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1. 개요
2. 학계의 용어
3.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군
4. 간도의 무장독립군
5.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
5.1. 전문가와 논문
5.2. 증거
5.3. 상식과의 일치성
6. 수라세프카의 진압과 실상
7. 사건 뒤
7.1.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
7.2. 김구 반공 원인 유언비어
8. 여담
9. 출처
10. 같이보기


1. 개요



1921년 6월 27일러시아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1]) 인근인 수라세프카에서 독립군 무장 병력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2]事變)이라고도 한다.
자유시에서도 벌어졌다고 인터넷에선 '''잘못'''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수라세프카에서 발생했다.[3]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했다는 출처불명의 썰이 있지만 실제로는 '''최소 36명'''이다. 이건 우익 성향의 역사학자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4]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사상자'''[5]를 수십명 단위로 본다.[6] 이 사건이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벌어지던 무장항일운동에 궤멸적인 타격을 준 사건'라는 썰 또한 사실이 아니며 자유시 사변 이전부터 간도독립군은 도저히 병력을 운영할 수 없어 '''이미 해산했다가 러시아로 가기 전에 집합시킨 것이다.''' 독립운동사 전문가 5인인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등이 검수한 국방부의 공식 견해 겸 공식연구서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서도 그 사실이 서술된다.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망자 272명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 사전의 참고문헌[8]은 모두 '''2010년대 이전 과거 학설'''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첫 참고문헌의 경우 자유시 참변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자유시 참변에 대한 실질적 참고문헌은 후자뿐이다. # 메인에 나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재외동포총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양측의 주장만 있고, 사망자 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서적에도 독립군측의 주장은 '''사망자 72명'''이다. #
아래 서술은 2017년 국방부의 공식연구서 및 공식견해, 2010년 윤상원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부터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의 논문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다만 아래 러시아 논문에서도 2010년대 이전 한국학계에서 지적된 독립군 내부 갈등이나 일본과의 외교 문제는 같이 언급되며 2010년 이전 한국 논문과 모순까지는 아니다. 극동공화국에서 3가지 문제를 섞어 모스크바에게 항의하고 있다. 모스크바와 다르게 현지인들에겐 독립군의 약탈과 폭행, 독립군의 세력갈등, 독립군에 의한 일본의 도발 정당성 문제 모두 위협적이었다.

2. 학계의 용어


2007년엔 주로 자유시 사변이란 용어가 선호됐다.

‘自由市 事變’,‘黑河事變’,‘黑河事件’,‘黑河慘變’등으로 불리기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혁명 이전 알렉세예프스크로 불리다가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을 지닌 스보보드니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그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자유시 부근에는 아무르강(흑룡강)의 지류인 제야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흑하사변’이라는 용어가 나온 듯 하다(金璟載 黑河事變의 眞相(1-3),독립신문,1922년 5월 6일 -6월 3일;윤상원, 自由市 慘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02,1쪽,재인용)그러나 자유시에 약간 떨어진 블라고베센스크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黑河시로 불리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흑사사변’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참변’이라는 용어는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에서 일어난 무장충돌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고 붙여진 용어이다. 그러나 단순히 무장충돌만이 아닌 사변을 전후하여 전개된 조선인 무장부대의 동향 전채를 서술하기에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지금은 대체로 자유시 사변이라는 용어가 일반적 으로 사용되고 있다'''(윤상원,위의 논문,1쪽).그런데 현재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모두 ‘자유시 참변’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고에서도 ‘자유시 참변’이라 지칭하겠다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학위논문(석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2007. 8, 1쪽

하지만 학계에선 2020년 기준으로 다시 "참변"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시 참변으로 국내학술지논문을 검색시 17건이 나오고, 자유시 사변으로 검색시 8건이 검색된다

3.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들은 독립군이 아니라는 루머가 있으며 심지어 한인계 러시아인 2세라는 인터넷 썰이 있는데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역사왜곡이다. 반공우익 학자의 논문만 봐도 이게 거짓말인 점을 알 수 있다.
실제 '''러시아 귀화인들 중에 적군에 들어간 인물은 극소수'''였다.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러시아사회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귀화 한인들로서는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는 것을 꺼려했다고 보여진다. 내전에서 소비에트 적군이 승리한다면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자신들의 지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교 출신들은 대부분 적군 편에 서기보다는 백군 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뒤에 살펴볼 호르바트 백군 내 한인부대에는 장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130)이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호르바트군에 들어가면서 진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수의 한인 장교들이 백군편에 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자료 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장교 출신으로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서 빨치산 운동을 했던 한창걸,오하묵 등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를 통해 시베리아 내전시기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던 한인 빨치산부대 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을 짐작할 수 있다.'''그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 즉 여호인이었다. 러시아지역 한인 빨치산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즉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들이 시베리아내전 시기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분적이었다. 부대에 미친 군사적 영향은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연해주로 온 군사지휘관들이나 간도에 설립된 여러 한인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군사적 소양을 쌓은 한인 청년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60~61 #

그리고 연해주의 한인들의 항일부대는 '''대부분이 독립군이었다'''. 반공우익 성향인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의 승리에는 파르티잔이라고 호칭되는 자발적인 민중들의 무장부대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파르티잔의 존재는 백군들에게는 분명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을 선동하는데 보다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는 민중의 무장부대를 그들 편에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무장부대도 결국은 볼셰비키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던 한인들에데 대한 해방의 메시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176~177

한인 무장부대는 만주에서나 '''노령'''에서나 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마다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한인무장부대의 목표가 아니었다. 한인무장부대는 우선적으로 무장역량을 강화해나가면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한인의 독립운동에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라는 명분 하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도 분명한 오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들로서는 '''민족해방운동이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한인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란 종종 그보다는 한인사회에 사회주의를 유포시키고 계급투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178~179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서도 조차 이들이 분명 독립군이 독립운동이 목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권희영 교수는 그 "한인무장부대"에 '''니항군대를 포함시키고 있다.'''[9]
니항군대가 독립군이란 것은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기타공공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인정하는 팩트다.'''

니항 부대

1920년 3월 조직되어 러시아 연해주 니항 전투에 참여한 '''재러 한인 독립군 부대'''. #

이들의 목적은 독립운동이였고 '''민족주의 성향의 무장단체였다.'''

