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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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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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안창호
安昌浩 | Ahn Changho[1]
'''
<colbgcolor=#005ba6><colcolor=#fff>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2]#
'''사망'''
1938년 3월 10일 (향년 59세)
경기도 경성부 경성제국대학 병원
'''신장'''
175cm[3]
'''사인'''
폐결핵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
'''국적'''
[image] 조선[image] 대한제국[image] 대한민국 임시정부
'''본관'''
순흥 안씨(順興 安氏)1파 참의공파 26세[4]
'''별칭'''
자(字)는 치삼
호(號)는 도산(島山)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가, 정치가, 계몽가
'''가족'''
안태열(조부), 제안황씨(조모)
안흥국(부), 제안 황씨(모)
안치호(형)[5], 안신호(여동생)
이혜련(부인), 안필립(장남)
안필선(차남), 안필영(삼남)[6]
안수산(장녀)[7], 안수라(차녀)
'''학력'''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설립)
구세학당(보통과)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8]
'''정당'''
독립협회, 개화파, 만민공동회, 한인친목회, 서북학회
공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청년학우회
수양동우회, 한국독립당, 한국노병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 내역 ]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수반
임기
1919년 4월 10일 ~ 9월 10일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1일
수반
대통령제 초대 이승만
전임
신설
동기
이동휘, 신규식, 노백린, 김구, 이동녕
후임
박은식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내무부장
임기
1919년 4월 10일 - 1919년 9월 11일
전임
신설
후임
이동녕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
임기
1919년 6월 28일 - 1919년 9월 11일
전임
이동녕
후임
이동휘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3대 법무부장
임기
1919년 9월 11일 - 1920년 8월 26일
전임
남형우
후임
임시서리직 신익희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국[66] 제1ㆍ2대 부장
임기
1919년 9월 11일 - 1920년 8월 26일(1대)
전임
신설
후임
안창호
임기
1920년 8월 27일 - 1921년 5월 11일(2대)
전임
안창호
후임
이시영
<color=white> [image]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5대 국무령
임기
1926년 5월 3일 ~ 1926년 5월 16일
전임
대리직 이동녕
후임
대리직 이동녕

1. 개요
2. 생애
2.1. 혁명론
2.2. 민족개조론과 개인주의
2.3. 이광수에 따른 오해
2.4. 폭력활동에 대한 성향
2.5. 재정마련 중요성 강조
3. 인물관계
3.1. 임시정부 옹호파
4. 활동
4.1.1. 점진 전쟁론
4.2. 국내 활동과 사망
4.3. 사후
5. 그의 영향
6. 평가
7. 어록
8. 기타
8.1. 단편적인 일화들
9. 대중매체에서
10. 관련 단체
11.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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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며, 애족입니다.'''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정치가.[9] 호는 도산(島山)[1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종교개신교 장로회이다.[11]

2. 생애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에서 농부인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안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남관면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의 집을 '노내미집'이라고 불렀으며 안창호를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렀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 왔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 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용인리에서 출생한 봉산 김씨인 김희순(金羲舜)이 세운 한학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후에 도산 선생은 김희순 훈장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김희순의 제자 중에서 과거 급제자 4명이 있음을 기념하는 비석을 직접 세웠다고 한다.[12]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 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하자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교육자로 변신했다.
1902년 안창호는 교육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고학 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귀국할 무렵인 1907년에는 지방회 7곳을 둔 북미 최대의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13] 1907년 그는 불현듯 귀국해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안창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8년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1907년에는 조선 통감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로 그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모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도 함께 서양에 못지않게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다. 협조해달라." 하며 안창호를 회유했다. 이에 안창호는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서양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근대화, 서양에 맞섬 등을 명목으로 한반도를 침탈하던 일본의 기만적인 실상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 양성을 주장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출국해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는데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2.1. 혁명론


과거 인식, 현재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자가 아닌 독립전쟁론자이자 혁명론자였는데 본인의 연설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난다.

혹자는 혁명수단에 의하여 완전한 독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실력이 없고 또 단계를 밟지 않은 때문이다. 차라리 자치를 먼저 얻고 그리고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창도하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 이유는 일본 정부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자치를 허용할 시기가 빠르기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은 그들의 준비에 다망을 극하고 있다. 그 자치제가 시행되기에 이르렀을 때에 있어서 여하한가를 말하건대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내지 일본 동화자만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 있어서의 지면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에 있고 그리고 국내의 경제 또한 그들의 수중에 있으므로 정래 독립할 기회가 있어도 자치를 얻는다는 것은 절망일 것이다. 또 일파에서는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칭하나 이것 또한 불가하다'''. 자본 지력 경험이 부족한 아 민족은 가령 일본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인 자본가와 경쟁할 수 없다. 하물려 우리에게 실력과 문화의 진보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에 있어서랴. 이제 한국 내의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불쌍한 우리 동포는 동으로 일본의 공장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북으로는 만주의 황야에서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음은 실력양성의 주창자의 이상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생명의 부활을 위해서는 혁명의 한 길이 있을 뿐이며 그것을 유력하게 함에는 보편적이고 또 유력한 '''일대혁명당'''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산만적 운동보다도 조직적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혁명을 공산주의로 하자! 무정부주의로 하자! 복벽(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 운동을 하자! 하여 각각 자기의 의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는 '민족혁명'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대혁명적 조직'을 성립한 후에 일치적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에 부치지말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안창호, 1926년 7월 8일 연설[14]

