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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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강영각(姜泳珏)
생몰
1896년 2월 28일 ~ 1946년 2월 4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
사망지
하와이 호놀룰루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7호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영각은 1896년 2월 28일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첫째 형 강영대(姜永大), 둘째 형 강영소, 셋째 형 강영문(姜英文), 넷째 형 강영상(姜永商)과 다섯째 형 강영렬(姜泳烈)이 있었고 여동생 강봉강(姜鳳姜)이 있었다. 8살 때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했고 12살 때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이후 업랜드소학교와 클레아몬트 중학교, 그리고 포모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기악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전 주미대사 장리욱 박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영각 군은 여러모로 보아 천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온통 미쳐버리기 일쑤였고, 어떤 기발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는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포모나대학 3학년에 재학하면서 대학악대 리더였다. Young Kang 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전문 악기는 코오넷(트럼펫과 비슷한 악기). 음악에 탁월한 강영각은 다뉴바와 클레아몬트에서 한인악대를 조직해 지휘하기도 했다. 그가 지휘하는 밴드는 반군국주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포모나 대학 졸업 후 1920년 하와이로 돌아간 강영각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는 영문격월간 한인소년(The Young Korean)를 창간했다. 그는 이태성과 함께 한인학생 동문, 한인대학생 클럽, 그리고 태극 클럽을 조직했다. 1925년 6월 기간지 <단산시보>를 발간했으며,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번호 261번을 부여받았다. 그는 1931년 9월 17일 신한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나는 두가지 결심을 하고 장래에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첫째는 국민을 위하여 더욱 힘과 마음을 다하여 일을 계속하려고 하며, 둘째 국민회를 위하여 나의 재능과 물질적 도덕적 그리고 모두를 다하여 돕고자 하나이다. 결론으로 나는 아메리카 안에 생각이 있는 모든 인도자 여러분에게 간청할 것은 미국 땅의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 청년들의 다중적 협동적 운동을 협찬하여 주시요.

강영각은 독립운동자금 원조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5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임시정부후원회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여해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썼으며,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소식을 듣고 와히아와 지방의 한인들과 함께 임시정부 와히아와 후원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또한 <국민보(國民報)>의 영문 주필로 활약했으며, 안창호가 체포되자 흥사단 단원의 자격으로 석방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을 맡았으며 1944년 흥사단 제12반 하와이 반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인쇄업을 하던 그는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강영각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딸인 수산 강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9년 국립서울현충원 108실 177호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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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시카고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시기에 촬영된 사진. 오른쪽부터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 강영상. 우축 하단은 강영각.
  • 강명화(姜明化, 1868~1933): 강영소의 부친. 1900년 1월부터 1902년 8월까지 증산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재임했고, 1905년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후 공립협회에 가임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2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부터 사업차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을 오갔다.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대(姜永大, 1885~1948): 강명화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강영소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및 신한민보에서 활동했고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을 맡았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의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넘겨주고 1933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독립금,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소(姜永韶, 1886~1934): 강명화의 둘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1909년 대한인 국민회에 가담해 하와이 대표로 활동했으며,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했으며, 1913년 5월 안창호흥사단을 조직했을 때 단원으로 참여했고, 1916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로 파견되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호소했고, 1919년 7월 18일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식을 거행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바람에 통합이 결렬되었다. 이후 1919년 11월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미주지역 한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이후 시카고에서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해 왕성한 사업을 벌이면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문(姜英文, 1888~1965): 강명화의 셋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을 때,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하여 9년만에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후 시카고에 자리를 잡아 하워드 식당을 경영했고 형과 함께 시카고 한인 교회를 이끌었다. 1938년 단우번호 299번으로서 흥사단에 입단했고,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 서무원으로서 활동했다. 1947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고, 1961년과 1962년에 이사부장을 맡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