니콜라예프스크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그 주변은 주로 채소밭 정원사들이었다. 단지 몇몇만이 상업에 종사했고, 몇몇은 부유한 가정에서 미숙련 노동자로 일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비밀 증류를 계속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평소의 관행에 따라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충돌이나 오해는 없었다. 천성적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그들은 러시아 정치 사건에 무관심했고 볼셰비즘에 관심이 없었다.

중국인처럼, 한국인들은 사업가들 중 한두 명만 제외하고는 마을을 보호하는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마을을 점령한 후 한국인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대가로 약속한 볼셰비키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한 한국 교사 박모 씨와 접촉했다.

'''민족주의 구호에 감염된 한국 젊은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 억압의 멍에에서 한국 국민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박의 선동적인 연설에 응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가 조직되었는데, 한국사회는 한국을 해방시키고 볼셰비즘 사상을 한국민 전체에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협회는 적군본부와 협상을 벌여 한국사회가 군사분견을 조직하고 무기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식 조약을 체결했다. 이 분리는 결국 한국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볼셰비키의 반대자들에 대한 트리아피친의 투쟁에 참여하여 별도의 한국 분리로 적군 본부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한국이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적군의 지원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조약은 붉은 군대 본부와 한국 사회 수반을 위해 Triapitsyn, Nina Lebedeva Kiashko 및 Sluchainyi가 서명했습니다.

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새로 결성된 한국 분리는 자원 봉사자들을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첫 주에 300명이 합류했다. 한국 분리는 중국인과 함께 트라이아피친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대담하고 두려움없이 니콜라벡을 지배할 수 있었던 주요 세력을 대표했다. 농민들 사이에서 모집된 당파들은 항상 어느 순간에나 가장 강한 쪽으로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덜 안정된 요소였다. 트리아피친은 그들의 기분과 소망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트라이아피친의 지휘하에 한국과 중국 분리는 항상 당파간의 불만을 억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4월 20일경에 일어난 일이다. 한국군 분리는 적군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군사 부대로 간주되었다. 규율은 매우 엄격했다.

5월 1일 이후, 트리아피친이 러시아 당파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감옥과 경비대의 경비원들은 한국과 중국 분리대에서 모집되었다.

책임직도 한국인들로 채워졌고, 공정하게 말하면 경호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들은 죄수들에게 어떠한 면죄부도 주지 않았다. 농민 당파의 관행과는 달리, 그들은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근무할 때 항상 술이 깼다.

'''이들이 스스로 맡은 의무를 수행하는 데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이 분견대는 조국을 사랑하며 볼셰비키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고, 오직 그 도움으로만 한국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젊은 한국인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한국 당파들은 징발, 몰수, 약탈, 강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트라이아피친의 손에 졸개들이 있었다.

* * *

'''니콜라예프스크의 대피와 마을의 파괴 동안, 중국과 한국의 분리는 트라이아피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가장 큰 사형 집행자였다.''' 5월 초부터 트라이아피친은 더 이상 농민 당파를 신뢰하지 않고 한국인에게만 책임 있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들은 Triapitsyn과 함께 Kerbi로 떠났고, 일부는 타이가에 흩어져 있었고, 다른 일부는 붉은 분리를 따라 Blagoveshchensk로 갔고, 그들은 붉은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원문

The Koreans living in Nikolaevsk and its environs were primarily vegetable gardeners. Only a few were engaged in commerce, while some worked as unskilled laborers in wealth-ier households. Some Koreans carried on clandestine distilling. The Russian people, according to their usual practice, were friendly toward the Koreans; there were no clashes or misunderstandings. Hard-working by nature, they were indifferent to Russian political events and had no interest in bolshevism.

Like the Chinese, the Koreans did not participate in the volunteer force protecting the town, except for one or two individuals from among the businessmen.

After occupying the town, the Bolsheviks set out to attract the Koreans to their side. They contacted a Korean teacher, Pak, who, taking advantage of his influence among the Koreans, persuaded them to participate in the activities of the Bolsheviks who promised in exchange to help liberate Korea from the Japanese.

Korean youths, infected by nationalist slogans, res-ponded to the inflammatory speeches of Pak, who promised that Soviet Russia would help to liberate the Korean people from the yoke of Japanese oppression. As a result, a Korean Society was organized, whose aim was to free Korea and to spread the ideas of bolshevism throughout the Korean population. The Society entered into negotiations with Red Army Headquarters and signed a formal treaty, which permitted the Korean Society to organize military detachments and acquire arms. These detachments were to be sent eventually to Korea. Until then they were to take part in Triapitsyn's struggle against the opponents of the Bolsheviks and be at the disposal of the Red Army Headquarters as a separate Korean detachment. Red Army assistance would not cease until such time as Korea became an independent state.

The treaty was signed by Triapitsyn, Nina Lebedeva Kiashko, and Sluchainyi for the Red Army Headquarters and by the head of the Korean Society.

As soon as the treaty was concluded, the newly formed Korean detachment began signing up volunteers. Three hundred joined during the very first week. The Korean detachment, along with the Chinese, represented the main force with which Triapitsyn and the people surrounding him were able to dominate Nikolaevek, boldly and without fear. The partisans recruited from among the peasants were a less stable element, because they were always ready to crossover to the side which was strongest at any given moment, a situation that made it necessary for Triapitsyn to consider their moods and wishes.

At Triapitsyn's command,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could always suppress discontent among the partisans. This is exactly what happened around 20 April. The Korean detachment was considered to be the most reliable military unit of the Red Army. Discipline was very strict.

After 1 May, the guards at the prison and the guardhouse were recruited from the Korean and Chinese detachments, because Triapitsyn had become suspicious of the loyalty of Russian partisans.

Responsible posts were also filled by Koreans, and, to be fair, they carried out their guard duties excellently. They did not permit any indulgences to the prisoners. Contrary to the practice of the peasant partisans, they never left their posts and were always sober when on duty.

The attitude of the Koreans toward performing the duties which they took upon themselves is explained by the fact that the detachments consisted exclusively of young Koreans, who loved their motherland and sincerely believed that only the Bolsheviks could help them and that only with that help could Korea obtain its freedom.

Korean partisans did not take part in requisitioning, confiscating, plundering, or coercing. They were unquestioning pawns in the hands of Triapitsyn.

