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천황
天皇 | Emperor of Japan

<colbgcolor=#be0026> 현직
나루히토 (제126대)
재위 기간
2019년 5월 1일 ~ 현직
연호
레이와 (令和)
관저
고쿄
천황기[1]
1. 개요
2. 상세
3. 칭호
3.1. 어원
3.2. 한반도에서
3.2.1. 천황 표현의 거부감과 대안
3.3. 그 외 국가에서
3.4. 일본의 국가원수?
4. 역대 천황 및 역사
4.1. 관련 신화
4.2. 역사와 상징성
5. 지위
6. 한국과의 관계
6.1. 방한(訪韓) 여부?
7.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
8. 논란
8.1. 최고존엄
8.1.1. 반발
8.1.2. 기타
9. 여담
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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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天皇は、日本國の象徵であり日本國民統合の象徵であつて、この地位は、主權の存する日本國民の總意に基く。[2]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일본국 헌법(日本國憲法) 제1장 천황(天皇) 제1조[3]

천황() 또는 덴노일본군주로, 현 일본국의 헌법상징적 국가원수이다.

2. 상세


역사적으로는 일본 전통 종교 신토주신#s-1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교파의 대표였던 사람을 부르는 명칭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국가신토의 사실상 교주[4]이자 일본 제국대원수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패전 이후 새롭게 시행된 현 일본국 헌법에서는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일본국 헌법국가원수에 관한 규정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주요 행위(国事行為)의 권한이 상징적으로만 천황에게 주어져 있다. 이에 따라 일본 대내외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실질적인 '일본의 국가원수'로 본다. 해외에서도 천황을 일본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보고 있다. 과거 일본에서는 천황 외에도 황제, 천자, 미카도(帝) 등의 칭호가 통용됐으나 현재는 '천황(天皇)'으로 공식적인 명칭이 통일된 상태이다.[5]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천황 외에, 한국에서는 외국 군주에 붙이는 '국가명+왕' 식의 호칭인 '일왕'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으며, 일본어 독음을 고유명사로 보아 '덴노(てんのう)'[6]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천황'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늘황제, 중세시대 이후로 도교의 민간신앙중에 인기 있는 신중 하나인 옥황상제를 뜻한다. 그러나 일본의 건국신화에서도 황실을 신의 후예(神裔)이라고 주장하지 신 그 자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천황의 지위를 과도하게 높여 살아 있는 신 그 자체로 모시는 사상은 메이지 유신(대정봉환과 제정복고) 후에 나온 것이며, 이당시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파급력을 고려하여 인지도 있는 중국의 민간신앙 등을 받아들여 자국신화와 기타설정과 섞어 명칭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에는 동아시아 주류 문화권과 격절된 섬나라의 이점을 살려 독자적으로 칭제하는 정도였다. 다만, 요메이 덴노차남쇼토쿠 태자는 607년 수양제에게 보낸 '해 뜨는 곳천자(日出處天子)가 해 지는 곳천자(日沒處天子)에게 글을 보내노라' 글로 간접적 하대를 한적이 있었다.[7]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일본의 국교였던 국가신토에서는 현인신(現人神)으로 숭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식민사관'과 관련되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2019년 5월 1일에 126대 천황으로 즉위한 나루히토이며, 연호레이와(令和)이다. 4월 30일까지 재위하던 현 천황의 아버지 아키히토고카쿠 덴노의 생전퇴위 이후 현행헌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202년 만에 생전퇴위하여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

3. 칭호


일본어 발음은 天皇(천황)의 한자 음독인 てんのう(Tennō).[8] 영어로는 흔히 Emperor of Japan으로 옮긴다. 영미권 말고도 다른 국가에서도 황제 칭호를 붙이는데 특히 태국에서는 자국 국왕은 그냥 라자(국왕)라고 부르면서도 일본 천황에 대해서는 마하라자(황제)라고 칭한다. 대한제국, 독일제국, 제정 러시아, 프랑스 제국, 중화제국 등 다른 황제국의 황제들이 모두 역사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오늘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황제(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현대 일반적인 일본인들이 천황을 언급할 때는 '텐노(天皇)' 혹은 '텐노헤이카(天皇陛下, 천황폐하)'라고 하며, 뉴스나 신문사에서는 존칭을 써서 '텐노헤이카(天皇陛下)'라고 한다. 또는 줄여서 헤이카(陛下). 간혹 옛날 명칭인 미카도(帝) 혹은 텐시사마(天子様)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킨조(今上, 금상)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재위 중인 임금을 부르는 말로 군주정 시대의 한국의 '주상 전하'처럼 중국에서도 자국 임금에 대해 쓰던 말이다. 반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일상적으로 천황을 언급할 때는 대부분 '텐노'라고만 하며, 반대로 상당히 반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연설 등 공식적인 발언에서는 대부분 '텐노헤이카'(天皇陛下)라고 한다.

3.1. 어원


사실 천황이라는 명칭은 건국 초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명칭은 오키미(大王, 大君) 등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치천하대왕,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이 스메라미코토의 의미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 천황(天皇)이다. 따라서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지 '텐노'라고 읽지는 않았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보다 높이려는 의도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천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옥황상제를 일컫는다. 일본서기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수나라에 파견했을 때 당시의 서찰의 서두에 "동천황이 서황제께 보냅니다.(東天皇敬白西皇帝)"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는 원래 일본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황이 '천신의 후손'(天神の後孫)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원래부터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해당 구절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당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해가 뜬다 진다가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 중심의 지리관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강한 지지를 얻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9][10]
도교에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등 방위구분이 있었으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대신들로부터 모든 황의 가운데에 있는 태황(泰皇)이라는 명칭을 건의받았으나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다. 중국의 도교 신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본래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신의 계율사회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인 옥황상제를 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황과 일본에서의 천황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이 '천황'이라는 단어의 언급 문제는 중국 측과 일본 측의 자료가 확실하게 엇갈린다. 중국 측에서는 위진남북조 시절에 중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외교서찰이 시초라고 본다. 이에 대해서 다른 나라에서는 일본 측의 자료보다는 중국 측의 자료를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당고종측천무후당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황제를 천황, 자신을 천후(天后)라고 높였던 시대가 있는데, 이 때 일본이 당나라와 접촉하여 천황 칭호를 수입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고 하는데, 북극성은 천상의 궁궐인 자미원의 정점에 자리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도 이와 빗대어 군주는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며 궁궐도 북쪽에서 남면하여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낸다. 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를 북극성에 비기는 호칭이 퍼졌다는 것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천황의 의례는 태양과 연계되는 동서축이 종교의례적으로 중요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미카도(帝)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발음대로 읽은 천황보다 더 '정통적인' 호칭인 셈이다. 천황이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황실이 권력 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면서 스메라미코토라는 의미가 잊혀져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흑선 사건 이후 일본의 군주를 부를때 이슬람권의 술탄, 독일어권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를 부르듯이 일본의 미카도(Mikado of Japan)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잘 그러지 않는 듯하다. 요즘에는 그냥 Emperor of Japan이라고 하는 추세.
메이지 유신 후 천황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천황은 중국식 칭호를 수입했던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못했다. 미카도 등의 다른 명칭들을 제치고 천황이라는 명칭이 낙점된 이유는 바로 '천황'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3.2.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 #[11]
과거 조선에서도 일본의 실권자는 쇼군(막부의 최고 주권자)이며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임을 파악하였다.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일본 황실의 세계'를 자세히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막부에 권력이 넘어간 이래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일본의 얼굴마담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주체는 쇼군이었고, 쇼군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은 '일본 국왕(무로마치 막부)'이나 '일본국 대군(도쿠가와 막부)'이었다. 이것이 수정된 것은 숙종 대의 일로, '일본국 대군'이라고 하던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으로 상향시켰고 이후 조선에서도 천황을 '왜황(倭皇)'이라고 부른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 호칭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막부타도와 함께 대정봉환, 제정복고(1876)가 이루어지고 개혁(폐번치현, 근대화와 사무라이 폐지)이 시작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사신단이 대놓고 "일본 천황이 조선 국왕보다 의전서열이 높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에도 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일단 천황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기 때문에 '조선 국왕 < 천황=황제'라는 것이다.
일본은 막부가 존립한 시절까지만 해도 막부가 외교를 전담했는데, 심지어 쿠로후네 사건(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적 개항요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서 총영사 해리스는 쇼군을 일본의 사실상 국가원수[12]로 간주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의 친서를 건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이나 영일우호조약 등 각종 불평등조약에서 일본의 대표자로서 최종적으로 서명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사다(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였다. 미국 정부영국 정부 역시 일본 조정이 아니라 막부를 협상대상으로 삼았음은 조선 조정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 국왕이 자기들이 천황보다 아래라고 보진 않았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천황 호칭에 대해 성호 이익이 이 문제를 이미 예견한 바 있긴 하다. 관련 문서로.
조선이 봤을 때 일본과 동등한 관계에서 화친해야 마땅하였다. 사실 소중화사상(小中華事像)에 빠진 당시 조선은 자신들을 '천하'라며 스스로 높임과 동시에 일본은 천하 바깥의 교화되지 않은 무리라고 여겨 서로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 결국 조선 측에서 일본이 화친을 하고자 한다하여 여기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 주었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서는 1871년에 이미 청일수호조규, 즉 '대일본제국 천황'과 '대청 황제'라는 대등한 관계로서 국교를 맺었던 적이 있긴 하다. 이는 청나라 건국 이후 일본을 당시 통치하고 있던 에도 막부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근대화/산업화된 이후 대등한 관계에서 근대적인 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또 조선 입장에서는 청나라도 천자국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긴 했지만 내심 만주족 오랑캐 왕조라는 이중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 역시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대군주' 칭호로 격상시키면서 사실상 해소되었고, 대한제국으로 국제가 바뀌면서 '대한제국 황제'가 '대일본제국 천황'과 명목상으로나마 동등해짐으로서 이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된다. 그러나 한·일 합방(1910.8.29.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이후 대한제국 황제는 왕공족의 일개 가문명으로 불리는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천황보다 의전서열이 아래에 위치하게 되고 일본의 귀족, 화족보다는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김구를 비롯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천황'이라는 단어를 그냥 사용했으며, 한창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서도 따로 비하어를 만들기보다는 그냥 천황으로 불렀다. 또한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천황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천황, 일왕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9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반일 감정이 격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황, 일왕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꼭 일본 천황이라는 표현을 썼다. 2005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 일왕'이라고 써야 하는지, '일본 천황'이라고 써야 하는지 미처 준비를 못했다며 '일본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초기 '천황'이란 용어를 사용 했었고 후기 '천황 사과 요구 사건' 당시에는 '일본 왕'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이것은 1회성에 그쳤다. 이후 공공기관에서 기존의 천황 표기를 '일왕'으로 교체하는 등의 후속조치는 없었다.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이후에는 '천황' 호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외교적인 관례라고 치부할 만큼 천황과 다른 국내용 표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바는 없다.
한편 국내 언론은 2000년대 중반부터 전부 천왕, 일왕 호칭만 쓰고 있다.[13]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천황'이라는 단어 사용을 친일적인 뉘앙스로 여기고 있어서, 만일 천황이란 단어를 한 번이라도 쓰면 그 기사 밑의 댓글에서는 비판이 쏟아지며 그 기사가 게재된 언론사는 물론 기사를 쓴 기자까지 각종 욕설을 얻어먹는다. 그러나 한국 언론사라도 영문기사에선 King(왕)이 아닌 Emperor(황제)으로 표기한다.예제 1예제 2
문재인 정부에서는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일대사로 지명되어 "천황폐하"라고 말했다.

