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세이

 

1. 개요
2. 상세
3. 원인
4. 전개
4.1. 인세이의 시작
4.2. 인세이의 절정기,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
4.3. 원(院)과 제(帝)의 대립
4.3.1. 도바 상황의 인세이
4.3.2. 호겐의 난과 무사세력의 대두
5. 종말
6. 여담


1. 개요


院政(いんせい(원정)
일본 역사에 등장했던 독특한 통치 형식. 천황황태자에게 양위한 뒤에, 상황(上皇, 조코)으로서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했던 독특한 제도를 의미한다. 인세이는 천황의 권위를 떨어트리고 결과적으로 막부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었다.

2. 상세


'인세이'라는 명칭은 상황이 '원(院)'이라 불리는 곳에 기거했기 때문에 '원'에서 '정(政)치 업무'를 보았다는 뜻에서 '인세이(院政, 원정)'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이후 인(院)은 '양위한 전임 천황'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사실 군주제 국가의 특성 상 어린 나이 등으로 통치 능력이 없는 군주는 자주 등장했고, 때문에 군주를 대신해서 통치하는 섭정들은 군주제 국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왕실이나 황실의 최고 여성 어른이 군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통치하는 수렴청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또한 선왕이 아직 정정한데도 양위하는 사례 자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당현종의 경우는 안사의 난이라는 위급상황에서 황태자에게 양위했고, 조선의 태종도 세종에게 양위한 예가 있다. 태종세종에게 양위한 후 왕이 가지는 잡다한 업무부담을 털어버린 후 상왕으로서 권력만 챙기는, 좀 더 수월한 통치활동을 보여준 역사가 있다.[1]
하지만 인세이와 이런 사례와의 다른 부분은 인세이는 특수 케이스가 아닌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잡았고 실권을 놓지 않고 통치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왕의 아버지가 실권자로 집권한 사례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본 예가 있지만, 흥선대원군이 왕이었다가 양위한 게 아니고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역시 경우가 다르다.
인세이는 요약하자면, 전임 천황이 멀쩡히 활동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어린 아들에게 천황 자리만 물려주고, 자기가 대신 권력을 휘두르는 희한한 형태의 제도였다. 말이 '군주'이지 사실상 황태자에게 직함만 올려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3. 원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일본 특유의 은거(隱居) 제도와 유사한 정치형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이 가독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은거'를 결정한 뒤에도 여전히 가문과 영지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듯이,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上皇)이 그 위치에서 천황과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문제가 없다는 말. 다만, 인세이는 전국시대 이전에 벌어진 제도인 만큼 인세이 제도에 따와서 생긴게 은거 제도라고 봐야할 것이다.
현직 천황을 능가하기까지 하는 것도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황실 즉 '천황이라는 지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가문'의 최고 당주가 천황이라는 지위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현직 천황이 아니다 뿐이지 엄연히 황가의 당주인데 당주로써 그 가문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뭐 어떻단 거냐."는 인식과 유사하다.
정치적인 환경을 고려해보자면 인세이는 황위 계승이 장자 계승으로 고착화되지 않은 채 외가의 권세에 좌우되던 일본 황실의 특성과, 강력한 외척과 천황들의 유착 및 갈등 상황과 연관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 황가의 분열은 천황들의 계승권이 복잡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복잡한 후계 문제를 야기했다. 따라서 생전 천황이 살아있을 때 계승 문제를 확실하게 하고자 인세이라는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죽은 권력은 말이 없기 때문에 천황이 죽고난 이후 누굴 천황으로 올릴지는 분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실권이 없었더라도 명목상 천황에 장기간 재위한 인물을 끌어내리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행동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세습 경영을 추구하는 재벌 그룹들이 후계 준비의 일환으로 후계자로 확실히 내정된 인물을 그룹 내 주력 기업의 사장 자리에 앉히면서 실권을 맡은 사람은 '회장' 직함으로 올라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2] 바꿔 말하면 인세이는 현직 천황이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단순히 황태자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천황이라는 '군주'의 자리에 명목상이나마 앉힘으로서 후계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사후 발생할 계승 문제를 원천 차단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천황들이 종교적 권위로 인한 여러 행동상의 제약들과 의례 수행에 따른 번잡함, 관례화된 후지와라 가문의 정치 관여 등을 피하면서도 권력은 누리려는 성향도 인세이의 지속 원인이었다.
하지만 군림해야할 '천황'이 실권이 없다는 점과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물론 정책과 제도, 권력 구도 측면에 있어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위치'이긴 했으나 어쨌건 '천황'의 자리에 오른 마당에 상황(上皇)과의 권력 분열은 천황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국가 최고 결정권자가 1명이 아닌 현실에서 정치 상황이 문란해지는 것과 함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어 국가 운영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세이 제도가 생겨난 이후 천황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고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무사들이 권력 지위를 넘보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이 다툼에서 '천황파'가 패하고 '무사계급'이 승리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전통적인 천황제는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유명무실해지고 무사 정권이 등장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4. 전개