* * *

During the evacuation of Nikolaevsk and the destruction of the town, the Chinese and Korean detachments were of great service to Triapitsyn. The Koreans and the Chinese were the chief executioners in carrying out the mass death sentences. From the beginning of May, Triapitsyn no longer trusted the peasant partisans and gave responsible duties only to the Koreans. They left with Triapitsyn for Kerbi, where some of them scattered into the taiga, while others went along with the Red detachments to Blagoveshchensk, where they joined the Red Army.

Anatoly Yakovlevich Gutman 지음, Ella Lury Wiswell 번역 겸 서문, Richard A. Pierce 편집, 1993,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Alaska Limestone Press, 122-124쪽 부흥카페 재인용

4월 말 무렵, 일본인의 진격에 관한 전보가 도착하기 시작했고, 방어를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분리가 강화되고 그들은 한국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후자와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영토에 군대를 구성하고 훈련시키는 대가로, 그들은 '''나중에 한국의 독립을 얻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받았다'''. 동시에 전체 인구가 동원되었다. 살인과 사격은 약간 축소되었지만 계속되었고, 처형 전에 문장이 발표되었다.

원문

Toward the end of April, telegrams concerning the advance of the Japanese began to arrive, and measures for defense were taken. The detachments were reinforced and they began to train the Koreans. Incidentally, an agreement was concluded with the latter, according to which, in exchange for their assistance, they would be allowed to form and train an army on Russian territory, and they were promised help in obtain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later. At the same time the entire population was mobilized. Killing and shooting continued, although on a slightly reduced scale, and sentences were announced before execution.

“TESTIMONY OF EVGENY IVANOVICH VASILEVSKY, Former Tax Assessor in the Nikolaevsk District”, Evgeny Ivanovich Vasilevsky, Nikolaevsk―on―Amur, 13 July 1920, Anatoly Yakovlevich Gutman 지음, Ella Lury Wiswell 번역 겸 서문, Richard A. Pierce 편집, 1993,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Alaska Limestone Press, 237쪽 부흥카페 재인용

'''니항군대는 민족주의 성향이었으며 조국인 한국을 사랑했고 조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적군에 협력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동휘가 지휘한 상하이파 소속이었고 만주에 인맥이 있는 집단이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천여 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에펨코 번역 재인용

그리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학술서에 의하면 박일리야가 주요인물인 대한의용군은 1921년 3월까지 '''상해임시정부를 봉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정치적 차이

대한의용군: 상해임시정부 봉대(21.3까지)

고려혁명군: 대한국민의회 봉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8쪽

그리고 이 니항군대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독립군이기도 했다.
트랴피친의 군대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적군이었다.

금속노동자 출신인 트랴피친은 니콜라예프스크의 공격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20대의 매력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며 '''무정부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176~177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서 완충국가의 성격을 지닌 극동공화국을 수립해야할 필요성을 보다 확시킨 계기는 1920년 3월에 발생한 소위 '니콜라옙스크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무정부주의적 극단주의자인 트랴삐찐의 지도하에 일련의 빨치산 부대와 이 지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수비대와의 무력충돌로 인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일이다.

홍웅호, 극동공화국 건설에 나타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단면, 大東文化硏究(Journal of Eastern studies ) Vol.0 No.52 [2005], 408 #

'''러시아빨치산부대는 금속공 출신의 아나키스트 트랴삐친Ya Triapitsyn'''·레베데바N.Lebedeva Kiyashko·나우모프Naumov등이 이끌고 있었다.

반병률,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1920년 1월 하순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던 야곱 트랴피친이 지휘하는 약 4천명의 빨치산 부대는 니콜라옙스크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했고, 빨치산과 일본군은 2월 말 휴전에 합의하였다.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8쪽 부흥카페 재인용

'''아나키스트 야코프 1세의 게릴라 부대'''. 소비에트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트라이아피친은 1920년 1월 이 도시에 접근했다. 일본 수비대와 합의가 이루어졌고, 부대는 입국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붉은 게릴라들과 지역 주민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지속되지 않았고, 곧 군인들은 체포되어 처형된 백인 운동에 동조하는 개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원문

The guerrilla unit of the anarchist Yakov I. Tryapitsyn, who formally recognized the Soviet regime, approached the city in January 1920. An agreement was reached with the Japanese garrison, and the unit was allowed entry. The peaceful coexistence between Red guerrillas and the local population did not last, however, and soon the soldiers launched a hunt for individuals sympathetic with the White Movement, who were arrested and executed.

Sergey V. Grishachev · Vladimir G. Datsyshen, 「Allied Intervention in the Russian Civil War and Japanese Troops in Russia’s Far East, 1918–1922」, 『A History of Russo-Japanese Relations.』, Brill, 2019, 145 부흥카페 재인용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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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에 일부 아나키스트가 적군 소속으로 활동한 건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인지된 사실이다.

볼셰비키에 대한 적극적 저항에서 수동적 중립성 또는 열렬한 참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결국에는 다수의 아나키스트가 백군에 포위당한 볼셰비키 정권에 다양한 지지를 보냈다.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대부분 공식적으로 볼셰비키와 제휴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적극적인 비난을 삼가고 우익의 해악성이 제거될 때가지 ‘제3의 혁명’을 연기했다. 심지어는 가장 호전적인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중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레닌의 당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대자들이 더욱 많았으며 마지못해 비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분파가 있었고, 더 심한 경우 몇몇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그룹은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볼셰비키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회적 흡협귀’를 즉각 전복할 것을 호소했으며 (브리안스크 연합처럼), 또는 지하 아나키스트들의 경우처럼 공산당 관리들에 대한 테러리즘 운동을 벌이는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120쪽 부흥카페 재인용

빌 샤토프가 그 점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인물이었다. 내란이 벌어지는 동안 샤토포는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원으로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열성으로 레닌 정부에 봉사했다. 1919년 가을, 적국[붉은군대] 제10사단의 장교로서 그는 이우데니치 장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그는 아나키스트와 친밀한 급진주의자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슈체코프에 의해 치타로 소환되어 극동공화국의 운송상이 되었다.

