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고등학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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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창조적 글로벌 리더 육성
2. 역사
3.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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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부지는 총 21,686m2 (6575평). 참고로 사진에서 가까운 옥상이 녹색인 건물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영희초등학교. 왼쪽 중앙 건물과 운동장이 중동고등학교 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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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주년 기념관
창조관, 컨퍼런스룸, 체육관이 모두 여기 속한다. 위 사진에서 제일 앞에 있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건물.
- 창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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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당.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체육관을 지나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있는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가면 된다. 시설 자체는 오른쪽 백주년 기념관에 있지만 해당 건물에 있는 계단은 바로 연단으로 들어가는 용도와 귀빈용으로 사용된다. 본관 3층 복도와 다리로 연결되어있다. 수용인원은 350명에서 400명 정도로 원래 한학년에 담임, 교장, 교감, 부장 선생님들까지 하면 딱 맞는 수준이었지만 학생 수가 적어져 보통 자리가 남는다. 입학설명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신입생 동아리 홍보, 각종 강연 및 축제 때 주요 공연의 용도로 쓰인다. 입학 설명회나 축제 때에는 뒷 공간과 계단까지 합쳐 600명 정도 수용하는 것 같다.
- 컨퍼런스룸
소강당. 창조관과 같은 건물에 있지만 1층에 있다. 오른쪽 건물로 바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다. 수용인원은 100명 정도. 임원 전체 소집, 동문 선후배 멘토링, 자치법정, 이공계 프런티어, 소규모 대학 설명회 등 중소규모 행사에 주로 이용된다. 입학설명회 때 대강당인 창조관이 자리가 없을 경우 이곳에 남는 인원을 수용한다.
- 체육관
교문 바로 앞의 넓은 공터 바로 왼쪽에 있는 것. 입장 시에는 위에 나온 창조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특수할 때에는 공터로 열린 문을 개방한다. 조명장치와 음향시설, 연단이 갖추어져 있어 필요 시 강당으로 쓸 수 있다. 주 쓰임새는 축제 시 동아리 부스 설치, 졸업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 행사장, 비오는 날 체육 수업, 그리고 검도 수업. 최근에 지어져 건물이 매우 깨끗하다. 그러나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은 편.
- 성큰 가든(Sunken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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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관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 나오는 안으로 움푹 파인 지대로 왼쪽에는 식당, 오른쪽에는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점심시간에 이곳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2018학년도까지 이곳에 매점이 있었지만 2019학년도부터 업체가 바뀌며 본관 뒤 컨테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 판매되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지역임을 표시하는 팻말이 붙었는데 거기에 성큰가든이라 적혀있었고 그 이후로 성큰가든으로 불렸으며 학교/학생회에서 사용하는 공식명칭도 성큰가든이다. 이렇게 지하에 햇빛이 들어오도록 짓는 건축 기법을 선큰이라 해서 붙은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비둘기가 많이 오는 곳이었다. 학생들이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는데, 그 덕에 비둘기들이 점심시간 마다 떼거지로 몰려왔다. 다만 위생때문에 학생회 측에서 비둘기를 쫓기 위해 노력했다. CD를 매달아 놓거나 퇴치 스피커 설치 등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 그닥 효과가 크기 않았고 천장에 있는 철골 구조물에 그물을 쳐 놓은 이후로 비둘기의 수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이후 매점이 옮겨가면서 성큰가든에 비둘기가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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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1층
교장실, 행정실, 인쇄실, 방송실, 도서관, 숙직실, 3학년 1~5반
- 본관 2층
프런티어실[2] , 보건실, 3학년 6~12반, 체육부실
- 본관 3층
- 본관 4층
제 2교무실, 미술실, 다용도실, 1학년 1~4반, 2학년 9~12반, 세미나실, 학생상담실
- 본관 5층
물리실, 화학실, 생물실, 지구과학실[5] , 각각의 준비실, 과학조교실, 1학년 5~12반
- 엘리베이터
체육관 건물에 설치되어있으며 전층 운행한다. 매 층에 장애 학생을 위한 시설이라며 이용을 자제하라는 푯말이 있으며 학교에서는 타지 말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딱히 선생님들이 단속하지도 않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는 편이다. 선생님들도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 즉각 벌점을 부여하는 선생님도 있다.
- 기타
4. 학교 생활
- 경례가 존재하는데, 구호는 '정직'이다. 다만 경례구호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교에 경례가 있다는 게 전혀 좋은 일이 아니라서 대체로 학생회장 유세 때 사용하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사용하기도 하고 4대부, 그리고 체육 시간에 일부 선생님들에 한해 사용하기도 한다.[8] 70년대에도 쓰던 역사 깊은 구호. 갈수록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 명찰이 한자[9] 로 적혀 있다. 주변 학교들과는 차이가 있는 모습. 노란 한자가 쓰여져 있는 검은 명찰은 근처 학교 학생들에게 중동의 상징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사실 학생들의 인권과 사생활 보호를 위한 교사들의 뜻 깊은 방책이라는 드립도 존재. 이 때문에 잃어버린 교복을 찾아도 주인한테 줄 수 없는 웃지 못할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체육시간 전후로 옷을 갈아입을 때 누구 체육복인지 모르는 경우가 생간다. 특히나 이름에 복잡한 한자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교사들도 못 읽는 경우가 나온다. 특히 새로 온 젊은 교사들은 힘들어 한다.