4.1. 인세이의 시작


일본 역사에서도 태자에게 양위한 천황은 심심찮게 있었다. 고교쿠 덴노가 동생인 코토쿠 덴노에게 양위했던 것이 첫 사례이고, 헤이안 시대에도 몇 명의 천황들이 양위한 기록이 존재한다. 셋칸 정치 이전인 헤이안 초기, 8세기 말 사가 덴노(嵯峨天皇)에게 양위했던 헤이제이 덴노(平城天皇)가 상황으로 있었는데 그 복위가 시도되어 '구스코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사가 덴노 본인도 양위 후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율령 체제하에선 양위한 상황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게 원칙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상황은 천황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규정 때문에 상황들은 정사에 관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세이가 이미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나타났다는 해석이 많지만, 흔히 인세이의 전형이라 불리는 시라카와 법황[3]의 예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이 시대에는 천황 세습이 명백하게 규정된 것이 아닌 데다가, 헤이안 말기로 갈수록 천황들이 단명하는 사례가 많아 강력한 권력을 가진 상황이 나타날 여건이 아니었다. 이리 되니 자연스럽게 황가는 약해진 반면, 전대 천황의 부인 즉 황후의 집안이 천황의 외조부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우다 덴노부터 이렇게 권력을 휘두른 집안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으로, 무려 170년 동안 천황에게 자신들의 딸을 황후로 들이게 하고, 천황이 젊어서 요절하면 나이 어린 외손자를 등극시킨 뒤에 '셋쇼(摂政, 섭정)'로, 천황이 성인이 되면 '칸파쿠(関白, 관백)'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오랜 세월 권세를 누리면서 신하들을 복속시키고, 지방의 관리들과 토호들을 회유했으며, 막대한 장원을 기진받아 천황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자 자연히 천황의 권력은 크게 제한되었다.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행하고, 천황이 장성한 후로도 권세를 누리는 판이었기에 상황들의 정치 참여는 거의 제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지와라 참조. 헤이안 중기는 이런 셋칸 정치 시기였다.
1068년 고산죠 덴노가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셋칸케의 권세가 약화된다. 170여 년 동안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와 엄청난 장원을 소유하여 막대한 재력과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을 휘두르던 셋칸(摂関) 후지와라 가문에 반발했던[4]고산조 덴노는 170년 만에 후지와라 가문 여인의 소생이 아닌 천황이 되었고 후지와라 가문의 셋칸정치를 약화시켰다. 당시 후지와라 셋칸케(摂関家)는 내분으로 인해 천황의 견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고산조 덴노는 외척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이라 칭송받는 정치를 펼쳐 장원을 축소시키고,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면서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고산조는 맏아들인 사다히토 친왕(貞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행하려다[5]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만 고산조 덴노가 인세이를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양위 후에 후지와라 가문의 재등장을 막으려는 차원이었다는 분석도 있긴 하다. 이후 셋칸케는 규정 외의 장원이 정리되는 등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져서 잠시 국가 상황이 호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지와라 섭관가 밑에서 숨을 죽이던 후지와라 방계 및 타성의 귀족들이 이후 점차 임용되기도 한다.[6]

