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이섭
1. 문경시 출신 독립운동가, 곽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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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생이며 경상도 문경현 가북면 상고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10월부터 11월까지 총기를 휴대하고 10여 명의 의병들을 지휘해 진천, 음성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1909년 7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곽이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무안군 출신 독립운동가, 곽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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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월 2일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조규학(趙圭學)·옥대호(玉大鎬)·홍원표(洪玩杓) 등과 함께 무등독서회(無等讀書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무등독서회는 연합군 상륙 후 행동대원으로 봉기할 것을 굳게 다지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임시정부 연락원의 밀령을 실천하여 정통 역사관 정립과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두었다. 그들은 '일본은 물러가라'라는 내용의 삐라와 벽보를 금남로 일대와 일본인의 집 곳곳에 부착했으며, 1943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정보원과 접촉하며 국제정세와 임시정부의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여 회원끼리 나눠가졌다. 이어 그해 5월에는 광주비행장의 근로동원을 3개월간 기피했고 혹독한 군사훈련에 반항하여 전학년 구보 데모를 전개했다.
1945년 6월, 무등독서회원들은 만주 봉천에 거주하는 임정 연락원 옥평호의 조국이 해방된다는 정보와 연합군 상륙과 동시에 봉기하라는 밀령을 받고 교내에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1944년 10월 체포된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에 석방되었다. 이후 무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9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곽이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