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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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월 혁명 직후의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 전쟁의 시작은 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25일. 실질적인 끝은 흔히 1920년으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같은 경우 1921년까지 버텼으며 공식적인 종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망한 1922년 10월 25일으로 본다. 최후의 백군이 사라진 날은 1923년 6월~10월쯤이며, 일본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한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1924년이다. 한 쪽이 승리할 것처럼 됐다가도 뒤집어지고 엎치락뒤치락이 반복되다 보니 국내 피해가 무한정 커졌다. 당시, 러시아 총인구 약 9천만 중 사상자가 천만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된다.
세력이 너무 많았고 관계도 복잡했다. 좌우 갈등은 물론 좌파 내부에서도 비혁명 좌파 정당들은 무력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러시아 공화국을 해체시킨 10월 혁명의 대의를 부정했다. 연립 정부가 들어선 러시아 공화국으로도 의회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중도 좌파인 트루도비키나 카데트는 백군의 선봉장이 되었고[7] , 볼셰비키 독재에 항거하는 몐셰비키, 좌파 SR, 아나키스트들은 백군, 적군을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면서 독립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공산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1차 대전의 협상국 측인 미국, 대영제국, 캐나다,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화민국, 프랑스 제3공화국은 물론 독일 등 동맹국 역시 백군 측과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등지의 민족주의 군대를 지원했다. 시베리아 전선의 다국적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를 참고.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단순히 적군과 백군의 대결로 볼 수 없다. 볼셰비키도 처음에는 통일전선[8] 을 형성해 사민주의자와 다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 심지어 마흐노의 흑군과도 적극 협력했으나, 독일과 체결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 사회혁명당 소속 좌파였던 카플란은 레닌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 명칭
세칭 적백내전이라고도 한다.
내전의 주축이 볼셰비키 정부군과 반혁명군이 각각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9] 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적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백색은 차르를 의미한다.
하지만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독재와 두마#s-2 폐쇄에 실망한 네스토르 마흐노의 남우크라이나 흑군[10] , 우크라이나의 시몬 페틀류라의 녹군, 알렉산드르 S. 안토노프가 이끈 청군[11] (탐보프 반혁명군) 등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적백 대립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 내전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3.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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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의 초기 배경.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군대는 볼셰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 있는 병사보단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볼셰비키 정권이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고 있었으므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집에 가야만 자기 몫의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촌을 장악하러 간 공산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혁명 시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이었고, 지방엔 아직 로마노프 왕조를 복권시키려는 왕당파 군벌과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들이 상당했다.[12] 때문에 볼셰비키 정권이 러시아 전역을 통제하려고 하자, 반볼셰비키 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백군은 트란스바이칼 공화국을, 적군은 극동 공화국을, 녹군은 연해주에 젤레나 우크라이나를 수립하는 등 각 세력은 군웅할거에 들어갔다. 여기에 폴란드, 카자크, 각 지역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등 종교적 봉기와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봉기 세력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이들을 계속적으로 지원했고, 레닌은 트로츠키 등의 반대에도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강행키도 했다.
게다가 협상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4.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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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말 ~ 1918년 초까지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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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중엽 ~ 1919년 초반기까지의 전황.
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적군에 반기를 들었고 돈 쿠반 지역의 카자크도 반기를 들어 러시아 제국의 편에 섰다.[13]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웠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극시켜 그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협상국(간섭군)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백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콜차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자세한 건 시베리아 내전 참고. 하지만 백군은 단 한번도 적군보다 장비 면에서 우세한 적이 없었다. 적군은 페트로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 툴라 조병창, 이브제스크 조병창 등 제국 시절의 핵심 총기, 야포, 탄약 생산 시설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군은 내전 내내 장비 면에서 불리했다.
전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고 자신들을 역적으로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결과 1918년 7월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14]
5. 절정과 반전
5.1. 적군: 최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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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적군에게 최악일 뻔했던 전황.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거의 60km 앞까지 적이 진격해 함락이 눈 앞이었지만 얼마 안가 반격하게 된다.
