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죠 덴노

 


[image]
'''시호'''
고산죠 덴노(後三條 天皇, 후삼조 천황)
''''''
타카히토(尊仁)
'''능호'''
엔소지능(圓宗寺陵)
'''생몰'''
1034년 9월 3일 ~ 1073년 6월 15일
'''재위'''
1068년 5월 22일 ~ 1073년 1월 18일
'''연호'''
엔큐(延久)[1]
'''황거'''
헤이안쿄(平安京)
1. 개요
2. 생애
3. 가계


1. 개요


일본의 제71대 천황. 고스자쿠 덴노의 차남.

2. 생애


1045년, 이복형 고레이제이 덴노의 황태제로 책봉되었으며,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의 양녀인 모시와 혼인하였다.
1068년, 형 고레이제이 덴노가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171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외손이 아닌 사람으로서 제위에 올랐으며,''' 당시 후지와라씨는 내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천황의 권력을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즉위 후 반(反)섭정가의 선봉으로 동궁 시대부터 천황을 비호하고 있던 후지와라노 요시나가와 '무라카미 겐지'의 미나모토노 모로후사 등을 등용해 후지와라씨의 정권 독점 타파를 도모했으며, 후지와라노 사네마사 등의 하급 관리 등을 등용해 적극적으로 친정을 실시했다.
1069년,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발포하고, '''기록 장원권계소'''를 설치했으며, 1070년에는 견포 제도, 1072년에는 엔큐 선지승이나 고가법의 제정 등 율령제도의 형해화에 의해 약체화된 황실의 경제 기반의 강화를 도모했다. 특히 '엔큐의 장원 정리령'은 지금까지의 정리령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치밀함과 공정함을 보였고, 그 때문에 기준 외의 섭정령이 몰수되는 등 후지와라 섭정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 당시 기록 장원권계소는 장원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일이 국가와 장원 영주,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와 '''엔큐의 선정'''이라 부른다. 반면 후지와라 섭정가는 내분때문에 천황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항을 할 수 없었다. 또 이때 벌어진 '''엔큐 에조 전투'''에서 쓰가루 반도와 시모키타 반도까지 혼슈 전 국토가 조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지방에서도 착실하게 영향력을 뻗어나가게 되었다.
1072년, 즉위 4년째에 황태자인 장남 사다히토 친왕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인세이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병으로 쓰러져서 1073년 사망하였다. 이때의 양위는 상황이 국정을 다스리는 인세이(원정)의 선례를 남겼다.

3. 가계


  • 황후(皇后) : 카오루코 내친왕(馨子 内親王) (1029~1093) - 68대 고이치조 덴노의 황녀
  • 황후(皇后) : 증황태후(贈皇太后) 동궁비(東宮妃) 후지와라노 시게코(藤原 茂子, 모시) (?~1062) - 후지와라노 킨나리(藤原 公成)의 딸이자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 能信)의 양녀
    • 제1황녀 : 사토코 내친왕(聡子 内親王) (1050~1131)
    • 제1황자 : 사다히토 친왕(貞仁 親王) - (72대 시라카와 덴노)
    • 제2황녀 : 토시코 내친왕(俊子 内親王) (1056~1132)
    • 제3황녀 : 요시코 내친왕(佳子内親王, 1057~1130)
    • 제4황녀 : 아츠코 내친왕(篤子内親王, 1061~1114)
  • 호리카와노 뇨고(堀河 女御) 후지와라노 아키코(藤原 昭子) (1016~?) - 후지와라노 요리무네(藤原 頼宗)의 딸
  • 효부노 뇨고(兵部 女御) 미나모토노 모토코(源 基子) (1049~1134) - 미나모토노 모토히라(源 基平)의 딸
    • 제2황자 : 사네히토 친왕(実仁 親王) (1071~1085)
    • 제5황자 : 스케히토 친왕(輔仁 親王) (1073~1119)
  • 전시(典侍) : 후지와라노 교시(藤原 行子) (1049~1134) - 후지와라노 사네츠네(藤原 実経)의 딸

[1]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엔큐노미카도(延久帝)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