3.2.1. 천황 표현의 거부감과 대안


한국은 군주가 국가 최고 통수권자를 칭하는 말과 동시에 황제가 모든 군주들의 최고 상위 개념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천황에 대해서는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심한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 한자를 뜻풀이해 '하늘의 황제'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어서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비롯된 황제 칭호가 '왕중왕'의 의미나 '신의 대리자', 하늘의 아들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황은 대리자도 아닌 아예 '하늘의 황제' 그 자체라는 뜻의 칭호에서부터 너무 오버가 심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 거기다가 '황제'보다는 '국왕'이 군주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폭넓게 쓰이는 이유도 있으며, 황제는 영토가 넓은 나라의 군주의 이미지가 있으며, 민족주의적 감정과 더불어 일본이 매우 넓은 영토를 갖는 나라는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천황을 '황제'라 인식하지 않는 편이다.
다른 식의 표기로는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카이저', '차르'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써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된 동아시아사는 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한반도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도 일본에게 '조공'했다는 일본서기 식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본서기 자체가 가려볼 점이 많다는 전제가 있다.
그밖에도 미디어물, 영화, 게임 등에서 큰 영토를 가지고 수많은 민족, 문화를 아우르는 국가의 수장에 대해선 대부분 '황제'라고 칭한 것 또한 이러한 호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높였다. 실제로 영화, 게임 등에서 등장하는 황제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는 방법 등으로 드넒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의 출신들이다. 이러한 미디어물 게임 속의 황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보기엔 천황과 이를 떠받드는 일본에 대해 나라도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 황제를 칭하는 자뻑질로 보이는 것이다.[14] 물론 실제 역사는 게임과 미디어물과 다르게 황제 칭호를 쓰는 것은 단순한 영토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였다.[15]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말엽에는 영토의 대부분이 잠식당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 남부의 몇몇 공국들을 가진 도시 국가 수준으로 전락했으나, 그 영토가 좁다는 이유로 칭호를 격하해 부르거나 황제(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럽 국가는 없었다.
다른 의견으로는 '일본 국왕'와 같이 한국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일반명사 ‘국왕’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영국 여왕 등 현대에도 군주정이 남아 있을 경우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국왕이기 때문. 심지어 실제 작위가 대공인 모나코 등 소국 군주도 한국에서 일반적으로는 국왕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일왕'이라는 표현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를 대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 극우파들이 "텐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를 외친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 언론들은 "일본 극우파들이 '일왕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용 주체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특히 일본인일 경우엔 일왕이란 표기는 영 어색해지게 된다. 실제 사례 한편 책에서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왕을 사용하는 책들도 있다. 일례로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에서는 천황을 사용했지만 Go Go 카카오프렌즈에서는 일왕을 사용했다. 그런데 일왕이라는 표현은 자칫 일본인들이 자기네 군주를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한자문화권인데다가 날 일(日) 다음에 임금 왕(王)자가 붙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물론 천황이라고 쓴 책들도 많고 나무위키나 위키백과 등 인터넷 자료에서도 천황이라고 부르므로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오해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또한 천황이 일왕이 되면 일본 황실은 왕실, 황후는 왕비, 황태자는 왕세자가 되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격하되므로 천황 호칭에 딸려 있는 수많은 일본 고유명사 호칭이 왜곡 된다. 당연한 것이, 일본은 따로 친왕과 왕 등 각각의 작위가 황실전범[16]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천황을 지칭할 때 '일왕'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친왕/내친왕[17]', '왕/여왕[18]' 같은 일본 황실 용어들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난감해진다.
국내 언론의 경우, 일본 황실 구성원 호칭에 대한 통일된 원칙은 없는지 '천황'을 '일왕'으로 부름과 동시에 '황태자' 역시 '왕세자'로 격하(?)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皇太子'를 유지하고선 '고타이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는가 하면(#[19]), '일왕'의 장남 '황태자'라는 괴이한(?) 서술도 있는 형편이다(#). 또한 친왕은 왕자/왕손, 내친왕/여왕은 전부 ‘공주’로 호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현대 한국인 관점으로는 일본 황실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거나 관심이 없는 이상에야 의미 전달에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친왕 문서에 보듯, 왕작위의 개념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왕'이라고 하면 일국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짙다. 천황(황제)과 왕을 황족 내부에서의 위계에 따른 호칭으로 보기보다는 일단, 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나라의 수장에 대한 칭호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 군주가 여럿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전달하고자 하는 대상이 한국인들이라면 어느 정도 바꾸는 게 언어소통 면에서 명확하다.

천황에 대해서는 'Emperor'라고 쓰는 외국에서도 친왕은 'Prince'로 부르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꼭 위격에 맞게 번역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Prince에 왕자라는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거나, 군주가 아닌 작위로서의 왕을 보통 Prince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잘 몰라서 나오는 말에 가깝다. 한국은 역사상 작위로서의 왕이 오래 전에 사라졌으므로 왕=군주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어서 생기는 오해.
戰後 평화노력 인정 '천황' 공식 사용키로
김대중 정부, 공식문서에서 '日王' 전환 추진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서구와 베트남 말레이시아에서 쓰는 사용 실태(오마이뉴스)

3.3. 그 외 국가에서


외교 프로토콜에 따른 영어 경칭은 His Imperial Majesty다. 정식 영어 명칭도 그냥 Emperor of Japan.
일본에선 각각의 천황은 여타 군주들처럼 칭호를 붙여 구분하며(진무 덴노, 덴무 덴노),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현재의 천황은 홍무제, 영락제처럼 메이지 덴노쇼와 덴노연호를 붙여 지칭한다. 또한 옛 중국의 황실 용어를 받아들여 천황의 죽음을 붕어#s-2(崩御)라고 쓰고 부른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천황의 사망일을 붕어일(天皇陛下ご崩御ノ日)로 기술한다[20].
북한에서는 일본의 왕조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인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
중국의 경우에는 새 이름을 만들어서 부를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는지 그냥 천황(중국어로 톈황) 호칭을 쓰고 있으며, 난징대학살 연구자들도 쇼와 덴노를 비판할 때도 천황이라 표기한다. #

3.4. 일본의 국가원수?


제국(帝國/帝国)이라는 의미는 2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 군주가 황제인 나라를 가리킬 수도 있고, 2)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과 구성원에게도 통치권을 확장하는 국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1)과 2)가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3공화국은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 제국(French colonial empire)으로 자주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군주국은 국호에 군주의 칭호에 따라 왕이면 왕국, 공작이면 공국 등을 함께 표기한다. 그래서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 Empire of Japan)'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과 함께 새로이 설립된 일본국 이후 현재까지도 국제적으로 '일본국(日本国, Japan)'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국호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 공화국이 됐다면 '일본 공화국' 또는 '일본민국'이라고 하고, 군주국(제국)을 유지한다면 '일본 (제2)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체를 나타내는 표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패전 이후 쇼와 덴노는 "더 이상 정치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며 입헌군주로서의 최소한의 권한까지 전부 버리는 길(말하자면, 상징천황제)을 택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의 군주인 천황은 단순한 입헌군주조차 아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의 천황처럼[21]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헌법에 군주가 해당 국가의 상징이자 원수라고 명시하지만, 일본국 헌법은 천황을 일본의 상징이라고만 서술할 뿐, 실질적으로 '국가원수'라고 하지는 않는다. 군주가 존재하긴 하나 아무런 권한도 없고 헌법상 국가원수라 명시되지도 않은, 그저 '상징적 인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좀 애매모호하다. 국왕과 비주권 군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될듯하다. 물론 덴노를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쪽은 대체로 일본 헌법학계의 이야기고, 일본 보수 및 극우 내각은 덴노를 국가원수로 받들고 있는 것을 넘어 개헌을 통해 덴노의 국가원수 명시 조항 부활 계획을 세우고 있다.

