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image]}}}{{{#fff '''豊臣秀吉(とよとみひでよし
도요토미 히데요시'''
}}}
[image]
태정대신 재직 당시의 초상화
[image]
관백 재직 당시의 초상화[1]
'''출생'''
1537년 3월 17일[2]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 (현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사망'''
1598년 9월 18일 (61세)
야마시로국 기이군 후시미 후시미성 (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재임'''
'''일본국 제90대 태정대신'''
158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
'''일본국 관백'''
1585년 8월 6일 ~ 1592년 2월 10일
'''일본국 태합'''
1592년 2월 11일 ~ 1598년 9월 18일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본명'''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 기노시타 히데요시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
'''신호'''
풍국대명신(豊国大明臣)
'''신체'''
140cm[142] | 45kg[143]
'''부모'''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
어머니 오만도코로(大政所)
계부 지쿠아미(竹阿弥)
양부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
1. 개요
2. 상세
3. 호칭/별명
4. 유년기
6. 천하인이 되다
6.1. 혼노지의 변
6.2. 오다 가문의 분열
6.3. 천하의 지배자 시절
7.1. 조선 침공을 결심한 이유
7.2. 당시 일본의 반응
7.3. 감도는 전운과 막고자 하는 세력의 술수
7.4. 전쟁의 시작과 진행
7.5. 엇갈린 과의 강화협상
7.6. 결론
8. 후계자 문제와 죽음
8.1. 히데요시 독살설?
9.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10. 가족관계
11. 불임 의혹
12. 색욕마인
13. 히데요시와 천주교
14. 히데요시의 능력
15. 후세의 평가
15.1. 일본
15.2. 한국
1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에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3]

2. 상세


[image]
[image]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
오동나무.[5]
하시바 가문 시절의 문장
호리병박.
센코쿠 시대최고로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간파쿠(관백)[6]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당연히 한국인들에게는 전국 3영걸 중 유일하게 인상이 매우 좋지 못한 인물이다[7]. 인터넷이라는 것이 발명된 이후부터는 상당수의 일본인들도 인터넷 등을 통해 임진왜란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 히데요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 또한 나오기 시작했으며, NHK 대하사극 군사 간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일본 사극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점점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며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내에서의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일본 영상물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최고권력자에 오르기까지는 호방하고 대범한 인물로 묘사하다가 말년에 타락, 노망드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게 한국 매체의 '그냥 나쁜 놈' 취급과의 차이점이다.

3. 호칭/별명


다른 이름으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8],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별명은 '대머리 쥐(禿げ鼠)', 원숭이.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이등박문으로도 부르는 것처럼 조선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고유어 이름을 일본어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풍신수길로도 불린다.
만년에 간파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퇴임한 셋쇼(섭정)나 간파쿠를 이르는 호칭인 '다이코(太閤:태합)'로도 많이 불린다. 사실 다이코라는 호칭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호칭은 아니지만, 이 호칭으로 불린 사람들 중 제일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그냥 '다이코'라고만 지칭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9] 그래서 나온 말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인데, 히데요시처럼 밑바닥 출신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들의 별명으로 쓰이는 단어다. 정치계의 이토 히로부미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일본의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의 창업자인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는 '여자 이마타이코(女今太閤)'라고 불렸다.

4. 유년기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尾張国, 아이치현 서부)에서 아시가루[10]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공가나 무가 출신조차 제대로 된 기록이 없던 시절인지라 히데요시의 출생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단은 없다. 칸파쿠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주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으나, 부정적인 주장을 따르면 미천한 신분까지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부친이 아시가루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생 히데나가와 아사히히메, 히데요시가 평생 효도한 어머니 오만도코로(이름은 '나카')를 제외하면 친가 쪽의 친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11]
아명은 고자루(小猿, 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日吉).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きのした とうきちろう)로 개명하였고, 오우미 국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지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관백(關白)이 되면서 도요토미(豐臣)라는 을 썼다. 더해서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도 있다. 또한, 당시 겐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지(平氏)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선 '평수길(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이라고도 불린다.[12] 단, 위에 기록한 다이라,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우지(氏)'이므로, 실제 사용한 성씨(苗字)는 계속 하시바였다는 주장도 있다.

