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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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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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
李丙燾
1896년 9월 20일~1989년 8월 14일

''우리의 최고 정신이 개인은 국가나 민족을 떠나 존재의 의의가 없고 항상 국가와 민족의 통일 발전 가운데 살고 그것에 봉사하는 일원인 것을 자각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영원한 이상에 순하는 정신이다.''

''백제하남위례성경기도 광주군 춘궁리(현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성산성)고,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사성(蛇城)이다.''

1. 개요
2. 일생
2.1. 가족사
2.2. 친일 논란
2.3. 기타
3. 평가
4. 수상 경력


1. 개요


대한민국 실증주의 사학의 시조. 한국사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일제강점기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본관은 우봉[1](牛峰), 호는 두계(斗溪).

2. 일생


1896년 경기도 용인시 태생으로 중동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다. 처음에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츠다 소키치, 요시다 도고의 영향으로 동양사쪽으로 특히 한국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 그를 지도한 교수는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2]로 문헌 비판과 언어학적 고증을 중시하는 츠다 소키치의 태도는 이병도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외에 도쿄대학에 있었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간 것은 유명한 일인데 이병도 본인은 이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졸업 논문고구려의 對 ,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학위를 마친 뒤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중 하나였던 《조선사》 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한자 독음으로 금서룡)와의 불화로 사임하고 보수가 없는 촉탁으로서 조선사 편찬 사업 종료까지 일하였다. 이후 이병도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나혜석, 김억 등과 함께 <폐허>를 냈고 1922년 횡보 염상섭, 오상순 등과 함께 '문인회'를 결성했으며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 이직했다. 1934년 '진단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 및 발행인,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2년 진단학회 해산 이후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이직해 강사를 지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그의 학술적 업적은 고대사와 유교 사상사에 집중되었는데 일반에 알려진 연구 업적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것이다. 광복 후 그의 나이는 50세로 조선학술원 역사철학부장을 거쳐 12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선사 교수로 임용되었고 서울대학교로 개편될 때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창립 멤버로 교편을 잡으면서 1961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여러 후학들을 양성했고(대표적으로 김철준 교수) 1952년 문학박사 학위를 땄다.[3] 교수 재직 동안 1945년~1951년 중앙도서관장, 1954년 박물관장과 대학원 부원장, 1960년 대학원장 등을 각각 역임 후 1962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는데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적도 있었다.
해방 후 친일 논란으로 그의 활동은 어느 정도 위축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민족주의사회주의 사학자들이 월북 및 납북되고 대신 실증 사학이 주류 사학으로 다시 격상하여 그의 활동 영역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쟁 당시부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4년간 지내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으로 부임 후 1955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서 학회에 복귀해 사학계 원로로 지위를 굳혔고 1960년 4.19 혁명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면서[4] 문교부 장관을 4달간 맡았다. 그는 임기 초부터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및 경찰의 학원 감시를 배격한다고 했고 '학원 정상화, 사도 확립, 교육 중립성 확보' 등 3대 원칙을 내걸고 5월 10일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당시 성행하던 학원 민주화 운동에 부정적 입장을 표했고 싹터오르던 '교원노조 운동'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해체 요구를 하는 등 4.19 정신을 위배하기도 했다.
1960년 장면 내각 수립 후 학술원 회장을 21년간 맡으며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국민대학 학장, 고려대학교 교우회장(1957~1966)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수립 후 1965~1978년까지 학교법인 동구학원[5] 이사장, 1966년 5.16 민족상 심사위원회 고문이사, 1970년 국토통일원 고문 및 민족문화추진회 이사(1982년부터 이사장), 1975~1989년까지 학교법인 송산학원[6] 이사장 등을 각각 거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부터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8년간 재직했다.
말년에 진단학회 운영을 빼고는 특별한 일 없이 권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와 <환단고기> 역자 임승국 같은 소위 재야사학자들이 자기네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들어 '식민사학의 괴수'로서 대중 일부에게 낙인찍히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를 사칭해서 회개하고 단군을 인정했다는 식의 책이 나오기까지 했는데 물론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 애초에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단군신화의 실체와 의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 회개설'의 출전은 최태영 박사의 <인간 단군을 찾아서>라는 회고록인데 이 책 자체가 회고록이다보니 최태영 박사의 자뻑이 심한데다가 환독까지 가미된 책이라 신빙성은 적다.[7] 그리고 아래 설명되어 있듯이 이병도는 단군 신화의 내용 일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반응이나 추상화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으나 단군의 실존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가 1923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사개강>, 1948년 출판한 <조선사대관> 등의 저작에서 알 수 있듯이 이병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의 실존을 긍정하고 있다. 비슷한 주장으로 죽기 전 이병도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주장을 뒤엎고 단군이 실존한다며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그는 1986년 10월 9일 개천절을 기념해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올린 바 있는데 내용을 보면 이전에 이병도 본인이 했던 주장들을 다시 꺼내는 수준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진단학회, 송산학원 운영에 힘쓰며 꾸준히 글을 쓰고 연구를 하던 중에 1989년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불과 4달 전에는 '올해의 고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1. 가족사


