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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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如松, Lǐ Rúsòng)
(1549년? ~ 1598년)
1. 개요
2. 행적
2.1. 임진왜란 이전 행보
2.2. 임진왜란 파병
2.3. 평양성 탈환
2.4. 벽제관 전투 및 이후 행보
2.5. 죽음
3. 가족 및 후손
4. 기타
5. 야사
6. 매체


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군.
임진왜란 시기에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다. 평양성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2. 행적



2.1. 임진왜란 이전 행보


고려 전객부령 이천년의 7대손으로 이천년은 고려원종~충혜왕 때의 문신이었던 이조년의 친형이다.[1] 즉, 조상을 거슬러 가면 고려문벌귀족까지 닿는다. 더욱 놀라운 건, 조상 이천년의 동생 이조년은 고려 말의 권신인 '''이인임의 할아버지'''다. 즉, 본관은 이인임과 같은 성주 이씨가 된다. 이여송의 6대조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요양성 참정 등의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서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5대조인 이영(李英)은 평안도 초산 사람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정착하여 후손이 이성량~이여송으로 이어진다.[2] 아버지인 이성량명나라 장수로 그냥 일반 장수가 아니라 요동총병으로서 엄청난 전공을 세워서 요동의 왕으로까지 불렸다.[3] 이성량에게는 이여송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 이여매(李如梅) 등 9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 이씨네 용맹한 아홉 장군)이라 불렀다 한다.
여러모로 기울어 가던 명나라에서 제독 직급으로 복무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난을 진압하여 명성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영하(寧夏)에서 벌어진 몽골인 보바이(哱拜)의 난[4]을 진압할 당시, 반란군의 우주방어로 명군이 6개월간 진압하지 못했던 성을 수공을 이용해 3개월에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5] 그러나 언뜻 보면 6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한 성을 3개월만에 함락시켰다는 것은 대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현실적으로는 6개월간 포위된 성을 추가로 3개월 더 걸려서 총 9개월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킨 것이다. 군량의 소모를 기다려 항복시킨 것이 아니라 수공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9개월 동안 포위되어 아무런 보급없이 버틴 몽골군이 피폐했을 수밖에 없고, 수공이라는 전략 또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천여년 이전부터 숱하게 사용된 전략인 만큼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에도 문제가 있다.

2.2. 임진왜란 파병


보바이의 난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급보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의 만력제는 명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돕는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일본군의 정확한 규모와 전력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선 요동총병이며 투메드부 및 차하르부, 우랑카이부 소속 몽골인 및 건주/해서 여진족, 다우르족 등으로 구성된 북병의 지휘관 조승훈을 보내 3천 병력[6]을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남병이 주로 보유한 조총 등 총이나 불랑기포, 홍이포 등의 화포도 안 끌고 온 기병들은 평양성에서 일본군의 매복 기습에 보기 좋게 깨지고 돌아왔고, 일본군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명은 이여송이 이끄는 4만2천 병력을 파병하기로 한다.
요동경략 송응창과 함께 이여송은 조선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7]

이 이르기를,

"이여송(李如松)은 명장인가?"

"이성량(李成梁)의 아들로 천하의 명장입니다. 영하(靈夏)를 정벌할 때에 그의 아버지 성량의 권한이 너무 중하여지자 성량을 불러서 북경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되자 영하후(靈夏侯)로 봉해져서 지위가 아버지 위에 있게 되고 '''천하대총병(天下大總兵)이 되어 13총병이 모두 이여송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33권 중'''

읽었다면 알겠지만, 왜 명장이라는건지 이유가 쓰여있지 않다. 이후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행적을 보면 어떻게봐도 명장이라고 평가하기엔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요동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그를 선조는 버선발로 마중했고, 조선 조정은 가뭄에 단비가 내린듯 상기되었다. 명의 대병력이 단숨에 일본군을 쓸어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겨울 내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며 미적댔고,[8] 몸이 달은 조선의 대신들이 당장 공격할 것을 종용한 끝에 1593년이 되어서야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2.3. 평양성 탈환


적장은 보아라! 우리가 한 번 거사하면 너희를 모두 섬멸키에 충분하나, 차마 인명을 모두 해할 수 없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니, 너는 여러 제장을 거느리고 속히 원문으로 나와 나의 분부를 받들라!