4. 역대 천황 및 역사





4.1. 관련 신화


역사가 오래된 나라라면 흔히 보이는 '군주를 신격화하려는' 특성으로 인해서 천황은 일본 신화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의 자손(天照大御神の子孫)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자나기(男神)와 이자나미(女神) 등 두 남매가 각종 행위[22]를 통해 일본의 무수한 신을 창조하였는데, 그 중에 미하시라노우즈노미코(三貴者, 삼귀자, 산키시)라 일컫는 아마테라스(태양의 여신), 츠쿠요미(달의 신), 스사노오(추방당하여 사나운 바다의 신)가 가장 막강하다. 각각 하늘과 하늘에 있는 타카마가하라(아마테라스)와 달과 역법(츠쿠요미), 바다(스사노오)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중 바다를 통치하는 스사노오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고 야마타노오로치에게 잡혀 있던 쿠시나다히메와 결혼해 자식을 두었는데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 옛 기록에서는 '오쿠니누시'는 스사노오와 친척이자 스사노오의 사위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뒤 스사노오로부터 마지막 축복을 받았다. 그 뒤 이즈모에 거점을 두고 '나라 만들기'[23]를 계속하여 땅 위를 다스렸으나, 지상은 여러 신들이 혼란스럽게 구는 어지러운 혼돈의 나라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彦彦火瓊瓊杵尊, 이하 '니니기')와 니기하야히노미코토(饒速日命) 형제를 각각 큐슈와 야마토에 내려오면서 '원래 니들 거니까 뺏어와'라고 해서 따지고 보면 사촌인 오쿠니누시를 몰아냈고 그 후 니니기의 자손인 진무 덴노가 또 사촌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 등을 내려보낸 주체가 전승에 따라 다르다.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취합했으며 본문이나 일서니 하는 식으로 다른 전승이 있음을 분명히 구분했다. 본문과 일서를 포함하여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는 니니키를 내려보낸 주체는 천계 타카마노하라가 열릴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세 신들 중 하나라는 '다카미무스히'이다. 그보다 덜 오래됐으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판으로 간주한 본문의 기록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명을 내렸다. 그리고 일서에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은 '아마테라스'가 단독으로 명을 내려 손자 니니기 일행을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마테라스가 천황가의 조상신(皇祖神)이자 천계 다카마노하라의 주신으로 자리매김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카마노하라란 개념 자체가 민간층이 아니라 야마토 조정 내부에서 생긴 궁정신화이다. 야마토 조정의 초기 황조신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아니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초기 조상신은 다카미무스히였을 가능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일본서기 중 일서에만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을 표준판인 양 정책적으로 퍼트리고 교육했다. 전후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당시 일제강점의 치하에 있던 조선인들)마저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때의 천황관을 일본 고대의 천황관처럼 이해했다. 가장 후기의 전승을 메이지 정부가 표준판으로 간주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가장 후기의 전승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미코토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면서 '천양무궁의 신칙'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천양무궁의 신칙 내용은 요약하면 이러하다. "지상은 내 손자 니니기와 그 자손들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
천황이 신이면서 죽음을 맞는 부분도 신화를 이용해 구색을 맞춰뒀는데, 니니기가 지상에 내려오면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보고 미모에 반해 청혼했더니 그 아버지가 언니인 이와나가히메도 데려가라고 했는데, 니니기는 이와나가가 못생겨서 거절했다고 한다. 사쿠야를 통해 황실이 만발하는 꽃(はな・花)처럼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이와나가를 통해 돌(いわ・岩)처럼 튼튼하게 유지하라(불사)는 뜻이었다. 니니기가 사쿠야를 취해 황위도 얻고 '만세일통'하지만, 이와나가를 버렸기에 신의 자손이면서도 불사(不死)를 얻지 못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일본서기고사기 등 속칭 '기기신화'가 완성되기 전의 기록을 보면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덴노 자신이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 자신으로 간주되었다. 신화적, 종교적 의미에서 천황의 계승식이란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이자 진무 덴노이자 역대의 천황이었던 바로 그 존재가 되는 의식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옛 신화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4.2. 역사와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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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들이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라는 옷이다. 남자들이 입은 옷은 소쿠타이, 머리에 쓴 관은 스이에이노칸이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세계 유일의 황제'이자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라히토가미(현인신)'이며 일본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천황의 혈통이 초대 진무 덴노 이후로 한번도 끊어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세일계의 수호신'(万世一系の守護神)으로도 불린다.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임금이지만 실제 권력은 없는 상징적인 허수아비였던 기간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일본 역사 초창기에는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천황이 실제 군주로서 통치를 했고, 아스카 시대율령을 도입했다. 즉, 일본도 고대에는 동시대 백제신라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임금이 직접 율령에 의한 정치를 하는 고대국가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인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이래로 후지와라씨가 외척으로 권력을 독점하면서 귀족정치로 변모하며, 국풍이 발달하면서 한국이나 중국과의 교류도 감소한다. 이 때부터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일본 특유의 이중적인 권력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약 1천년 동안 대정봉환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천황은 실제 정치는 셋칸, 간파쿠, 쇼군 등에게 위임하고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무사정권은 천황 자체를 쫓아낸다거나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는데 일본 역사상 또라이 가 없는 건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교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반도 땅에서 거병해 본인을 신황이라 일컬으며 천황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24]의 군대에 토벌당해서 죽었다.[25]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2018년 7월 6일 오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렇게 일본의 명목상 지배자이며 상징성을 가진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른 나라의 국왕과 같은 모습으로 실제 권력을 지닌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밖에 되지 않는 등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이 탓인지 조정의 권위가 가장 초라하던 시절인 센고쿠 시대에는 대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그림이나 글을 팔아먹고 살았다[26].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가 대표적이다. 고나라 덴노는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고호조(後北条)나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성금을 받아 즉위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자신의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고 한다. 또 궁녀들이 매춘을 해대며[27], 동네 아이들이 천황 본인을 무시하며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에도 막부 시기에는 쇼군가였던 도쿠가와 가문의 막대한 후원과 더불어 고위 사무라이 및 쇼군가와의 유착으로 인해 적지않이 권세를 누린 적도 있지만[28], 그 시기에도 당연히 정치적 실권은 쇼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막부에게 있었고, 천황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다.[29] 여담으로 이렇게 천황을 쥐고 흔들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대정봉환으로 일본 제국이 성립되자 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에도 막부가 정당한 군주인 천황을 핍박했다고 보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과거 천황에게 충성한 충신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무엄하게(?) 천황을 허수아비 취급하지 않고 존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조선 침략을 하지 말라는 고요제이 덴노의 어명을 무시했을 정도.(...)
자신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万世一統)의 천황'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황실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츠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게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스진 덴노 이전의 천황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30]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큐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3왕조 교체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게이타이 덴노 이래 일본 천황의 역사는 1500여년 동안 끊기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왕조 중 가장 오래되었다.[31]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천황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上皇)이 출가하여 법황(法皇)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천황은 사실상 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院政)라고 한다.
특히 이른바 '남북조시대'라고 하여 천황이 2명이나 있던 시대가 있었다. 하나는 원래 천황, 다른 하나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가 추대한 새 천황.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큐슈를 완전 복속하면서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왕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황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어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히로나리 친왕[32]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이 해(1392년)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기 고쿠가레의 토지는 거의 조금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조 세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당초에 약속했던 교대 계승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남조의 혈통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시기의 남조 혈통을 후남조라고 부르는데, 약간 남은 기록이 있기는 하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횡사하는 정도로 매우 안습하다. 결국 '서진의 남조(가칭)'라는 한 왕자가 어느 절에 의탁하였다는 기록을 끝으로 남조의 계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다.[33]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천황으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천황을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히로나리 친왕은 천황이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무라카미 덴노,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34]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나[35], 총합 약 50여명 정도가 나타났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36]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흔히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정통성의 천황, 권력을 위임받은 실권자 쇼군이라는 도식으로 흔히 설명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부터는 이미 그 권력의 정통성도 원래부터 쇼군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천황이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같은 사람은 "중세 일본의 천황은 제사장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천황과 조정을 이루는 공경[37]들은 당대의 일본 상류사회를 이끄는 셀럽처럼 인식되었고, 아무리 정치적인 실권이 없다고 한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역대 쇼군들은 황녀와 혼인함으로서 황실 전체를 막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래서 에도 막부 때는 애들이 고나라 덴노에게 했듯이 돌을 던졌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 시기 중기 이후 오규 소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지배층에게 퍼지자 천황이 다시 쇼군의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부활했다. 천황과 쇼군이 주고받는 친서를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천황이 슬슬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 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천황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때에 로마 교황유럽을 포용하듯이 천황도 아시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천황제(普遍的天皇制)는 끝내 정계, 학계 등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이 시절에도 천황이 절대 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천황이 전 일본을 다스리는 신국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38] 메이지 덴노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보통 다른 사람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천황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천황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천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39] '현인신(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천황이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천황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천황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들고 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메이지 초기에는 천황의 행차에 을 집어던지는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천황에게 적용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천황의 행차가 지나가면 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천황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황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40]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궁사(신관)는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 민중들 사이에 거의 민중종교로 자리잡고 있던 불교가 특히 된서리를 맞아서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찰들이 파괴되고 많은 승려들이 강제환속당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에게 서양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덧칠하려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금지·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는 위처럼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지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41]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천황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천황이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대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히로히토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사건 당시 '이유가 어떠하건 내 허락도 없이 내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여 반란을 일으킨 것들은 내 신하가 아니다', '장군들이 가만 있겠다면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지휘해 진압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聖斷)'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히로히토는 일본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미국의 장군인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해서는 "히로히토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매우 잘못했다"는 떡밥도 은근히 나오고 있다.[42][43]
이 외에도 메이지 덴노 역시 시기에 따라 나름 권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사실 실권이 없어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 뭘 몰랐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에 따라 신하들에게 다 맡기느라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지도자는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고, 실제 일은 아랫것들이 다 하는 스타일. 이런 문화 때문에 일본은 굳이 천황이 아니라도 막부나 번, 군부에서 유난히 중간층의 영향력이 강했다[44].
대일본제국 헌법 등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실제로는 일본의 국사 중에서는 천황이 아니면 권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영역이 있었고, 메이지 6년의 정변이나 종전 당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답이 없으면 천황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 메이지 시대 말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없고 어지간한 신하들도 슬슬 나이를 먹고 은퇴했을 뿐더러 메이지 덴노 본인도 나이를 먹었을 무렵에는 그나마 활동을 좀 했다.
사실 히로히토는 서자였던 할아버지아버지와는 달리 다이쇼 덴노의 정실인 데이메이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천황으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히로히토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 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견원지간이었고, 그 둘 모두는 특이하게도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천황에게만은 절대 복종한다"고 절대 맹세 및 복종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히로히토는 공공연하게 민간정부를 지지했으며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연구는 없다. 문제는 내각이 천황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군부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군부는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지 내각에 있는게 아니라면서 반발하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통수권 간범이라는 논리로 내각과 정당정치를 역적도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막으려는 궁중 중신들까지도 역적/간신배 딱지를 붙여 탄핵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천황기관설' 등 천황을 현대적 정책결정과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치키 기토쿠로 등 히로히토 측근들의 시도를 격렬하게 공격, 축출시키고 메이지 시대의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에 달한게 2.26 사건으로, 쿠데타군에게 총리대신이 살해당한 줄 알았던 히로히토는 쿠데타 당일 새벽에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육군에게 즉시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육군상 가와시마는 이를 무시하고 쿠데타군과 3일이나 지리한 대치전과 협상을 벌였으며[45] 심지어 반란을 진압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는 사태 마지막 날까지도 육상과 참모차장에게 천황에게 대권을 쥐어주고 유신을 선언토록 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46]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의 투항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히로히토의 통수권이 얼마나 유명무실하였는지를 입증해보였다. 더군다나 사이토 마코토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유력한 측근들이 살해당하고 권위를 실추당한 히로히토는, 쿠데타군이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접선하여 황위 교체를 노렸다는 뜬소문까지 퍼지면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히로히토가 무력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 2.26 이후이다. 히로히토가 1937년 우가키 가즈시게를 총리로 임명하자 육군이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하야시 센주로를 내세워 총리대신에 앉힌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육군에겐 천황에게 대놓고 거역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현인신이라는 천황조차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실제로 작전회의에서도 히로히토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 수뇌부들이 낸 의견들을 듣고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승인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 개막장 작전에 관해서는 히로히토도 '이 작전이 실제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으나, 결국 수뇌부 다수가 찬성하면 본인의 의견은 접어버리고 '다수가 찬성했다면 짐 또한 반대하진 않겠소.'라며 결국 승인을 해주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개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히로히토가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명시한 제3 제네바 협약과 전시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에 비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47] 말이 있으나 비준이 무산된것은 육군과 해군, 즉 군부의 반대로 1934년에 무산된 것이므로[48] 히로히토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한다는 천황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다. 섭정 시절인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1928년에 강화해서 반정부운동 탄압에 써먹었다고 주장되나 마찬가지로 히로히토가 섭정이었던 1922년 2월에 사법성에서 치안유지법의 전신인 '과격사회운동단속법안'을 제출했다가 기각된 사실과[49] 1925년 보통선거의 실시와 맞물려 내무성과 당시 보수양당이었던 헌정회와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입법되고 강화되었던 사실[50] 이 어디에도 히로히토가 관여했다는 주장이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리로 지명되었다가 육군의 반대로 조각에 실패한 것을 아돌프 히틀러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2번이나 독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다가 육군의 반대로 실패한 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일국의 재상인 총리대신을 임명하려다가 군부가 인정을 거부하여 무산된것과 군부인사문제를 손대려다가 군 내부의 반대로 실패한 것을 같은 격에 둘 수 없는 것이고 또한 히틀러의 외교정책에 독일군부가 쿠데타 음모까지 벌여가면서 반대하다가 결국 모두 숙청되고 예스맨만 남아 히틀러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과는 달리 일본군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했고 항복을 질질 끄는데 성공했던 걸 고려하면 독일 군부와 일본 군부의 권력 지위는 서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 육군은 중국[51]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을 고려했는데 히로히토는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확대시킨 고노에 후미마로를 지지했다고 하나, 협상을 파토낸 건 육군성(이타가키)과 내각(고노에)이었고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한 쪽은 지금까지 만주 침략활동을 주도해 온 참모본부(간인노미야)였는데, 사이온지 긴모치의 비서였던 하라다 구마오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1월 14일 내각의 반대에 직면한 간인노미야가 협상 지속 문제를 놓고 '어전회의(御前会議)'를 열어서 내각의 결정을 뒤집으려고 하자 히로히토가 "그러면 애초에 중국에서 일을 안 벌였으면 될 것 아니냐"며 질타했던 것이다.[52]
히로히토의 평가는 매우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쇼와 덴노/전쟁 책임 항목으로.