[중간생략]

'''샤토프 외에도 많은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적군[붉은군대]에 복무했다. 테러와 반란의 경력으로 유명했던 위스틴 주크와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었다'''. 군수품 수송대의 지휘관인 젤레즈니아코프는 1915년 7월[1915년은 편집자 오타임] 데니킨 포병대의 포화에 의해 에카테리노슬라브 근방에서 살해되었다. '''소비에트 중앙 집행위원회의 알렉산드르 게는 체카의 고급 간부로 일하던 코카서스에서 백군의 군도에 찔려 죽었다.'''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121~123쪽 부흥카페 재인용

1918년 1월, 의원내각제에 대한 강렬한 적의로 무장한 아나키스트들이 전투분견대를 이끌고 제헌의회를 해체시켜 버림으로써 단 하루만에 그 생명을 끊어버린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볼셰비키 신정부의 명령에 따라 타우리제궁서의 수비대장으로서 새로 임명되어''', 크론스타트 해군기지로부터 온 수병 젤레즈니아코프는 위협적인 코멘트와 함께 빅토르 체르노프를 해임했다. “당신은 너무 지쳤소.”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65쪽 부흥카페 재인용

10월 혁명 후 젤레즈니아코프는 타우리제 궁을 지키는 수비대장―한 목격자의 설명에 따르면 “어깨를 가로질러 딴띠를 요염하게 걸치고 벨트에는 수류탄을 눈에 띄게 매달고 있던―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볼셰비키의 명령에 따라) 제헌의회의 수명을 끝장냈다'''. 이 모든 게 그의 능력이었다.

아나키스트가 이 역할을 맡았던 건 적절해 보인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정부의 반대자로서 짜르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거부했던 것만큼 열렬하게 대의민주주의도 대체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루동이 말했듯이 보통선거권은 반혁명이고 의회는 기만과 타협의 소굴이며 중·상류계급이 노동자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어다. 소수의 예외(그 중 한 명이 크로포트킨)가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이 다른 혁명집단의 “의회물신주의”라고 부르던 입장을 비난했고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제헌의회를 비판했다.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2004,『아나키스트의 초상』,도서출판 갈무리, 188~189 부흥카페 재인용

사할린 부대(니항군대가 주도한 대한의용군)에게도 아카니스트 성향이 있었다.

세계 혁명의 화염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갈 생각을 진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공적은 '''무정부주의 사할린부대가 해산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에펨코 번역 재인용

니항군대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에서 러시아 민간인 학살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이 러시아 민간인뿐만 아니라 같은 한인도 학살했다'는 인터넷 썰이 떠돌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확인한 결과 그 출처의 정체는 '''루리웹''' 인 것으로 확인됐다. # 루리웹에 별다른 출처 없이 올라온 글이니만큼 신빙성은 낮고, 지금까지 확인된 논문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내용이다.
참고로 사할린부대(니항군대)와 갈등관계였던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부터가 아나키스트 성향의 적군 지휘관이었다.(...)

슈먀츠키는 한인부대를 가능한 한 빨리 극동공화국으로부터 벗어나서 조선 쪽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으며 무장부대들을 통합하기 위해 창설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으로 조지아 출신인 깔란드라쉬빌리를 파견하였다. '''깔란드라쉬빌리는 극좌 무정부주의자로서'''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극동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그는 슈먀추키와 이르쿠츠크파 빨치산부대장 오하묵, 최고려 등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공공연하게 벌이려고 했다.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의 정세 오판과 사욕이 빚은 비극. ‘자유시 참변’의 진실


4. 간도의 무장독립군


간도독립군은 러시아로 피난을 갔는데 이유는 만주지역 내 활동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부터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00~201 #

'''국방부'''부터 이것을 인정한다. [10]

1920년대 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4~95 #

그리고 간도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군대 유지가 불가능해서 이미 해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로 갈 준비를 위해 재집결을 한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사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 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김좌진홍범도'''가 1920년 12월에 발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78~79 #

그리고 간도독립군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고 잘못알려졌으나 이것은 2009년이후 부터 부정되고 있다.
이점은 유료논문뿐 아니라 무료로 열람 가능한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
  • 이숙화, 大倧敎의 민족운동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17.2 #
당사자인 독립군 회고록에도 없는 내용이고(윤상원) 일본군도 유언이라며 내부에서 부정하고 있다.(이숙화)
'''당사자인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이 다 부정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아래와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부대가 밀산에서 단일한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후 이동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가 부합되지 않다고 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6쪽 #


5.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



5.1. 전문가와 논문


이 논문은 에펨코, 부흥카페 어느 이용자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인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의 논문을 번역업체에 의뢰해 얻어난 번역물로서 "허락을 일일히 받을 필요 없이 출처 링크만 건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된다고 당사자가 허락하고 있다. 에펨코 2020.07.28 18:49 덧글, 부흥카페 2020.07.28. 05:50 덧글 그러나 번역물을 의뢰했던 이용자는 조건을 전제했는데 반드시 링크의 출처를 제시해야한다. 그 이유는 '''번역의뢰 했던 업체에 대한 번역 표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퍼가기를 할 시에는 반드시 링크를 출처로 가져가야한다.
다음은 에펨코, 부흥카페 이용자가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던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의 논문 중 자유시 사변(아무르 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원래 칼란다리시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인데 여기에 자유시 사변(아무르 사건)에 대한 내용이 비중있게 나온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 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 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 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 년 1 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 년 3 월 11 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 상동. L.69 )

다음 날, 슈먀츠키는 새로 임명된 라핀 인민혁명군 총사령관과 회담을 진행하면서 조선혁명군들의 성공적인 단합을 위해서는 “가장 야비한 적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총사령관은 이에 동의하며, “숙청은 진행될 것이다. 다만, 무단으로 소집된 군사협의회의 영향을 받은 부대에서 발생한 일부 불미스러운 일들은 해독제로서 어느 정도는 허용하고, 그러한 영향이 당신에게서 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칼란다리시빌리를 조속히 파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50 :상동. L.70 ) 그리고 5 월 10 일 슈먀츠키는 라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칼란다리시빌리와 한인부대 혁명위원회의 임무는 “범죄적 민중선동을 일삼는 박 I와 한인부대의 다른 모험가들을 어떻게 징계할 지, 또는 (모두) 쓸데없으니 (그들을) 풀어주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슈먀츠키는 ‘할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라핀은 조만간 특별사할린부대 유격대원들에 대한 주민들의 새로운 불만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51 : 상동. L.71, 76 )