1918년 말엔 적군이 사방에 공세를 취했으나 공세는 얼마 안가 막히게 되었고, 그 후 백군이 동쪽에서부터 거센 반격을 한지라 한때는 적군이 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내전 초부터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러시아도 절반 이상 날아간 상황이었다. 유데니치의 에스토니아 백군 때문에 페트로그라드의 함락이 눈 앞이라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긴 적도 이때. 게다가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장비하는 등 적군보다 장비도 좋은 편이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하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5.1.1. 레프 트로츠키의 등장
5.1.1.1. 병사: 징병제 → 500만 병력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대대적으로 적군 조직을 전선군과 사단 단위로 개편하고 1918년 6월에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 적군의 주축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로는 농민에 대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근대국가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의 징병제에 대한 반대를 무력으로 억눌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5.1.1.2. 지휘관: 과거불문 구제국 장교들 영입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 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228호 명령).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상급대장이다. 브루실로프 장군의 경우 붉은 군대에 가담했던 외아들이 반혁명군에 처형당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폴란드의 소련 침공이었다. 그래서 아예 트로츠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년대에 은퇴한 후 자연사했다. 특히 신생 폴란드가 소련을 침공하여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 독일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다던 볼셰비키들이 오히려 조국의 수호자가 되는 상황에 처하자, 제발로 적군에 찾아와 가담하는 장교도 많아졌다. 그 외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쿠로팟킨[15] 대장도 적군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백군의 참가 권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활동을 벌였다. 다만 이 사람들은, 결국은 스탈린 시대에 거의 다 정리된다. [16]
5.1.1.3. 수송력 보유: 철도 장악
이렇게 적군의 전투력이 개선되자 전황은 적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적군은 통일된 군사력에 철도도 장악하고 있으니 부대를 이곳 저곳으로 재배치하는 데 확실히 유리했다.
5.2. 백군
5.2.1. 구심점(최고사령관) 부재
이에 반해 백군 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른 집단의 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지휘할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설령 니콜라이 2세가 죽지 않고 백군에게 구출되었더라도 제정복고는 언감생심이라 주변부는 죄다 독립하고 혼란스러운 임시정부로 돌아갔을 공산이 크다.
5.2.2. 병사: 25만 병력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었으므로 '''최전성기에도 25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본 일이 없다.''' 이래서야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니 안 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5.2.3. 지도층 불신
백군 지도층 상당수는 귀족, 지주, 자본가 등 구(舊) 지배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목적도 혁명 전 구(舊) 체제 복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과 가난으로 지칠대로 지친 노동자, 농민 출신 병사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웠다. 대부분 구(舊) 지배계급 출신인 지도자들이 사병들을 천하다고 무시하고 학대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부분 하층계급 출신인 병사들 또한 백군 지도자들을 기득권 회복을 목적으로 외세와 손잡은 착취자·매국노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사병들은 카자크·중산층 출신 의용병도 있었지만 대부분 징집을 통해 강제로 군인이 된 이들이었다. 이로 인해 사병들의 불만이 많았고 군 기강도 전반적으로 해이한 편이었는데, 볼셰비키 정부의 백군 사병들의 불만을 겨냥한 선무 공작에 상관 살해 및 투항하거나 탈영하기 일쑤였으며 사병들이 장교들을 붙잡아 넘기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5.3. 내전의 국제화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재흡수하고 국제주의 이념에 따른 공산화를 시도했고,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의도와 달리 러시아로부터 막 독립을 쟁취하려던 신생 독립국에게는 자칫 정권만 바뀐 러시아의 재정복 시도이자 볼셰비키 정부의 야욕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일련의 시도는 발트해 국가들은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동부 우크라이나 이외에는 영국이 지배하던 캅카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협상국들은 1차대전에서 함께 연합해서 싸우다가 독일하고 화해해서 전선을 이탈한 소련을 러시아 제국과 동일 주체로 보았기에 러시아의 배신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백군을 지원했다.