5.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13]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松下之綱)라는 자를 섬기다 얼마 안 가 그만두고[14], 18세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된다. 이후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담당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강항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사와야 할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비싸기만 하고 질이 엉망인 것만 잔뜩 가져오기 십상인데 히데요시는 가신들이 주고 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중용했다고 한다.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하룻밤만에 성을 만들어내보인 것으로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 성(墨俣一夜城)의 일화도 이 시기(1561)의 것이지만,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15] 히데요시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568년의 일인데, 간논지 성 공략 당시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교토 입성에 성공한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케치, 니와 등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였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인해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신가리)를 자청하여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살아나 큰 공을 세웠고, 1573년의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다. 아자이 나가마사 사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 군 18만 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았는데, 이때 오다 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성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우미 출신의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고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우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에는 상락해오는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쌍방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 오다 군이 대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데토리가와 전투). 이 일로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이후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략하여 이를 멸하였다. 이후에는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쓰(赤松)[16], 마츠바라(松原)[17], 벳쇼(別所)[18], 고데라(小寺)[19], 우키타(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으나, 연달아 일어난 반란으로 모리 공략은 연기되었다.
1581년부터 재개된 모리 공략에서, 돗토리 성, 빗추 다카마쓰 성 등을 공략하였다. 특히 다카마쓰 성을 공략할 때 물줄기를 돌려 성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 '다카마쓰 수공'으로 히데요시의 전공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6. 천하인이 되다



6.1. 혼노지의 변


이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할 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카마쓰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 한 명만 할복하고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는 내용[20]으로 모리 측과 즉시 화친하였다. 이후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을 따르자면,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21][22]
일본의 어느 소설가가 이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육상선수들에게 요청해서''' 가상실험을 해봤는데, 몸에 번잡한 장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그러니까 식량을 휴대하지 않은 경보병 정도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히데요시가 혼노지에서의 소식을 전해듣고 퇴각하기 전에 미리 발이 빠른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나게 될 길목에 위치한 마을마다 돈을 줘서 병사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식사를 조달받을 수 있도록(즉 신속하게 전투 병력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해둔 뒤에 보급 없이 무장을 최소화한 병사들을 선발대로 보내는 방법으로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석했다.#[23] 자신들과 같은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와 같은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제 천하를 잡으러 간다. 우리와 같은 농민의 시대가 열린다!"며 축하하러 나온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후 13일에 교토 근교인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와 회전(야마자키 전투), 이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6.2. 오다 가문의 분열


6월 27일에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에서 부친 노부나가와 함께 자살하여 차남 오다 노부카츠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 파로 중신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남 노부타다의 적자인 산보시(훗날의 오다 주나곤 히데노부)를 지지하여 이를 옹립하였다. 이 일로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으로부터 탄핵장을 받았으나,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삼아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생모와 딸을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하여 3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에 동조하여 다시 거병한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이고 그 결과 가츠이에는 부인인 오이치와 함께 자살한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하였다.
오다 가문은 몇 파벌로 갈렸는데,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데려다 옹립한 상태였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한다.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쯤으로 취급하고 공개적으로 대항했으나 패배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아주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주인을 치는[24]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25]."
1584년에는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기이 사이가 당,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오다 군에 가담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세의 쿠키 요시타카오다 노부카네,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 등을 포섭하여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하구로, 나가쿠테 등에서 연패하였다. 이에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서자,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투는 패배로 끝나 오다나 도쿠가와를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후 도요토미가 정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난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중순에 종오위하 사콘에노곤쇼쇼[26]에 임명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인 11월 22일에는 곤노다이나곤[27]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관위로도 오다 가 필두가 되어, 명실 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6.3. 천하의 지배자 시절