'''연광정 토굴로 피신하여 저항하는 고니시에게 이여송이 유시한 말'''

남하한 명군은 1만여 명의 조선군 지원과 함께 도합 5만 병력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며, 평양성에 죽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들과 격돌했다. 초기의 섣부른 공격으로 공세 초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 등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이여송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성을 함락할수 있다고 판단해서, 신중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여송은 명군이 보유했던 모든 화포를 평양성에 쏟아 부음[9]과 동시에 병력을 전개시켰고, 왜군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왜군은 화포가 없이 대조총이 포 역할을 했고[10] 왜군 아시가루들은 분명 조선 병졸들보다 창칼을 능숙히 다루었으나 오랜 시간 내몽골 부족들과 이골나게 싸워온 명군의 검술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고, 북병 기병 역시 타타르검이라 불리는 몽골 칼과 장창을 보유하고 뛰어난 투창술을 보였으며, 그리고 만구다이라 불리는 기마궁수까지 운용했다.
이여송의 직속 부대인 요동 기병[11]은 병과 특성상 공성전에선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절강이나 양광 등지에서 파견된 남병, 즉 척계광 등의 대 왜구 훈련을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대활약했다. 척계광의 병법은 3수병 체계로 조총을 쏘는 포수, 을 쏘는 사수, 그리고 이들을 근접 엄호하는 을 다루는 살수가 있었으며, 조선군이 일본의 장창에 대응하지 못해 전부 찔려서 죽을 때 압도적인 위용으로 일본 장창수 및 철포대를 제압했다. 전술한 것처럼 일본은 조총만 있었지, 화포는 없었으며 대조총이 화포 역할을 했다. 결국 명군이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불랑기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화포 세례를 맞아 대부분 궤멸했고, 조총수를 보조하던 궁수 역시 남병의 활과 조총 사격에 궤멸했으며 근접 전투에서는 몽골 칼을 쓰는 북병 기병들에게 밀렸다.
평양성의 일부 성채는 함락했으나 고니시 군은 남은 성채에 모여 방어를 강화하자 협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고 왜군은 남쪽 황해도 쪽으로 철수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여송은 평양 탈환전에서 일본군 1만 8천명 중 1만 2천명을 격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참고로 이여송이 이 전투에서 조선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평양성 전투 문서 참고. 정확히는 이여송이 주도했다기 보단, 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여기던 차하르부와 칼간부, 투메드부, 우랑카이부 소속 몽골인 용병들이 선조인 칭기즈 칸이 그랬듯 일본군 포로 전원을 학살하고 성 안의 조선인 민가들까지 약탈한 것이었다. 이들 몽골인들은 나중에 병자호란때 몽골팔기를 구성해 한성을 약탈했고, 대칸인 숭덕제의 약탈 금지 지시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조선인들을 붙잡아 청나라로 끌고 가고 귀중해 보이는 물건은 모두 훔쳐갔으며 포로들도 선조인 칭기즈 칸처럼 마구 처형했다.
평양성이 탈환되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며 2주 후에는 개성을 탈환했다.

2.4. 벽제관 전투 및 이후 행보


'''그리고 하필이면 이제야 뒤늦게 명장이라는 거품이 걷히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신나게 추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 상당수가 재집결하고 있다는걸 간과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을 추격하던 명군 기보병 9000명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게다가 북병 위주로 급하게 진군하여 그만 남병을 제외하는 바람에 평양성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조총화포가 없었던 명군은 일본군과 뒤엉킨 개싸움을 시작한다. 백병전 끝에 상당수의 기병을 손실했고 이 와중에 칼에 맞을 위기에 빠진 이여송을 부관 이유성이 목숨을 바쳐 구해내기도 했다.
정오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양측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명군에게 개활지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었으며, 명군은 이때는 조총 등 화약무기 없이 만구다이라 불리던 몽골 궁기병이 무리하게 기병돌격을 감행하다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조총의 기병 저지력이 뛰어난데다 조총은 장창병의 호위 하에 운영한터라, 일본군의 장창진을 만구다이만으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본군은 다가오는 명군 본대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지 않은 터라 해가 진 후 한성으로 물러났고, 2500여명의 피해를 입은 명군 역시 진격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여송은 자신의 직속 부대인 몽골족으로 구성된 요동 기병 다수를 잃고 무력감에 빠진다.[12] 이후 이여송은 이쯤에서 더이상의 피해를 막고 적당히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고, 조명 연합군 전체에 더 이상의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곳에 눌러앉은 명군은 식량과 물자를 현지 조달(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실질적으로는 약탈)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의 민간에게 크나큰 부담과 고통을 주게 된다. 특히 나사풀린 차하르부와 투메드부 몽골 기병들은 마구잡이 약탈로 원성을 샀으며 조선인들이 '''달자(몽골족)들이 왜놈보다 더하다'''며 통곡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2.5. 죽음