5. 지위


천황은 일본의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영국 국왕과 비슷한, 비록 권력은 없지만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며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카메이도 악취사건 문건에도 기술돼있지만 일본의 사이비종교 화학테러집단 옴진리교가 이런 천황을 독극물로 암살하려다 발각돼 일본 전체에서 아예 옴진리교가 퇴출을 당한 것이다. 일본 만화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황실을 소재로 한 건 마코 공주를 제외하면 거의 보기가 힘들다. 1990년, 아키히토 천황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당시 가와시마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긴 하다.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황실의 숨겨진 스캔들이나 소문, 치부에 대해서 소문이 상당히 많다. 예컨대 후미히토 친왕의 불미스런 사생활 문제와 같은 것들. 일본 생활을 해본 어떤 사람이 황실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일본인들이 피식하면서 "황실에 대해서 많은 소문들이 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상징이기 때문에 일본국의 상징답게 처신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 천황의 규정과 천황이 해야 할 의무, 권리가 적혀 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천황은 상징이니까 국가 행사에는 무조건 참가해서 상징답게 굴어야 하고, 권력은 없으니 내각이 정하는 것에 군소리 말고 도장만 찍으면 됨'이다. 즉 헌법이라는 국가의 법 최고레벨에서 '늬들은 꼭두각시니 내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라고 못을 박아놓은 셈이다.
입헌군주제 국가 중에서도 이 정도로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든 경우는 없다. 이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한 천황과 조정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인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사실상 더 엄격하게 강화한 거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의 군주는 실제로 사용하긴 어렵겠지만 일단 법률거부권이나 인증거부권, 의회해산권 등의 권한을 지니고 있다. 태국 같은 경우엔 쿠데타 등의 비상상황에선 국왕이 제재를 가하거나 승인함으로서 실제로 개입할 수 있으며, 2차대전영국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 국왕이 한 행동처럼 필요에 따라 군주가 어느정도 개입할 수 있다.
외국의 입헌군주는 또한 정치적인 권한은 없더라도 정치권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상당한 양의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국 왕실의 맨 섬과 채널 제도 등으로, 이 지역은 왕실의 사유지로서 영국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더라도 현 윈저 가문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이외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같은 유럽의 입헌군주국의 왕족들이 갖고 있는 사유지와 별장들 또한 마찬가지.
이에 비해 천황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거주지인 고쿄조차 궁내청 소유다. 막말로 국회가 천황의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당장에 무일푼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일본 국회는 황족 품위 유지 차원에서 매년 황족들에게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적지 않은 생활비를 지급한다.[53] 아울러 일본 황실의 생활을 돕고 관리하는 궁내청 직원들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월급을 준다.

일본국 헌법(1947년 이후에 제정된 새로운 헌법, 평화헌법(平和憲法)이라고도 한다.)

제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54]

제4조

① 천황은 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② 천황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제5조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두는 때에는,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이 경우에는 전조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8조

황실에 재산을 양도하거나, 또는 황실이 재산을 양수 또는 사여(賜與/賜与)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기초하여야 한다.