또한 안창호의 최측근 동암 차이석은 안창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선생의 '''혁명이론'''은 곧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었으니 민족 내부적으로는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의 일종인 체계적 방법을 세우고, 밖으로는 대동세계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우리 민족 자신의 힘으로써 원수인 적 일본 제국주의에 초멸하여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한 후 급속히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을 기초로 하여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네 가지 평등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원만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은 또 '''민중적 혁명을 주장'''했으니 한국 혁명사업이 소수 독재자의 손에서 나와서도 안되며 또는 특수계급이 좌우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반드시 전민족적 총단결로 추진되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혁명의 무력화를 주장했으니 장차 전 민족이 총무장하여 나섬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며 독립이 이루어지고 나면 곧 바로 국가건설에 종사하고 더 나아가 국제평등과 세계공영에 기여하자는 것이다.」[15]

안창호는 본인이 직접 실력양성론이란 건 자치론과 묶어서 같이 부정했으며, 오히려 측근들은 적극적 혁명론이나 전쟁론을 주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2.2. 민족개조론과 개인주의


춘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이란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처럼 설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안창호를 잘못 인식하는 데 영향을 줬다. 그러니 이광수의 주장 = 안창호의 주장이라는 것부터 틀렸다.
안창호가 말한 '민족개조론'이란 일제에게 해방돼서 독립국가를 세운다는 전제 아래,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독립된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길러서 독립국민에 맞는 자격을 갖게 하겠다는 것으로 혁명투사를 만들기 위해 개조를 주장한 것이었다.[16] 안창호는 통합과 함께 개인주의를 중시했다. 예로 미국을 예로 들면서 개인주의가 강해서 공동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으나 실제로는 잘만 한다면서 개인주의와 공동주의를 배타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개인이 조직에 참여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근거해야 하고, 그래야 조직의 뿌리가 강해진다고 보았다. 민족의 힘이라는 것도 개개인의 힘에 나오는 것이라 봤다.[17]
또한 사적인 관계나 사상적 관계로만 통합해서도 안 되고 통합된 조직은 사상적 통합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안창호에게 통합이란 '실제적인 일', '구체적인 사업'을 위해 결합해서 단결하는 것을 말했다. 당연히 사상통합을 말한 게 아니니 개개인의 의견 차이, 갈등, 대립이 없는 통합을 말한 게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싸움은 당연한 것이며,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만일 싸우지 않으면 충성 있는 지도자라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개개인의 논쟁과정은 당연하게 생각했다.(다만 이건 같은 조직에서 하는 것을 말하며 조직을 분리해서 다른 별개 조직이 되어서 싸우는 것은 반대함) 다만 그런 논쟁 절차를 거치고 합의가 이루어져서 '공론'이 이루어지면 복종해야 된다는 것이 안창호의 조직론이었다. 이 공론은 위에서 말했듯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과 사업을 말하며 이데올로기와 달랐다.[18]
안창호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통합과 조직을 이루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이데올로기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는 다른 집합적이고 공식적인 이념체계이며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합의되는 의사결정이나 결의사항과도 다르지. 안창호는 집합적이고 공식적인 이념체계에 근거한 통합을 좋아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일과 계획을 위해 개개인들이 결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19]
안창호는 개인역량강화를 중요시했는데, 그건 바로 이런 개인주의를 중요시하는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민족이 하나가 돼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개인주의에 근거하여서, 개개인이 존재가 있는 '실제적인 일'과 '구체적인 사업'을 위해서 조직을 이루어야된다는 게 안창호의 조직론이었다.
그와 달리 춘원은 '자치론'을 전제한 것이라서 주장의 전제부터 달랐고 민족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도덕성에 근거한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주장이라 목표도 다르다.[20]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의 영향을 따른 것이란 주장은 이광수 자신의 주장일 뿐이다.[21]

2.3. 이광수에 따른 오해


춘원이 소개한 안창호 = 실제 안창호로 보는 건 정말의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예로 이광수는 흥사단운동을 안창호의 독립운동 본류인 것처럼 소개했는데, 안창호가 흥사단운동을 중시하긴 했으나 안창호 자신이 말한 것처럼 흥사단은 독립운동단체가 아닌 별개의 단체라고 생각했다. 안창호 선생에게 흥사단 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었고, 별개의 혁명가를 기르는 단체였다.[22]
곽림대는 '안도산'1966 이란 도산의 일대기 책을 썼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하며 해방 후의 안창호에 대한 인식에 한탄하였다.

지금 국내에서는 도산을 간디 같은 인물로 만들기로 생각하는 있는 줄 아는데, 나의 부탁은 제발 '''도산을 간디 같은 인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도산은 간디가 알지 못하고 내놓지 못한 흥사단주의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도산은 삼군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펼치는 것이 꿈'''이었고, 워싱턴(1732~1799)과 링컨처럼 이성을 위해 일하려는 인물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23]

곽림대는 도산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했고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체포되었는데, 차이석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고문을 받아 거의 병신이 되었다."고 할 만큼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겨우 풀려난 뒤에는 미국으로 망명후에 도산의 곁을 지킨 사람이다.[24]
또한 안창호의 사상을 이어받은 최측근 차이석은 한국독립당 당의를 설명하며 '''브라질의 청원식 독립운동과,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같이 타협적인 것이 아니라, 강성적인 적극적 독립운동'''이 당의라 설명했다.[25]