칼란다리시빌리는 조선군사혁명협의회 의장과 한인부대 총사령관 직에 임명되어(하묵은 부총사령관이 되었다) 5 월 19 일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슈먀츠키는 그에게 광범위한 임무를 부여했다: “칼란다리시빌리의 임무는 중국 마적떼('홍후즈')를 동원하여 조속히 완충지대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이들 조직의 관리는 중국공산당의 조력을 받게 될 오홀라에게 맡겨졌다. 홍후즈 마적떼의 임무는 한인부대들을 위해 완충지대를 벗어나 경계를 벗어날 때 최소한 그 후방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간섭주의 작전은 운게른 부대와의 전투 맥락에서 계획되었다: 당시 슈먀츠키는 운게른과의 전투를 위해 500 여명의 병사로 구성된 쉐틴킨의 부대를 몽골로 보냈다. (52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 )

라핀 총사령관은 1921 년 5 월 21 일 크라스노쇼코프 극동공화국 대통령에게 자유시 아래 위치한 크라스노야로보와 마자노보에 한인유격대원 1500 여명이 주둔해 있고, 그 지휘부는 한국에서 활동하다 일본군에 의해 격파된 후 극동공화국으로 떠난 일본 및 중국군의 전 한인장교들과 부대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이 임명한 지도자들을 인정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4 월에서 5 월까지 크로스노야로보 부대는 이르쿠츠크에서 온 한인연대로 보강되었다(500 여명이 넘는 병력, 러시아군대 한인 장교로 구성된 군간부들은 '연대 전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매우 신뢰할만 했다'.) 라핀은 이 연대로 사할린 부대를 보강함으로써 나머지 부대의 '심리적 요새'가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부터 강력한 체포권을 부여받은 칼란다리시빌리는 1921 년 6 월 9 일 '한인부대가 (그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는다'고 자유시에서 전해왔다. (53 : 상동. L.88, 95 ) 합당한 권한을 부여 받은 야심에 찬 칼란다리시빌리는 불복종에 대한 대응으로 신뢰할 만한 이르쿠츠크 연대에 의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반혁명주의자들'로 신속하게 처리해버렸다. 블라고베쉔스크 인근 수라줴프카 마을에서 조지아 '권력층'의 지휘 하에 만행되어 블류헤르 인민혁명군 차기 총사령관에 의해 제지된 6 월의 '아무르 대학살'로 인해, 트랴피씬 한인유격대의 범죄성을 도외시했던 현대 연구가의 과장된 정보에 따르면, 피살, 익사, 실종된 반란군은 400 명 미만,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군' 표시를 달고 러시아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간 반란군은 900 명에 달했다. (54: 박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1917-30 년대 말). M., 이르쿠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1993. p.73-91 ) 또한 수 백명의 유격대원이 사망했으며, 한인사회는 사할린부대에 가해진 징벌에 분노하고 있다고 레닌에게 전해왔다. (55 : 불다코프 V.P. 유토피아, 침략, 세력. 혁명 이후의 사회심리적 동향. 러시아, 1920-1930 년. M., 2012. p.601 )

한편, 극동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 년 7 월 16-19 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 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고 전했다: “스보보드넨스키 지역에서 사령관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할린부대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명령은 부대 내에 반형멱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었다. 충돌로 인해 부대 총 인원 1026 명 중 830 명이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일부는 도주했다.”(56 : 6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372. Op. 1. D. 114. L.68 )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한인 36 명이 사망하고, 60 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 실종자는 60 명, 무장해제된 자는 860 명에 달했다. (57 : 토루쿠노프 A.V. 한국사(새로운 관점). M., 2003. P. 303-304 ) '실종자' 중에는 도망자들이 우세했다(박은 70 명의 병사와 함께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홍호자들과 함께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 보고서는 사령관들이 제 5 군 군사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던 이미 무장해제된 한인들에 대해 징벌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르사변’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

칼란다리시빌리는 여전히 볼셰비키의 관심 대상이었던 한인의용대의 징계 임무를 수행했다. 1921 년 1 월 중순, 국경을 통과하는 모든 한인 유격대원들을 '일본 정탐꾼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러 낼 것'을 요구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은 1921 년 6 월 29 일 한인부대와 인민혁명군의 무장 충돌 소식을 듣고, 블류헤르 총사령관에게 계속해서 한인부대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58: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17. Op. 13. D. 288. L.6, 100 ) 외교인민위원회도 의견을 같이했다. 1921년 7월 초, 치체린은 중앙위원회 극동국에 한인부대 사건에 관한 세부사항을 전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들에게 신중하지 못한 분별없는 행동이 가해진 것은 분명하니,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 한인들이 극동공화국에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나, 그들을 해산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들이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르쿠츠크로 보내야 한다.”(59 : 상동. F. 372. Op. 1. D. 87. L.153 )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 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 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 2 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60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2. D.44. L.207, 213 )

세계 혁명의 화염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갈 생각을 진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공적은 무정부주의 사할린부대가 해산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극동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공화국 인명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 하며, 1921 년 6 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부흥카페 제공, 에펨코 제공

이 논문에 의하면 현지에서 진압당한 이유는 독립군들이 심각한 약탈, 테러, 폭동을 저지른 탓이고 그러나 독립군들이 현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벌인 폭력은 수라세프카의 진압 이후 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 농민들은 독립군을 "제2의 사무라이"로 취급했다.'''
이 논문은 전문가의 논문이란 것이 중요하다.

만약 비전문가가 역사학자에게 반박한다면 그건 귀납적으로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논의되는 문제에 관해 관련 지식을 가질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말이 참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이다."(앤 톰슨 지음, 최원배 옮김, 2012, 『비판적 사고: 실용적 입문 3판』, 서광사,128쪽) 그러나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는 분명 전문가다.

견해의 신뢰성: 다른 분야가 아니라 해당 전문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의 견해에는 신뢰성이 있다. (앤 톰슨 지음, 최원배 옮김, 2012, 『비판적 사고: 실용적 입문 3판』, 서광사, 128~129) 출처의 신뢰성: 다른 분야가 아니라 해당 분야에 전문 지식이 있는 전문가인 사람이 출처라면 신뢰성이 있다.(알렉 피셔 지음, 최원배 옮김, 2018, 『피셔의 비판적 사고(제2판), 서광사, 129쪽)

논리적 오류성 여부와 건전성: 분야가 다른 전문가의 주장을 근거라 제시하는 건 오류다. 하지만 해당 분야에 전문가의 사람의 논문을 근거로 제시하는 건 귀납적으로 건전하고 바람직하다. '전문가니깐 무조건 진리다'같은 궤변만 아니라면 사실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아니다. (서정선, 2002, 『논리학의 첫걸음』, 서광사, 87~88) (한상기, 2007, 『비판적 사고와 논리』, 서광사, 304~306) (김희정·박은진, 2008, 『비판적 사고를 위한 논리』개정판, 아카넷, 175~177) (irving M. copi·carl cohen·kenneth mcmahon 저자, 박만준·윤진각 옮김, 2015, 『논리학 입문 - 제 14판』, 도서출판 경문사, 172~173쪽) (로버트 바움 지음, 전재원 옮김, 2016,『비형식 논리학』원서 제4판, 이문출판사, 253~256) #


5.2. 증거


  • 러시아로 망명하는 독립군이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현지 러시아인 군인들이 보인 반응들
간도독립군들은 대규모로 러시아로 피난온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만주침공 때문으로 일본군의 침공과 학살 탓에 간도에서는 투쟁이 불가능해졌기에 망명을 간 것이다.
당사자들부터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 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00~20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부터 이것을 인정한다.