그렇게 이여송은 별다른 전투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전투 회피로 명나라 조정에서 탄핵을 당하여 유정(劉綎)에게 조선 주둔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한 후, 명나라로 돌아가 중군 도독부 좌도독으로 지낸다.
나중에는 1597년 요동총병이 되었을때 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만[13][14]이 이끄는 차하르부를 토벌하기 위해 내몽골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1598년 4천의 경기병만을 이끌고 숲 주변을 정찰하던 중 매복하던 수천의 차하르부 병력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고, 저항했으나 탈출에 실패하여 포로가 되어 결국 몽골군한테 처형된다.
사후 만력제가 애석해하며 후히 장례를 치르라 명하고, 소보(少保), 영원백(寧遠伯)으로 추증되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죽은 뒤 명나라의 조선 원군은 화포조총, 삼안총, 승자총통, 화창 등 화약무기를 다수 보유한 절강 및 복건 남병이 주력으로 담당했으며, 일본군과의 일전에서도 화포가 없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행주산성에서도 권율이 화약무기인 승자총통화차 등을 이용해 왜군 대부분을 벌집으로 만들고 명군 없이 첫 승리를 거두는 등 조선군도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15]

3. 가족 및 후손


  • 동생 이여백(李如柏) : 형과 함께 임진왜란 참전,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16]했다.
  • 동생 이여매(李如梅) : 형과 함께 임진왜란 참전. 1612년 사망했다.
  • 이성룡(李成龍) : 이여매의 손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 아들 이성충(李性忠) : 이자성의 난 때 죽었다.
  • 손자 이응인(李應仁) : 이성충이 죽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인 금씨(琴氏)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였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달 뒤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천근(李天根)이라 한다.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 쇄환 요구가 오자 거제도에 숨어 살았고,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다.
한편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이여송의 아우)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후손이 농서 이씨이다.
이여송 본인이 조상의 나라인 조선에 대해 애착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까지 했음을 감안하면, 이후 조선에서 그의 후손이 이어지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4. 기타


  • 조상이 조선 출신이니 이여송이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론 그런 거 없었다.[17][18] 이여송은 철저한 명의 장군으로 조선을 대했으며 보급 문제로 명군의 대민피해가 심해 조선에서 적지 않은 원성을 샀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군량 대신 은을 군대에게 지급하고 군은 그 은으로 상인들에게 군량을 구입하여 조달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여송 역시 이에 따라 만력제로부터 20만냥의 은을 하사 받아서 조선으로의 장도에 나섰으나, 문제는 명나라 상인들이 압록강 너머서까지 들어오질 않았고, 파견온 조선은 전화에 휩싸이고 상업과 도로가 명나라보다 심하게 뒤떨어진터라 군량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사람이 지고 나르는 것 외에는 제대로 운송할 방법이 없었다. 이로 인해 평양성 전투 이후 명군은 공세 역량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개성에 이르면 보급을 받지못해서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마 1만필이 대량으로 폐사해 전력에 치명타를 입었다.[19]
  • 이여송의 부하인 낙상지는 조선에 제독검이라는 검법을 소개했고, 이 검법은 훗날 조선의 무예신보와 무예보통지에 등재되었다.
  • 접빈사로 나온 이덕형에 대해서 아내와 성이 같다니 이거 순 짐승 아냐?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전근대의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있기 때문이었다.[20] 특히 본관이 같은 동종결혼이라면 가중해서 처벌했을 정도였다. 즉 이여송이 보인 태도는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한거냐는 것. [21] 이에 이항복이 본래 성씨가 다른데 공을 세워서 왕실의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몄고, 이 말을 들은 이여송이 오히려 이덕형을 존중하게 했다는 식의 일화도 있다. 국성을 하사받는다는 건 대단한 공신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 이익성호사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여송이 선조에게 아주 귀한 음식이라며 '계두'라는 계수나무에 사는 벌레를 선물했고[22] 당연히 선조는 받았으나 질색하며 입에 대지도 못했다. 이후 선조는 명 장수들에게 문어 요리를 보냈는데 문어를 안먹는 북방 내륙[23] 출신의 명 장수들이 난처해하며 감히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우화인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소설 임진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선 문어 요리가 아니라 산낙지로 나온다.
  • 아우인 이여백도 장수였으나 형인 이여송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되려 조선 시대 소설에서 이여백이 조선에 와서 죽어 원혼이 떠돌아다니는 설정으로 나왔을 정도. 하지만 실제 이여백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안 죽고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죽었기에 이건 허구다.
  • 개인의 인간성은 굉장히 착한 덕장이다. 휘하에 이유성이라는 부하가 있었는데 이유성은 기생과 놀아나서 군무를 게을리 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그런 이유성에게 군무 태만의 죄를 용서해줌은 물론이고 아예 그 기생과 결혼을 시켜줬으며 심지어는 사재를 털어 이유성과 그 기생이 사는 집까지 장만해줬다. 이렇게까지 인정으로 대하자 임진왜란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이유성이 몸을 날려 이여송을 구하고 전사했다.