- 80년대와 90년대에는 명찰의 색으로 학년이 구분되었다. 빨간색-파란색-노란색이었고 체육복도 이렇게 색상으로 학년을 나누었다. 색상은 선후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선후배 관계가 명확한 중동고에서는 명찰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었다. 2005년 1학년(101기) 기준 뱃지색깔로 학년을 구분했었다. 1학년 파란색 2학년 노란색 3학년 빨간색 이었던듯. 3학년 전용으로 테두리에 색이없는 로고 뱃지도 있었던거 같다. 이후에는 명찰의 테두리 색으로 학년을 구분했는데, 진남색-녹색-흑색이었으나 흑색과 진남색이 구분이 안 된다는 이유로 진남색이 적색으로 대체되어 적색-녹색-흑색으로 바뀌었는데 흑색이 황색으로 바뀌어 115기 기준 현재는 녹색-적색-황색으로 사용 중이다.
- 수능 전날이면 '수능 출정식'이란 걸 한다. 나름 유명한지 매해 수능 당일날 저녁 뉴스를 보면 자료 화면으로 뜨기도 한다. 2017년 출정식에는 미국 abc뉴스에서도 취재 했고 기사를 낸적이 있다. 수능 전날 3학년은 일찍 끝나는데, 1, 2학년 학생들이 학교 마당에서 교문까지 늘어서서 박수를 치거나 응원가를 연호하며 깃발[10] 을 펄럭이고 3학년은 그 사이를 걸어 교문을 나가는 것. 교문 쪽에는 선생님들이 나와서 격려해 주시는대 이때 은근 감동이다. 솔직히 눈물 흘리는 애들 많다. 당연하지만, 매년 행사 때마다 바로 길 건너 앞에 아파트에서는 민원이 폭주한다고(...) 그리고 그날 밤 11시, 몇몇 동아리 소속 1,2학년들은 현장수능응원을 위해[11] 각자 소속된 동아리가 모이는 학교 앞으로 가서 노숙을 했지만 111기 기준 요새는 선생님들이 단속을 나가서 잡는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응원가 부르기, 경례하기, 절하기 등을 하고 시험 시작하면 해산한다. 방송사나 신문사의 기자가 응원 장면을 촬영하고 인터뷰하기도 하는데 높은 확률로 당일 지상파 방송의 메인 뉴스에 등장한다. 이때 복장 원칙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만이다. 그래서 응원이 끝나면 몸이 굳어버리는 참사가 발생한다. 2018년 수능부터 당일 아침 응원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분위기라는게 있어 수능 들어갈때 괜스래 가슴이 떨리고 긴장을 엄청하게 된다.
수능당일 현장응원
- 권위주의적 선후배 관계가 완화되었지만 지금도 남아있다. 114기부터는 학생회가 개편되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4대부는 여전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것은 대표적인 금기 중 하나.[12] 특히 일부 역사가 깊은 동아리에서 그런 모습이 심했다. 모 동아리의 경우 후배가 선배를 볼 경우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동아리 신입 후배 기수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차려를 주자고 하는 모습도 보였다.
현재에는 조금 완화되었지만 학교 차원에서 경례를 유지시키고 있다. 애초에 타파되어야 할 현상이기도 하고. 물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금방 적응하고 선배랑 잘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도 한 해에 한두 번씩은 선후배간에 갈등이 발생한다. 1학년은 노예, 2학년은 인간, 3학년은 신이라는 농담도 존재한다.(사실 팩트다.) 원래는 신입생 들어오고 동아리 선발하고 하는 3-4월경에는 점심시간 나 방과 후에 경례구호가 교내를 울렸다.