1920년대 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4~95 #

그리고 간도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군대 유지가 불가능해서 이미 해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로 갈 준비를 위해 재집결을 한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사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 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김좌진홍범도'''가 1920년 12월에 발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78~79 #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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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제2군을 무시하고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의 위기라서 '''타국가의 영토에 이동하는 처지이면서 일부 독립군은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에 들어가려 했다.'''
독립군이 현지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며 러시아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차단하며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하며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현재 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할 거면 여기로 오지말고 만주로 가라고 요구한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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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군인들이 제발 오지말라고 계속 요구하는데도 2개월 이상이나 국경지역에서 요구를 무시하며 무장하고 들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압권이다.
이후 전개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그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받았다.[11]
자유시로 이동해온 간도 독립군들은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대한의용군으로 들어갔다.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다반군대·니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인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이중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 [12] 참고로 대한의용군=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이다.[13]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14]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15] 그러니깐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에펨코 재인용
  • 마자노프에서 벌어진 독립군 폭동과 약탈
무장독립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는데 현지 러시아인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었다. 러시아 농민들에겐 무장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할 이유가 없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현지 러시아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며 폭력을 일삼았다.
현지 러시아 농민들은 무장 독립군에게 분노하며 현지 간부들에게 호소와 항의를 했고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서 독립군과 '''현지 러시아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총사령관 에이헤는 4월 23일부터 이미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한다.
총사령관 에이헤는 4월 23일부터 이미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치타.

1921년 4월 23일 20시

전보

이르쿠츠크.

제5군 혁명군사호의 위원 슈먀츠키 귀하.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의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제369호

총사령관 에이헤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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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농민들이 한국독립군을 거부한다는 건 독립군 본인들의 보고서에도 나와있다.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 본부.

1921년 5월 7일

제2군 사령관 및 정치위원 귀하.

(……)현 시점에 부대가 식량문제로 위기상황이 있고 그 때문에 '''농민들과의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갈등은 수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비록 3일간이라도 부대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식량은 스보보드니 식량기지에도 배급지점에도 없습니다. 스바보드니 식량기지에서 수령한 200푸드의 밀가루는 스바보드니 시의 보급창에 쌓여있는데, 운송수단도 없고 '''농민의 완강한 협조 거부 때문에 각 부대로 배급할 수 없습니다.''' (……)』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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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집회 위원들이 총사령관에게 보낸 청원이다.

당집회 위원들의 총사령관에의 청원

1921년 5월 13일

총사령관 귀하

부탁이 있습니다. 즉각 [판독불가]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에 3,000명이 있는데 3개월간 주둔하고 있습니다. '''면 주민들은 가난하며, 이들이 새로 정주한 병사 3,000명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향후 그들이 계속 주둔한다면 들판에 뿌릴 종자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부대는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체포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는 무장충돌의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귀하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당집회 위원 안친페로프, 데예야토프, 프로야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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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치특사가 보낸 보고서이다.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블라고베센스크 제01928호

1921년 5월 14일

전보

치타. 총사령관 귀하.

창립회의 아무르 위원들이 마자노보에서 타전합니다. 마자노보 지역에서 숙영하고 있는 '''한인부대가 주민들에 대해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대해 근거 없는 체포 및 폭력을 자행'''하고 지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저녁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여 그럼으로써 현재 아주 늦게 끝나는 농민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지시를 어기고 '''한인부대는 주민들에게서 계속 식량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창립회의 위원들은 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대립이 극단적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알리면서 한인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위한 실제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본인에게 타전하시기 바랍니다. 제178호.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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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가 한국독립군과 지역주민 사이의 관계를 보고한 보고서이다.

독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배치된 곳의 '''지역주민들은 부대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대 철수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 및 내부적 성격의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인부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합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악화되면 농민과 한인부대 간의 전면적 투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 652호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참모장 시코미

암호해독: [판독불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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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은 제2군 사령관에게 한국독립군이 일반주민에게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치타. 1921년 5월 14일.

제2군 사령관 귀하.

사본은 제12여단 정치위원에게.

'''특별사할린부대 한인 빨치산들이 일반 주민들에 자행하는 난동과 강압에 대한 불평등이 또다시 본인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은 생존을 위한 정상적 조건 보장이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내는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하에게 직접 이 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부과합니다. 동시에 혁명 질서의 유지와 감독을 위해 부대에 대리인을 파견하십시오. 귀하의 조치들로 인해 본인이 부대에 대한 불평을 듣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A. 라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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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라제프카 진압(자유시 참변) 이후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한인의 폭동, 우리 부대에 의한 그들의 무장해제, 대포가 동원된 12시간의 전투 및 인민군 지휘간부 및 병사의 손실은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에게 아주 답답한 기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지시들로 우리 지휘부의 조치에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주입한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는 폭도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를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대는 방탕, 약탈, 무자비한 폭력 같은 것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에는 6월 29일 집회를 소집한 칼란다리시빌리는 제4사단장 파데예프 문제를 집회에서 다룰 것이라고 직통전화를 통해 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금 진압된 폭동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 덕분에 다시 시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를 1년 이상 알면서 가끔 그와 함께 일한 우리는 그의 할동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한인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우리 부대에겐 이미 두 번째 일입니다. 그들의 재무장은 아무르 주민들이 이미 충분히 겪은 반란과 강도행위를 다시 야기할 것이며, 향후 자기 지역에서 칼란다리시빌리 부대 같은 것의 주둔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각 칼란다리시빌리를 제2군 사령부에 완전히 복종케 하거나 아니면 그를 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주민과 군이 폭동과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요청합니다.'''