이해에 오사카 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10일에는 정이위 나이다이진에 서임, 임관되었다. 3월 21일에는 토도 타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또한, 시코쿠를 정벌하여 7월 25일에 이를 평정하였다.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닌 관백을 칭한 이유는, 처음 성인 기노시타가 어머니 오만도코로의 친정 쪽 성일 정도로 평민 중의 평민이었다가 벼락출세한 인물이었기에, 아무리 노부나가의 빈틈을 파고들어 천하를 일통했다고 해도 정통과 권위가 한참 떨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으로 막부를 열어 정이대장군이 되는 대신 관백에 직접 취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8]
같은 달에는 칸파쿠 상론의 종결을 위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칸파쿠 직을 수여받았다. 관백이란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칸파쿠)를 장악한 셋칸 정치를 벌인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관백이 된 뒤 오오기마치 덴노로부터 ((うじ)로서 도요토미를, 성((かばね)으로서 아손(朝臣(あそん)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とよ(とみノ朝臣(あそん)을 칭하게 되었고[29], 10월에는 총무사령을 선언하며, 다이묘끼리의 사사로운 전투를 금지시켰다. 12월 25일에는 다죠다이진/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되었다. 태정대신은 조정 최고위 관직으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헤이안 말기의 다이라노 키요모리처럼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조정과 일본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독재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직으로 봐야 한다.
간파쿠 취임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면, 당시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와 함께 개판이 되어 있었다. 막부 정치 이후 어차피 실권은 슈고 등의 막부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혹은 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직인 간파쿠는 공가에서도 최고 명문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고셋케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게 된다. 이 부분은 소위 '삼관추임문제'라고 하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끊이지 않는 논쟁이다.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간파쿠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고셋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간파쿠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일본의 성씨 제도는 우리의 성(姓)에 해당하는 (氏;'''우지''')와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문을 나타내는 '''묘지/묘자(苗字)'''가 구별되었는데, 히데요시는 고셋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여기서 후지와라는 본성(本姓) - 코노에(묘지(苗字)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氏;우지)를 하사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간파쿠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셋켄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간파쿠 직을 내리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간파쿠가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너무 어려서 히데요시 사망 직후 간파쿠가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진다.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버텨야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방해라는 이유로 그 일파와 함께 모조리 숙청해버리면서 스스로 제 살을 깎아먹어버렸다.
세키가하라 전투로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파쿠 직을 다시 고셋케에 돌려주었고, 자신은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유신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되어 조정 내에서 정치를 한 이유는 그는 정이대장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일본 황실이 무력화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 상징성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어서 일본은 누가 뭐라 해도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권세를 잡기 위해서는 황실과 최소한의 혈연적 유사성은 있어야 했다.
막부정이대장군은 천황과 혈통상 연관성이 존재하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붙었는데 잘해봐야 농민 출신인 아시가루의 아들에게 그런 고귀한 혈통이 존재했을 리 없고, 있어도 증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정이대장군 대신 간파쿠에 취임하여 실권을 행사하려 든 것이고 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되지 못했기에 쉽게 무너진 것이다.
물론 그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압박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 병력은 대부분 조선 정복하겠다고 임진왜란에 보내어 다 소모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이 확실하게 믿을 만한 병력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 우키다 히데이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오사카 성의 전투 때는 좀 더 병력이 늘긴 했지만 이것도 실상은 진짜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라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큰 낭인들이 대거 가세한 것이다.
미나모토 요시이에(源義家)의 증손인 닛타 요시스에(新田義季)의 후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하여, 천황의 혈통 관계를 주작하면 쇼군이 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솔직히 무리수이다. 애초에 본인부터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고작 모친의 주나곤 딸 썰 따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로 일본도 부계를 중시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후지와라씨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30]가 되기 위해 발광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쇼군직을 폐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일본은 무가인 사무라이들은 몰라도 천황과 공가인 귀족들은 항상 남아있는 편이라 혈통 세탁이 난이도가 높았다. 그래서 속임수를 써도 딱히 의미가 없어서 정식으로 세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87년에는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씨를 복속하였고, 87년에는 교토에 주라쿠다이(聚樂第, 취락제 또는 聚樂臺, 취락대)라는 대 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텐노를 초청하였다. 이 해에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다.[31] 또한, 규슈 일대의 기독교도들의 횡포를[32] 목격한 후에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내려 기독교에 압박을 가하였다.
1589년에는 측실인 요도도노[33]로부터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얻었다. 이듬해에는 호죠 가가 사나다 가의 영지를 무단으로 침범했다는 이유로 20만 대군으로 오다와라성을 포위, 3개월 만에 항복을 받아내었다. 포위 중에 다테 등 토호쿠의 다이묘들도 항복의 의사를 표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일본의 통일은 완수되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츠루마츠는 3살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34] 1591년에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칸파쿠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타이코/태합(太閤, 전 칸파쿠/관백에 대한 경칭)를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언하였다.