집안이 모두 굉장히 장수하는 집안이다. 이병도 박사는 5남 2녀의 자식이 있는데 2002년에 88세로 별세한 장남 이기녕 박사, 2016년에 99세로 별세한 차남 이춘녕 박사, 2019년에 95세로 별세한 3남 이태녕 박사를 제외하고, 모두 생존해 있다. 참고로 이춘녕 박사는 농학계의 권위자이며,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의 부친이다. 장욱진 화백의 부인인 장녀 이순경 여사는 1920년생으로 2020년 기준 100세다. 그밖에 자녀들도 80~90대로 모두 생존해 있다. 4남 이동녕 박사는 1927년생으로 93세, 차녀 이운경 원장은 1931년생으로 89세, 5남 이본녕 박사는 1936년생으로 84세다.
유명한 후손으로서, 손자인 전 서울대 총장 이장무[8], 고고학자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 사위인 한국추상화가 장욱진이 있다. 장욱진 화백은 평생 장인어른인 이병도 박사에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유는 딸 이순경 여사를 고생시켰기 때문이다. 이순경 여사는 서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병도 박사는 단 한번도 사위의 전시회에 간적이 없으며, 장욱진 화백도 "처가는 다 박사야, 사람은 나 혼자"라는 말로 처가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다.
그런데 장욱진은 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위치하는 교동에 고택을 짓고, 여생을 보내는데, 교동이란 단어 자체가 향교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는 용어다. 다만, 용인항교는 법정동인 언남동에 위치해 있다. 과거 용인군청이자 現 구성동사무소 뒤편에 위치. 거기에 향교는 오늘날 공립중고등학교와 같은 위치로 지방을 관리하는 행정기관 가까이 위치하였기에 용인이 1914년 이전에는 구성에 용인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에 이병도 집안이 용인, 그것도 교동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욱진이 처가를 물려받아 살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2. 친일 논란


우선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친일파인 윤치영 집안과 3중 사돈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이병도의 형 이병묵의 아들(이병도의 조카)이 윤치영의 둘째형 윤치소의 딸(윤치영의 조카이자 윤보선의 동생)과 결혼하여 이중사돈, 윤치소의 누나 윤노덕이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과 결혼하여 삼중 사돈이다. 그리고 이병도의 장인은 일본군 중장을 지낸 조성근이다.
이러한 개인가족사 외에도 조선사 편수회에서 일한 것 때문에 치암 신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친일인명사전 2권 876~877P). 사전에 등재된 그의 활동 내역은 1925년 8월에서 1927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일했으며, 그 이후 1938년 6월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또 청구학회 활동 경력도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이병도의 제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이병도 등의 진단학회 창설 경위가 청구학회에 편승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학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증언에 의하면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한 명인 이병도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9]라고 하여, 이부분은 함부로 속단하기 어렵고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 외에 역사왜곡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소속 기간이 상당히 장기간에 달한다는 점에서 친일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수사관보'와 '촉탁'의 신분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참여한 조선인 중 한 명이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역대 수사관보는 총 10명. 그 중에서 조선인은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등 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특히 조선사편수회는 스스로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직속으로 설치된 "하나의 새로운 독립 관청"이라고 규정했던 점이 있는 만큼 실제로 이병도의 이름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이병도는 교사생활 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한 것이었고, 무급으로 근무한 것과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 등으로 인해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도 하고 있다.
그 밖에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도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증거가 증언 밖에 없는데다, 이 증언이 정말 사실인지도 불확실하다.
사족으로, 흔히 웹상에서 볼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과 혼동된 결과로 추측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이병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다.