제2군 사령관

군정치위원

군참모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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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상식과의 일치성


위의 설명된 논문과 증거들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게 없다시피하다. 식량지원 없는 독립군이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과 비우호적인 관계인데 현지에 지속적으로 주둔한다면 당연히 저런 사태가 벌어진다.
위의 논문들과 증거들을 부정한 가설을 말이 되게 제시하기도 불가능하다.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이 비협조를 하는데 독립군이 약탈과 폭동을 안 했다면 러시아 영토에서 어떻게 식량을 조달하는가? 일본군이 점령한 간도에서 러시아까지 식량을 운반하는가? 증거가 없어도 독립군의 약탈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논문과 증거까지 있으니 부정할만한 현실적인 가설도 없다.
보급 안되는 군인들이 벌이는 짓은 어디나 다르지 않은데 아예 타국에서 타국민과 있으면, 특히 약탈이 아니라면 식량 조달을 설명할 수 없다. 십자군 전쟁부터 신념은 있는데 보급은 없는 민병대가 어찌되는지 보여준다.
애초에 독립군이라는 게 결국은 민간인 무장단체이며 타국에선 위험한 집단인데 타국에서 통제를 무시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가만히 두는 게 오히려 이상하고 생각해보면 무장해제 거부가 황당한 행위다. 애초에 남의 땅 들어가는데 무장 그대로 하고 지휘는 받기 싫다고 하는 것이니 그 나라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6. 수라세프카의 진압과 실상


[image]
자유시 사변 현장 약도
(출처: 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
[16]
인터넷 썰에 의하면 자유시 참변(본문에서 설명된 것처럼 학계에서의 용어가 아님.)에서 독립군이 최소 96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자가 19명 박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 34명 기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자1명 29연대 사자 1명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그러나 권희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최소 사망자는 36명으로, 최소 960명이라는 인터넷 썰과 매우 다르다.
게다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인 상해파의 일원이었던 계봉우 역시 후에 자신이 집필한 회고록인 <조선역사>에서 사망자가 36명이었다고 못박았다. 이는 36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는 주장이다.

(자유시 사변의)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36(구)의 묻음(무덤)을 보게 되었고''' 投江(투강)한 人數(인수)에 있어서는 제야강에 물어야 할 터인데, 제야강은 말없이 밤낮에 흐를 뿐이다. 합동민족군대는 의용군 측의 대소 장교 20여인을 포로로 하여 가지고 이르쿠츠크로 회환하였다.

『조선역사』 권3, 133~134쪽

그리고 최근에 2018년 러시아 역사학자의 논문이 번역됐다. 여기에 의하면 인민혁명군이 진압한 이후에도 계속 약탈했다고 나온다.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 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 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 2 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60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2. D.44. L.207, 213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teplyakov-alexey@rambler.ru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에펨코 번역 재인용

그리고 중요한 게 또 있는데 '''진압현장에 간도 독립군 대부분이 없었다.'''

임시군정의회는 계속해서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그리고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584) 6월 6일 깔란다리쉬빌리가 까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깔란다리쉬빌리였고,두 명의 위원은 최고려와 유동열이었다. 극동비서부에서 전권위원으로 오홀라가 동행했다.그는 슈먀츠끼로부터 극동공화국 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았다.585)이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가게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들은 군정의회를 중심으로한 통합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홍범도와 안무,최진동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高麗革命軍 교관으로 선임되었다.586)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 간도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했다.이는 곧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한 것이었다.이로 인해 군정의회는 통합에 있어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쥘 수 있었다.그렇다면 이동휘 및 한인부와 관계를 맺으며 자유시로 온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589)그러나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무엇보다 단일한 조직과 규율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90) 그리고 그 통합은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 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하”는 것이라고 했다.때문에 자기들은 “軍政議會의 本部와 某軍隊 駐屯地相距가 一百七八十里 되난지라 食料 及 諸般 供給에 對하야 運搬上 不便이莫大함으로 該軍隊를 軍政議會 近接 村落으로 移屯하라”는 군정의회의 명령이 정당함을 양해하고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591)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간도에서 옮겨온 무장부대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것은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까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의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또한 '''마자노프에 있던 사할린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까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

상황은 타민족 무장 독립부대를 받아들인 극동공화국 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간의 주도권 갈등이 거세지면서 사안아 더욱 복잡해졌다. 이때 '''홍범도와 최진동 그리고 안무 부대가 전체 한인부대의 통합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에 힘을 실어주자''' 대한의용군의 상해파가 북간도로 회귀한다고 결정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7쪽#

6월 28일 무장해제의 과정 수라세프카에서 발생했다.[17]
'''간도독립군 중 수라세프카에 주둔한 독립군은 소수.''' 현장에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군대 병사들이었음"으로 사망자 중 간도독립군이 대부분인 것은 맞는데[18] 그 간도독립군인 허재욱의 의군부는 정작 간도독립군 중에서 소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 등 대부분 간도독립군은 이미 수라세프카에 없었다.
그나마 사상자 수십명이 생긴 이유도 러시아어를 못해서 언어소통을 못한 것도 중요 이유였고 진압측도 별로 사상자를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래 논문에서도 사상자는 '''수십명이라고 서술한다'''. 수백명 단위가 아니다.)

아무리 화력의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할린부대측에서 적극적인 무력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살펴본 김재규의 회고도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김재규는 이후 깔란다리쉬빌리로부터 “왜 기관총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없이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깔란다리쉬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들을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9)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640) 또한 '''군정의회측 또한 살상을 통해 무장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희생자는 거의 자유시수비대 29연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앞서살펴보았듯이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8쪽


7. 사건 뒤



7.1.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


자유시 사변 이후 사건으로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김좌진 계열이 김규식의 군대가 러시아 농민 4인을 총살한 사건으로 무장해제 당하려하자 목능현으로 도망갔다가 중국군에게 무장해제 당한 사건이다. 러시아 농민 4인 살인사건은 일본의 문서와 고려인 회고록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규식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부대원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넘어갔다.김규식은 연해주해방전쟁이 끝나가던 1922년 11월 15일경 수이푼 재피거우에서 '''부하 군인이 러시아인 4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적군의 반감을 사서 무장해제를 강제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부하군인을 이끌고 서간도 안도현 방면으로 출발했다'''(高警 第4142號,武裝解除後二於ケル在露領不逞鮮人團ノ狀況 ,1922.12.28, 在西比利 亞部 14권,36항.이 사건에 대해 김규면은 “김규식은 '''로씨야농민 네사람을 총살'''하면서 성명하기를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고 하고 그 즉시로 군대를 다리고 중국땅으로 넘어서 도주하였다”고 적고 있다. 老兵 金規勉 備忘錄 ,앞의 책,180쪽.) 일본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김규식은 곧 김좌진과 합류하여 중국 목능현 八站(馬橋河)에 도착했다고 한다.김좌진이 김규식부대에 합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그런데 김규식이 원래 軍政署軍의 장교였던 점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김좌진과 연계하여 활동하려 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그러나 '''이 부대는 이곳에서 중국군대에게 강제로 무장을 해제당한 채 해산되고 만다.'''