보다시피 국사행위에 거부권은 없는데 무조건 승인해줘야 한다는 조항도 아시다시피 없다. "천황은 선하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이유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의식적인 문제이고, 일본 정치인들이 대책도 다 세워뒀다. "천황이 핑계를 대며 승인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무부에서는 "선한 천황이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정신병에 걸린 것이므로 섭정을 세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55] 더 골 때리는 건 중의원 해산(의회해산)에도 천황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일본 총리가 각의(내각회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천황은 반드시 승인해야 한다. 무조건 승인을 해줘야 한다는 조건은 없지만, 승인을 안 할 수가 없다. 총리가 각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천황은 그냥 도장 찍은 문서를 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
단, 한국감사원에 해당하는 회계검사원[56]의 원장과 위원 2인 임명에 대해서는 천황이 최종 가부를 결정할 수 있다. 회계검사원장과 위원 2인은 중의원/참의원 양원 모두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정당 당적을 가지지 않은 외부 인사가 보임된다. 보통 법학이나 행정학 교수가 추천되며, 가끔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에 파견나갔다가 복귀한 일본의 유명 경제학/경영학 교수가 지명되기도 한다. 원장과 위원의 임기는 따로 없는데 만기는 6년이나, 보통 2~3년 하고 자진사퇴 하는 식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 지명자를 천황이 최후에 승인해줘야 취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천황이 회계검사원장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천황이 회계검사원장 거부권을 행사하는 날은 곧 일본이란 나라가 뒤집어지는 날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궁내청일본 정부 내각의 지시를 받아 천황과 그 가족의 일상생활 거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 거부할 권리는 전혀 없다. 특히 무엇을 하건 간에 일단 궁내청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아야 하는데, 한 10가지의 신청을 하면 그 중 9개는 인가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천황이라고 예외는 없다. 당시 황태자였던 나루히토 천황의 아내인 마사코 황후의 경우,
- 책방 가는 것? 불가능.
- 친정 가는 것? 불가능. 황실에 맞는 규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 커피 마시러 잠깐 나가는 것? 불가능.
- 외국에 있는 대학교 동창들한테 전화하는 것? 불가능. 남편을 따라 평민이었던 여자들은 신으로 살아야 하기에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성이 없어지므로 신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올바르게 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하다. (참고로 마사코 황후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유학파이며 외교관 출신이라,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상기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같은 입헌군주제라 해도 상상하기 힘든 조치이다.
재력의 경우, 물론 중상류층 정도 생활을 하면서 황실의 위엄을 갖출 정도의 돈은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 정부에서 국민이 내는 세금을 천황에게 떼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돈은 천황의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비라서 단 1엔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자기 재산은 없으며[57] 명색이 천황인데 정부한테 용돈을 받아 쓰는 꼴이다.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 나라 중에서는 정부가 군주에게 월급을 많이 바친다던지, 또는 군주가 직접 세금을 걷되 일부를 정부에게 주는 나라도 있지만 일본은 많이 다르다.
이것 외에도 할 수 없는 게 산더미 같다. 그러니까 위에 예로 든 몇 가지 사례는 그 일부이다. 워낙에 많아서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황실의 신붓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서둘러 다른 남성과 결혼해 버리거나 혼담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황실에 시집 오지 않으려 한다고.[58] 반면 마사코 황후에게는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서 충분히 일을 하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여자를 꼬셔 정략적으로 결혼시키긴 했는데,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지킬 수조차 없었다.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징성을 넘어 일정한 권리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천황이 일본 그 자체의 상징이란 이미지는 남아 있다. 애초에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천황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천황이라는 의미가 일본인에게는 정말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쇼와 덴노의 서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천황이 중병에 걸렸다고 일본 내 모든 행사가 전부 취소되고 자숙(自粛)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처음엔 야단법석에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해(1989년)를 넘어 질질 끌자 김이 샜는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는 꽤 조용했다.
전임 제125대 천황인 아키히토가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추존 시호로 '헤이세이 천황(平成天皇)'이 되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아키히토를 헤이세이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인 '시호'를 아직 살아 있는 천황에게 쓰는 셈이니, 제대로 된 건 아니다. 일본인들은 금상(今上)이나 텐노 헤이카(天皇陛下) 등의 경칭으로 부른다. 물론 언론이나 공식 석상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천황제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사석에서 천황(天皇さん) 정도로 다소 스스럼 없이 부르기도 한다. 텐쨩(天ちゃん)같이 보수주의자 기준으로는 막 나가는 호칭까지도 쓰는 사람도 있다.[59]
아키히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테러를 방지한답시고 도쿄도 경찰 전체가 동원되어 도쿄도 시내 전체의 맨홀 뚜껑을 일일이 열어 확인한 후 봉인하는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진저리나는 바보 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또 당시 가이후 토시키 일본 총리가 즉위식에 참여해 축사를 하고 만세 삼창을 불렀으며, 일본 국민의 대표인 일본 총리보다 천황이 높은 단에 위치해 있었음을 들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위 비용으로 소비된 약 400억엔의 금액이 전액 국고 지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조차 문제가 제기되어, 가나가와현의 시민단체가 흔히 만세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을 걸었으나, 14년을 질질 끈 끝에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이 시기 시의회에 참석했던 당시 나가사키 시장이던 모토시마 히토시(우익 성향의 자민당!)가 좌익계열 정당에서 당선된 시의원과 이야기하던 중, 전쟁 책임에 대한 집요한 추궁 질문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가 글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60]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장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사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집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사태가 좀 진정되어 다시 출근했다가, 1990년 차에 타던 중 우익 세력의 난동으로 등 뒤에서 발사된 총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평소 극우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를 시의회에서 한 번 했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테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으로 당선된 시장 이토 잇초는 전임자와는 달리 중도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 극우 정치인들의 일본 핵무장 발언이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가, 2007년 야쿠자 출신 극우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끝내 사망했다. 핵을 맞았던 전력이 있는 나가사키극우 성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극우파들의 정치 테러의 목표가 된 셈이다. 이런 일본 앞에, 천황을 독극물로 암살하려 했던 옴진리교가 목 날아간 꼴이 됐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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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졸업식에 참석한 마코 공주(왼쪽)와 카코 공주(오른쪽).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카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했다.
일본 황족들의 교육에도 조금은 특이한 면이 있다. 가쿠슈인이라고 부르는 일관제 학교를 다닌다. 이 학교는 황족뿐만 아니라 패전 때 신적강하되었던 왕족의 방계나 재벌가의 자녀 등 유수 가문의 자녀들이 재학하여,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다.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였으나, 패전 후 평민에게도 개방되었고 사립학교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말이 평민이지, 금수저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고.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갖추고 있고, 중고등학교 과정은 남학교와 여학교로 나뉘어 있으며, 대학은 가쿠슈인대학(남녀공학)과 가쿠슈인여자대학이 있다.
그러나 가쿠슈인은 이 명성만 믿고 발전이 미비해 40년 동안 가쿠슈인 대학에는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경제학부의 4개 학부 외에 새로운 학부가 개설된 것이 없었다. 가쿠슈인 여자대학에는 학과가 더욱 적다(3개). 그래서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art-science)에 진학했다. 아키히토 천황의 5촌 조카딸들 중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 모리야 아야코는 죠사이(城西)국제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이는 히사히토 친왕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을 거쳐 동(同) 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하는 등, 가쿠슈인의 그 위상이 예전같지 않음은 확실하다.
이에 가쿠슈인도 위기 의식과 대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2013년 4월부터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에 교육학과를 신설했다. 이 학과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로, 개설된 첫 해에 카코 공주가 입학했다. 외가인 가와시마(川嶋) 가문에 교육자가 많은 영향에, 어머니 키코 비도 교직을 권했으며, 카코 공주 본인도 12살 아래의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을 도맡아 돌보는 등 아이들을 좋아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아 지원, 합격했다. 매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설을 준비하던 학과였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라는 가쿠슈인 측의 입장과 함께,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다!!"는 세간의 반응도 슬쩍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카코 공주도 이듬해 8월 말 가쿠슈인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 마코 공주가 졸업한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지망하여 합격했다. 카코 공주는 여기에 대해 "황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불편했고, 유치원부터 쭉 가쿠슈인에만 다녔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서도 공부해 보고 싶었고[62], 국제기독교대학의 충실한 영어교육과 폭넓은 교양교육(libral arts)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현재 황위 계승 서열 1위는 후미히토 친왕, 2위는 2006년에 태어난 아키히토의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친왕. 200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밖에 없는 현 황실을 우려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필두로 하여 여자도 천황이 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가 셋째 임신 중을 언론에 밝혀 무산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는 몇 번씩이나 아들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히사히토 친왕(2006.9.6.)이 태어난 날, 아키히토 천황은 갓 태어난 손자에게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내렸고, 거의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나루히토 천황 내외가 아들을 낳지 않는 한 히사히토 친왕이 큰아버지 나루히토 천황의 황통을 이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황족 23명 가운데 남자는 7명뿐인 사실을 감안하고 남녀평등의 여론이 불어,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마코 공주후미히토 친왕의 큰딸이며, 아키히토 천황의 손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마코 공주의 여동생인 카코 공주는 2년간 합숙훈련을 한 끝에 2004년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 재학 중에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열의가 높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1학년이던 2007년에는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신 실력은 그저 그런데 공주라서 점수를 잘 받았다는 평도 있다. 부친인 후미히토 친왕은 "딸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지지를 하고 있지만, 일본 보수파들은 "어떻게 공주가 저리 망측한 짧은 옷을"이라는 등 카코 공주의 취미생활에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후로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키히토 천황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11월 평민 공무원이자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하여 평민으로 신적강하 되었다.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황족과 친구로 지낼 정도였다면, 꽤나 좋은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 사야코 공주는 오타쿠로도 유명하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시절부터 가쿠슈인대학(일어일문학과) 시절까지 쭈욱 아니메 계열 동아리 소속이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이라고. 코미케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쿄 근처 서점에서, 시종으로 추정되는 양장 차림의 점잖은 노신사들이 만화책을 구입하러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2013년,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가 IOC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논란이 일었다.
2013년 10월 31일에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 의원이 천황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가 정치문제가 되었고 결국 국회에서 사죄해야 했다. 정작 아키히토 천황은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천황이 편지를 읽어 봤자, 전후(戦後) 체제에서 어차피 천황은 내각이 뻘짓을 하건 국민들을 어떻게 굴리건 진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법률로 금지된 정치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심만 살 수 있고 이 경우 천황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의원은 아예 "감히 신성한 천황에게 멋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넨 놈"이라는 보수 극우들의 린치로 참혹한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황은 편지 자체를 안 읽어 봤고, 내용도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실태에 대해 호소하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꼴을 당했다. 만일 천황이 직접 읽어 봤고 내용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 더 나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야마모토 참의원은 황실 행사 참석 금지 징계에 극우 단체의 협박 편지까지 받았다. 아키히토 덴노도 해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읽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측근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며, 해당 의원의 안위를 염려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 23일, 아키히토의 생일에 맞춰 트위터에서 천황합성축제(天皇クソコラ祭り)란 게 퍼지면서 대규모 키배가 터지고 있다.
2017년 5월 21일, 일본 보수인사 측에서의 천황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아키히토의 생전 퇴임을 논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베 신조 총리의 자문위원회 인사들 사이에서 "천황은 제사에서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것 말고 무슨 역할이 있는가? 궁중제사만 계속하면 굳이 퇴위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궁내청에서도 이에 상당히 격분하며, "그간 천황이 국내외를 다니며 나라를 위해 기여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해당 자문위원회의 인사들이 아베 신조 총리의 측근 인사라는 점을 볼 때, 일본 지도층에서 천황을 보는 시각 및 관점들을 엿볼 수가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에서 일본의 교섭 주체자 내지는 천황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라의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재위 20년(173)자를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倭女王卑弥呼 遣使来聘)"고 하여 아달라 이사금 때에 왜국과의 교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왜의 여왕 비미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히미코(비미호, 卑彌呼)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일본 내 소국들이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기에 여왕으로 공립(共立)된 인물로서 경초(景初) 2년(238)과 정시(政始) 4년(243)에는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등장 시기가 173년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238년, 243년과 시간적 차이가 있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 이 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게 되면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사서에 근거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조작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비미호 기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왜국왕으로 공립되기 전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邪馬台国)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인사를 한 것이며, 그 연대는 신라의 고기록(古記錄)이나 구삼국사(舊三國史/旧三国史)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미코의 생몰기간이다. 히미코의 사망연대가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을 보면 247년경으로 되어 있는데 173년에 야마타이국 여왕으로 즉위했다면 최소한 75년 간 재위한 것이 된다. 비미호의 즉위시 연령은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 10살에 즉위하였다고 해도 최소 85살 이상은 생존했던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생몰기간이 가능하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기록에 등장하는 비미호 기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히미코는 왜국의 대표로 공립되기 이전에 이미 야마타이국 왕으로 재위해 있었고, 즉위 초년에 즉위 사실을 신라에 알리고 견사하여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도 전하지 않는 신라와 야마타이국 간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천황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천황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천황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의 대마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63].
천황은 한때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고유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천황이 전쟁 책임은 면책받을 수 있어도 아시아 식민통치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천황이 되므로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본국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이 강했겠지만.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한편으로 현재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건너뛰고 천황을 국가의 대표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특히 자국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좋은 술안주 농담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보기에, 천황에 대한 정신적인 충성이 강하게 무장되어 있는 일본의 상황을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특히 한국은 해방 이전부터 어떤 형태였던 간에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천황을 비평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격한 반응에 당황하는 일이 많은 편이다. 위에서 서술한 배경들을 잘 알고 일본인들의 반응을 이해해야 좀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아키히토 천황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일본 황실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아키히토 천황이 외교적 수사[64]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한국 병합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고, 일본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이마저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운 것이, 한 국가의 왕실이 다른 국가의 혈통과 섞이는 것쯤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20세기 초 유럽만 봐도 그렇고. 현재는 군주가 먼 옛날 피 좀 섞였다고 다른 나라를 병합할 수 있는 시대가 이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전혀 의미가 없는 떡밥일뿐.