4.2. 인세이의 절정기,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



사실상 인세이의 전형은 시라카와 덴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시라카와 덴노는 1086년에 불과 8살밖에 안 된 아들 타루히토 친왕(善仁親王)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면서 인세이를 시작했다. 이렇게 즉위한 호리카와 덴노(掘河天皇)가 죽고, 5살밖에 안된 호리카와 덴노의 아들이 즉위하여 도바 덴노(鳥羽天皇)가 되면서 시라카와 상황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아예 모든 정사는 시라카와 상황이 좌지우지하고 천황은 말만 천황일 뿐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는 기묘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시라카와 덴노가 처음부터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들에게 양위한 건 아니었다. 원래 양위한 이유는 강력한 차기 황위계승권자인 동생들을 우려해 동생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호리카와 덴노는 칸파쿠인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通)와 상의하며 정사를 봐서 시라카와 상황이 멍때리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는 고산조 덴노가 셋칸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으나 아직은 조정에서 섭관 정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탓에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셋칸케에만 쏠리는 국정 운영에 필요한 정보력과 영향력 및 상황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마딴한 조직과 기반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1099년 때마침 칸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가 사망하여[7] 시라카와 상황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모로미치의 아들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忠實)는 당시 나이가 어렸고, 아버지만큼의 정치력은 없었기에 모로미치에게 상의해서 정치를 하던 호리카와 덴노는 이제 아버지에게 물어서 정치를 해야 했다. 게다가 1107년 호리카와 덴노가 갑자기 사망하고, 5세이던 태자 무네히토 친왕(宗仁親王)이 즉위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시라카와 상황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다. 더불어 후지와라의 셋칸을 임명하던 후지와라 출신의 황태후가 부재하였던 상황은 황실 최고 어른의 자리를 상황이 차지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이후 황태후를 대신해 상황이 셋칸의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실 어른으로서 천황의 계승까지 결정하게 되었다.[8]
이후 시라카와 상황은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인노고쇼(院御所)인 교토 동북부 시라카와 호쿠덴(白河北殿)에 자리잡은 그는 권력의 수족으로 외척이나 대귀족들 대신 중하류 귀족들과 지방 고쿠시(國司, 국사) 출신들 및 무가 세력을 기용해 그들 중심으로 측근정치를 행하였다. 이들은 인에 설치된 원청에서 근신(近臣)으로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인은 조정에도 근신들을 보냈고, '인젠(院宣)'이나 '인쵸쿠다시부미(院廳下文)' 같은 문서를 통해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조정을 압박했다. 또한 경호 및 직권 무력으로서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호쿠멘노부시)'를 설치하여 측근들과 각지의 겐지, 헤이시와 같은 여러 무사 씨족들을 기용하였다. 이들은 인의 경호 및 직접적인 무력으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유칸(融観)'이란 법명을 받은 시라카와 법황은 불교계와 유착을 강화했고, 젊은 셋쇼를 직접 임명하며, 도중 그 직권을 2번이나 정지시키면서 기를 꺾는 등 후지와라 셋칸케를 견제하였다. 또한 방계 황족들을 출가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후지와라 가문이 황위 계승에 간섭하지 못하게 해 자신의 자손들이 외척의 도움 없이 황통을 이어가게끔 조치하였다. 이런 권세 덕에 법황은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쳤다. 이때 시라카와인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 즉 '천하삼불여의(天下三不如意)'에 대해 말했다고 하는데, 교토 인근 카모가와(賀茂川)의 물, 쌍륙의 주사위(의 눈금), 승병의 문제[9]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10] 이는 뒤집어 말하면 자연과 운, 당시 강성하여 강소(强訴)를 일삼던 승병들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신이 전제(專制)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승병은 무사들을 동원해 억제하였기에 상황으로서 지난날 셋칸의 권력 이상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셋칸케를 비롯한 귀족들의 장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셋칸케의 전횡을 억제하기도 했지만, 점차 인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조정이 무력화되고, 정치가 자의적으로 행해져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는 폐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에 심취했던 인이 사원들에 장원을 기진하거나 새로운 사원을 세우면서 재정 지출이 증가하고, 장원 개혁이 약화되는 폐해를 생겨났다. 더불어 후지와라 셋칸케와 밀접했던 무사씨족 '카와치 겐지(河内源氏)'[11]를 경계하여, 겐지와 경쟁하던 무사씨족이었던 '이세 헤이시(伊勢平氏)'[12]를 중용했는데, 그 비호 아래 타이라 가문이 인의 무장세력으로서 복무하면서 지방의 문제나 승병들의 강소 등을 막고, 상업과 장원에서 쌓은 부를 인에 바치면서 성장하여 무가정권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13]
당시까지는 반석과 같던 시라카와 법황의 치세였으나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후대에 분란의 여지를 남겼으며, 여기에다 사적으로 호색했던 면이[14] 추문을 불러일으켜 이후 황가의 내분, 즉 '호겐의 난'을 초래하게 된다.