2.4. 폭력활동에 대한 성향


안창호는 계획에 따라서는 폭력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로 안창호는 청년비밀단을 사용한 유격전법을 한 전략으로 구상했다.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국내 동포를 민족적 각성을 하게하며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다.[26] 예로 미 의원단이 방한한다고 하자 광복군총영, 대한광복군결사대 등을 통해 강렬한 폭력투쟁을 지휘했다. 광복군총영 본부는 서울, 평양, 신의주 3곳에 폭탄의거를 할 계획을 추진하고 결사대원을 선발해 잠입시키고도 하였다. 예로 서울에서 계획한 활동은 종로경찰서이완용의 집, 서울역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나 1920년 8월 21일에 일제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27]
안창호가 반대했던 것은 폭력활동이 아니라 조직되지 않은 소수 인원들이 산발적으로 거행하는 테러활동이었다. 안창호가 생각하기에 의열투쟁은 통일된 조직에 근거한 군사적 작전으로 해야 옳은 것이다.[28]
또한 안창호는 1919년에 연통제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국내조직으로 연통부를 세운 것이다. 연통제란 도, 군, 면 단위로 임시정부 국내조직인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시도였다. 역시 안창호가 주도한 활동이다.[29] 연통부의 활동에는 폭력적 활동도 포함되어있다.
예로 연통 각 부에서 담당하는 주요사무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장차 외지에서 動兵하여 전쟁을 개시할 시는 '''군인 · 군속의 징모, 군수품 의 정발·수송에 관한사항'''.[30]

1919년 12월 함경북도에선 관련자들이 일본제국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는데, 일본제국 경찰에 따르면 연통제의 활동은 이러했다.

(1)군자금 모집, (2)군 사상의 경험이 있는 자를 보고할 것, (3) '''일본관헌을 습격할 것, (4) 병기탄약을 조사 보고할 것, (5)시위운동을 할 것''', (6) 일본관헌 및 군대의 상황을 내사 보고할 것, (7)시위운동 때문에 살해되고 또는 부상한 자의 주소 씨명을 조사 보고할 것[31]

또한 연통부에서는 매 5일마다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긴급사항은 즉시 보고해야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군사상 지식 · 경험이 있는 자의 주소 • 씨명 · 연령 및 약력.[32]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조건 중 하나로 "(대한)제국시대의 군인이나 의병이나 기타 군사의 지식 경험이 있는 자를 조사 통일하여야 할 것이오, 없던 군대를 新造하여 싸우려 하니 군사에 관계 있는 자들이 다 모여서 작전을 계획할 필요가 있소." 하고 주장하며 군사 유경험자를 찾아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다.[33]

2.5. 재정마련 중요성 강조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위해 매우 필요한 활동으로 재정마련을 들었다. 독립운동은 참가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재정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가 없다. 안창호는 그걸 잘 알았고, 자금운동과 재정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34]
예로 연통제 활동이 있던 시절에 하던 주요사무 중에는 징수 같은 자금운동이 있었다.[35]
또한 미주동포들에게 "직접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라도, 재정을 감당하는 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군에게 보내서 지원해 달라." 하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36]

안창호는 '한국인은 정통적으로 재정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고 주장했고 그 원인을 유교라 주장했다. 유교의 원인으로 재(財)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죽자죽자고는 하는데 자금문제는 따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낮추어 보는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상 돈이 안 나오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돈이 없어도 일이 되는 줄 아는 까닭… 그래서 독립도 글자나 말만으로 되는 줄로 아는 까닭」

그리고 모든 조직적 활동은 재정지원에 따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다녔다.[37]
안창호는 독립전쟁과 재정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다.[38]

「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

「여러분,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

「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

이윽고 독립운동가 중에서 재정마련운동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했다.

「나는 우리 독립운동자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일인도 없음을 볼 때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39]

안창호는 "무슨 일이든지 하고,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바치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다 일하시오. 여기서 할 일이 없거든 서북간도에 가서 농업을 하시오. 독립운동하노라 하면서 노는 자는 독립의 적이오.」[40]

따로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이런 재정지원활동과 자금운동을 중요시했는데, 이것이 안창호를 온건운동가나 실력양성론자로 오해를 받게 하는데 일조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 굉장히 현실적인 주장이다. 직접적인 독립운동만 하면 자금마련이 제대로 될 턱이 없으니, 다른 활동을 하며 돈을 모으다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기부해야 재정을 굳건히 할 수 있다.

3. 인물관계



3.1. 임시정부 옹호파


한때 임시정부 내부의 대립이 극심해서 옹호/개조/창조라는 3개 진영이 생겨나 극심한 대립을 벌인 적이 있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서서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 탓에 이승만, 김구과 극심하게 대립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이였으니 안창호와 대립했고,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한 인물 중 하나였다.

3.1.1. 이승만


1919년 임시정부 초창기에 이승만이 당시 임시정부에 없는 직함인 대통령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이는 헌법위반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말라"고 전보를 띄웠으나, 도리어 이승만에게 "지금 이러면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니 떠들지 마시오."라는 답장만 받았다. 당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은 그러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을 함께 적어 안창호에게 답장했다.
당시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9. 8. 25. 상하이에서】

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

【답장】<1919. 8. 26. 워싱턴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

"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한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워싱턴 이승만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에서는 그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고 이승만정한경을 파견 대표로 정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로 가지 못하게되었고 대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를 할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신채호가 주동이 된 이승만 반대운동이 임시정부 안팎에서 격렬히 진행되었다. 안창호는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했으나[41] 후에 독립운동노선을 바꾸었고 이승만 반대편에 섰다.
이 대립은 각 인맥을 타고 격렬한 암투로 발전했다.[42] 안창호와 치열하게 싸운 이승만은 안창호 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대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자신의 비서가 여운형과 사이좋게 지내자 '안창호 똘마니와 놀러다니지 말라.'고 혼냈고, 서북지역 출신을 폄하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창호도 이승만을 비롯한 기호파들을 적대시하였고 이승만이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못한 틈을 타 임시정부내에 안창호파가 득세했고 결국 이승만은 탄핵당했다.