2.3. 기타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에 보면 1979년 매국노 이완용의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중인 관뚜껑을 이병도가 개인연구에 쓴다고 가져가서는 불태워 버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8선에 빛나는 그가 지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병도를 변명하는 입장의 이야기로는, 관뚜껑을 없앤 게 어차피 조리돌림 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 않나 말한다. 몇몇 이들은 이완용 때문에 평생 시달린 까닭에 이완용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어 사학자로서의 책임감을 버리고 개인 감정을 우선한 결과라고도 한다.
또 1984년 잡지 '학원'과 인터뷰에서 이병도는 이완용과 관계성을 부인하다 못해 이완용은 '익산' 출신이다라고 슬쩍 흘리는데, 이 말 때문에 실제로는 경기도 성남시 지역 출신인 이완용이 졸지에 전라도 반역향의 화신 쯤으로 지역감정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완용의 익산 출신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병도의 1984년 학원지 대담 사실을 주구장창 들고 나와 논쟁이 컸었다. 이완용과 이병도는 성남 판교의 우봉 이씨 집성촌이 고향으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이완용 생가에 대해 원주민 증언과 더불어 2001년 생가터를 확정한 사실이 있다. 물론 이완용과 이병도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이병도가 특혜를 받은 것도 적어도 드러난 것은 없어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지만, 위의 그의 행동들은 역사학자로서 온당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가 회장을 8선이나 하고 원로위원까지 역임한 학술원에서도 이완용과 관계성을 두고 뒷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서울대 총장은 이런 뒷말에 대해 이완용과 이병도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사실 이병도가 이완용 후손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쓰는 게, 어떤 곳에선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조카라고도 한다. 같은 편끼리도 말이 엇갈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단법인 모 단체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환단고기를 참된 역사라고 하며 최태영을 두둔하고 이병도 박사를 식민사학의 거두, 이완용의 조카라는 되도 않는 강의를 하고 있다.
다만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자택에서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는 이운구 성균관대 전 교수(우봉 이씨)의 증언과 더불어 사학자로 적절치 못한 부분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병도의 부친 이봉구는 1907년에 죽은 걸로 알려져 있어 집사를 언제 한건지는 사실 검증이 필요하다.
1956년에 김창룡이 암살당하자 그의 묘가 관악산에 있던 시절 그의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개였다가 건국 이후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개가 되어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의 온갖 전횡을 일삼은 김창룡을 비판하는 내용이 묘비명에 하나도 없고 호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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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근현대사학자 김삼웅의 칼럼에 의하면, 이병도는 1961년 5.16 군사정변국가재건최고회의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봉기했다"며 쿠데타를 미화하는 칼럼을 기고한 바 있었다.
그가 회장으로 몸담았던 진단학회에선 1980년부터 매년 '두계학술상'을 시상중이다.