6.1. 방한(訪韓) 여부?


역사적으로나 현재까지도 역대 천황들은 역대 일본 총리나 각료들과는 달리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 한 번 방문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한 기록이나 사례가 없다. 또다른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는 쇼와 덴노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 아키히토도 1991년과 1992년, 2017년에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등 다른 아시아의 일본 제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도 겪었고 임진왜란 등을 통해 일본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침략 받았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못지 않게 일제 시기의 일본에게 더 큰 피해를 입었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근방(近邦)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이나 각료들을 제외하고 천황은 물론 황족 등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 부부가 방한한 것 외에는 방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예전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친족들이 있기는 했다. 1970년 영친왕의 장례식 때나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가 그 예다.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는 전술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65]유리코 비 부부가 조문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기 때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차남인 이구의 장례식 때는 주한일본대사가 조문했고, 아키히토 덴노미치코 황후 부부 명의의 조화가 왔다고 한다.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의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천황 방한을 추진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국민들은 물론 호국 및 애국단체와 독립단체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반일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거나 규탄하고 나섰으며 한국 국민들 대부분도 천황의 방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가 급히 "천황의 방한 계획은 사실상 없다"고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렸고 이에 우려하는 말이 나오자 해명하였다
사실 이명박 이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천황 방한을 추진하거나 추진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과거사 문제해결과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정서 그리고 반일 및 애국단체들의 반발과 반대, 일본 측의 거부로 인해 모두 실패하였거나 무산된 적이 있다. 게다가 노무현박근혜, 문재인의 경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대일 외교와 관련해 천황 방한을 아예 언급, 추진하지 않았을 정도였다.[66] 일본의 상황도 비슷해서, 천황이 한국에 간다는 것은 또 다시 한국에서 천황에게 일제강점기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 간 역사 문제와 관련해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는 등 난처한 입장이 된다는 것이 자명하기에 방한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기된 대로 천황은 정부의 통제를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보다 더 일본과 사이가 안 좋은 중국도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이 중국을 방문한 것처럼, 언젠가는 한국도 방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중국조차도 1970~80년대 당시 쇼와 덴노가 살아있던 시절까지는 천황의 방중이 중국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금기시될 정도로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현 아키히토가 즉위할 때까지 천황이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만일 성사된다면 대한민국에 방한한 국가원수들의 기념행사인 무궁화훈장 수여가 천황에게도 이루어질지도 실로 주목된다.
그러나 2016년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히고 이로 인해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 작업이 일본에서 진행되면서 큰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황위를 양위한 이후 현직 천황 신분이 아닌 '상황 신분으로라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들도 나오고 있다. 아니면 차기 천황인 나루히토의 방문도 생각해 볼 수도 있긴 하다.
2017년 9월 23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 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이수훈 신임 주일대사도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이 한일관계를 녹이는데 큰 기여를 하는 게 아니겠냐"며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천황 방한이 이뤄지면 한일관계에 발전될 것으로 본다"며 천황 방한을 거론하는 발언을 했다.# 생전 퇴위가 결정된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에 대해 한국과 일본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2019년 2월 8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천황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려, 일본 정계와 언론이 일제히 강하게 반발하였다.#
레이와(令和) 신연호 발표 하루 전에 2019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67] 아베 신조 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상이 1986년 3월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다.#

7.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


천황의 적통이나 신성성, 인간신, 그런 거 없다. 일본 공산당은 과거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은 물론 1990년 아키히토 덴노의 즉위식에도 불참하고 축사의결에 반대했다.
1932년 5월 당시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에서는 일본지배체제를 절대주의적 천황제, 지주적 토지소유, 독점 자본주의의 세 축으로 규정하였고 지주 및 독점 자본의 대변자 그리고 절대주의적 정치체제로서의 천황제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천황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혁파하고 이윽고 프롤레탈리아 민중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일본 공산당의 제1과제로 삼았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인민공화국 문서로.
그런데 2003년을 기준으로, 아키히토 천황의 거듭된 평화주의적 행보와 여성 천황도 수용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인해 상징에 불과한 천황제에 대해 마지못해 인정해 준다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는 대중정당으로의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노선 전향 이후 공산당 내의 국제파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천황에 대해 마냥 곱게 보는 입장은 아니긴 하다. 해당 기사는 시위대처럼 천황제를 당장 없애자는 건 아니고, 즉위식이 정교분리에 어긋난다며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일본국 헌법에 명시된 일본국과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천황의 국정에 관한 권한이나 권위는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시이 가즈오 일본 공산당 위원장은 "천황은 정치권한이 없으므로 과거사 사과를 할 자격조차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는 공산당이 평화헌법 개정을 막기 위해 호헌파에 속해 있지만 정작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의 첫 조항에 천황제가 명시되어 있다는 아이러니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공산당이 여당의 자리에 올라 그들이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한다면 [68] 국민들에게 천황제 존속을 묻는 여론조사나 국민투표를 시행할 수도 있다. 현재는 천황제 적극 반대도 아니고 적극 지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일본 공산당 강령에서 "천황의 제도는 헌법 상의 제도이며 그 존폐는 앞으로의 정세가 익었을 때 국민의 총의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天皇の制度は憲法上の制度であり、その存廃は、将来、情勢が熟したときに、国民の総意によって解決されるべきものである。)"라며 국민의 총의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8. 논란



8.1. 최고존엄


한국에서 천황에 대한 논란은 천황 본인보다는 최고존엄식으로 천황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고 이에 대한 논란 자체를 터부시하는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의 반응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실제로도 천황에 대한 반발심리는 천황 본인이 자초한 것이 아닌 천황과 관련된 논란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과 과잉되고 감정에 매몰된 발언들의 여파가 훨씬 크다. 오히려 아키히토 상황은 과거 일본에서 잘못한 점들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음을 줄곧 표방해왔다.
일반적으로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 사이에서 천황에 대해 비판하거나 행적을 평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된다. 단순히 여론의 비난 포화를 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비판한 사람이나 단체가 천황을 신성시하는 극우 단체의 집단 협박과 테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이면서도 아직 왕실이 존재하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유럽의 군주국들만 하더라도 국왕과 왕족들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과 평가가 굉장히 자유롭기 때문에[69] [70]이러한 일본의 천황에 대한 논란 자체의 배제 및 언론의 침묵과 천황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들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 회피는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때는 일본에서 집단 반발이 일어나서 한일관계가 얼어붙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발언했는데, 이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서 한일관계가 악화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만이 주로 언급되지만, 일본 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다. 집권 민주당과 자민당은 물론 과거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던 공산당 역시 비판 성명을 낼 정도였다.
그 후로도 2019년 2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다시 천황의 사과 요구를 했을 때에도 일본 여론은 한국에 대해 굉장히 싸늘해졌고, 평소 한국에 중립적으로 알려진 인사들까지도 혐한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태국이나 아랍 왕정 국가들마냥 완전히 비판을 틀어막는 건 아니기에 천황제에 대한 반대시위 자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당장 2019년에도 참여 인원은 극소수였으나 천황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매우 극단적인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이는 좌익, 우익 성향을 막론하고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황족 개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는 일본인들은 상당수 있지만 천황과 천황제 자체를 모욕하는 것은 일본 내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8.1.1. 반발


다만 일본에서도 천황 본인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는데 반해, 친왕이나 내친왕, 친왕비 등 다른 황족들에 대한 비판은 크게 제약받지 않는다. 또한 천황에 대해서도 인터넷에선 자유롭게 토론되며,천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의 일본에 특권계층이 있다는것 자체가 거부감이 드니까. 단 이런 이야기를 밖에서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8.1.2. 기타