4.3. 원(院)과 제(帝)의 대립



4.3.1. 도바 상황의 인세이


인세이는 천황을 공기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인세이의 가장 큰 문제는, 인세이를 하는 상황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 자연히 권력에서 소외되는 천황에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게 되고, 천황이 상황에게 맞서서 권력을 쟁탈하려 하게 되면 결국 내전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129년 시라카와 법황의 사후에 일어났다. 1123년 시라카와 법황은 직접 키운 손자 도바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도바 덴노의 장남 스토쿠 덴노를 세우고 난 뒤에 죽게 되었다. 문제는 도바 덴노가 스토쿠 덴노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도바 덴노가 처음부터 장남을 싫어했던 건 아니고, 강제로 양위하게 된 것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이 사정에 대해선 스토쿠 덴노 문서 참고.
시라카와 법황이 세상을 떠난 뒤, 도바 상황은 인세이를 행하여 율령을 벗어난 자의적 정치가 이어졌다. 특히 도바 상황은 장원의 국령지 회수보다 자신의 장원 확보에 열을 올리면서 인(院)이 막대한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도바 시기 장원으로 인한 분란과 소요가 끊이질 않게 되었다. 상황이 사적으로 장원을 늘리는 행위는 황실의 신망을 떨어뜨렸으며, 국고를 감소시켰다. 이런 경향이 확대되어 타이라 같은 무사 가문이나 귀족 가문들, 지방의 권세가들까지 토지를 겸병하게 되었고, 이들 세력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국고가 악화되고, 민심이 흔들렸다.[15][16] 여기에다 황실의 내분, 계속되는 실정은 황실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이미 고레이제이 덴노 이전까지 거슬러가는 지방의 분열과 불복종은 심화되었다. 동북방의 오슈(奥州)에서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방 관직과 관위를 세습하면서 사설 장원 및 북방과의 교역 및 사금 채취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으로 교토와 맞먹는 규모의 히라이즈미를 건설, 반독립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17] 장원들은 소유 무사들에 의해 봉건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앙이 이들 토지 소유 무사간의 토지 분쟁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면서 이를 중재하는 무사 세력의 힘이 성장하였다.[18] '세이와 겐지'와 '간무 헤이시'를 비롯한 지방의 여러 무사들의 대두는 이를 바탕으로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형성한 것을 그 기반으로 하였다.
한편 도바 상황은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황자를 낳자 이 아들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려고 스토쿠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결국 1142년 스토쿠 덴노는 아버지의 강요로 2살짜리 동생인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을 양자로 들여서 양위를 하게 되었고, 코노에 덴노가 즉위하였다. '신인(新院)'으로 불리게 된 스토쿠 상황은 원래대로였다면 도바 상황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서 인세이를 할 수 있었으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인 상황이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우에게 양위하였던 스토쿠 상황은 인세이를 할 수 없었다. 이는 도바 법황의 세력이 강력했고, 스토쿠 덴노의 아들은 황후인 섭관가의 딸 후지와라씨의 자식이 아닌 후궁의 자식이었으며, 나리히토 친왕이 스토쿠 덴노의 황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스토쿠 덴노의 장인이었던 셋쇼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가 도바 법황과 손을 잡아버렸던 탓이었다. 결정타로 양위식 때 양위문에는 황태자가 아닌 '황태제'에게 양위한다고 쓰여, 스토쿠 덴노가 아우에게 양위하는 형식이 되었기에 스토쿠 상황의 인세이가 불가능하게끔 되었다. 이에 스토쿠 상황도 가만 있지는 않아서 동생인 코노에 덴노의 유사시를 대비해 자신의 맏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도쿠시에게 양자로 들이게 했다. 이렇게 되면 시게히토 친왕이 천황이 될 경우 천황의 친아버지라는 명분으로 인세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스토쿠 상황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1155년 병약한 코노에 덴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도쿠시 등은 스토쿠 상황이 인세이를 하는 걸 막으려고 도쿠시의 또다른 양자이자 도쿠시 소생 황녀와 결혼하게 되는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을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모리히토 친왕은 당시 너무 어렸기에 장성하여 천황이 될 때까지의 징검다리로 모리히토의 친아버지인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 도바 상황과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4남)을 태자 책봉도 안하고 천황으로 덜컥 즉위시켜 버렸다. 장유유서의 문제도 있었고, 도바 상황의 측근이자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乳父)였던 신제이(信西)가 마사히토 친왕의 옹립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로[19] 그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이다. 실제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 그 아들이었기에 고시라카와 덴노의 즉위 이후 곧장 모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도 이루어졌다.