3.1.2. 김구


기존 임시정부 문제로 옹호파, 개조파, 창조파로 갈등과 대립이 생겼을 때 김구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다. 이 이후부터 김구는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에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운동을 하였다.[43]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갈등과 대립하였다.[44] 그래서 후일 윤봉길 의거 때 김구가 안창호에게 사전에 피하라는 언질을 주지 않아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된 것도 그냥 실수가 아니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다.
김구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같은 진영으로 상당히 활동한 바 있다.

3.2. 사회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하고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가"로 평가했다. 임정 초기부터 사회주의 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동휘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다. 특히 1920년대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지식인과 기업인들이 주축이 된 운동들은 당시 식민지의 조선인들은 생존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었는데 국산품 수입품을 따지고 자시고 할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에 좌익 계열이나 민중 사이에선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안창호는 주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비롯한 서위 지식인과 부르주아 운동 노선의 좌장격이었다. 위에 쓰인대로 혁명이나 일치단결을 통한 민족 독립혁명을 이야기 한 적은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에 대한 전략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단결을 주장했다 하여도 사회주의의 통일전선 전술이나 1930년대에 반파시즘을 위한 연합전선 개념이었던 인민전선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도산 안창호는 민족 혁명이나 보수주의적 혁명 개념은 있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정이나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적 원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다. 물론 대부분의 초기 독립운동가들이 정치적인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하더라도, 당대의 민족 지도자로 손꼽히던 인물이 이러한 부분에서 명확한 이론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여운형, 조만식, 조소앙등과 무리 없게 지낸 점을 보아[45] 좌익 계열이나 민주 계열 자체를 배격하진 않았고 그 계열도 안창호를 배격하진 않은 듯 하다. 실제로 현재 국내 좌파나 리버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은 점을 상기해보자.
김일성이 쓴 세기와 더불어 에 따르면, 1927년 당시 안창호가 길림의 재중동포들을 찾아 강연을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안창호는 실력양성만 반복하여 이야기 하고, 조선 민족의 후진성을 이야기 하며 수양만을 강조했다고 '''깐다.''' 김일성은 이때 자신이 질문지를[46] 적은 쪽지를 안창호에게 건넸고, 안창호는 자신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하여 급히 자리를 떴다고 한다. 물론 한국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신빙성이 없다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강연은 청중이 너무 많아서 연소자들은 입장불가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당시 15세였던 김일성은 아예 들어갈 수조자 없었고, 강연 내용을 따로 전해들은 것을 차후에 비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47] 여하튼 이러한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대 독립운동가들은 안창호를 "독립 조선의 대통령감"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신도 그의 인품과 신력은 인정하는 점을 들어,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48]
여기까지만 보면 왜 사회민주주의 항목에 안창호가 분류되어있나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체계적인 이념으로 발전하지 않긴 했지만 안창호는 분명 ''대공주의''라는 이름의 미래 지향에.관한 연설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49] 이 대공주의는 후일의 삼균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위한 것이었는데, 개인과 개인간의 경제적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4. 활동



4.1.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4.1.1. 점진 전쟁론


그는 기본적으로 점진전쟁론을 견지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에 있었던 이동휘와 같은 급진적인 전쟁론자와 갈등을 빚었다. 그가 생각하는 바는 대략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 되는 것이 다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요라고만 하고 가만 앉아 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여운형은 이러한 안창호의 뜻을 따랐는데, 여운형이 일본의 초청을 받고 일본행을 결심하자 여운형을 변호하면서 이동휘와 갈등하였다. 이동휘는 "일본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극구 반대했으나, 안창호는 여운형을 믿고 일본행을 권유하였고, 노잣돈까지 주었다고 한다.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적을 알아야 하니까니 가서 니야기를 들어보라우. 이거 얼마 되딘 않지만."

"허나 임정 안팎에서 야단들입니다."

"뭐,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50]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 여운형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한용운에게도 안창호가 '독립 후에는 서북파가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서북파는 그간 박대받아 왔고 기호파는 지난 500년 간 지은 죄가 크다'라는 내용의 지역 감정을 피력한 적이 있으며, 이에 실망한 한용운이 다시는 안창호를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도를 떠나 서북민으로서의 울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나 자세한 건 불명.
그런데 윤치호 일기는 오류투성인데, 문제는 안창호가 1932년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1935년에 풀려났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51] 사장이었고, 여기에 엉뚱하게 신흥우가 나온 것도 상황처리 앞뒤가 맞지 않다. 윤치호가 지어낸 이야기인가?! 아니면,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적은 건가,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추측은 선후맥락을 보면 앞뒤가 더 맞지 않는다. 신흥우는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름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인물로, 주로 미주에서 활동했다. 신흥우는 이 시기 윤치호와 대립이 심했다. 뒤에 신흥우는 193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게 된다
하지만, 1932년 10월 4일자 일기 내용만 가지고 선후맥락없이 판단할 경우 오류가 될 수 있는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사실 안창호가 지역감정의 소유자라는 이야기를 윤치호가 들은 건 1920년 8월 일기에서도 나오는 걸 봐서, 당연히 1932년도보다 이전에 해당될 것이다. 실제로 1932년 1월 8일자 일기에는 "오후에 안창호가 수감되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고, 윤치호 자신이 안씨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에 김활란이 분개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즉 안창호가 감옥에 수감 중인 상태라는 건 본인도 당연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글을 썼을 것이다. 또한 윤치호 일기를 보면 "안창호가 지역감정이 섞인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지, 그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도 않다. 안창호가 출옥 후 1935년 3월 24일에는 안창호를 직접 방문하여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있는데, 안창호는 이 자리에서 "나는 지역감정 소유자가 아니며, 오히려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었다. 더군다나 안창호와 윤치호 관계를 보면 지어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지금에서야 건국훈장받은 위인과 친일반민족행위자지만 윤치호도 안창호와 함께 수십년간 개신교활동 및 계몽활동에 투신하였고 윤치호는 안창호의 석방과 병치료는 물론 안창호의 장례까지 치루어준 오랜 친우로, 낭설따위로 오해를 할만큼 거리가 있는 사이가 아니다. 위의 한용운의 일화와 윤치호 일기를 종합해볼때, 과거에는 강한 지역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늦어도 1935년에는 지역감정의 문제점을 느끼고 타파하려고 개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여운형일본으로 건너가 회유에 굽히지 않고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일본 정계를 술렁이게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1930년 상하이에서 임정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4.2. 국내 활동과 사망