5. 야사


전국 각지에서 이여송과 관련된 야사와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설화 속 이여송은 대체로 콧대 높고 오만해 소국인 조선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다가 조선의 숨은 이인, 기인들에게 크게 혼쭐 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 라는 얘기가 많다.
  • 첫째로는 쇠말뚝 전설이다. 이여송은 풍수에 능했는데, 조선의 지세를 보고 작은 나라에 명당이 쓸데없이 많으며,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 명을 위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말뚝을 수시로 박았다는 전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 동네 뒷산에 이여송이 말뚝을 박고 튀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것과 관련돼서 가장 유명한 야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백두산 일대에서 명장이 태어나는 명당을 보고 못을 박았고, 전후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이성량에게 이 일을 자랑스레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성량이 그곳은 조선에 살던 옛 조상이 묻혔던 곳이며 네가 그 맥을 끊었으니 우리 집안은 이제 망했다며 통곡을 하는 것이다.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어 결국 이여송은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제 명에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물론 민중이 오해를 한 측면도 있다. 숙영지 등을 만들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후, 이를 남겨둔 채 떠나간 것을 보고서 "지맥을 끊으려 했다"고 가뜩이나 미운 명군과 이여송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것. 그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일본군이나 소련군, 미군 등이 와서 쇠말뚝을 박을 때마다 똑같은 오해를 하고 비슷한 야사를 만들었다. 이 이여송 쇠말뚝은 이런 전설에 있어서 최초인 셈이고, 한국인이 쇠말뚝을 실생활에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일본군의 경우에는 자기네 나라에서 국가신토를 행했듯이 한국의 토속신앙도 박해했었기에 오해할만한 부분이 충분히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 임진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조선에 도착한 후, 선조의 융숭한 환대를 받았는데, 당시 조선의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차림이 그리 호화롭지는 못했다. 그러자 이여송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먼 곳에서 온 지원군의 장수를 이리 홀대하니 신의를 알지 못하는 듯하므로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라며 연회석을 나가버렸다. 선조가 황망히 있자 사명대사가 선조에게 귀띔하기를 "상복을 입고 고개 위로 올라가 곡을 하라"하니 선조가 그대로 하였다. 그 곡소리를 들은 이여송은 "참으로 용의 통곡소리와 같도다"라며 철군할 의사를 철회했다. 이 후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이토록 명민한 조선의 호걸들이 태어날 곳이 너무나 많아 장차 명국에 위협이 되겠다"며 심복을 대동하고 팔도를 돌며 호걸들이 태어날 만한 곳의 혈맥을 다 자르고서야 명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상주 봉황성에 이여송이 말을 맸던 자리가 있었다 전해진다.