7. 조선 침공


[image]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

7.1. 조선 침공을 결심한 이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도 있고 그 중에는 1591년에 겨우 낳은 아들 츠루마츠의 죽음과 맞물려 그 충격으로 말미암은 '히데요시 노망설'도 있지만 사실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운운한 최초의 기록은 1585년부터 나타나며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가 정말로 일본 통일 후 대륙 침략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35] 즉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기 전부터 대륙 진출을 운운했다는 뜻으로 대륙에 '진출' 한다는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히데요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에 가득한 계획에 불과했고, 히데요시와 관련된 많은 사료에서 그런 과대망상적인 심리가 드러난다. 조선에 보낸, 오만방자한 국서가 대표적이다. 자기가 '''태양의 아들'''이며 그 근거는 자기 어머니의 태몽이고, 대륙을 정복하여 제국의 정치를 억만 년을 시행하겠으며, 늦게 따라오는 나라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삼가 나의 사적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가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인하여 나에게 적심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00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의 정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가 되어 입조한다면 원려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이외에도 루손(=스페인령 필리핀)[36], 태국, 고산국(=대만), 류큐(=오키나와) 왕국에도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 편으로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령 고아에 '''(내가 인도까지 정복할 테니까) 거기서 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해당 국가들에게 엄청난 어그로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후금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뿐만 아니라 태국과 류큐도 참전계획이 있었지만[37]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면서 명나라와 조선이 자신들만으로 정리했다. 즉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나라들까지 괜히 적대하게 만든 것이다. 이리 어그로를 끌었던 만큼 명나라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자기가 조선과 전쟁하는 동안 다른 나라가 뒤통수치기로 일본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랬으면 우리야 다행이겠지만 대신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도 피해가 누적되었을 것이다. 특히 누르하치의 경우 임진왜란에서 군사력을 소모한 후유증으로 여진족 통일이 실제 역사보다 더욱 힘겨워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는 16세기로 20세기와 정세가 전혀 달랐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가 막장이어서 그렇지,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시달리던 청나라 말기와 달리 한때 세계 최강 중 하나였다. 조선 또한 비록 오랜 평화와 세조의 군제 개악 탓에 건국 초기에 비해 군사력이 많이 퇴보하긴 했지만 명종 시기부터의 군제 개혁으로 적어도 수군에 한해서만큼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갖춰놓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구한말마냥 극단적으로 국력이 퇴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작부터 워낙 어그로를 끌어댄지라 명나라는 멸망 직전의 조선을 돕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다. 조선과의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군사적 안정을 위해 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기까지 했던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작질까지 하면서 막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이를 두고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 이유를 찾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겨우 10년이었으나 그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여러 봉건영주를 복속시킨 후 그의 권력은 무제한의 공중에 떠서 무중력적 기분이 되어 '''망상세계의 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미천한 출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자들보다 기반이 부족했는데, 그렇기에 권세를 대대손손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이묘들을 휘어잡을 만한 확실한 업적이 있거나 그들을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를 갖거나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이묘들을 다 잡아 족칠 수도 없으니 그 대신으로 조선을 정복하여 나름의 업적을 인정받고 조선을 새로운 자기 영지로 삼아 동일본 쪽의 다이묘들도 전부 제압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에도 막부는 영원히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간토의 호조 가문[38]을 정벌할 때 규슈의 시마즈나 막 규슈에 배치된 부하 장수들의 병력을 부르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조선 공격에 크게 동원할 의도가 없었고, 조선 침략에 동원된 장수들의 면면은 대개 히데요시가 비교적 신뢰할 수 있거나 히데요시 정권과 관계가 가까운 심복들 및 서일본의 영주들로 채워져 있었다.
프로이스 일본사 등 여러 문헌에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신뢰할 만한 장수들을 성장시키려는 속내를 일정 부분 드러내고 있다. 총대장이 둘 다 애송이급(...)인 것도 그러한 연유인데, 우키타 히데이에(임진왜란 당시 20세)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정유재란 당시 15세)는 둘 다 히데요시의 친족이었다.[39] 여하튼 도요토미가 조선 및 명 정벌에 성공해 영지를 대폭 늘리고 부하들에게도 뿌렸다면 세력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패착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가문과 부하들이 멸문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서 결국 리스크만 본 셈이다.
아울러 동일본의 장수들은 히데요시가 신뢰할 수 없었고 영지도 멀어서 동원할 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다테 마사무네 같이 고쿠다카의 크기가 거대한 다이묘들이 동일본에 상당수 포진해있는지라 이들은 이미 '''배부른 호랑이'''였고 그래서 굳이 조선으로 진출한다는 생각에 별로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이에야스는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여러 성 건축 등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었고, 기존의 세력 기반이었던 미카와에서 간토 지방으로 영지가 바뀐 이에야스는 새 영지를 안정화하는 사업 때문에 병사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쿠가와 등 동일본 지역의 다이묘들로서는 출병하는 데에 서일본의 다이묘들보다는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될 텐데, 이는 히데요시에게는 논공행상에서 그들에게 그만큼 더 많은 몫을 두둑히 쳐줘야 한다는 양날의 검이 있다. 도쿠가와의 영지는 상술했듯이 안정화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으며 워낙 간토 사람들의 텃세가 심해서 치안 유지에도 골머리를 앓고 있을 정도였다.[40]
실제로 히데요시는 껄끄러운 다이묘들을 통치가 힘든 지역으로 전봉시켜서, 이를 거부할 시 내쳐버리거나(오다 노부카츠), 이후 반란이 일어나는 등 영지의 경영에 실패할 시 그것을 구실로 숙청하는(삿사 나리마사) 일이 많았다. 호조 가문의 세력이 깊이 뿌리내려 있고 반항적, 독립적 풍습이 있는 간토를 다스리는 것은 상당한 난관이었으므로 봉지 경영 때문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히데요시의 통치력 부족이었다. 히데요시는 급한 불을 끄는 건 잘했지만 오랫동안 국가경영을 하는 능력은 매우 미숙했다. 한마디로 일개 군 사령관으로 일하면 잘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실격인 스타일이[41]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력과 인격이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일본은 계속 다스려야겠고 결국 전투지휘관 스타일로밖에 리더 자질이 없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전쟁 상황이 끝나자 바로 이웃나라인 조선에 전쟁을 걸었고 또다시 전투지휘관이 된다.