즉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金佐鎭과 金圭植이 이끄는 약 400명의 부대가 1922년 12월 상순 露領 松田關으로부터 서간도로 이동할 목적으로 穆陵縣 八站子 부근을 통과할 때 그 지역 中國 保衛團이 그들을 억류하였다. 며칠 후 '''하얼빈 방면에서 도착한 중국군 부대에게 다시 무장해제 명령을 받았는데''' 김좌진 등은 무장해제 면제와 중국령에서의 행동을 묵인해 줄 것 을 의뢰하였다.그러나 중국군대는 보위단에 편입하여 국경경비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채용할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시킨다고 엄명을 내렸다.그런데 보위단에 입단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없어 '''마침내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 전부를 인도'''했다는 것이다.이때 인도된 무기의 수량은 장총 약 400정,권총 30정,폭탄 약 300개,기관총 3정, 군도 30본,소총탄 약 1만6천발,기관총탄 약 1만발이었다고 한다.

무기 인도 후 김좌진은 부하 전원를 한 곳에 집합시켜 “露支領 어디에서도 무장행위를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추세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금후의 행동은 각자의 자유에 맡긴다. 그럼에도 종래의 행동을 돌아보아 고향으로 귀향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최근 조직된 연해주한족노동회에 입회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는 것이 가하다.또한 장래 기회가 있을 때 결속하여 국사에 분주할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고별사를 하였다.해산된 군인 약 400명 중 250명은 연해주노동회 혹은 추풍지방에서 농업 기타에 종사하고 약 50명은 목릉현 八面通 지방에 들어가 농가의 고용이 되고,약 100명은 간도지방의 家鄕으로 귀환하여 생업에 나섰으며,12월 중순 삼삼오오 이산한 김좌진과 김규식 기타 중요한 간부는 연해주노동회에 들어간다고 하며 노령으로 향했다고 한다.934)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부대를 이끌고 중국령으로 달아났다가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319~320


7.2. 김구 반공 원인 유언비어


김구가 자유시참변을 원인으로 반공주의가 됐다는 인터넷썰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어느 사료에도 그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펨코 이용자가 대표적인 김구 전문가인 도진순에게 직접 문의해서 답변을 얻었다.

백범이 자유시 참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반공적인 입장과 관련은 더더욱 없습니다.'''

백범이 반공 또는 반좌파가 된 것은 임정초기 공산당의 모스크바 자금 횡령 등에서부터,

김원봉 측과의 끊임없는 갈등 등이 원인입니다.

'''자유시 참변과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도진순 #

자유시사변이 반공의 원인이 됐다는 썰의 출처가 의문시되는 내용.

8. 여담


자유시 참변은 사실상 한인 공산주의 양대 단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vs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갈등과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상자는 박 그리고리의 독립단군와 허재욱의 의군부에서 많이 나왔으니, 적군(공산주의)에 가담한 한인(韓人) 독립군 간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간 최초의 동족상잔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편 고려군정의회가 극동공화국군을, 즉 사실상 소련군을 끌여들인 이유에 말이 무성하다. 이 모든 것이 소련의 음모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는 등 소련을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김두한에게 박용직이규갑염동진 등을 소개시켜주며 아버지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할 때 언급되었다. 작중에서는 다른 이름인 흑하사변으로 나왔다.
[image]
2017년 6월 9일, 자유시 시장과 아무르 주 부지사와 스보보드니 마을 주민, 홍범도 장군의 손녀가 참가한 가운데 자유시 참변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에 1921년 자유시사건 표지석 설치[19]

9. 출처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 석사학위논문, 2007.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백기인, 심헌용.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이완종. '러시아문서 번역집 :근대한러관계연구 14'. 선인, 2008 - 2015.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10. 같이보기


[1] 러시아어 Свободный는 한국어로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한글로는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보통 '스보보드니'로 적지만 강세를 반영한 실제 발음은 '스바보드느이'에 가깝다. 러시아 아무르 주에 있는 자유시는 1920년 2월 볼셰비키 적군이 백군을 몰아내고 점령한 알렉세옙스크란 도시로, 소비에트 정부는 해방구의 상징으로 삼고자 스보보드니로 개칭했다.[2] 흑하는 아무르 강을 지칭하는 말이다. 80년대에 나온 책에선 이렇게 부른 것도 많았다.[3]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1쪽;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학위논문(석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2007. 8, 1쪽[4]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208~209p.[5] 사망자가 아니라,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다.[6]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8p.[7] 백기인·심헌용 집필,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감수, 2017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8 - 79p, 94 - 95p[8]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국외3.1운동』21(김병기·반병률,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13) (실제로는 2009년 발간된 서적이나, 대백과사전에서 오류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 , 『재외동포총서 러시아: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상)』7 (국사편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2008)[9]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 국학자료원, 1999, 183[10] 해당 서적의 성격은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참고[11] 윤상원, 2010, 170~171; 백기인·심헌용, 2017, 95~96쪽 에펨코 재인용[12] 백기인·심헌용, 2017, 96~98 에펨코 재인용[13] 윤상원, 2010, 178;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 한국사연구 (178) , 243 쪽; 임경석,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72 에펨코 재인용[14] 윤상원, 2010, 180; 윤상원, 2017, 245; 임경석, 2009, 173~174 에펨코 재인용[15] 윤상원, 2010, 175~176 에펨코 재인용[16] 사진 링크가 삭제된 관계로 한 블로거 링크 첨부[17]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1쪽[18]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專攻 2010. 2, 216쪽)[19] 원 카페 링크 삭제로 연합뉴스링크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