5.3.1. 극동의 협상국 진출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 제국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 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17] 하여 러시아 동부 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르쿠츠크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여하간 1920년, 러시아국 해체를 계기로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계속 버티다가 적군의 트랴피친 부대와 충돌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트랴피친 부대는 일본계와 러시아계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켜 적군 지도부가 보낸 체카에 의해 처형된다. 이것을 니콜라옙스크 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이라고 부른다.
6. 결말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까지 적군에게 패배했고, 이때 외몽골이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중화민국에서 독립하면서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아나톨리 페필랴예프의 군대였으나 1923년 6월 17일에 패배한다. 페필라예프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1938년에 처형당했다.[18]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던 일본군도 1924년 철수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고 협상국에게 약속했지만 이내 북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에 이어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수 동부까지 점령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이 파견한 병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간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협상국들도 일본의 행동에 '저것들이 땅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미군과 일본군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허나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적군과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국군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 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적군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의 러시아 제국 시대부터 통치받다가 독립한 세력은 바스마시 운동을 일으켜 '''30년대 초중반'''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대세는 기울어서 적군과 이후의 소련군에게 진압된다.
7. 영향
이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시기 소련의 첩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강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지만 이 당시 수용자들은 내전 후 대부분 석방되었다.[19] 또한 소비에트 적군이 실전을 거치면서 기존 군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들이 이스탄불, 파리, 베를린 등 전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반공정서 형성에 기여했다. 일부 학자들은 나치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일부 백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독일이 조직한 러시아인 부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일례로 백군 장군 중 하나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는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탈출했고,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SS 카자크 군단을 지휘했다.
그외에 살아남은 백군과 반공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중앙아시아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로 숨어들어서 도적이 되거나 중화민국의 땅이었던 만주와 신장 중가리아로도 많이 넘어갔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이라고 하며 중화민국에만 8만 명이 넘게 망명했다.[20] 전직 백군들은 중국 군벌들의 용병이 되어 중국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장쭝창이 이들을 편애하였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도 백계 러시아인들 묘사가 나온다. 만주 최대 도시였던 하얼빈에는 이들만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형성될 정도였다.[21] 성스차이가 장악한 신장성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백군 출신 병사들을 지휘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백계 러시아인은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될 때까지 중국에 있다가 일부는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일부는 필리핀 등 해외로 흩어졌다. 중화민국에서 살다 죽은 어떤 백군 장군의 묘비는 수십 년 후 지나가던 홍위병들에 의해 뜬금없이 폭파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어떤 백계 러시아인들은 인도네시아, 호주나 아프리카 영국 식민지까지 가는 등, 세계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결국 무국적자로 떠돌아야 했다. 극소수는 일제강점기 조선까지 들어왔으나, 북한 정권이 들어서자 모두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서울에 있던 러시아인 커뮤니티도 6.25 전쟁 때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모두 소련으로 보내졌다.
당시 함경도 사람들의 증언 중[22] 에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함경남도까지 와서 함경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딱하게 여긴 함경도 사람들이 고등어를 갖다주자,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날걸로 먹었다고 할 정도라 했고, 처음 보는 새파란 눈을 가진 하얀 사람들을 보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으며, 파란 눈이 이쁘다는 말을 했다던 사람도 있었다 했다.
이후로는 함경도에서 밍기적거리며 지내다가 돌아가거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소련이 내려와 눌러앉아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을 잡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이때 세계 열강들의 침공을 일시에 받은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 실패와 러시아 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불러들여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
7.1.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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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제식 군모인 부됸노프카를 쓴 홍범도 장군
러시아 내전에서 많은 극동 지방의 한인들이 적군에 많이 가담했다. 일본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연해주 일대로 들어와 적군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탄압받던 한인들은 주로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적군 내에서도 이들 한인 부대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언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의도치 않게 소비에트 정부의 지휘에 따라 백군과도 전투를 해야했다.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가담했던 한인들도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과의 전투에서 소모된 경우가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적군 뿐만 아니라 소수 백군에 가담한 한인들도 있긴 했다.
