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후 추
1. 개요
고구려후 추는 삼국사기와 한서 왕망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즉, 고구려의 인물들 중 하나지만,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2. 문헌에서의 등장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31년(12)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1]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반란을 일으키면]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 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삼국사기》권제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 31년'''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 추(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한서 왕망전'''
3. 누구인가?
한서를 참고하면 호(흉노), 고구려(하구려), 토하라 등 각종 표현을 보면 이민족 하대 정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민족에 대한 비하적인 인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후는 작위나 제후를 뜻하는 말로써, 인물을 후로 바꾼 신나라에서 상대국에 대한 하대적인 정책을 의미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목이 잘린 주체가 추가 아닌 연비라는 장수로 나오며 주석으로 한서에는 고구려후 추로 되어있다고 나와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역사서를 만들 때 중국계 역사서의 기사와 국내 역사서를 조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서 왕망전을, 인물 이름은 현대에는 전해지지 않는 국내 역사서를 참고한듯 보인다. 연비라는 이름은 중국계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또한, 이런 기록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고 싶었던 고구려인들의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왜냐면 삼국사기의 서술이 목이 잘린 주체를 제외한 99퍼센트 한서의 서술이랑 동일하다는 것은 김부식이 참고한 고구려 자체 기록이 한서에서 카피했음을 의미하며, 즉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바꾸고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후를 연비라는 장수로 바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후가 어떤 왕인지의 문제가 남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3.1. 구추설
인물 추는 주몽(추모)과 구추로 보는 추측이 있다. 이때 삼국사기에 의하면 추모(鄒牟)가 죽은지 31년이 되는 유류왕 31년이므로 주몽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유리와 부여를 같이 도주했던 구추(句鄒)가 당시까지 생존 했을 가능성이 있다.
3.2. 주몽설
그러나, 유리왕설의 논거는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크나큰 허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서기 12년에 재위한 고구려 왕을 유리왕이라 확신할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 위의 유리왕설에서 고구려후 추를 유리왕이라 비정한 근거는 단순히 당시 재위중이었던 왕이 유리왕이라 삼국사기에 나와있다 하나뿐인데, 알고있듯이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보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고구려 자체 기록을 신뢰한데다가 술이부작의 방법을 취해 이것들을 수정없이 기록하다 보니 고구려 왕조가 왜곡한 역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위에서 중간에 삽입한 고여율의 존재도 그걸 입증한다. 그렇다면 고구려후는 누구냐? 주몽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추'가 동명왕의 다른 시호인 '추모왕'의 앞글자이며, 고구려 당시에는 동명왕보단 추모왕이 더 많이 쓰였다는 점을 들어 동명왕이라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이렇게되면 주몽이 서기 12년까지 재위했다는게 되는데, 삼국사기에 나온 주몽의 사망 연도와는 무려 31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대무신왕 어머니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오류로 삼국사기가 20년 정도 기년 오류가 있다는것이 확실한데다가 삼국사기에 따른 주몽왕의 사망 시점이 유리가 주몽을 찾아온 그 해라는 점에서 고구려인들이 후일 국가의 시조가(정확히는 계루부의 시조지만) 이런 치욕을 당한 것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유리가 찾아온 그 해에 사망한 것처럼 만들고 유리의 재위 기간을 앞당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간 수명상 필히 동명왕이 부여에서 탈출한 시점을 늦출수밖에 없으며, 그 뒤 왕들의 생몰년도도 같이 조정되어야 하는데, '''태조왕의 생몰년도를 늦추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다''' 즉, 이렇게 늦춤으로써 원래는 거의 30-40년가까이 달했을 수도 있는 모본왕~태조왕 사이의 정치적 혼란기를 아주 짧은 기간으로 늦추고, 개연성을 부연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재사의 나이도 같이 조정되므로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의 관계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며, 또 위의 유리왕설에서도 나온 삼국사기 유리왕본기의 이중인격 문제도 여율을 삽입함으로써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3.3. 유리왕설
고구려후가 목이 잘린 시기가 서기 12년인데, '''삼국사기에서 서기 12년에 재위중이었던 왕은 유리왕이었다.''' 사실상 빼도박도못할 증거일 셈인데, 그렇게되면 삼국사기에서 나온 유리왕의 사망연도인 18년은 어떻게 되는 거냐? 할수 있지만 중국측 사서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누락된 유리의 막내 여진으로 비정되는 고여율의 존재를 삽입하면 완벽하다. 마침 즉, 유리가 서기 12년에 사망 -> 유리의 막내 여진, 즉 여율이 즉위 -> 서기 18년에 사망 식으로 된다. 마침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의 기록이 무슨 이중인격을 보는 것마냥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재위처럼 기록되어있기에 이대로 해석한다면 실제로는 위에 서술된 것처럼 일이 일어났지만 후일 고구려인들이 왕이 중국인들에게 목이 잘리는것도 모자라 국명까지 강제로 개조당한 전대미문의 치욕을 숨기려 목이 잘린 주체를 연비라는 인물로 바꾼 뒤 여율을 삭제하고 서기 18년까지 유리의 생년을 늘인 것이다. 즉, 고구려인들이 여율을 삭제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4. 결론
모두 그럴듯하게 서술해놓기는 했지만 사실 현재 학계에서 정설은 없는 상태이다. 게다가 고구려후 추의 존재를 삼국사기를 신뢰하여 연비라 보는 견해도 국내에 소수 존재[2] 하며, 만약 주몽설을 따를 경우 고구려 초기사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기에 고구려후 추의 존재만 놓고 함부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