3. 평가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전혀 없다. 이미 이병도 생전에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병도 자신이 '요즘엔 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생각 외로 학술적으로도 상당히 비판받은 부분도 많다.
특히 그가 일제시대 이래 계속 주장해 온 진한 = 한강유역설은 무리한 점이 많아 살아 생전에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대사 연구에서 지나치게 음상사(音相似)에 의존한 연구 결과들도 비판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 백제의 도성(하남위례성)을 둘러싼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논쟁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이 위치한 풍납리(風納里)를 '바람들이'로 뜻을 풀어서 바람들이→바람드리→배암드리와 같은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 유적이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0] 하지만 이후 고고학 조사 결과 나온 유물의 수와 토성의 규모는 풍납토성몽촌토성을 가볍게 발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주장은 폐기당한 상태다.
그리고 《역주 삼국사기》와 《역주 삼국유사》에서 보여 준 오역들과 70~80년대 사육신 논쟁에서 보여 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때문에 부산대 이재호 교수에게 엄청나게 비판받은 적도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한문으로 된 고전을 해석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은 현대 한국이 아닌,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역사학의 거장이라는 백남운도 정인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전을 오역했다고 할 정도이니.
물론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진 정당한 비판이니 억지로 점철된 환빠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게다가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꾸준한 비판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비판이 있다. 재야사학이라 자칭하는 환빠 들의 비판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실제로 이 비판을 시작한건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이다.
일단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 오히려 그는 신라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 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으로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백여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다. 여기서 말하는 건국연대는 왕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보인다. 백제 같은 경우 고이왕 대에 율령이 반포되었을 정도였다.
이렇듯이 해방 이후의 이병도에게서 일본 식민사학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주장. 되려 이병도 본인은 해방후에 식민사학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주장 관련 자료를 보면 이병도의 단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위만은 조선인이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도 이병도라는 것.
또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병도가 일제식민사학자들한테 이어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서북한 일대로 비정한 견해는 그 뿌리가 가깝게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일선동조론은 받아들이되, 이등 신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은 식민지 시절의 지식인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고, 위만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주국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라고 일축한다. 다만 위의 이완용 관련 사례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사학의 경우는 이병도의 개인사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에서의 이병도 비판은 백남운이 월북한[11] 한국전 시기 이후로는 정체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그분들이 그리 말했다는 식으로나 강의에서 언급된다.
해방 이후 친일 문제의 역사학적 평가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학자(+사회주의 사학자)들과 대립한 탓에 진단학회가 폭삭 무너진 경우도 있어서 평이 썩 좋지는 않다.
단 정치적 상황으로 봐서는 실증 사학의 사정이 나았다. 민족주의 사학자는 독립 운동과 직접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신채호, 박은식 등은 안정적인 학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저서 몇 권만을 남긴 채 사망하였고 일제의 직접적인 역사학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학계에서 신채호는 사상 문제로 반 매장 상태였고, 안재홍이나 정인보 등은 납북당했다. 사회주의 사학 또한 광복 이후 남한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백남운과 김석형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다. 물론 북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연구 성과를 낸 바 있으나 사상색이 섞이지 않는 게 사실상 힘든 상황이고 남한에는 더더욱 전해지기 어려웠다.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런 학자들이 살아있었다면 역사학의 방향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은 남는다.
한국사학계의 서울대학교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이들 주류 사학자를 서울대 학파라고 지칭한다. 학자들 본인은 강단 사학이나 서울대 학파라고 자칭하지는 않는다.
또한 김정호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속설(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처벌해서 옥사하고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웠다는 속설)을 처음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해당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병도를 비난하는 부류 중 환빠와 같은 유사역사학은 정작 이병도의 방식을 답습하거나, 오히려 이병도보다 더욱 후퇴한 방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유사역사학에선 시대에 따른 지명의 변천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글 독음만 같고 한자는 다른 지명을 동일시하면서 언어의 유사성에 따른 추론을 맹신하는데, 이는 이병도의 음상사 연구보다도 더욱 뒤떨어진 것이다. 또한 유사역사학은 혈통민족, 영토의 구분 및 관계를 매우 자의적으로 행하는데, 이병도의 앞서 말한 위만 조선인설과 같은 특유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이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4. 수상 경력


  • 충무금성훈장 (1954)
  • 서울시 문화상 (1955)
  • 대한민국학술원상 (1956)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 인촌문화상 (1977)
  • 5.16 민족상 (1979)


[1] 이완용 역시 우봉 이씨다.[2] 한국에는 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을 유포한 식민사학의 태두로 욕을 먹고 있는데 사실은 일본서기천황을 비롯한 일본 고대사에도 마찬가지로 실증을 들이댔던 사람이다. 그래서 1940년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당했다.[3] 1952년 4월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 이병도를 포함하여 6명에게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는데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수여한 최초의 박사 학위다. 같은 날 수여되었으나 학위번호 1호를 받은 전풍진 박사가 대한민국 박사 1호 타이틀을 가져갔다.[4] 허정 수반은 이병도와 보성전문학교 동창이었다.[5] 동구여중 및 동구마케팅고를 운영하는 사학재단. 1942년 김활란, 조석봉 등이 세웠다.[6] 동도중과 서울디자인고를 운영하는 사학재단.[7] 이병도가 사망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출간된 《역사가의 유향》에서는 말년에 투병 중이던 이병도가 최태영이 자신의 이름을 사칭한 것을 보고는 문병을 온 후배에게 "도대체 이럴 수가 있어?"라고 반문을 표했다는 증언이 실려 있다. 이병도는 학문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자부심과 고집이 강해서 자신의 주장을 갑자기 바꿀만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 또한 고려해봄직하다.[8] 다만 2006년에 그가 취임할 당시에 부친을 친일파나 식민사학자로 항의하는 반대 세력 때문에 큰 곤혹을 치르어야 했다. 학교 정문 앞에 '매국노 후손 이장무 개xx는 물러나라!' 식의 플래카드들이 걸려있고 스피커로 음악을 틀기도 했다.[9] 조선연구월보,14,1963 원 출처: 연속심포지엄 「일본에 있어 조선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 6 회,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을 중심으로>(32P), 조선연구월보 14, 일본조선연구소,1963.[10] 그 때문에 풍납토성 내에 아파트와 연립주택들이 지어져버렸다.[11]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인보의 납북도 친우였던 백남운이 주도하였으나, 정인보는 전쟁기의 납북으로 인한 여독으로 과로사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