4.3.2. 호겐의 난과 무사세력의 대두


이는 분명 파행적인 일이었으나 스토쿠 상황으로선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도바 상황이 죽은 후인 1156년, 고시라카와 덴노와 스토쿠 상황은 무력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이다. 호겐의 난은 인세이 체제의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되어 버렸다.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형 타다미치에게 밀려나던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와 손잡고, 무사세력을 규합했다. 이 때문에 타이라 씨족과 미나모토 씨족 역시 분열되었으나 결국 상황군이 패배하여 스토쿠 상황은 유배되기에 이른다.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은 출가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1158년 고시라카와 덴노가 아들 모리히토 친왕과 그 후견인 도쿠시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상황이 되었다.즉위한 니죠 덴노(二条天皇)는 정사에 적극적이었으며, 권력은 막대한 장원을 가졌던 도쿠시와 셋칸케 및 타이라 가문의 보좌를 받던 아들에게 있었기에 고시라카와 상황은 권력을 잃은 채 한가로이 지내었다. 상황 소유의 장원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에게서 몰수한 장원 정도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위축되어 있었다. 이듬해(1159) '헤이지의 난(平治の亂)'이 발발해 상황의 측근들이 죽고, 유폐되었다 탈출하는 일도 있었으나 그때조차도 쟁점은 아들인 니죠 덴노의 신변으로, 고시라카와 상황은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난의 와중에서 신제이(信西)가 살해되고, 주모자로서 다른 측근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살해되는 등 상황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0] 그후 남아있던 상황의 측근들은 정쟁에서 패해 파직당하고, 귀족들도 상황을 징검다리로 보아 상황에 협조하지 않았다. 정치에서 소외된 고시라카와 상황은 불교, 특히 관음신앙에 심취하여 쿠마노(熊野)를 참배하였고(이후로도 수차례 참배하였다), 타이라 가문의 조력을 얻어 1,000개의 관음상을 안치한 관음당(觀音堂)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관음당의 완공 후 기뻐하던 상황이 아들인 니죠 덴노에게 왕림을 청했으나 제위 계승과 인세이 문제로 사이가 멀어졌던 천황은 끝내 왕림하지 않았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거절된 당시나 천황 사후에 이를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165년 니죠 덴노가 요절하면서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상황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키요모리의 처제인 타이라노 시게코(平滋子)와 결혼하여 유착을 강화하였는데, 정략적인 면이 강한 혼인이었으나 시게코는 상황의 총비가 되어 수차례의 쿠마노 참배를 비롯한 상황의 여러 여행길에 항상 동행하였다. 키요모리와 그 일족을 등용하고 승진시키면서 그 재화와 무력을 얻어 권력을 누리던 고시라카와는 손자였던 로쿠조 덴노(六条天皇)를 퇴위시키고, 황후 타이라노 시게코가 낳은 7남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을 키요모리의 지원을 받아 다카쿠라 덴노(高倉天皇)로 즉위시켜 천황의 생부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로쿠조 덴노의 황후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 또한 양녀로 삼아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셋칸케는 호겐의 난 이후 권력이 약화되었던데다, 셋칸케의 방대한 영지의 대부분이 고시라카와인의 묵인 아래 키요모리의 딸이자 죽은 후지와라노 모토자네(藤原基実)의 아내였던 모리코(盛子)의 휘하에 들어가 타이라가가 관리하게 되면서 상황은 셋칸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타이라 가문을 이용해 반항적인 사원들의 강소를 억누르며 임의적인 정치를 행하던 고시라카와인은 황후 시게코 사후 타이라 가문과의 틈이 벌어져 결국 타이라 가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미 시게코 생전부터 타이라 가문의 권력이 너무 강력해져 셋칸케의 영지마저 관할하고, 수도의 치안 및 군사권을 거의 장악하여 키요모리의 승인 없이는 강소 저지의 인젠(院宣)조차 무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엔랴쿠지(延暦寺)가 엔랴쿠지의 말사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후지와라노 모로타카(藤原師高)[21]의 유배를 주장하는 강소를 벌였는데, 키요모리는 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진압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이로 인해 측근의 아들들을 유배시켜야 했던 고시라카와 상황과 키요모리와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상황은 타이라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이것이 1173년의 '시시가타니 사건'이었다. 이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누설되어 나리치카나 승려 사이코를 비롯한 상황의 측근들이 제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이코(西光)는 처형되었고, 키요모리의 장남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처남이던 나리치카마저 유배 후 아사하였다. 고시라카와 상황 역시 도바 이궁에 유폐되었으며, 조정은 천황과 친 헤이케 귀족들 및 타이라 일문의 공경들로 채워져 정사가 행해졌다.
고시라카와 상황은 유폐된 가운데에도 은밀하게 지방에서 반 헤이케의 기치를 내건 겐지 일족과 연락했으며, 다카쿠라 덴노와 키요모리의 사후 정치적 공백을 틈타 인세이를 재개하였다. 그는 모략을 써 가며 1185년 안토쿠 덴노(安徳天皇)를 폐위하고, 다른 손자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를 옹립하였으며 헤이케 토멸의 선지를 내리는 등의 행동으로 타이라 가문의 멸망을 이루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장악하였다. 이에 상황은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이자 용맹으로 이름높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부추겨 형제간의 내분을 획책하였으나 요리토모의 전격적인 진압으로 인해 실패했으며, 반발하는 요리토모를 달래고자 결국 그의 동국 지배권을 인정해야 했다. 요리토모는 동국에서 기존 국가의 지방통치체제를 대신하는 자신의 봉건적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하니 이것이 본격적인 무가정권의 시작이 된다.