- 이렇게 옛날부터 단결력을 자랑하다보니 싸움 잘 하는 학교 이미지가 있었다. 가끔씩 옛날 중동고가 싸움 붙은 내용의 신문기사가 돌기도 한다.[13] 1970년대 중앙고등학교 재학생 증언에 따르면, 학교 간 패싸움이 벌어질 때 "중동 모여라!" 소리만 들리면 서로 싸우던 다른 학교들이 즉시 연합해서 중동을 상대해야 했을 정도라고(...).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들은 바로는 자신이 학교에 부임한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 수학여행에서 패싸움이 붙었는데, 옆에 한 50대 중년 아저씨가 겉옷을 벗으면서 "내가 중동 00회다!" 하며 무리 속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한다. 84년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중동고만의 단결력은 변함없었다. 8학군으로 이전해 과거와 다를 것이다라는 예측은 그저 예측이었을 뿐이다. 일원동 1기인 80회 졸업생부터 82회 졸업생까지 순수하게 강남 출신으로 배정된 학생들이 있던 시기에도 수송동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82회 졸업생은 1학년에 입학하자 마자 3월에 중동고 방송실에서 있었던 서초고 회장단의 사과 방송부터 듣고 시작했다. 서초고등학교 학생이 중동고 학생을 때려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중동고 학생들이 서초고에 몰려가 항의하며 거칠게 나섰고이에 서초고에서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한 것이다. 휘문고, 단대부고, 경기고 등 주변 학교들과의 마찰도 항상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고 중동고만의 선후배 관계로 내부 결속이 잘 이루어져 타학교의 잘못된 작용에는 전교생이 뭉쳐서 반작용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편, 개포고등학교와의 사건은 88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90년에 정점을 이루었지만, 88년에도 개포고에 3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가 학교를 둘러싸고 중동고에 대한 폭력에 항의했었다. 당시에도 전교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나와 경찰서에 모두를 데리고 가라 무언의 시위를 했었다. 학교 내부에서는 선후배간의 엄격한 위계로 신경쓰면서 다녔지만, 외부에서 건들면 전교생이 쉽게 뭉쳤다. 중동고등학교만의 단결력인데, 외부와는 싸움이 잦았지만 내부에서는 선후배 간의 군기 외에 동기끼리 싸움은 거의 없었다.
- 사실 싸움 잘하는 데는 역사가 길고 규율이 강한 전통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축구부, 레슬링부, 역도부, 아이스하키부(!)등이 전국 수위권일 정도로 운동을 잘 했고 운동부원들 결속력도 강해서이고, 두 번째 이유는 야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간부는 일찍 하교하는 중학교와 같은 교실을 썼는데, 주경야독하는 건실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중학교때부터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해서 온 학생들, 가정 형편 때문에 몇 살이나 나이 더 먹고 느지막히 들어온, 거칠게 살다 온 학생도 많아서 주먹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포동 이전 전까지, 학교가 있던 서울 중심가 종로, 세종로 등지에서는 중동 학교 뱃지나 검은 명찰, 교표인 사자가 그려진 버클을 차고 있으면 타 학교 불량 학생들도 잘 건드리지 않았다. 해당 학생은 혹시 약할수 있지만, 곧 그 친구나 선후배들이 몰려와서 개박살을 낼수도 있었기 때문. 학교 역사가 깊다 보니 교사들도 거의 다 동문 선배들이었는데, 학교 밖에서 싸움질을 했어도 타 학교에서 맞고 온 친구를 도와주러 가서 패주고 왔을 경우라면 대충 간단한 기합만 주고 무마해 주기도 했었으니...연극반 출신 동문인 정동환이 술회하길 연극반의 군기도 운동부 못지 않았다고 한다.
- 70-80년대엔 중동 아이스하키부, 축구부가 강력하여 중동 출신 국가 대표, 프로 선수가 꽤 있었다. 축구협회 회장을 지낸 조중연, 동 시대의 조영증 등이 그 예. 19년 기준으로 경남 FC 김종부 감독, 고 차경복 전 성남 FC 감독, 90년과 96년 K리그 우승을 이끈 고재욱 전 럭키금성, 울산현대 감독 등 유명한 축구 선수 출신이 많다. 아이스하키 또한 유명 선수를 많이 배출했고, 최근으로 범위를 좁히면 중동고 시절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신상훈이 있다.
- 축제는 백농축전이라는 이름 하에 2학기 말, 12월에 열린다. 원래는 1학기 기말시험이 끝난 이후였는데[14] , 2014년부터 옮겨졌다. 3학년의 축제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지만 , 수능이 끝난 시점이라 3학년은 그때 그냥 다른 데서 논다. 아니, 애초에 학교도 잘 안 나온다. 축제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며, 첫째날은 본교 학생들끼리, 둘쨋날은 다른 학교들까지 함께 축제를 진행한다. 2016년 기준으로 백농축전은 하루로 축소되었다. 동아리가 뺑뺑이로 바뀐 것과 같은 해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부분.
- 위 시설 항목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특이하게도 1주일에 1시간 검도수업이 존재한다. 학생들은 검도수업을 대체로 싫어하는 분위기지만 칼 갖고 논다고(...) 재미있어하는 모습도 가끔 보인다. 원래는 2012년까지는 2학년까지 대상이었지만, 학생들이 싫어해서인지 108기부터 1학년만으로 대상이 축소되었다. 검도 선생의 꼬장으로 맨발로 체육관을 돌아다녀야 한다. 물론 체육시간 때는 여느 남고가 그렇듯이 축구와 농구로 갈리지만 가끔씩 테니스 코트를 개방해 테니스를 치거나 족구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은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구석에서 스마트폰을 한다. 야구공과 글러브를 가져와서 캐치볼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떤 학생이 비품으로 있던 소프트볼로 운동장쪽 유리를 날려먹고 사람까지 다친 뒤엔. 인쇄물로 제발 하지 말라고 하면서 금지했으니 적당히 봐가면서 하자.
