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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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고재천(高在千)
본관
장흥 고씨[1]
생몰
1905년 9월 1일 ~ 1981년 5월 29일
출생지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용수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2]
사망지
광주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재천은 1905년 9월 1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용수리(현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여름에 동교생 10여 명과 함께 학교 뒷산인 여기산(麗妓山)에 모여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적한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했다. 건아단 단원들은 농촌사회의 계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들은 수원군 안룡면 고견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7년 9월 북도 지방을 수학여행하던 그는 강원도 등지에서 일본인 소유의 대규모 농장을 목격하고 분노해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1928년 6월, 건아단은 당시 일본 동경에 설치되어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농우연맹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주장에 합류하여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연사로 참여한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한전종(韓典鍾)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자, 단원들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단명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칭 위장했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에 검거된 일이 일어났다.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이들의 활동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1928년 9월 고재천은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18개월 동안 미결수로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30년 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광주로 이주해 조용히 지내다가 1981년 5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고재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23세 '''재(在)''' 규(圭) 항렬.[2] 인근의 삼천리·유천리와 함께 장흥 고씨 집성촌이다. 고재필 전 보건사회부 장관과 독립유공자 고재휴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