜨렸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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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생활은 꽤 재밌습니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만화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의 명성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심해져 결국 1989년 산에서 목을 매달다 실패한다. 그 뒤로 집에서 돌아가지 않고 홈리스 생활을 시작했다가 경관에게 발견되어 귀가하게 된다.[7] 그러나 아즈마는 2년 뒤인 1992년 택배를 보내러 가다가 다시 가출하여 행방불명된다. 그 후 배관공으로 일하다 아는 사람이 타고 있던 자전거가 도난자전거(일본은 자전거 등록제가 있다)여서, 경찰 조사(경찰이 그의 팬이었다)를 받다가 다시 귀가하게 된다. 귀가 뒤에도 반년간 배관공 일을 했다고.
[image]
오너캐.
귀가 후 만화가로 복귀하게 되지만 변화한 만화업계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알콜의존증에 빠졌고 자신의 실종과 알콜의존증 치료를 유쾌하고 담담하게 풀어낸 논픽션 만화 '''실종일기'''를 발표한다. 한 때 저명한 만화가였던 그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에 의하여 실종일기는 곧 커다란 화제작이 되어 제 34회 만화가 협회상 대상,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만화 부분 대상, 제 10회 데즈카 오사무문화상 만화 대상, 37회 일본 SF대회 성운상 논픽션부분을 수상하며 왕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그 덕인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이후에는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렸다. '실종일기'는 한국에도 정발이 되었다.
2. 현재
'실종일기'가 발매됐을 무렵인 2005년경 "개그 만화가 은퇴" 선언을 했다. "일도 없고 한계이다. 자신을 괴롭게만 할 뿐이라 개그만화를 그만둔다"고 공언하면서 이제부터는 어두운 작품만 그릴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해서 개그가 넘쳐나는 만화를 그렸다(...).
2000년대 후반에는 케이온!을 비판해서 화제가 되었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판에 대한 불만 토로로서 애니화가 되면서 여성 스태프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여 원작만화에 있던 에로함과 유머가 죽어버렸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시청자들은 대체로 "?"라는 반응만을 보였다. 특히 "케이온 원작에서 에로함이 있었나?" 라는 평. 게다가 실종일기 정발 전에 일어난 일이라 작가 인지도가 떨어지는 한국에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80년대 초부터 활동(?)해온 오덕들 중에는 이 사람의 팬이 제법 있으며, 이들은 이 발언에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2012년 1월부터 석달 간격으로 "아즈마 히데오 베스트 셀렉션"을 발매하고 있다. 아즈마 히데오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들 표지에는 우시지마 이이니쿠가 표지모델로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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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와 같이...
2013년 9월에 발표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선언에 대한 팬의 질문에 "아마 거짓말일거라 생각해"라고 답변. "미야자키씨도 실종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에는 "미야자키씨는 사회성이 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가끔 곤란한 걸 만들지만."이라 답변하였다.
2017년 3월, 자신의 트위터에 '식도암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다' 는 글을 올렸다. 결국 식도암 투병 도중 2019년 10월 13일 타계했다. # 향년 69세.
[1] 본명은 동일한 발음의 吾妻日出夫.[2] 토카치 출신 유명 만화가로는 아라카와 히로무가 있다. 단, 아라카와는 마쿠베츠 출신이고 아즈마는 우라호로 출신이다.[3] 데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잡지로 가로보다는 메이저했다. 덕분에 먼저 폐간되었지만.[4] 초창기 화풍 한정.[5] 자체 항목은 없지만 루이지 항목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아라키 히로히코의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에서 그의 작품인 '전염됩니다'의 4컷 개그만화가 패러디되기도 했다.[6] 토미노 요시유키는 아예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너 로리콘이잖아. 그럼 로리콘이라고 말해버려. 차마 그런 말은 못하겠고 그러고만 있으니 안되는거야. 팬티를 그려도 그걸 팬티가 보인다는 인식의 영역까지만 그릴셈이라면 관둬줬으면 좋겠어. 그게 오히려 더 교육에 좋지 않으니까. 애니메이션이니까 얼마든지 그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거잖아. 그러니까 '그 여자애의 팬티를 보고 말았다', '보여버리고 말았다',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어느 쪽인지 분명히 해주지 않으면 그 캐릭터한테 실례라고 생각해. 아무 의미 없이 팬티를 그리는 건 실례잖아."라고 발언했다.[7] 참고로 아즈마는 1973년 결혼, 1980년에 장녀, 1983년에 장남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