- 학생회장 선거는 2학년 회장, 부회장과 1학년 부회장이 한 팀을 이루는 런닝메이트 제도이다.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선거철이면 등교시간에 교문이 떠나가라 선거구호를 외쳐댄다(...). 선거구호라고 만드는 것들이 어째 매년 꽤나 유치해서 오히려 학생들이 민망해한다.
- 1학년들의 경우 2학기 기말고사까지 다 끝나고 나면 학생회 주최로 축구대회를 열었다. 겨울철에 하다 보니 정신없이 축구하다가 미끄러져(...)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불미스러운 사고 이후 109기부터는 더이상 겨울에 하지 않는다. 2016년 입학생인 112기의 경우, 아예 축구대회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7년 기준으로 운동회에 추가되었다.
- 한편 2학년들은 축제기간 즈음에 농구대회를 열였다. 전통적으로 이과에서 우승반이 나왔지만 108기 때는 문과에서 우승반이 나왔다.
- 2020년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타 여러 학교들처럼 수학여행과 축제가 취소되었다.
5. 출신 인물
6.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6.1. 지하철
- 참고로 교통편이 상당히 좋다. 교문 바로 옆이 서울시 지하철 3호선 대청역이고, 그 반대편으로 비슷한 거리에는 3호선 학여울역과 2호선 삼성역으로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이 존재한다.
6.2. 버스
7. 사건 및 사고
- 1990년 당시 옛날 얘기긴 하지만 중동고 학생들과 개포고 학생들이 패싸움으로 사회면에 났다. 경과는 다음과 같다.원문 출처
뉴스기사 내용에 덧붙여 실제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개포고 복도에서 갑자기 누군가 '중동만세!' 하면서 지나갔고 이후 중동고 학생들이 위의 설명처럼 운동장에 등장 나머지 사건 전개는 기사와 같다.
이 사건 이후 중동고와 개포고 사이에서 마찰이 끊이질 않았고 어떤경우는 중동고생과 개포고생이 서로 싸우다 결국 두 학생의 부모가 만났더니 서로 회사 동료인 상황까지 가서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개포고에서 개포고 학교 깃발을 들고 사과하러 왔고 중동측에서도 사과를 했었다.
이때 경찰이 중동고에서 사건의 주동자를 잡으러 왔었는데, 결국 잡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이 처음에 사건의 주동자가 있으면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경찰은 경찰대로 운동장에서 계속 나오라고 하자 갑자기 처음에 누군가가 나오고 이후 또 누군가가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결국엔 중동 학생 전부가 다 나오자 경찰도 누굴 잡을 수가 없어서 결국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에 한 교사가 동문회에서 어떻게 그때 전부 나올 생각을 했냐고 묻자 3학년이 당시 운동장에 나가면서 당시 2학년을 끌고 나오고 2학년들도 나가게 되니 1학년들도 나가게 되었고 그 결과 모두가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 1992년 8월에 사립중고등학교 법인으로써는 이례적인 학교법인 중동학원 부도 사태가 일어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래에 서술된 것 처럼 2년도 채 안 된 1994년 초에 삼성그룹이 인수하면서 중동학원 부도 사태는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조기진압 되었다.
8. 여담
- 1994년에 삼성그룹에 인수되었다. 삼성그룹의 설립자 이병철 회장의 모교라서 인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150억 부채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인수했는데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17년 기준으로 600억 이상의 금액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사립중,고등학교 재단 인수 금액 중에서는 거의 최고 수준. 삼성은 세계적인 명문고등학교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리모델링, 해외탐방 등 804억 원(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현재 기준으로 1000억대 이상)을 들여서 후원했지만, 교육부와 다른 커리큘럼을 고집하려는 삼성의 이견 때문에 2011년 삼성그룹에서 나가게 되었다. 사실 삼성그룹은 중동고등학교에 삼성 임직원 자녀 전형을 신설하고 싶었는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절대로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결국 중동학원에서 손을 떼었다는 설이 정설이다.#[22] 그래도 삼성은 삼성인지 상당한 규모의 돈을 재단에 때려박고 나갔다. 그리고 아직 그돈 까먹고 살고 있다(...).[23] 팬택 회장이 중동출신이라 재단을 인수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팬택 망했잖아. 안될거야 아마. 현재 동문[24] 이 운영하는 원익그룹에서 18년경 인수하였다.