또한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에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당시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후에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으로써 중일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했다. 다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서 자유시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근처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돕지 않자, 배신감에 떨며 미련 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다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엔 이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독립군이 뜻 밖의 소득을 거두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한 것. 이는 청산리 전투 등의 후에 벌어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8. 이 시기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
8.1. 게임
- 배틀필드 1: 차르의 이름으로 DLC의 맵 중 2개의 맵이 러시아 내전을 다루는 맵이다. 볼가강, 스탈린그라드의 구 이름인 차리친으로 등장한다.
8.2. 소설
8.3. 만화
-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 이 시리즈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배경이다.
- 아나스타샤: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살아남았다는 가설을 가지고 만들어진 20세기 폭스사의 만화영화.
8.4. 영화
- 적과 백: 내전에서 적군 편으로 가담한 헝가리 의용군들이 주인공이다. 전투에서 패한 후 백군 카자크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기도 하고, 백군이 거점을 함락시킨 뒤 러시아인 포로들만 처형하고 헝가리인 포로는 풀어주기도 한다. 백군 지휘관이 헝가리인 포로에게 "이건 우리들의 전쟁이다"라면서 끼어들지 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23] 타이르는 장면도 있다.
- 제독의 연인(러시아 원제는 그냥 '제독'): 제목에서 뜻하는 제독은 남주인공인 백군의 사령관이자 옴스크의 공화정부 수반 알렉산드르 콜차크(Aleksandr Vasiliyevich Kolchak) 제독이다.
8.5. 음악
9. 기타
- 이 당시 적군의 상대는 거의 전세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 사상이 번져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 혹은 직후였기 때문에 염전주의의 영향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가 초토화되었던 영향도 있었다.
-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러시아 내전이 진행되면서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에 장악당하고 백군 황제파는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쫓겼는데, 이들에 의해 몇 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로 추대되기도 했다. 제1 로마→제2 콘스탄티노폴리스→제3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러시아인들만의 정통성 계보에 따른 것이다.
- 이 당시 개발된 무기 중엔 테크니컬의 조상뻘 되는 무기도 존재했다. 타찬카(Тачанка)라고 불리는 민간의 건초 달구지나 이동용 마차를 징발해 맥심 기관총#s-5.2 같이 당시로는 거치식으로만 사용 가능하던 초기 기관총을 달아 소나 말이 끌게 한 물건으로, 러시아에선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24] 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마흐노의 마차'라는 별명이 있다. 생각보다 기동성이 좋아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하며 무려 독소전쟁까지 잘 사용되었다.
- 백군에 표트르 크라스노프(붉은) 장군[25] 이 있었고 적군에 파벨 알렉세예비치 벨로프(하얀) 장군[26] 이 있었다. 서로 대비되는 성씨를 가졌는데 심지어 최후도 정반대이다.
- 흥미로운 사실 하나, 위키백과의 적백내전 항목은 영어판보다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판이 더 자세한 항목이다. 특히 독일어 항목이 그렇다. 러시아어의 경우는 러시아사의 중요 사건 중 하나라서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독일어권 국가들[27] 이나 루마니아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의외라고 할 수 있다.
- 김경천, 한용운이 이끈 소수의 조선 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다. 이들은 적군 편에서 싸웠는데, 이는 백군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군에 가담한 독립군들은 조선 이민자가 많은 연해주 일대에서 게릴라전과 테러, 첩보 활동 등을 해 적군을 도왔다. 그러나 이 참전용사들은 의심병 환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시대가 되자 소수 민족 탄압과 강제 동화 정책으로 짤없이 숙청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웃국가였던 핀란드에선 핀란드 내전이 벌어졌는데, 러시아와는 반대로 백군이 승리했다. 핀란드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대단한 지도력을 보여줬으며, 장비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제국군이 부대를 파견해 백군과 같은 편에서 참전하는 등 적군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이 작용하였다.
