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수

 

성명
고명수(高明秀)
생몰
1882년 ~ ?
출생지
황해도 황주군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명수는 1882년생이며 황해도 황주군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했고, 1918년 8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이흥삼(李興三) 등과 함께 연해주로 파병된 일본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1919년 10월 독립군 부대에 입대한 그는 러시아 내전 발발 후 야코프 이바노비치 트랴피친(Яков Иванович Тряпицын́)이 지휘하는 트랴피친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대적했다. 이후 그는 1920년 2월 말 트랴피친의 지휘하에 일본군을 몰아내고 니콜라옙스크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 트랴피친 부대가 니콜라옙스크에 거주하는 러시아인과 일본인을 대거 학살하는 데 관여했다.(니콜라옙스크 사건)
이후에도 학살을 일삼는 트랴피친을 보다못해 쿠데타에 관여하여 트랴피친을 처형시킨 그는 1921년 니항군대(泥港軍隊) 부관(副官)으로 극동공화국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일명 자유시)에 도착하여 고려혁명군 제2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무장 헤제를 거부하는 독립군을 체포하는 데 관여했고, 그 과정에서 독립군 960명이 사살되고 1,800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자유시 참변)
1922년 10월, 고명수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우르간의 한인분대 소속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 고려혁명군 본부의 명령으로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이후 소집된 지방대회에 고려혁명당 선전부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같은 해 3월 러시아 적군으로 편입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당 혁명중앙부 군사부 산하의 특립군대가 편성되자 특립군대 제1연대장이 되었으며, 6월에는 공산청년회 재무부장으로 고려공산당 간부 및 민회(民會)와 밀접한 연락을 갖기도 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고명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