- 위와 같은 역사를 거친 중동학원은 현재는 딱히 불미스러운 소식을 들려오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학생들한테 너무 존재감이 없다는 게 문제라면 몰라도(...) 그치만 중동고 사이트에 있는 법인회의록을 보면 그 사이에 이사장이 바뀌고 이사 선임을 놓고 싸우는 등 문제가 많다. 실제로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어지간한 경우 재단이 있다는 것도 딱히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 뭐 몇몇 다른 학교들의 재단들이 횡포를 부리는 뉴스를 보면 이런 쪽이 훨씬 좋을지도? 다만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는지 강남으로 이전해 왔던 시점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재단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벽에 재단 퇴진하라는 낙서가 나오고 학교 측에서는 또 그거 잡겠다고 나서는 일이 종종 있었다니 말이다.
- 1990년대 중후반 졸업생 들에게는 "시내버스 288"이라는 괴랄한 노래가 구전되어 내려온다.[25] 2004년 서울 시내버스 대개편 이전의 288번에 빗댄 노래이지만, 114기 기준으로 들어본 바 없다.
- 교가보다 더 유명한 응원가가 있다. 2020년 기준 현재 사용하는 곡은 세이가[26] 와 Queen의 we will rock you의 음을 따서 만든 응원가인 지정가[27] 가 있다. 두 곡 모두 수능 응원날 부르는데 중동고의 수능 응원이 방송에 곧잘 나오는 편이기 때문에 방송에도 자주 나간다. 이 외에도 이화가[28] 와 그 외에 구호[29] 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이상 사용하지 않아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 같은 재단 학교로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중동중학교가 있다. 많은 중동고 학생들의 출신 학교이기도 하다. 이쪽도 강남으로 이사올 때 같이 왔다는 모양. 현재 영희초 부지까지 먹어서 중동중을 붙여놨어야 했었다는 말이 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의견이 많은편이라고 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원래 두 학교는 한 학교였었다. 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지만 중학교 과정만 있던 것이 아니고 다 가르쳤으며, 1951년 학제개정에 따라 두 학교로 분리된 것. 즉 전체 역사 중 앞 절반 시기에 다닌 사람은 중동중 졸업, 중동고 졸업 뭐라 해도 맞는다. 그래서 그 이후 다닌 사람들도 중동 중학교에 다녔든 고등학교에 다녔든 서로 동문이라 여겼으며, 강남으로 이사 간 이후엔 동문이란 의식은 많아 흐려졌으나 2010년대 기준으로도 많은 행사를 함께 진행한다.[30]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수송동 시절엔 학교 중심으로 1km반경 안에 산다면 꽤 높은 확룰로 중고등학교를 다 다니게 되었다. 수송동 당시에는 중동중학교에 들어가면 선배가 2개 학년이 아니라 5개 학년인 꼴이었다. 물론 고교생들은 중학생을 어린애로 보고 터치하진 않았지만, 같은 운동장을 썼고 교실만 달랐기에 학교 안에서 마주치면 인사는 하고 지나쳐야 했다. 중학생들은 같은 교실을 쓰기 때문에 방과 후 들어오는 야간부 형들에게도 목례는 하고 나가야 했고... 운동부 같으면 같이 연습했고, 미술부 연극부 등 특별활동부 지도교사도 한 명 뿐인 경우도 다수. 고교와 중학 사이 교사 왕래도 빈번했고 고교에서 물리를 중학에서 수학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교사들도 동문이 많았으며, 사립이다 보니 수십 년 근속한 사람들이 많아 동료, 선배 교사이기 이전에 스승이고 동시에 까마득한 선배 기수이기도 한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그러니 다른 학교라고 생각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
-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인 덕분에 학부모들한테 관심이 많은 편이다. 당연히 내신 점수는 따기 어렵다는 말이다. 뭐 이 근처 동네에서 내신 따기 쉬운 학교가 어디 있겠냐만...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내신은 상관 없다. 나의 길은 오직 논술과 정시'라는 태도로 시험에 임하지만... 매번 학교성적표를 받아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어쩔 수 없다.(...)
- 휘문고등학교와 함께 강남구에 있는 두 개의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중 하나이다. 묘하게 휘문고와 비교되며 '휘문은 이과, 중동은 문과'라는 인식이 있으며, 서로 경쟁적인 분위기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중동고도 2015년 현재 2학년중 문과4반 VS 이과8반으로 이초(?)현상이 심각하다. 3학년의 경우는 문과5반 VS 이과 7반으로 주위의 다른 남고들에 비해 문과 반이 많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 2016년 또한 2학년은 문과 4반, 이과 8반으로 여전히 이초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31]
- 중동고등학교는 군대를 방불케하는 타이트한 군기와 수직적인 선-후배관계, 휘문고등학교는 자유분방함[32] , 경기고등학교는 중동고와 휘문고의 중간쯤 될 법한 분위기였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학교로 배정받은 학생들은 선-후배 간 너무 풀어진 모습에 혀를 차고, 휘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중동고등학교로 배정받은 학생들은 갑자기 빡빡해진 선-후배 관계에 충격을 받는다.