6. 매체


  •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명 진영의 영웅 중 한 명으로 등장하며, 기병이 없는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말을 타고 다녀 기동성이 우월하다. 거기다 강력한 기본 능력치와 연옥술 스킬로 명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영웅이다. 일본이나 조선 입장에서는 이여송 개객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참고로, 임진록 2 초기에는 연옥술이 없는 대신[24], 생산 건물이 군사 연구소가 아니라 병부성이라 더 초반부터 나왔다. 조선의 반격에서는 송응창, 이령 등과 함께 핵심 장수로 나온다.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신국이 연기하였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명나라 측 인물들 중에서는 개념있게 묘사되며 연기자부터 워낙 점잖은 인상이라 무장이라기 보다는 선비처럼 묘사될 정도이다. 더구나 바로 직전에 등장했었던 조승훈이 워낙 개차반으로 묘사되었기에 여기에 대비된 면도 크다. 때문에 역대 한국 사극에서 묘사되는 이여송 중에 가장 호의적으로 묘사되었다 볼 수 있다.
  • 징비록에서는 정흥채가 연기했으며, 역사대로 거만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제관 전투 이후 류성룡이 이여송에게 제발 진격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하는데, 그 노력이 눈물날 지경. 실제로 군량 문제 때문에 이여송이 류성룡을 꾸짖자 그만 류성룡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여송도 이 꼴을 보고 민망하긴 했는지 부하 장수들에게 '너희들은 전에 나와 함께 서하 지역을 정벌할 때는 여러날 굶고도 참고 공을 세웠다. 그런데 조선에 와서 며칠 군량이 없다고 벌써 돌아가자고 하냐?'라고 갈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야인시대이규갑을 맡았던 김태영(배우)이 맡았다.
[1] 다른 형제의 이름들도 비범하다. 맏이 이백년(李百年), 둘째 이천년(李千年), 셋째 이만년(李萬年), 넷째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이조년(李兆年).[2] 이 부분은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 차용한 듯.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조선 측 사료에는 이여송의 5대조인 이영이 사람을 죽여서, 부부가 함께 철령위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고, 이후 세습 철령위지휘첨사의 관직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역사적 사실로 봐도 무방하다. 철령위가 있었던 지역이 이성계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도 조선인들 보다는 야인(여진족)들이 더 많이 살던 지역이었기에 귀화한 여진족 출신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영은 고려 문벌귀족인 전객부령 이천년의 후손으로서 족보가 확실하므로 그런 그가 귀화한 여진족 출신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3] 융경, 만력의 두 황제 때 그는 요동을 30년이나 지켰는데 그 기간 동안 몽골을 막아내고, 토만을 소탕했고, 여진족을 이간시켰다. 변경의 이족 수령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뤘으며, 삼십년동안 대첩이라 불릴만한 전공이 10차례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성량을 동북장성(東北長城)으로 여겼는데, <명사>에서는 그를 "변수무공지성(邊帥武功之盛), 이백년래소미유(二百年來所未有) "변방 장수로서 전공이 많은 것은 명나라가 들어선 후 이백 년 동안 없었을 정도이다."라고 까지 평할 정도였었다. 그 유명한 누르하치 역시 이성량의 부하 출신이다.[4]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을 만력 삼대정이라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만력제를 참고.[5] 이 시기 명은 만력 중흥 당시 군사력 증강을 통한 북로남왜의 극복을 통해 군사력에 상당히 자신감이 있는 상태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때부터 명나라의 재정이 나빠지면서 정규군 자체가 막장이된터라 그걸 해결하기 위해 주요 장수들이 가정이라는 사병을 육성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군은 대병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면서 결정타는 군의 정예를 담당하는 가정이 먹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정이 전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으면 군대의 전투력은 급감하게 된다.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그렇게 소극적으로 변한 것이나 명군이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6] 대부분 몽골인여진족 기병들로 말도 안통해 한족들과 몽골어 통역을 써서 대화해야 했고 군기는 자연히 엉망이었다.[7] 굳이 이여송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선 한반도와 가까운 요동에 머물고 있었다는 시간적인 이유가 있고, 상기했듯 요동의 명군은 지속적으로 만주, 내몽골, 다우르족 등 북방 이민족들을 상대하다보니 실전경험이 풍부해서 정예병력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게다가 요동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반도 및 여러 이민족들간의 교류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요동을 차지하는 국가는 요동에 가장 정예 병력들을 배치하곤 했으며 실제로 고구려수나라당나라의 침입 때 다른 곳은 뚫려도 요동만은 절대 뚫리지 않았다. 이후 고려를 쳐들어온 원나라도 요양성(요동성)을 중심으로 삼아 거란-여진 혼성부대를 주력으로 쳐들어왔다. 물론 이후의 이여송의 삽질을 보면 한숨이 나오기는 하지만, 당시 만력제의 입장에서는 정말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준 셈이다. 오죽하면 당대 중국 내에선 만력제를 일컬어 고려천자, 조선황제라고 비아냥을 할 정도.