1932년에 체포되어[52] 국내에 압송, 5년 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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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안창호[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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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의 안창호.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그러나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12월에 윤치호의 여러 번에 걸친 탄원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고문과 감옥살이로 인하여 폐렴, 간경화 등 여러 질병을 앓았다.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막대한 치료 비용을 윤치호김성수가 지원해주었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59세의 일기로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위인전에서 자주 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아[55],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위키백과에 따르면 저 말을 한 뒤에도 한동안 살아있었고 다른 말도 했고, 유상규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기 전 미국에 있던 가족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그를 만나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었다. 현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안창호 본인이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안창호의 동지들도 가족들의 귀국을 만류했다. 가족들을 일제가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압박할 지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두 아들들은 자신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괜찮다고 하였지만, 동지들은 일제가 그런 걸 지킬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가족들도 뜻을 꺾어야 했고, 안창호는 끝끝내 가족들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마음이 아플 뿐이오. 일본자기가 일으킨 전쟁으로 망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힘을 모으시오.'''


1938년 3월 10일,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

4.3. 사후


1938년 3월10일 0시 5분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도산의 사망이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했다.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말 것과, 장례식 주관 및 참석자는 가족 친지 등 몇 명에 한하고, 고별식에도 이들 이외는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반인의 조문이 금지되었으며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됐다.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들의 언행을 사찰했다.
별세한 직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우리로 향하는 출입로에는 '불온언동자'를 색출하고 '소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영구차 앞뒤로는 경찰 자동차가 경계를 폈으며 경관들은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하여망우리로 향하는 길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경계를 폈다. 당시 영구차가 묘지로 갈 때 망우리 방향 통행은 일절 금지됐다. 망우리에 도착한 도산의 관은 즉시 매장됐다. 묘지에 심으려고 가지고 갔던 무궁화 묘목은 압수됐다. 그러다가 1973년 서울특별시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과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

5. 그의 영향


이러한 안창호 vs 이승만광복 이후에까지 남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안창호는 해방을 미처 못보고 별세했으나 안창호와 가깝던 여운형과 수양동우회 소속이었던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적이 되어 그를 견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여운형은 암살을 당하고 최능진은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6. 평가


안창호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양성"이라는 노선은 지금도 평가되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당장 그가 설립한 흥사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단, 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며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실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안창호도 그래봤자 자치론자 아니냐며 까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안창호는 자기와 엮이는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도 했다.[56]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이광수 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을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참고해두자.

7. 어록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 속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죽더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애써 실행하라.'''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청년이 다짐해야 할 2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속이지 말자. 둘째, 놀지 말자.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청년은 스스로 생각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진정한 애국심은 그 말보다 그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로써 조언해야 한다.'''

'''남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 해서 그를 미워하는 편협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세상에 화평이 있을 것이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체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너도 믿고 나도 믿자.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자. 너도 주인이 되고 나도 주인이 되자. 공적은 '우리'에게로 돌리고 책임은 '나'에게로 돌리자.'''

'''도서관은 더 좋은 학교요, 책은 더 좋은 선생님이다.'''

'''질서와 청결은 문명인의 자격이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라.'''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허황된 마음은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한 마음은 성공의 기초이다.'''

'''작은 일이라도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다.'''

'''자기의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의 국가와 자기의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인 관념이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다.'''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즉, 일에 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이다. 힘이 적으면 적게 이루고 힘이 크면 크게 이루고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먼저 그 힘을 찾아야 할 것이다.'''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므로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를 청년 제군들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바이다!'''

'''인간 사회는 유정한 사회와 무정한 사회로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정한 사회다. 우리나라를 무정한 사회에서 유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정의 돈수'에 힘을 써야 한다. 정의는 친애와 동정의 결합이다. 곧 사랑이다. 돈수는 두텁게 갈고닦는 것이다. 즉, 정의 돈수는 사랑하기 공부다. 친애하고 동정하는 것을 공부하고 연습하여 두텁게 하자는 것이다. 정의 돈수, 우리 국민의 사활이 여기에 달려있다. 우리는 정의를 기르기 위해 다음 일곱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1. 남의 일에 개의치 말라.'''

'''2. 개성을 존중하라.'''

'''3.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

'''4. 물질적 의뢰를 말라.'''

'''5. 정의를 혼동하지 말라.'''

'''6. 신의를 확수하라.'''

'''7. 예절을 존중하라.'''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 한 도덕 역을 겸하여 갖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해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잖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차가운가? 훈훈한 기운이 없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아량이 없고 오직 저만이 옳다 하므로 그 혹독한 당쟁이 생긴 것이다.'''