5. 종말


고시라카와 사후 요리토모를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하는 안이 관철되어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조정의 동국 지배권이 상실된 이후 조정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1221년 '조큐의 난'으로 고토바 상황이 호조 가문에 의해 유폐되고, 황가와 귀족들이 장원의 상당수를 잃게 되면서 확실해졌다. 이후 조정의 약화와 함께 인의 권력도 크게 약화되어 지난날과 같은 치천의 군의 위세는 갖지 못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幕府)기 교토에 설치된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통한 호조 가문의 정치 개입 속에서 인세이는 황족 내 황위다툼과 연계되어 행해지는 경우가 늘어났다. 13세기 중반 이후 황통이 '지묘인토(持明院統)'와 '다이가쿠지토(大覚寺統)'로 분열되었고, 막부는 황통의 교차 세습을 권유하여 양통의 황족들이 번갈아가며 황위를 잇게 되었으며, 인이 황위의 계승을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333년 고다이고 덴노겐무 신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으나 북조의 지묘인토가 황통을 독점하게 되면서 부활하였다. 17세기 초 에도 막부 시대에도 고미즈노오 덴노가 인세이를 행하였으며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이렇듯 인세이는 섭관직과 더불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막부 시대의 상황들은 시라카와-도바와 같은 치천의 군의 권력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고토바 상황이 설치했던 '서면의 무사(西面の武士)'는 철폐되었고,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도 크게 축소되어 소수의 경호집단 수준으로 전락하였다가 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를 지나며 명목만 남게 되었다.