[8] 단, 조선의 보급 문제로 군마들이 상당히 많이 좋지 않은 상태가 되거나 죽었음을 감안하고 식량 보급 문제도 겪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9] 이때 포르투갈로부터 얻은 서양 화포인 불랑기포가 등장한다.[10] 포르투갈인들이 나가사키에 상륙 시 불랑기포도 소개했으나 사무라이들의 대규모 회전이 주축이던 일본은 공성전이 많던 명나라와는 달리 화포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조총만 수용했으며, 화력을 올리기 위해 대조총을 고안했다. 일명 대총. 그러나 이 대조총도 원본은 조총이라 사거리가 50보 이내에 불과해 명나라가 막상 화포를 끌고 오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11] 한족, 차하르/칼간/투메드/우랑카이부 소속 몽골인, 해서부 및 건주부 여진족 혼성 부대로 남병에 비해 군기강이 문란했다. 주축은 기병답게 차하르부와 투메드부 소속 몽골족이었으며 이들은 전투력이 강하고 잔인하기까지 해서 약탈도 서슴치 않아 조선인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저항할 힘을 잃은 일본군 포로들을 선조인 칭기즈 칸처럼 마구 학살하기까지 했다.[12] 이후에는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는 한 편, 용산의 일본군 군량 창고의 위치를 알아내고 부총병관 사대수에게 그곳을 불태우라고 명한다.[13] 이 토만이라는 인물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쪽 자료들을 보면 차하르 몽골의 대칸인 투멘 칸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당시 투멘 칸은 살아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 토만이 단순히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투멘 칸의 아들인 보얀 칸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단순히 몽골의 군사 체계인 투멘(土門. 다른 말로는 만호萬戶. 투멘 칸과 한자는 다르지만 몽골어 발음이 같다)의 장을 부르는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14] 참고로 인터넷에는 이여송이 토번에게 죽었다고 잘못 알려진 자료가 많은데 이여송은 당시 '''요동'''총병이었다. 고로 절대 서쪽에 있는 토번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15] 이때 총사령관 우키타는 승자총통 세례를 맞고 총알이 온 몸에 박혀 벌집이 되다시피 했다가 부하들이 업고 뛰고 대신 총탄에 맞아줘서 간신히 살았다.[1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투 후에 자결했다. 앞서 간 두송과 마림의 부대가 후금군에게 전멸하고 본대까지 괴멸위기로 온터라 총사령관 양호로부터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퇴각하여 전력을 보존했지만, 그 행보로 인해 조정에서 의심을 받자 자결하게 된다.[17] 당장 오늘날의 이민 2세대도 부모의 출신국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고 그냥 자기랑 관련이 조금 있는 외국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3세대 쯤 되면 이민자 민족끼리 자체 사회에서 모여 살지 않는 이상 현지에 동화되는 게 대다수인데, 이쪽은 이민 2세대도 아니고 7세대다. 애시당초 이 사람이 한국계 혈통만이었을지도 의문이며, 오히려 중국 한족들과의 잦은 통혼으로 한국계 혈통이 많이 희석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참고로 바이두백과에서는 이여송의 민족을 한족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조상이 한국계라고는 해도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적, 그리고 현대의 조선족 집단이 형성되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족보다는 한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는 하다.[18] 오히려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이 부각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계 일본인들만 해도 한국계에 대한 차별이 은연중 있는 일본의 경우 한국계라는 걸 숨기는 사람들도 있으며, 한국이 국력이 약했던 시절에는 특히 더 심했다. 대표적으로 절대 한국말을 안 쓸 정도로 독하게 정체성을 숨긴 역도산. 당시 명나라와 조선은 국력이나 규모 뿐 아니라 주종 관계가 명확했다. 물론 이여송이 실제로 자기 혈통을 숨긴 건 아니지만, 딱히 조상의 나라라고 챙길 이유도 많지 않다는 것.[19] 징비록에 따르면 개성에 주둔한 시기는 행주대첩 직전 상황이었는데 이여송은 곧 진군 준비를 마치겠다고 말해놓고 개성의 보급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조선의 장수 몇 명이 이럴거면 평양으로 후퇴하고 다시 공세준비를 하자고 말했는데, 이여송은 조선군 장수들에게 정신머리가 없다고 호되게 일갈해놓는다. 그러나 이여송은 이렇게 질책하고선 정작 얼마 뒤 함경도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평양 공격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평양으로 돌아가버렸던 것이다.[20]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졌는지, 전근대의 중국사에서 부부의 성씨가 같은 유명인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넓은 땅과 수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국에서 말이다. 동성결혼의 금기는 근현대에 와서야 풀렸다.[21] 다만 나중엔 조선도 숙종 시기에 본관이 달라도 같은 성씨면 혼인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22] 동남아 지방에서 보석은 한 상자 보내도 계두는 한 접시밖에 조공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고 중국 황제가 좋아하는 진미이니 번국 가운데 으뜸인 조선 왕을 매우 귀히 여기는 표시다.[23]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괴물, 흉물 취급이다.[24] 조선의 반격 출시 후 기술이 추가되었고, 임진록 2 단독으론 마지막 패치때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