'''나도 잘못할 수 있는 동시에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거든 내 뜻과 같지 않다 해서, 사문난적이라 하여 멸족까지 하고야 마는 것이 소위 사화요 당쟁이었으니 이 악습은 아직까지도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되 우정과 존경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무릇 문명국민으로서의 덕목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천 만 가지의 의견이 대립하더라도 오히려 우정과 민족적 우애만은 하나일 수 있으니 사상의 대립 또한 서로 연마 발달하는 자극이 될 수 있고, 서로의 존경과 애정은 민족 통일을 묶는 실이 되어 안으로는 이런저런 의견 대립이 있다 하더라도 전 민족의 운명이 달린 일에 대해서는 혼연이 하나가 되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일개인 탓도 아니오, 일본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이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인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저마다 남에게만 돌리려고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망국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뼈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역적을 죽일 놈이라고 비난하며 그저 앉아만 있는가?'''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 우리나라에 광복의 새 지평이 열릴 것이다.'''

'''적어도 동포끼리는 서로 다투지 말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8. 기타


  • 사진속 세련된 도시미남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안남도 출신이라 서북방언을 썼다고 전해진다. 감이 안온다면 야인시대시라소니 말투를 생각하면 된다. 다만 1919년 9월 28일에 안창호와 직접 대면한 이병상에 따르면 말씨에 경성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사진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찍힌 사진이고, 이후 고된 타지 생활과 오랜 독립운동,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홍커우 의거로 붙잡혔을때 사진을 보면 엄청 초췌하고 깡마른 모습이 두드러진다.도산의 다른 사진들
  • 안창호의 연설은 매우 뛰어났다. 젊었을 적 독립협회의 관서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힘쓸 무렵, 평양 쾌재정[57]에서 교육진흥을 주제로 하여 '대국민계몽연설'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 연설에 크게 감명받고 독립 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오산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이승훈이다. 조만식여운형도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독립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승훈, 조만식, 여운형 모두가 말빨(?)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말빨로 꼬셔버린 것이다.
  • 호인 도산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를 보고 지은 것이다. 그래서 섬 도에 뫼 산 해서 도산. 그래서 미국 본토 근처에도 못갔는데 하와이 보고 벌써 미국에 압도당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 위인전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샤프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삽화로 넣은 위인전도 있어서 충공깽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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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창호 선생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도 있다. # 책 제목이 굉장무쌍하다.
  • 2000년대 후반에 안창호 선생이 한국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론을 타고 알려지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민 집계는 일본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했는데, 안창호는 이걸 하지 않아서 집계가 안 되었고, 결과적으로 훈장까지 받은 독립유공자면서도 한국 국민은 아닌 황당한 상황이었다는 것.
  • 현재 공식적으로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불명인데,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허나 박정희 정권에서 이장한 점에서도 결론을 못 내린 점은 윤치호 가능성을 더 높혔다.
  • 도산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합중국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안수산 여사가 해군에 입대한 시기는 진주만 공습 직후였기에 아시아계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도 있어 퇴짜를 맞았지만 기어이 입대했다. 왜 자원입대를 했느냐에 대해 이유를 묻자 '아버지께서 하시던 싸움을 이어가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전역 후에는 1959년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 NSA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58]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별세하였다. 기사. 향년 100세. 안수산 여사가 23살 시절에 도산은 별세했는데 생전 딸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라면서 "그래도 뿌리인 조국을 잊지는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8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건국절을 연거푸 언급하면서 건국절 제정을 바란다는 의중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이에 발맞추어 건국절 법제화를 추진하며 논란을 키웠다. 건국절 논란 참고. 새누리당에 건국절에 대해서 강의하는 이가 류석춘 연세대학교 교수(전 이승만연구원장)라는 작자인데, "안창호는 미국인"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망언을 터트린 전력이 있다. 관련기사
  • 2016년 8월 20일 방송된 무한도전 LA 특집에서 날림관광으로 잡은 코스인 코리아타운 IC, 남가주대(USC) 한국학연구소, 우체국, 한인회관[59]에 다 그의 이름(Dosan Ahn Chang Ho)이 붙어있다. 또한 도산의 자녀 5명 중 2016년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만 90세(2016년 기준)의 막내아들 안필영 옹이 출연했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체포되어 구금생활 후 세상을 떠났기에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60] 부자 둘 다 서로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임으로써 안타까움을 더한다. 장녀 안수산 여사의 아들이자 도산의 손자인 필립 안 커디도 나왔다.[61]
  • 안창호 선생의 묘소가 원래는 망우리 묘지에 있었던 까닭은, 그곳이 흥사단 동지인 태허 유태규[62] 선생이 안장된 곳이라 같은 곳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1973년에 도산공원을 개장하면서 안창호 부부의 묘를 도산공원으로 이장하고 묘비를 새로 세웠다. 망우리 묘지에 있던 비석 역시 도산공원 안에 있는 도산기념관 지하로 옮겨 보관하다가, 2016년에 망우리 묘지의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웠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시절에 '도산 안창호 씨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씨'라는 호칭은 공식석상이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 쓰는 게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면 결례가 되는 말이며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다만 일본의 경우 네임드[63]에게는 씨를 붙인다.
  • 2018년 8월 20일, 대한민국 해군은 3,000톤급 국산 재래식 잠수함 프로젝트인 KSS-III의 1번함을 <도산 안창호>라 명명한다고 밝혔다. 각 함종의 1번함은 네임쉽으로서, 이로서 KSS-III은 도산 안창호급 잠수함으로 불리게 된다. 2018년 9월 14일 거행된 도산 안창호함 진수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임석하였고 안창호 선생의 손자 로버트 안 부부도 귀빈으로 초청되었다.
  • 2018년 8월 14일에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그의 생일인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기로 하였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에 미국 최초의 한인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의 공로와 더불어 그의 독립 운동 정신 등을 인정하여 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8.1. 단편적인 일화들


워낙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만큼, 알려진 일화들도 많은 편이다.
아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당했을 때, 경성 지방법원 검사의 심문에 답한 것이다.