- 전통 행사인 홈커밍데이가 있다. 졸업한 지 30년이 되는 기수가 주체가 되어 5월에 열리는데, 졸업생들은 돈을 모아서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게 전통이다.
- 월드컵이 남고에 미치는 영향이란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사진은 중동고 사진이다. 2010년 104기에 찍은 사진.
- 2012년 입학생부터 교복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남색 상의에 갈색 바지였지만 이후 정장식의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바지와 블레이저로 바뀌었다. 적용 대상은 자사고 3기, 즉 108기부터였으며, 2014년 110기가 입학함으로써 완전히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신형 교복의 바지가 아무 수선을 하지 않아도 상당히 다리에 달라붙는다. 이 때문에 가끔 외부인이 보면 바지 줄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 한창 자사고로 지정받기 위해 경쟁할 때, 남녀공학이 아니라서 불리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진지하게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만일 자사고 지정을 위해서 남녀공학으로 전환됐다면 아마 자사고 첫 입학생인 106기쯤부터 적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들 알겠지만 자사고 지정받는 데에 성공했고, 중동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 되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았다(...)
- 중동이 남녀공학을 고려했던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84년 수송동에서 대치동으로 이전했을 당시, 강남 8학군에 남학교는 2개 늘어난 데 반하여 (중동고 이전, 단대부고 신설) 여학교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8학군 전체적으로 남고 정원은 남아돌고 여고 정원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대치동 이전 직후 입학한 80기의 경우 3월에 입학한 학생수는 15학급 정원에 겨우 9학급 ... 전학생들을 받아들여 몇 달 후에는 12학급이 되었지만, 나머지 3학급은 여전히 충원이 불가능했고, 정부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남은 3학급을 충원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딸 가진 부모라면 중동고에서 3년을 보내느니 차라리 자퇴하고 검정고시 쳐서 대학 갈거라는 비관적인 예상(때마침 내신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교 중퇴 후 검정고시를 치는게 유행이던 시절이다) 탓에 결국 남녀공학 전환을 거절하고 80기는 12학급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81기부터는 다시 15학급 완충.
- 강남구에 있는 학교지만 묘하게 송파구민이 많다. 1/3~40%정도. 이는 송파구에 자사고가 보인고등학교가 있지만 강남 3구에서 탈 송파를 지향하는 송파 친구들이 대체재로 다니는 것이다.[33]
- 위 역사 단락에서 볼 수 있듯이 84년부로 현 위치인 강남구 일원동로 이전했다. 기존 위치는 종로구청에서 직선 거리로 200여 미터, 북쪽으로는 한국일보사 건물 바로 뒤였고 주소는 종로구 수송동이었다. 종로구청에서 250여 미터, 청진동 해장국 골목에서 300여 미터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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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건물(구 조선총독부)을 기준으로 6시 방향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수송학교, 중동학교라는 글씨가 보이고 사진의 7시 방향을 보면 수송국교, 숙명학교, 종로국교 글씨가 보인다. 수송동 시절엔 교문이 두 개였는데, 운동장은 하나에 건물도 같이 사용하는 것이 많았음에도 명목상 남서쪽 중학교 교실 쪽은 중학교 교문, 한국일보사 사옥에 바로 붙은 남쪽 고등학교 교실 쪽은 고등학교 교문이었다. 어디로 들어가도 되던 때가 있었고, 고등학교 중학교 나눠 들어가게 하기도 했다. 하교 때엔 어디로 나가도 무방.
수송동에는 중동고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송전기공고가 있었다. 1960년 6월 두 학교간의 유혈극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크고 심각했는데 두 학교의 통합을 찬성하는 중동고등학교 학생들이 통합을 반대하는 수송전기공업고등학교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양교간 담장을 무너뜨렸으며 급기야 양교간 투석전으로 전개되면서 부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동고등학교는 운동장이 비좁았고 수송전기공고는 운동장을 확보하고 있어서 통합을 하면 같이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보면 당시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수송전기공고는 중동학원이 인수하여 중동전기공고로 운영하다가 폐교했다.
중동고와 숙명여고가 붙어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수송동 교정 당시, 숙명여고는 중학교 건물과 담 하나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중동 쪽에는 건물 뒤로 가는 통로가 아예 없었고 담장 위에는 철조망까지 쳐 있었다. 79년경 숙명이 먼저 이사갔고, 몇 년 후 중동학원도 강남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그 위치에 비석으로 옛 중동고 위치, 옛 숙명여고 위치, 옛 수송전기공고 위치임을 표기하고 있다.
