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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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권대형(權大衡)
자 / 호
정집(正執) / 독수
본관
안동 권씨[1]#
생몰
1898년 8월 28일 ~ 1947년 10월 9일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군 청암면 궁항리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대형은 1898년 8월 28일 경상남도 진주군 청암면 궁항리(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에서 종5품 충청도 도사(都事)를 지낸 아버지 권계주(權啓柱)[2]와 어머니 임천 조씨 조성호(趙性鎬)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1924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인 그해 7월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1여년 후인 1926년 3월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도쿄에서 사상단체인 일월회(一月會)·재동경조선청년동맹(在東京朝鮮靑年同盟)·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등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진보적 서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가 발간하는 <신흥과학>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경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일어나자, 이에 동참하여 신간회 동경지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다. 또한 제4차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뒤 귀국하여 1930년 6월 이종림(李宗林)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1931년 2월에는 고경흠(高景欽) 등과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朝鮮共産黨再建設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일제의 검속이 치열해지자 대구로 몸을 피한 그는 일종의 연락기관으로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다. 이때 서인식(徐寅植) 등과 함께 <코뮤니스트>, <봉화>등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 경남 양산(梁山)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慶南赤色農民組合 東部委員會)와 동년 12월 광주(光州)에서 결성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지도하던 그는 1932년 3월 체포되어 1933년 4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7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권대형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복야공파 도징(道徵)계 31세 '''대(大)''' 병(丙) 만(萬) 우(友) 항렬.[2] 1856년 10월 24일 ~ 1931년. 1913년 편찬된 일종의 친일 성향의 지방 유지들을 기록한 인명록인 조선신사대동보에 수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