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화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명화는 1868년경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에서 태어났다. 강영소가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제출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의 부친 강명화는 일찍이 송씨와 결혼해 5남 1녀를 낳았는데, 강영대(姜永大), 강영소, 강영문(姜英文), 강영상(姜永商), 강영각(姜泳珏), 그리고 강봉강(姜鳳姜)이 바로 그들이었다. 실제로는 다섯째 강영렬(姜泳烈)도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력서에서 누락되었다.
1905년 4월, 강명화는 강영대, 강영소, 강영각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한인 친목회에 참석했다. 또한 1905년 10월 7일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가입했으며,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결성했을 때 이에 참가하여 국민회 규칙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0년, 강명화는 업랜드에 정착했고 그해 12월에 1911년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1911년 11월 22일, 강명화는 대한인 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총회장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회장으로서 시베리아지방총회, 만주지방총회, 수청지방총회, 멕시코지방회를 건설해 대한인 국민회의 역량을 증진시켰으며, 시카고 등 미국의 주요 도시를 왕래하며 인삼을 판매하는 한편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1913년 총회장 임기를 마친 강명화는 조국을 잠시 방문해 사업을 확장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이후 칠레로 가서 사업을 벌였다. 그러던 1916년, 차남 강영소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맡다가 자신의 딸 강단희가 병사할 때 일이 바빠서 문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아내 역시 중병에 걸린 것으로 인한 피로로 인해 더이상 총회장을 맡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1917년 1월 23일에 실시된 총회장 선거에서 강영소가 또다시 당선되었다. 이에 강영소는 사임원을 여러차례 제출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 격분한 강명화는 대한인 국민회의 거두 안창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강명화는 후에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여기고 1917년 6월 안창호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강영소가 공무에 바빠 집안일을 살피지 못하고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7, 8시에 신문사로 출근했다가 밤 11시나 12시에 귀가하여 딸의 병도 몰랐다고 밝혔다. 또 아내의 수술 이후 공무를 사임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이후 강영소는 3차 사임서를 제출해 비로소 승인받았다.(전략) 영소의 병든 몸은 형역통찰(兄亦洞悉)이나 이 아이의 천성이 진솔하여 상대를 즐겨 따르므로 타인의 농락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병든 중에 3,4년을 홀로 힘썼으니 그만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작년만 해도 회장 투표하기 전에 형(강영대)이 선출되고 영소는 아니되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형이 남북방으로 순행해 영소가 공무를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사람들이 말한 까닭에 어린 아들이 작년에 회장을 맡은 것입니다.
이 아이의 공심은 유천가질(惟天可質)이라 공무에 몰두하느라 가정일을 돌보지 못한 까닭에 여아의 병세가 위중함에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끝내 비참하게 죽는 걸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자식 놈의 부인의 오장에 병이 생겨 발작함에도 다시 공무로 돌아갔습니다. 신문 간행은 영소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있는데, 영소가 병으로 죽은 후에야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겁니까? 오형( 吾兄, 안창호를 지칭함.)이 가족을 멸하는 독술을 부리는 게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영소는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을 떠나든지 해야 쉴 수 있을 겁니다. 전 형의 독술을 압니다. 작년에 회장을 담당했으니 금년에는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영소는 회장 총무로서 시무하여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사무원, 서기, 회장 등 3,4년 동안 영수가 홀로 다 맡았지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질 않고 이름만 올릴 뿐입니다. 영소가 금년까지 또 일을 맡다가 영소의 자식이 죽어버리고, 영소가 결국 병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면 형은 저와 한 하늘에 해와 태양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습니다. 저는 형을 살인범으로 지목할 것이며, 기필코 제 손으로 보복할 것이니 형은 거주하는 곳의 방비를 잘하셔야 할 겁니다.
그 후 강명화는 1917년부터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지를 오가며 사업가로서 활약했다. 그러던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강명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가족 관계
- 강영대(姜永大, 1885~1948): 강명화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강영소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및 신한민보에서 활동했고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을 맡았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의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넘겨주고 1933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독립금,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소(姜永韶, 1886~1934): 강명화의 둘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1909년 대한인 국민회에 가담해 하와이 대표로 활동했으며,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했으며, 1913년 5월 안창호가 흥사단을 조직했을 때 단원으로 참여했고, 1916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로 파견되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호소했고, 1919년 7월 18일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식을 거행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바람에 통합이 결렬되었다. 이후 1919년 11월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미주지역 한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이후 시카고에서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해 왕성한 사업을 벌이면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문(姜英文, 1888~1965): 강명화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하여 9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후 시카고에 자리를 잡아 하워드 식당을 경영했고 형과 함께 시카고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1938년 단우번호 299번으로서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 서무원으로서 활동했다. 1947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고, 1961년과 1962년에 이사부장을 맡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영각(姜泳珏, 1897~1946): 강명화의 여섯번째 아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2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업랜드 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를 재학했고 포모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에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 영문격월간 '한인소년'을 창간했다. 이후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뒤 형 강영소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에 가담해 여러 잡무를 맡았고,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 번호 261번을 획득했고 1944년에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다가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그의 유족이 현재까지 살아있으며, 그 중 딸 수산 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문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통보받았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