- 러시아 내전이 끝난 10년 후인 1933년, 1934년에 신장 지역으로 이주해온 백군파 세력들은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독립 세력들을 돕기도 했다.
10. 관련 인물
- 백군
- 알렉산드르 콜차크: 시베리아
- 표트르 브란겔: 남러시아
- 안톤 데니킨: 남러시아
- 라브르 코르닐로프: 남러시아
- 표트르 크라스노프: 남러시아(코사크)
- 니콜라이 유데니치: 에스토니아
-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남러시아
- 미하일 알렉세예프: 남러시아
- 그리고리 세묘노프: 극동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몽골
- 아나톨리 페필랴예프: 극동
- 우크라이나 흑군
- 탐보프 반혁명군(청군)
- 우크라이나 녹군
- 사회혁명당
11. 관련 문서
[1]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였으나, 혁명 이후 자신의 부대와 함께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이후 초대 혁명군사위원회 총사령관직을 맡아 트로츠키를 보좌했다. 그러나 지휘력에 의문을 제기받으며 다른 볼셰비키들에게 비판받자 해임됐고, 배반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곧 복권되어 프룬제 군사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후일 대숙청에 휘말려 라트비아와 내통해 파시스트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거짓 죄목으로 처형되었다.[2] 볼셰비키 정치인으로, 초대 국방장관이었다.[3]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혁군평의회 2대 총사령관이 되었다.[4] 해군 총사령관[5] 초대 해군장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연인이었고,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6] 다만 내전 직후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2개월 후인 12월 결성되었다.[7] 다만 콜차크의 반동적 군대가 1918년부터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숙청되었다.[8] 인민전선이 아니다.[9] 백위대, 백색 운동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백군은 지방에 따라 하얀 완장을 두르기도 했으며, 유명한 부대들은 하얀색 또는 검은색 군복을 입었고, 주요 부대들은 이전 러시아군의 군복 혹은 독일로부터 지원받은 군복을 개조해 사용했다. 각지의 백군 군벌들이 통일된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대와 지방에 따라 옷이나 상징이 천차만별이었다.[10] 남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즘 무장 단체.[11] 크게 녹군의 일종으로 본다.[12] 1917년 11월 두마#s-2 선거에선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이 농촌 지대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40%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주요 도시 공업 지대에서 승리하면서 24%의 지지율로 제2당이 되었다.[13] 이들은 같이 적군에 맞서 싸웠으나 백군 간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다.[14] 니콜라이 2세의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이때 몰래 빠져나와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꽤 오랫동안 퍼졌다.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고, 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이 애니메이션은 항상 디즈니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만화영화 <아나스타샤>도 만들어졌지만, 아나스타시야 공주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소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15]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총대장이었던 사람이다.[16] 브루실로프 등은 다행히(?) 그 전에 죽어서 숙청은 안 당했다.[17]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해 신한촌 사건을 일으켰다. 신한촌 사건에서 한국의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18] 참고[19] 당시 적군에는 구 제국의 장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 중 볼셰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라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 제국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 대한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20] 북만주 일대는 한때 러시아 제국이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을 정도로 러시아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땅이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지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21] 731 부대 희생자 상당수가 백계 러시아인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들을 마치 전쟁 포로인 것처럼 날조, 왜곡했다.[22] 1912년생, 작고[23] 이는 지휘관 개인의 생각일지 몰라도 백군은 세력별로 미영연합군과 동맹국 등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해 외세의 꼭두각시라는 욕을 많이 먹었다.[24] 1919년에 볼셰비키와 갈라져서 아나키스트 흑군으로 적군과 싸웠다.[25] 백군이 망하자 독일로 도망가 나치 SS 카자크 군단의 지휘관이 되었고, 전후 소련군에 송환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26] 러시아 내전 적군 지휘관 중에서도 대숙청을 피하고 독소전쟁 시기에도 장군이 되어 지휘했으며 1963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27] 독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벨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