강남구로 이전할 당시엔 학교 근처가 개발되지 않아 허허벌판이거나 농경지였다고 한다. 당시 여러 학교들이 도심에서 강남으로 이전했는데, 중동, 숙명, 경기, 휘문 등이 해당 학교들이다. 기존 학생들은 통학버스로 강남구까지 다녔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설립 100년이 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참고로 앞에 나온 권위주의적 선후배 문화가 이때 기원했다는 말도 있다. 기존 학생들과 이전 후의 신입생들이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34]
- 아래 사진들은 수송동 교사들의 모습이다.
- 학교 역사가 113년에 달해 부자가 동문인 경우도 존재하고, 교사들 중에서도 중동고등학교 출신이신 사람도 종종 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3대가 동문인 경우도 있다고도 한다. 종종 증조부가 중동고를 나왔다는 학생들이 보인다.
- 학교 이름이 '중동'이라 중동(middle east)이랑 자주 엮어서 드립의 대상으로 쓰이기도 한다. 참고로 한자도 동일.
- 이사장실이 찾기 더럽게 어렵다(...) 학생들이 찾을 일은 없지만 신경쓰자면 은근히 신경쓰이는 부분. 사족으로 위치는 백주년기념관 1층에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방이다
- 학교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도보 10여 분)에 삼성서울병원이 있다. 학교에서도 잘 보이며 가끔 의료헬기가 이착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 2016학년도 신입생 지원 경쟁률이 2.66대 1을 돌파하였다... 다만 이는 2015년도 부터는 신입생 지원시 이전과 달리 중학교 내신 50% 이내에 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사라지고 대신 면접만으로 학생들을 뽑게 된 것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2020년 12월 자사고 신입생 지원방식이 코로나로 인하여 면접생략과 생기부를 안때고 오직 100% 추첨으로만 뽑는데다가 문재인 정부의 자사고 때려잡기 정책때문에 지원자수가 엄청 줄어들었다. 경쟁률이 1.09대 1 수준이라 넣으면 거의다 붙는수준이다. [36]
- 국산 호러 게임 화이트데이 시리즈의 모델이 된 학교이다.
9.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시국선언
2016년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10월 28일 금요일에 고등학교 단위로는 최초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언론사와의 연락 과정에 차질이 생겨 대부분은 11월 1일이나 2일쯤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된 모양. 시국선언은 당시 3학년 110기 주도로 진행되었고 이후 180여 명의 지지 서명을 받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 2, 3학년 36개 학급 모두에서 지지 서명을 받았어야 했으나, 수능이 다가오고 있었고 사태가 커지는 것을 우려한 학교 측의 제지로 3학년 절반에 해당하는 6개 학급밖에 서명을 받지 못했다. 당시 3학년 각반마다 30명 내외였음을 생각할 때 사실상 6개 학급 거의 전원이 서명한 것으로 만약 36개 학급을 다 돌았다면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서명을 얻었을 것이다.
[1] 회장이 66회 졸업생이며 반도체기업이다[2] 일반 독서실 같은 듀오백 의자와 칸막이 책상이 설치되어있다. 원래 컴퓨터실이었으나 상위권 학생들이 자습하는 프런티어실로 교체되었지만 107기 이후 교육청 제재로 인해 더이상 상위권만 공부하는 곳이 아닌 신청 학생 중 추첨된 학생들이 자습하는 곳으로 바뀌었다.[3] 올바르지 않은 행실을 보이면 자성교실에 가게된다. 3~4번 자성교실에 가게 되면 주말에 담당 선생님과 대모산 등반에 나선다. 교복 기부할 때도 사용된다.[4] 영자신문부가 주로 사용하며, 1학년 글로벌 시간에도 사용한다.[5] 실험실은 과학 수행평가 또는 1학년 과학탐구실험 시간에 주로 사용한다[6] 거의 항상 잠겨있다. 그러나 테니스부 부장이 친구라면?[7] 체육 선생님들이 담배피는 곳이다.[8] 가끔씩 선배들이 시킬 땐 정말 악을 써서 경례를 해야 한다. 소리가 크지 않으면 계속 다시 시킨다.[9] 이는 일제시대엔 한자로 이름을 박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60-70년대 한글 전용과 국어순화운동 대 대부분 학교에서 한글로 명찰을 바꿀 때도 안 바꾸었던 것이 무려 60년 이상 쭉 유지된 것이다. 잠시 한글 명찰로 바뀌기도 했다. 카드 형태로서 학생 본인의 사진이 붙어있고, 이름은 한글로 표기되어 있었다. 2002년 1학년(현재 98회 졸업생)들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적용되었다가 어느 시점에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10] 이 깃발을 휘두른 사람은 대부분 재수한다는 전설이 있다.