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득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근(成根), 족보명은 권각(權恪)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권득수는 1873년 10월 4일 경기도 연천군 남면 상수리에서 권덕영(權德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후 백부 권신영(權信榮)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부친 권신영(權信榮)은 무과 출신으로 절충장군 오위장에 올랐으며, 안동 권씨 추밀공파 정승공(政丞公)의 33세손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키기 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소략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김정화(金正和)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무과에 응시해 급제했다고 한다.
1905년, 권득수는 양평군 양근리에 거주하는 장로교 신자 홍씨 부인의 집에 정착했다. 그가 장로교 신자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양평교회에서 선교 활동과 문맹 퇴치에 전념하던 김연옥(金演玉)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을 보아 적어도 장로교에 호의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1907년 음력 7월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정미 7조약에 의해 해산되자, 권득수는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김연옥으로부터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라는 권고를 받자 이에 따랐고,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한 뒤 소장수로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의 장날을 택하여 격문을 붙이고 거병했다.
권득수는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평, 양주, 이천, 지평 일대에서 200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폭도사편집자료>에 따르면, "권득수가 본래 소 장사를 하던 자로 한때 부하 200명을 인솔하고 지평, 양근, 이천, 양주의 각지를 배회 출몰했다."고 한다. 이후 권득수는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의 나루터를 도강하려 했지만 일본 기병대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그의 의병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고 용문산으로 퇴각했다.
1907년 8월, 권득수의 의병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 9중대의 급습을 받았다. 8월 23일 양근에 도착한 9중대는 24일 용문사를 불태웠다. 이에 의병은 상원사와 운필암으로 후퇴하면서 항쟁했다. <김성완 판결문>에 따르면, 해산 군인 김성완(金聖完)이 8월 31일에 양근의 수회리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적도들의 수괴' 권득수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후 권득수는 1907년 음력 9월 원주의병장 민긍호 부대를 비롯하여 장기환 의병, 최두환 의병, 한갑복 의병, 박래봉 의병, 주석민 의병 등과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 연합의병에 가담했다가 1908년 6월 18일에 체포되어 9월 15일 종신유형을 선고받은 신창현의 진술에 따르면, 이 연합의병의 숫자는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1] 또한 용민사 인근 오촌리의 부자 김윤구가 권득수 의병에게 무기와 군량을 제공했다가 그의 집 99간이 일본군에게 불태워졌다.
권득수의 사망 일시와 경위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폭도사편집자료>에 따르면, "권득수는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도 전한다."라고 하며, <폭도사편집자료>의 또 다른 기록에는 "황재호(黃在浩)가 9월 상순 폭도 권덕수(權德洙)라는 자로부터 더불어 일을 일으키자는 꾀임을 받았으나 일단 응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이미 폭도의 수괴로써 행동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 후 도당을 모아 권덕수와 합동하였으나 서로 불화하여 마침내 권덕수를 살해하고 스스로 수괴가 되었다."고 기술되었다. 이 '권덕수'는 권득수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설에는 9월 2일 용문산 전투 때 전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득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신창현의 진술을 기록한 <폭도사편집자료>에는 권득주(權得珠)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권득수(權得洙)의 오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