6. 여담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후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도 이와 비슷한 '은거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 또한, 쇼군 통치시기에도 이와 유사한 '오고쇼(大御所)' 제도가 나타난다.
한국사에도 고려 말 원 간섭기 시절 충선왕충숙왕 시대에 여러 상황이 겹쳐져서 결과적으로 비슷한 체제가 나타났고, 그로 인한 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이 두 왕에 한정되는 일이었고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1] 태종의 경우 상왕이 되어서도 일정 부분 실권을 휘두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교와 군사 부문에만 한정한 것이고 나머지 내치에 관한 모든 것은 세종에게 넘겼다.[2]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은 근현대 일본 자이바츠들에게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시대 다이묘가 그랬고 쇼군 시대의 쇼군이 그랬듯 유사한 제도가 등장한 것. 그리고 일본의 경영 시스템을 많이 본딴 한국의 재벌 경영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다.[3] 불교에 귀의한 상황은 '법황(法皇)'이라 불렸다. 상황들은 승병들을 거느린 채 막대한 장원을 보유해 강성했던 사원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승려가 되고는 했는데, 어느 사원에 귀의하느냐에 따라 종파나 사원 간 알력에 휘말리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4] 생모가 산조 덴노의 황녀로 후지와라 가문의 외손이 아니었다. 물론 170여 년간의 혼인관계를 생각하면 사실상 한집안이나 다름없긴 하지만...[5] 인세이를 행하려 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들에게 황통을 잇게 하기 위해 양위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이는 시라카와 덴노의 양위에서도 그러하다.[6] 물론 가문의 격에 따른 품계가 사실상 정해져 있어서 이는 제한되었다.[7] 모로미치의 급서에 대해서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당시 지샤(절과 신사) 세력의 강소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했던 모로미치가 신불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설을 싣고 있다.[8] 특히 천황 계승 문제는 장자 계승이 확립되지 않은 채 주로 외가의 권세에 따라 계승이 결정되어 불안정했던 황통 계승 문제를 염려하던 천황들이 후대로도 인세이를 행하는 주 원인중 하나가 되었으며, 가마쿠라 시기 황통의 분화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조 시대를 여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9]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병이 특히 골칫거리였다.[10] 출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11] 세이와 덴노(淸和天皇)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이었던 '세이와 겐지'(淸和源氏)'의 일가로 카와치 국(河内國)을 근거로 했었음.[12] 간무 덴노(桓武天皇)로부터 사성(賜姓)된 방계 자손인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의 일가로 이세 국(伊勢國)를 근거로 했었음.[13]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조부 타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 때부터 북면의 무사로서 시라카와인을 섬기면서 법황의 총애를 얻고, 그를 통해 여러 이권과 지위를 얻으면서 성장하였다. 마사모리의 아들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는 시라카와-도바 법황을 섬기면서 장원을 늘리고, 송과의 교역을 확대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충, 이를 기반으로 사병 및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을 늘리면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런 세력을 가지고 인을 뒷받침하여 그 공로로 조정에 출사하기에 이르렀으며, 아들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권력을 휘두를 물적, 인적 기반을 마련해 놓는다.[14] 하술되는 손자며느리와의 풍문부터, 측근이나 북면의 무사 중 몇몇이 남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이러한 장원의 남설은 고시라카와 덴노 즉위 이후 '호겐신제(保元新制)'의 반포와 시행을 통해 천황의 장원 지정권 확립 및 장원 정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16] 도바 상황은 긁어모은 막대한 영지의 대다수를 총애하던 후지와라노 도쿠시에게 물려주었고, 이것이 도바 상황과 도쿠시의 딸이자 고시라카와 덴노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양모였던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 暲子 内親王)에게 상속되어 훗날 모치히토왕의 거병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등 황실 내 내분과 황권의 약화를 부추겼다.[17] 그러나 황실과 대귀족들의 장원 및 국유지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지방통치형식은 중앙이 조세와 장원의 공물만 징수하고, 지방 권력은 고쿠시(国司, 국사)와 지방 세력에게 위임하는 형식이었는데 오슈 후지와라씨는 유독 강성하여 오슈의 지방세력을 규합, 통제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8] 10세기 간토에서 발생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도 그 발단은 친족간 토지 분쟁이었다.[19] 하급 귀족 출신이던 승려 신제이는 그 덕에 이후 천황의 후견인으로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권세와 개혁으로 인한 귀족들의 반발을 사 헤이지의 난에서 살해되기에 이른다.[20] 원래 도바인의 측근이던 신제이나 그외 친정파를 몰아내고 인세이를 행하고자 고시라카와인이 이를 사주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1] 인의 근신 사이코(西光)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