[11] 필수는 아니고 동아리마다 다르다. 대부분 소속 동아리 부장이 참가한다 했으면 1학년들은 필참해야 한다. 2학년들은 선택, 3학년들도 미리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상 나가야 할 것만 같고, 친구들과 밤새고 놀 수 있다는 점에서 대개는 참가한다.[12] 과거에 대치역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가 선배에게 정강이를 차였다는 소문이 있다. 또, 어떤 학생은 똑같은 이유로 선배한테 뺨을 맞아서 고막이 나갔다는 얘기도 있다. 103기 까지만 해도 교무실 뒷편에 있었던(식당 쪽으로 이전되었지만) 매점 앞에서 있었던 일이고, 양재 시민의 숲으로 사생대회 가서 있었던 일도 있고 많았다. 학교 홈페이지 민원게시판의 옛 글들을 보다 보면 간간히 선배가 때렸다는 학부모들의 민원이 올라온 것을 볼 수 있기도 하다.[13] 제일 유명한 건 개포고 관련 신문기사.[14] 이때가 장마 즈음이라 자주 비가 내려, 기우제니 뭐니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15] ebs 강사, 교과서 집필진 등[16] 국회의원[17] 문학가[18] 前 팬택계열 부회장[19] 일제강점기 퇴교당했다[20] 삼성초대회장[21] 경유산업 대표이사[22] 이러한 삼성그룹의 꿈은 아산 디스플레이시티 내에 충남삼성고등학교 설립으로 이뤄졌다. 여기도 처음에 임직원 자녀 전형 때문에 교육청과 소송 난타전까지 이뤄졌지만 결국 헌법재판소까지 가는 소송전 끝에 삼성측의 승소로 끝났다. 중동고 입장에서는 삼성이 교육청 등쌀에 못이겨서 다른 학교에 튼튼한 재단을 뺏긴 것과 같기 때문에 조금은 안타까운 부분.[23] 카더라에 의하면 실은 창조관 건설 비용으로 350억을 사용했다고 한다. [24] 60몇회라고함[25] 버스가 어둠을 헤치고 중동고에 닿으면/288 정류장에 학생들이 쏟아지네/힘차게 달려라 시내버스 288.. 어쩌고 하는.. 가물가물[26] 가사: 아침 일찍이 (say!) / 책가방끼고 (say!) / 종점으로 종점으로 달려갔더니 (say!) / 무교동 버스 (say!) / 갈아타려는 (say!) / 학생들의 눈동자는 / 말똥말똥 저기 저 학생, 중동 뱃지달고, 새치기해서, 버스를 타니, 숙명 학생 나란히 앉아서, 방긋방긋 윙크하더라, 나도 한창 젊었을 적에는, 사랑도 했고, 연애도 했지만, 이제는 늙었으니까는, 마음잡고 살림해야지 (say!)[27] 가사: 주위를 둘러봐 / 불만 품었으면 / 한 번쯤 소리 질러봐 / 인생은 한 번뿐 / 모든 걸 걸고 /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봐 / 대중동고 중동 x2 / 맞고 터져와도 / 다시 일어나서 / 빨리 앞장서 우린 중동 / 모두 하나 돼 힘껏 외쳐봐 / 영원한 사자중동 대중동 / 대중동고 중동 x4[28] 가사: 이화이화이화 이화여고 학생들은 얼굴이 못났고 돈많은 숙명학생 멋만 부리네, 숙명의 낙제생이 열두명인데 그 중에 내깔이도 하나 끼었네, 교장아 교감아 꼰대새끼야 어쩌자고 내깔이를 낙제시켰냐? 낙제생 내깔이야 서러워마라. 이 몸도 대중동의 낙제생이다.[29] "만약에 중동이 OO한테 진다면, 밥상위의 꼴뚜기가 딸딸이를 치겠네"라는 구호를 한줄씩 외치고 각 줄이 다 외치면 전체가 일어나서 외치는 형식[30] 교직원들 중 동문이 많고, 그 분들은 중학을 나왔든 고등학교를 나왔든 아직 서로 동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듯.[31] 다만 상위권의 상당수가 문과이며, 한때는 이과를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는 107기 문과에서 만점자를 두 명 배출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던 모양. 다만 자율형사립고 지정 직전까지는 이과를 더 선호했었다. 당시 문이과 공통과목인 국어나 제2외국어, 언어 모의고사 등에서 이과가 확연한 강세를 보인 것이 그 원인인 듯.[32] 교복 도입 전에는 후배들이 선배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개기는(...) 모습도 있었다.[33] 여학생들이나 이곳에 지원하지 않은 학생은 한강 건너(...) 한대부고에 다녀야 한다.[34] 다만 이 부분의 해석은 잘못됐다. 중동고는 일원동으로 옮겨오기 이전에도 강력한 선후배 문화와 막강한 주먹(...)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히려 일원동으로 옮긴 후부터 선후배 문화나 주먹질(...)이 예전같지 않게 약화된 편이다. 이 부분에서 말하는 건 정확히는 권위주의적 문화의 기원이 아니라, 그냥 그때 선배들이 후배 까는 데 이유가 하나 보태진 정도?[35] 학교에서는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으나, 최규동은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36] 일반전형 정원 327명중 최종적으로 358명이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