아키히토 상황이 과거사에 대해 잘못을 통감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고 언급할 때 사람들이 그제서야 일본의 모든 사람이 과거사 인정과 사과에 대해 마냥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71], 때문에 이후 천황 호칭에 대한 논란의 상당부분이 사그라들기도 했다. 실제로 아키히토에 대한 한국 여론의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이며, 부정적이던 사람들도 아키히토의 발언들을 찾아보고 나서는 오히려 호의로 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9. 여담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성씨가 없다. 성씨는 인간들이나 가지는 건데 일본 신화 구조상 천황은 '보통 인간'이 아니고 신의 혈통에서 직계로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쇼와 덴노인간선언을 했고 21세기에 천황이 사실은 인간인 걸 모르는 사람은 일본에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성이 없는 상태는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 방계 황족은 궁호라는 걸 가지는데, 성씨와는 다르지만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 등등 성씨 비슷하게 사용되긴 한다.
친왕제는 한국중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공주를 '내친왕'으로 봉하는 건 일본만의 특징이다. 친왕/왕은 평민 여성과 혼인하더라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내친왕/여왕은 평민 남성과 결혼할 시 황적을 이탈해 평민으로 강등된다. 사야코 공주, 노리코 공주, 아야코 공주 등이 이에 따라 평민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남자 황족 부족 우려와 맞물려, 앞으로는 이러한 경우에도 황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자는 얘기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자 흐지부지됐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도 어김없이 남존여비의 분위기는 지속되어, 아무리 천황의 딸인 내친왕이라 할지라도 남편보다 먼저 앞서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구로다 사야코 문서로.
쪽바리와 더불어 소일본(小日本), 일본귀자(日本鬼子) 등과 같이 일본을 욕하는 말조차도 거침없이 모에화해버리는 21세기 일본의 오타쿠들이 워누(倭奴)와 더불어[72] 절대로 모에선으로 건드리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73] 천황은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를 모에화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는 황족을 모에화하거나 천황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카도니 하는 명칭으로 천황 비슷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로 만든다.
초대 진무 덴노, 여성 천황들( 사이메이, 메이쇼 등).[74] 근대의 천황들(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근대 이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있는 천황들을 빼고는 다들 초상화의 모습이 그게 그것 같다. 당연히 당대가 아니라 거의 후대의 어진이다. 유튜브에 역대 일본 천황 125대 진무 천황 ~ 헤이세이 천황(歷代の日本天皇125代[神武天皇 ~ 平成天皇])이라고 치면 천황들을 그린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부자연스럽다. 특히 2대 ~ 49대 천황의 경우에는 초상화의 색깔이 없고 단조롭다. 그리고 75대 ~ 93대 천황 중 81대 안토쿠 덴노를 제외하고는 초상화에 나오는 얼굴이 비슷비슷하다.
초상화가 없는 천황도 있다. 바로 고분 덴노. 그가 태어나서 죽은 이래 천 몇 백 년 동안 천황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도쿄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대국민담화를 할 때 TV 도쿄에서는 대국민담화 방송을 틀지 않고 정규방송을 하는 용자(?) 짓을 하였다. 왜 그런지는 TV 도쿄 문서로.
2018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천황인 아키히토에게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참배를 요구하였으나 아키히토는 거절한 바 있다.

