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암

 


성명
구수암(具壽巖)
생몰
1901년 2월 1일 ~ 1920년 5월 1일
출생지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사망지
부산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구수암은 1901년 2월 1일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서울의 모 신문사에 다니던 김수룡(金壽龍)이 김도엽·권철암·최기복·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오기원(吳基元), 그리고 구수암 등 기장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에 구수암은 여러 청년들과 함께 4월 5일 기장 장날 오전 11시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기장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을 통해 기장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 원지를 빌려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동지들과 혈서로 ‘양심발원(良心發源)’·’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쓴 큰 기를 준비하였다가 기장면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1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했다.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공소했지만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 처리되었으나 1920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당시 집에는 노모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가계가 힘들어 초상을 치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정의숙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성금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제문은 기장의 한학자인 박란수가 지었고, 명정의숙 출신의 권은해가 읽었다. 제문의 제목은 '구수암 만가'로 정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이 무슨 날고. 무궁화 옛 나라에 슬픈 바람이 낯을 치고 수심구름이 눈을 가려 흘러 나니 눈물이라. 만세의 한소리에 만 1년, 감옥 중에 원통히 병을 얻어 본가에 돌아온지 며칠이 못 되어서 거연히 세상을 버린 구(具)공의 상여로다… 슬프다! 나라잃은 설움이여, 우리 겨레 한마음으로 독립을 되찾고자 애국함도 죄가 되나…. 인심이 천심인데 천리가 무심하랴. 때가 오면 원한도 풀릴 날이 있으리라. 슬프다! 구공이여! …오호통제 상향.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구수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