검사(이하 검):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안창호(이하 안):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안: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64]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65]

"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보산의 송태라는 곳에 집 한 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검문하는 일본제국 경찰들을 피해가며 그를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평양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교회와 숭실학교의 존폐문제가 벌어지자, 평안남도 도지사 가마우치 시코사쿠는 안창호에게 한 경찰을 보내어 전했다.

교회와 학교 대표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의논하다가 안창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서는 반대 의견을 취하니, 당신이 음모를 꾸미거나 선동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평안남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평남을 떠나주기를 바라고, 될 수 있으면 미국으로 가기를 바라오. 당신만 미국으로 갈 의향이 있다면 여행권은 내가 주선해 주겠소.

그러자 안창호는 이렇게 답하며 그 일본제국 경찰을 돌려보냈다.

이렇게 지사께 전하시오. 만약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시킨다면, 평남에 있거나 미국에 갔거나 마찬가지라고. 아마 감옥에 잡아 가두거나 죽이더라도 마찬가지라고. '''2천만 한국인이 다 안창호와 같은 사람인데''' 일개 안창호를 송태에서 내쫓았다는 것이 불명예나 될 뿐이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부인인 이혜련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첫아들이 돌을 맞이한 직후에 한국에 다니러 온다고 가더니 통 돌아오지를 않아서 언제 오냐고 장문의 편지를 썼더니 길이가 두 배나 되는 편지가 답장으로 왔다고 한다. 요지는 지금 조국의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찌 동포를 버리고 미국으로 갈 수 있겠냐는 것. 심지어 맨 마지막 줄에는 '''그럼 내가 어쩌면 좋겠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할 말이 없었던 이혜련 여사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덤으로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평생 안창호가 사온 아이 옷은 유독 예뻐했던 둘째딸 수라의 아기옷 딱 한 벌뿐이었다고...(1964년 이혜련 여사의 인터뷰 기사)

9. 대중매체에서


  • 1967년작 이수희 감독의 영화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박암이, 1969년 최인현 감독판에선 배우 겸 감독 전창근이 각각 맡았다.
  • 1979년작 KBS-TV 3.1절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 1979년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 1982년작 MBC <거부실록: 백산 안희제>에선 배우 홍중기가 연기했다.
  • 1982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선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성우 정승현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1992년작 MBC 특집드라마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 2018년작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화에서 잠시 출연했다. 유진 초이에게 콜롬비아 대학으로 가는 길을 물으며 유진에게 3년간 조선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통성명을 하면서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배우는 박정민.