10. 같이 보기



[1] 가운데 문양은 금빛 국화 문양을 띠고 있는 일본 황실의 인장이다.[2] 헌법이 신자체와 현대 가나 표기법 시행 이전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원문 자체가 구자체,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따라 표기되어 있다.[3] 대부분의 공화국이 1장에 국체의 성격(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 헌법)이나 국가(권력)의 존재 이유(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 독일 기본법)를 삽입하나,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이 가장 앞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천황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 일본국 헌법의 제1조에서도 '일본 국민에 주권이 있으며', '천황 지위의 근거는 국민의 의사에 기초한다'고 하여 그 권력구조를 드러내고 있다.[4] 평화헌법(일본국 헌법)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국가)신토를 종교가 아니라 본래 일본인의 정신의 일부(고쿠타이/国体)로 취급하여, 일본 신민이 천황을 섬기 는 것을 '종교의 자유 이전의 문제'로 취급했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종교였다. 이때 탄압당했다가 전후 복권된 교파의 신도들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면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고 "야스쿠니 신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신사의 신(神様)은 몇백 년 전부터 모셔온 신입니다." 라고 직접적이 아닌 에둘러 말한다. 신토#s-6 문서의 관련 문단에 나온다.[5] 일본이 天皇이라는 한자를 처음 쓰기 시작한 7세기 무렵에는 훈독인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라고 읽었다. 현재와 같이 음독인 '덴노(てんのう)'로 읽게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6] 한자 천황(天皇)의 일본어 독음을 로마자로 적으면 'Tennō'이기에 '텐노'처럼 읽힐 것 같지만 일본어의 청음은 한국어의 거센소리마냥 강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발음상으로도 덴노에 가깝다. 애초에 한국어에선 유성 자음 자체가 ㄴ, ㄹ, ㅁ, ㅇ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어의 청음을 예사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영하여 어두의 청음을 거센소리(ㅋ, ㅌ, ㅊ)가 아닌 예사소리(ㄱ, ㄷ, ㅈ)로 표기한다.[7] 일본서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수서: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8] 한자를 따로따로 읽으면 てん(ten)과 おう(ō)이지만, 붙여 읽을 때는 連声라는 현상 때문에 n이 덧난다.[9] 김후련,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고대일본의 자타인식」, 『역사문화연구』21, 2004[10] 그러니까 수와 대립하던 고구려가 일부러 왜를 대국인냥 포장해서 수를 견제하려 한 일종의 뻥카라는 이야기[11] 김대중 정부 당시, 지도자의 칭호는 당해 국가에서 통용되는 고유한 명칭을 그대로 쓸 것을 권고해서 '천황'으로 쓰게 되었다. 한자 그대로의 '하늘의 황제'라는 뜻의 목가적, 봉건적 사상을 인정해준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 편의 때문에 이렇게 쓴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국무위원장', 중화민국은 '총통', 브루나이는 '술탄'이라고 칭한다.[12] 문서에는 황제라고 했다.[13]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후 급격해진 일본의 우경화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항의 표시인 듯, 오부치 게이조 총리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에서는 천황/덴노로 표기했다.[14] 이와 같은 미디어물과 게임, 소설에 익숙해진 일부 사람들이 이런 식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댄 것이 대한제국의 황제 선포.[15]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이 굳이 황제를 자칭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후 영국에서도 칭호 문제가 있었다. 프로이센에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가 시집을 갔는데, 이후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칭호 문제가 촉발되었던 것. 마침 영국인도를 완전히 장악하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의 타이틀을 겸하여서 칭호 문제를 무마한 적이 있었다.[16] 심지어 한국에서는 이것도 왕실전범이라고 하기도 한다.[17] 천황의 손자/손녀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다.[18] 천황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19] 해당 기사에선 '상황', '상황후', '황사' 등도 모두 '상왕', '상왕비', '왕사'로 일률 조정하되 정작 한자 표기는 '上皇', '上皇后', '皇嗣'로 해 두고선 각각에 '조코', '조코고', '고시'라는 일본음을 달아 두었다. 한자 표기를 사실상 일본식 호칭 전용으로만 쓴 셈이다.[20] 다만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일본 국내에서도 "붕어"라는 말이 일상적이지 않음을 감안한 것인지 당시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가 '붕어하셨다'라는 말 뒤에 '돌아가셨다는 뜻'이라고 짤막하게 추가 설명을 덧붙인 적이 있다. 실제로 '붕어'라는 어휘를 살면서 이때 처음 알았다는 반응의 일본인들도 아주 많았다. 하기사 마지막 붕어 소식을 전한 지 6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 60년도 그냥 60년이 아니다. (일부 대도시에서만 공업이 이루어지고) 아직 농업이 주류 산업이던 시대, TV 구경도 할 수 없던 시대가 이 60년 안에 정보화 사회로 바뀌었다. 까놓고 말해서 덴노의 붕어를 한날한시에 전국에 생방송으로 알린다는 것이 다이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21] 사실 엄밀히 말하면 메이지 천황 이전 고메이 천황에도 막부 시대 천황보다도 오히려 권위가 약해졌다. 비록 에도 막부 쇼군들이 막부 중기 이후로는 사실상 교토에 상경하지도 않는 쇼군들이 대부분인 등(막부 말기에는 오히려 에도에 한 번도 안 가보고 교토에만 거주한 쇼군 또한 있긴 하다.) 쇼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독점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형식적으로는 쇼군의 결정을 천황이 재가하는 형태를 갖추긴 했었던데 비해 현대의 천황은 그러한 형식적 권한조차 없다. 애당초 막부 말기 외양 웅번들이 토막을 외치고 반란을 일으킨 근거 자체가, 도쿠가와 쇼군이 천황의 허락이 없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다.[22] 코를 만지거나 귀를 씻거나 기타 등등[23] 이자나기이자나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나라/땅 만들기를 오쿠니누시가 계속 이었다는 의미.[24] 이때의 쇼군은 막부 시대의 쇼군과는 다른 개념으로, 천황이 임명하는 단순한 무관직에 불과했다.[25] 이마저도 중앙에서 보낸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기보다는 다이라노 사다모리,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같은 현지 호족들이 주축이 된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26] 오닌의 난과 같은 난리를 겪으면서 궁궐이 불에 탔으며, 이 때문에 황실이 재산을 잃고 파산하였다. 센고쿠 시대의 천황이 화려한 궁전이 아닌 허름한 집에서 지낸 이유는 이것이다. 천황과 귀족들의 본거지인 교토가 난으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27] 천황을 모시는 것 이전에, 궁녀들의 대부분은 공가의 귀족 출신이었다. 즉 조선으로 치면 반가의 부인과 따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소리다.[28]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이 덴노가 쇼군에게 보낸 칙사를 대접하던 사무라이들끼리 예법이 어긋났다는 이유로 쪼인트를 까다가 벌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이묘까지 할복해야 했을 만큼, 천황의 칙사 앞에서 무례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파장이 컸다는 소리니, 당시 천황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29] 이는 에도 막부의 쇼군가 쪽에서 천황이 실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황실과의 혼인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래서 그 막부의 권위도 나락으로 떨어진 개화기 때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황실의 딸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와의 결혼이 성사되자,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30] 만세일계와 같은 말은 한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단군이 하늘의 신 환웅과 웅녀의 후손이며, 한국은 하늘과 곰의 기운을 받은 국가라는 식의 신화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천황의 정당성을 위한 상징적 단어일 뿐이다.[31] 비단 현존하는 왕조 뿐 아니라 옛날에 존재했던 왕조들까지도 이잡듯이 뒤져도 가장 최장수 왕조에 꼽힐 것이다. 보통 왕조는 500년을 넘기도 힘들며 문명별, 시대별, 지역별로 왕위 계승의 법칙도 달라서 A라는 왕조가 500년을 넘겼다 쳐도 B라는 왕조에서 채택했던 왕위 계승의 법칙 방식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당장에 조선만 해도 서유럽식으로 보면 왕조가 몇번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를 들자면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한 것을 들 수 있겠다.)[32] 후에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33] 다만, 그렇다고 해서 북조 계통인 이후 덴노들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남조와 북조의 선조는 원래 덴노자리를 10년씩 교대로 지내던 사이다. 고사가 덴노가 상황으로 물러난 뒤 4남 고후카쿠사 덴노가 즉위했는데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계를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손이 아닌 평소 청애하던 8남 가메야마 덴노의 아들인 고우다 덴노로 정했기 때문에 지묘인 계통(4남의 후손, 이후 북조)과 다이카쿠지 계통(8남의 후손, 이후 남조)가 돌아가면서 덴노에 오르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분쟁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34] 실제는 섭정을 한 황태자 히로히토[35] 설령 정말로 남조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고카메야마 덴노가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선위한 이상 계승권이 없다. 다만, 정말로 남조의 후손으로 인정받을 경우 최소한 백작 이상의 높은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남조를 위해 목숨바친 충신의 후손들까지 찾아내서 귀족 작위를 주던 시대적 분위기였으니 말이다.[36] 남북조 시대 혈통 분쟁과 관련한 부분은 교고쿠도 시리즈 3권 <광골의 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그야말로 안습한 역사.[37] 일본의 전통적인 문벌 귀족.[38] 이토 히로부미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황족으로 태어남은 큰 불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절에 얽매여 살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면서 손으로 마리오네트 다루는 시늉을 하여 지켜보던 외교관들이 당황했었다는 말은 도시전설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군주에게 매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해서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메이지 덴노를 존중하고 섬겼다.[39] 메이지 정부가 전국 각지에 징병령을 내려 농민들로 구성된 징집 군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웠을 때도, 농민들이 죽창 들고 관공서 몰려가서 "천황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데 우리 목숨을 혈세로 거둬가겠다는 거냐"며 화를 냈을 정도.[40] 아직도 남아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41] 천황이 있는 도쿄 황거(고쿄)를 향해 신민으로서 절을 하는 일.[42] 맥아더는 천황에 대해서 “천황 한 명의 가치는 미군 사단 21개와 맞먹는다”며 그런 영향력을 지닌 천황을 굳이 교수대에 올려서 괜히 패망한 일본인들 감정만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킬 바에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본 개혁에 적절하게 이용해먹는 것이 차라리 더 효율적이고 일본인들의 저항도 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3] 패전 직후 일본 전국 각지로부터 맥아더와 미군을 환영하는 무수한 편지들이 쇄도했는데, 오사카 인근에 사는 오우치 하나코라는 사람이 1945년 12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예 “식량 배급을 늘려주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라고까지 썼다고# 특히 일본국 헌법 공표당시 일본 대중들 대다수가 군대와 전쟁포기 조항을 지지했을 정도로, 정말 당시 대중들은 전시상황만 끝날 수 있다면 뭐라도 좋은 상태였다. 물론 맥아더가 포섭하려 한 건 대중이 아니라 반공에 협력해줄 지도층이었기에 얘기가 달라진다.[44] 그래서 일본의 역사물을 보면 막부나 번 등에서 '가로(家老)'라든지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쇼군이나 번주는 가끔 몇 마디 던지는 정도고,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장은 없이 전무, 상무 등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격.[45] Ikuhiko, Hata, Hirohito: The Showa Emperor in War and Peace, Global Oriental Ltd, 2007, p.24[46] Ikuhiko, p.31[47] 당시 일본에서는 의회가 아닌 천황만이 조약을 비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는 1925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70년에 했고 제네바 협약은 1929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53년에 했다.[48] Sherman, Christine, War Crimes: Japan's World War II Atrocities, Turner Publishing Company, 2001, p.258[49] Tipton, Elise, The Japanese Police State: Tokko in Interwar Japan, Bloomsbury Academic, 2014, p.22[50] Tipton, p.22-23[51] 당시 중국 본토에 있던 중화민국[52] Harada, Kumao, Saionji-ko to seikyoku, vol.6, Iwanami Shoten, 1951, pp.206[53] 2019년에 후미히토 일가 5명에게 지급될 생활비가 한화로 대략 6억 정도다. 참고로 일본 월급쟁이들이 평균 연봉이 대략 4천만원이다. 물론 이 정도도 영국을 비롯한 외국 왕가들에 비하면 매우 적은 금액이지만.[54] 이 조항에는 '천황이 내각의 조언을 받아 자의로 승인을 한다'는 식으로 해석될 요지도 있지만(주로 극우들이 펼치는 논리다), 잘 보면 마지막에 내각이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있다. 책임을 지는 쪽이 당연히 권한도 갖는 것이다.[55] 물론 일본에서는 "그런데 섭정도 승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내부의 지적이 있고, 이에 대해선 답이 없다고 한다. 황실 전체가 천황하기 싫다고 파업하지 않는 이상 실제 이런 일이 터질 가능성이야 없겠지만, 헌법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는 셈이다. 성문법주의를 채택하고있지만 관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이기에, 천황의 일거수일투족에 굳이 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56] 일본에서 회계검사원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궁내청과 완전히 별개의 위치에 있는 헌법기관이다. 대만오권분립을 이루는 감찰원에 가깝다. 회계검사원은 입법, 사법, 행정, 궁내청의 회계를 검사하고 비리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57] 비교 차원에서 언급하자면 영국에서는 국왕이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겸하며, 랭커스터 공작 명의로 전국의 알짜배기 부동산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임대수익을 내탕금으로 삼는다. 이 부동산들의 집합체가 "랭커스터 공국"으로서 존재하며, 임대료 징수를 담당하는(그러니까 마름이다) 랭커스터 공국의 재상도 엄연한 각료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 천황은 개뿔도 없다.[58] 스스로 원하여 황실로 시집 온 키코 비는 퍽 이례적인 경우이다. 물론 그녀도 호된 시집살이를 겪었으니, 황실에 시집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59] 작가 아가와 히로유키(1920)가 썼다고 알려진 호칭이다. 해군선옥론자로 육군식 천황 신격화를 혐오했지만 역사 교과서 수정은 지지하는 등 딱히 우익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인물.[60] 협박을 비롯해 인터넷 개인메일 테러.[61] 물론 옴진리교를 이토 시장 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옴진리교는 일본 국가 전복을 꾀하고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상했으며 또 하려고 했기에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62] "중학생 때부터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 이외의 다른 대학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3학년 때 외부 대학에 지원했으나, 낙방해서 내부진학으로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했다고.[63] 도산 안창호가 임종하기 전,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당시 천황이던 메이지 천황을 유언으로 나무랐을 정도였다.[64] 이 발언은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양국간의 우호와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사돈의 팔촌 엮듯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한일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근거 동영상을 보면 "속일본기에 조상의 어머니가 백제계라 기록되어 있어 인연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65]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막내[66] 노무현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 대신 아키히토 천황의 장남인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을 정도로 천황 방한에 소극적이었고, 박근혜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하기 이전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자랑할 정도로 당시 고정 새누리당 지지층들로부터 높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복무, 부역하는 등 아버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당시에 일본아베 신조 총리가 군사대국화 등 우경화 정책을 펼치면서 박근혜 정부 시기 초반기에 한국과 외교적으로 대립, 갈등을 빚던 시점이었는지라, 당시 박근혜 본인이 천황 방한을 추진하고 싶어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재인은 아직 정부 출범 초반인데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일단 천황 방한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2017년 9월 이낙연 국무총리가 천황의 한국 방문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고, 이수훈 신임 일본대사와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천황 방한을 거론하는 발언을 했다.[67] 이때가 알다시피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는 달이라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해서 한일관계를 발전적으로 나아가려는 고려를 엿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68] 이전 버전의 서술 내용.[69] 영국에서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로 개편하자"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주장하며, 현 영국 여왕엘리자베스 2세를 크게 비판하는 사람들과 시민단체들도 상당히 많다. 이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군주제 폐지 주장을 사람들에게 잘만 주장하고 다닌다. 그밖에도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 사망 당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대한 영국 왕실의 태도에 대해 시민들이 집단으로 분노하여, 영국 왕실과 함께 여왕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를 거리낌없이 공개적으로 크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풍자화도 자유로운데, 일례로 한낱(?) 코미디 프로그램인 미스터 빈에서는 주인공이 (실수이기는 하지만) 전기톱으로 사진에 그려진 찰스 왕세자의 목을 자르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런 인식은 영국뿐만 아니라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다른 유럽의 입헌군주국들도 마찬가지다.[70] 다만 이러한 경향이 바탕이 되는 이유가 유럽 쪽은 명확하다. 유럽은 군주제에 반하는 여러 큰 혁명들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있으며, 유럽의 군주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반쯤 자발적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이러한 일들이 이러난 적이 없어 현대에 살면서도 여전리 군주라는 존재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다.[71] 과거사에 대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일본인들은 포퓰리즘에 충실한 언론의 십자포화와 강경한 일본 국민들의 감정적인 마녀사냥, 선동 때문에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불이익이 따르기에 활발하게는 활동을 못한다. 때문에 한국 언론 인터넷 등에서도 이것이 조명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72] 워누는 절대로 모에화를 못 한다. 설령 하더라도 노예를 모에화하는 꼴인데 이는 자기 나라를 모욕시키는 꼴이니(...)... 실제로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일본을 비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워누다. 중국인들이 이러한 맹점을 노린 것.[73] 물론 이러한 태도 때문에 "천황은 언터쳐블 최고존엄이 맞다"는 조롱이 더더욱 커졌다.[74] 고대에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여자가 국가 지도자인 것이 너무 이례적이기 때문에 따로 초상화를 남겼다. 한국사에서도 여왕은 오직 신라에서만 나왔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