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효신서
紀效新書. 명나라의 병서.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친 책이다.
16세기 무렵, 명나라 남부 해안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왜구들은 단병접전에 능한 스타일이었는데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어난 인물이 바로 척계광이다. 척계광은 보병 위주의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궁수), 포(총 포수), 감(창검수)으로 구성된 부대가 체계적으로 왜구를 토벌하는 전술을 개발하게 된다. 이를 절강병법이라 칭한다.
척계광은 이런 절강병법으로 저장성과 푸젠성 일대를 침탈하던 왜구를 토벌했고 이런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저술한 것이 바로 기효신서이다. 7 책 18권으로 구성된 기효신서는 명나라의 군사체계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막기에 버거웠던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 여진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기마병보다 왜구를 상대한 전술에 익숙한 절강병법에 단련된 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이들이 잘 싸우는 것을 보게 된 선조는 이여송에게 조선군에게도 명나라의 절강병법을 가르쳐줄 것을 청했으나 이여송은 군사기밀을 가르쳐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나 선조와 류성룡 등은 어떻게든 조선군을 명나라군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입수하려 애썼다. 마침내 류성룡이 이여송 휘하의 무관을 매수해 기효신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책을 얻긴 했으나 훈련법이나 군대 체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70여 명의 병사들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에게 보내 은밀하게 기효신서의 병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러던 차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고 전공을 세운 한교가 천문, 지리, 복서 등에 능통하다는 류성룡의 천거를 받았고 선조는 그를 훈련도감의 낭청으로 임명해 기효신서의 해석과 번역작업을 담당하게 했다. 일단 한교는 기효신서에 따라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의문점이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명나라 장수에게 물어서 이해한 다음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쳐 훈련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594년 4월, 훈련도감은 조총병 포수 5초,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 4초를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렇게 배운 기효신서의 병법은 조선 후기 군대의 체제를 바꾸었다. 훈련도감이 설치되면서 사, 포, 감의 삼수군을 육성했다. 또한 기효신서의 무술은 이후 조선이 일본의 왜 검법 등을 접목해 영조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에 의해 18가지 보병무예가 수록된 무예 신식을 완성하는데 역할을 했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하여 24가지 무예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 된다.
1. 척계광의 절강병법
16세기 무렵, 명나라 남부 해안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왜구들은 단병접전에 능한 스타일이었는데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어난 인물이 바로 척계광이다. 척계광은 보병 위주의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궁수), 포(총 포수), 감(창검수)으로 구성된 부대가 체계적으로 왜구를 토벌하는 전술을 개발하게 된다. 이를 절강병법이라 칭한다.
척계광은 이런 절강병법으로 저장성과 푸젠성 일대를 침탈하던 왜구를 토벌했고 이런 병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저술한 것이 바로 기효신서이다. 7 책 18권으로 구성된 기효신서는 명나라의 군사체계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조선의 군대를 바꾸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막기에 버거웠던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특성을 감안해 여진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기마병보다 왜구를 상대한 전술에 익숙한 절강병법에 단련된 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이들이 잘 싸우는 것을 보게 된 선조는 이여송에게 조선군에게도 명나라의 절강병법을 가르쳐줄 것을 청했으나 이여송은 군사기밀을 가르쳐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나 선조와 류성룡 등은 어떻게든 조선군을 명나라군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입수하려 애썼다. 마침내 류성룡이 이여송 휘하의 무관을 매수해 기효신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책을 얻긴 했으나 훈련법이나 군대 체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70여 명의 병사들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에게 보내 은밀하게 기효신서의 병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러던 차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고 전공을 세운 한교가 천문, 지리, 복서 등에 능통하다는 류성룡의 천거를 받았고 선조는 그를 훈련도감의 낭청으로 임명해 기효신서의 해석과 번역작업을 담당하게 했다. 일단 한교는 기효신서에 따라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의문점이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명나라 장수에게 물어서 이해한 다음 훈련도감 병사들을 가르쳐 훈련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1594년 4월, 훈련도감은 조총병 포수 5초, 근접전 전문 병사인 살수 4초를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렇게 배운 기효신서의 병법은 조선 후기 군대의 체제를 바꾸었다. 훈련도감이 설치되면서 사, 포, 감의 삼수군을 육성했다. 또한 기효신서의 무술은 이후 조선이 일본의 왜 검법 등을 접목해 영조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에 의해 18가지 보병무예가 수록된 무예 신식을 완성하는데 역할을 했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하여 24가지 무예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