10. 관련 단체



11. 참고 문서



[1] 혹은 An Chang-ho[2]남포특별시 천리마군.[3] https://news.joins.com/article/3838732 당시 평균 키를 감안하면 장신이다.[4] 호(鎬)자 항렬인데 다른 한자를 썼다. 사실 원래 '安昌''''鎬''''였다가 개명한 것.[5] 이름 미상의 다른 형.[6] 안필립은 1978년에, 안필선은 2001년에, 안수산은 2015년, 그리고 2016년 6월 18일에 차녀 안수라가 사망함으로써 2019년 4월 기준 자식들 중 3남이자 막내 안필영만이 생존해 미국에 살고 있다. 안필영은 2016년 무한도전 안창호 특집 때 출연하기도 했다.[7] 안수산은 미국인과 결혼해서 아들이 있다. 이름은 외삼촌과 같은 '필립 안 커디'다. 무한도전 안창호 특집에 출연했으며 외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사용하신 적 있는 곰방대머리(연기 뿜는 부분)를 보관하고 있다. 물론 다른 사진과 유품도 다수 있다.[8] 대한민국의 최초 장로교회인 현 새문안교회에 다녔던 사람이다.[9] 장택상은 광복 후에 안창호야말로 대통령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1 #2[10] 유래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주로 활동을 하던 하와이다.[11] 구세학당(경신학교)을 세운 창립자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였고, 안창호가 결혼식도 구세학당에 있던 미국인 밀러 주례로 치렀으므로 구세학당 입학 후에 개신교인이 된 듯하다. 안창호는 티를 잘 내지는 않았으나 주로 신약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12] 평안남도 대동군 군민회가 발간한 '대동군지'라는 책에 나와 있다. 김희순 훈장의 손녀가 을지로에 있는 고기집인 우래옥의 사장이라고 한다.[13] 공립협회는 이후 1909년 국민회, 1910년 대한인 국민회로 개편된다.[14]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32~133쪽에서 재인용[15] 2)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복 차이석평전, 2005, 역사공간, 258쪽에서 재인용[16] 박만규, 도산 안창호의 개혁사상과 민족개조론, 역사학연구 61, 2016, 244~245)[17]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57~258)[18]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59~260[19]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20] 박만규, 도산 안창호의 개혁사상과 민족개조론, 역사학연구 61, 2016, 245[21]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5쪽[22]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4, 138쪽[23]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6쪽[24]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27쪽; 차이석, 안창호 선생 피포 정형 및 그 약력, 장석흥, 임시정부 버팀복 차이석평전, 2005, 237쪽[25] 장석흥, 차이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9, 162쪽, 2014)[26]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3[27]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5~116쪽[28]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5~116[29]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04~105[30]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7쪽 에서 재인용[31]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7쪽 에서 재인용[32]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8쪽에서 재인용[33]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28쪽[34]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2[35] 박민영,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聯通制, 도산사상연구 7, 2001, 32쪽[36]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261)[37]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38]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39]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40]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41] 애당초 위임통치 청원사건이 안창호도 참여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이승만 반대파가 이승만을 축출하려고 하자, 안창호는 자기도 찬성했으니, 나부터 축출하라고 나서서 이를 막기도 했었다.[42] 한편 여운형은 자신의 출신지로 보면 이승만의 기호파였지만, 실제로는 안창호의 서북파로 분류되었다.[43] 오영섭,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회 35, 2015, 244쪽[44]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검구, 도산사상연구 8, 2002, 184~188[45] 여운형과 조만식은 사실상 안창호와의 만남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을만큼 안창호와 상당히 절친하였다. 조소앙의 경우는 임시정부 때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한 계파에 속한 일이 있어 완전히 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46] 질문지의 내용은 "산업과 교육으로 실력을 배양하자고 하였는데 왜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힌 상황에서 그것이 어느 선까지 가능하겠는가. 조선 민족이 열등하고 정신수양이 낮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영국과 미국을 반드시 본받을 필요가 있는가. 조선은 영, 미의 원조를 받아 독립할 수 있는가. " 였다고 한다.[47] 그런데 안창호와 김일성은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손정도 목사는 임정 의정원에 있었고, 실제로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다.[48] 게다가 김일성도 서북 출신이고, 안창호도 서북 출신이어서 어느 정도 우호적으로 기술한 점도 작용 했을 수 있다. 김일성은 항상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자신의 동향 사람들을 혁명의 주체로 표현했다. [49] 그리고 애초에 사회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자본주의도 사회민주주의의 친척뻘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실상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그 방향성을 잡을 때 공평 분배를 선택하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고, 능력별 분배를 선택하면 자본주의가 되는 것.[50]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이기에 서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한다.[51]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52] 안창호가 체포된 것을 살펴보면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윤봉길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했었을 때, 김구윤봉길의 의거 하루전에 상하이 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미리 통보한다. 다만 안창호에게만 통보하지 않았는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이 개방적인 조직이라 자칫 잘못하면 비밀이 샐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거사 당일 오전 9시에 안창호가 살던 집에 사람을 보내 거사 여부를 알리도록 했다. 불행히도 안창호는 이때 지인의 집에 가고 없었다. 그것도 생일을 맞은 지인의 아들에게 2원을 주기 위해서였다. 평소 안창호의 지론이었던 '''"어린아이라도 소중히 대해야 한다."'''를 실천하다가 체포된 셈. 안창호는 일본제국 경찰이 그를 잡아갈때도 의연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위에 나온 것처럼 김구안창호를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안창호를 일본 손을 빌어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통보를 늦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53] 1937년 11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되었다.[54] 도산 안창호의 순국 4개월 전에 찍었던 사진이며, 남아 있는 사진 중 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다.[55] 메이지 덴노 무쓰히토(睦仁). 사망 당시의 일본 천황이던 유인(裕仁, 히로히토)이라고 말했다는 버전도 있다.[56] 그런데 이광수의 후손은 안창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이광수를 변호하고 있다.(...)[57] 경북 상주시의 그 쾌재정과 다르다[58] 출처.[59] 회관은 기념관이며 그 앞의 광장[60] 안필영은 1926년생이고, 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보다 12년 뒤인 1938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복자가 아니지만, 안창호 선생이 안필영이 출생하기 전부터 투옥되어 사망 전까지 구금생활을 했으므로 12년간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가끔 책 등에서 말하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인 케이스이다. 안창호, 이혜련 부부의 늦둥이이기도 한데 형님들, 누님들과도 나이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 큰형님 안필립이 1905년생으로 무려 21살이나 차이나서 안필영이 말하기를, 큰형님인 안필립이 자신의 아버지 구실을 했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안필선(1912년생)하고는 14살, 안수산(1915년생)하고는 11살, 바로 위 누나인 안수라(1917년생)하고도 9살이나 차이가 났다.[61] 이때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인 도산의 다섯 곰방대 중 가장 작은 곰방대에 담배를 담는 통이 없는 까닭이 밝혀졌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이 분이 몰래 빼내신 것(…). 이후 엄마 안수산은 악의 없는 아들을 보고, 크게 웃을 뿐 혼내지는 않았다는 듯하다. 다행히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데 무도 멤버들한테 도산의 붓글씨 배달을 부탁했지만 곰방대는 끝끝내 가지고 계시겠다고 한다.[62]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며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과 동기이다.[63] 정확히는 '에라이 히토'인 경우. 주로 정치인에게는 '상'이 아닌 '씨'라고 호명하는 것을 일본 매스컴에서 볼 수 있으며, 악명이 높은 경우(ex: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도 붙인다.[64]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현대 국제사회가 성립된 이유다.''' 막대한 군비를 들여 가며 관리해야 하는 수천만 수억의 국민보다는 그냥 무역 대상으로 삼아서 돈이나 벌어다 주는 다른 나라로 만드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인들의 인식이 깨어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불거졌으며, 결국 현대 국제사회가 성립된 것이다.[65] 비폭력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그의 사상과 신념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저 대한의 독립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더 나아가 한일 양국의 평화까지 담긴 명언. 실제로 (국민감정은 차치하고) 우호국가로서 서로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발전하고 있는 현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소름 돋는 안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