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노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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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랄 코르도바의 이름'''
가비노 소사는 191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 로사리오의 지역팀 중 하나인 센트랄 코르도바에서 데뷔하였다. 초기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레프트였고 당시의 계약은 그저 클럽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소사에게 이적 거부권이 있었다. 비록 센트랄 코르도바는 소사가 있을 시절에 단 한 번도 1부 리그에서 뛰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센트랄 코르도바에서만 보냈고[2] 그러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일한 선수였다.
그의 이런 헌신을 기려 소속팀 센트랄 코르도바는 홈구장의 이름을 가비노 소사로 명명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소사는 1921년 코파 아메리카의 개막전이었던 브라질전에서 센터 포워드로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고 다음 경기부터는 사루포로 교체되었다. 이 대회에서의 우승이 유일한 소사의 우승 기록이었다. 하지만 1926년 대회에서는 소사가 주인공이었다. 비록 팀은 라이벌 우루과이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파라과이와의 시합에서 4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면서 8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소사는 이 대회에서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오버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그의 기술적 능력은 게임의 추를 가져오는데 효율적이었다. 또한 게임을 읽는 훌륭한 시야 역시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엘 그라피코의 저널리스트였던 프라스카라는 소사가 우아하게 공을 다루는 것과 그의 팀이 게임을 이끄는데 전술적인 지능이 좋았다고 강조했다.
'''센트랄 코르도바의 이름'''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가비노 소사는 191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 로사리오의 지역팀 중 하나인 센트랄 코르도바에서 데뷔하였다. 초기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레프트였고 당시의 계약은 그저 클럽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소사에게 이적 거부권이 있었다. 비록 센트랄 코르도바는 소사가 있을 시절에 단 한 번도 1부 리그에서 뛰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센트랄 코르도바에서만 보냈고[2] 그러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일한 선수였다.
그의 이런 헌신을 기려 소속팀 센트랄 코르도바는 홈구장의 이름을 가비노 소사로 명명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1.1.2. 국가대표
소사는 1921년 코파 아메리카의 개막전이었던 브라질전에서 센터 포워드로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고 다음 경기부터는 사루포로 교체되었다. 이 대회에서의 우승이 유일한 소사의 우승 기록이었다. 하지만 1926년 대회에서는 소사가 주인공이었다. 비록 팀은 라이벌 우루과이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파라과이와의 시합에서 4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면서 8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소사는 이 대회에서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오버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기술적 능력은 게임의 추를 가져오는데 효율적이었다. 또한 게임을 읽는 훌륭한 시야 역시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엘 그라피코의 저널리스트였던 프라스카라는 소사가 우아하게 공을 다루는 것과 그의 팀이 게임을 이끄는데 전술적인 지능이 좋았다고 강조했다.
3. 뒷이야기
- 소속팀에게 그가 계약으로 받은 것은 돈 400 페소와 인형이었는데, 인형은 그의 딸 라룬차를 위한 것이었다.
4. 수상
4.1. 클럽
- 아드리안 베카 바렐라 컵 우승 1회: 1933(센트랄 코르도바)
- 산티아고 피나스코 컵 우승 3회: 1923, 1927, 1928(센트랄 코르도바)
- 루시아노 몰리나스 주지사 배 토너먼트 우승 2회: 1932, 1936(센트랄 코르도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