7.2. 당시 일본의 반응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이 동기에 대해 히데요시가 종종 주변인들에게 "이 정도의 권력을 얻었는데 커다란 위업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지금 가진 권력이나 영광을 조만간 잃고 말 것이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도 하며,[42] 반란이나 음모를 통해 일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봉건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의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히데요시 이외의 모든 일본인이 이 침략 계획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끌려갈까봐 두려워했으며, 그 중에는 반란을 계획할까 망설이는 사람이나 '외국 땅에 끌려가서 죽을 바에는 자살하는 게 낫다'라고 처자식과 함께 한탄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고 한다. 조선이 원나라 마냥 여기저기 들쑤시며 다니는 놈들이라면 차라리 "'''얻어터지느니 선빵이라도 갈기자'''" 라는 심정으로 조선 침략에 긍정적일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조선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는 것. 결국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전사하면 이는 빼도박도 못할 개죽음인지라 일개 아시가루부터 고급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죄다 이 침략에 부정적이었다.
대규모 무리한 전쟁 준비 때문에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의 대역사가 이뤄졌지만[43]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히데요시에게 간언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다들 히데요시의 위광에 이상할만큼 위압되어 있었으며, 이런 불만을 민감하게 알아챈 히데요시가 살살 달래면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마구 을러댔기에 히데요시의 가신들조차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프로이스의 설명이다. 즉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사기까지 친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들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25개 조의 각서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고 나서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를 명(明)의 황제로 옹립해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마사히토 친왕(政仁親王)이나 하치조미야 도모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을 일본의 천황으로 삼겠다 주장했다. 그러나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요시의 외부로의 군사적 침략을 반대했고, 히데요시에게 「억지스러운 짓이다」(無体な所業)라며 말렸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 황실에서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던 모양.
다만 유일하게 예외인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222만 석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유일하게 고쿠다카가 많은 256만 석의 다이묘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 당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누를 만큼 강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 256만 석도 히데요시가 강제로 보낸 간토의 오지였고(잠재력은 있지만), 히데요시의 영지 중 적지 않은 것은 한솥밥 먹던 선배 출신으로 자기를 지지해 준 사실상의 부하들(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 어린 시절부터 먹이고 재워가면서 키웠거나 기타 자기의 직속 부하라고 할 만한 이들(유명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쿠로다 간베에 등등), 양자 제도 등을 이용해 어쨌든 굳건히 도요토미 가를 지지해줄 만한 부하들(우키타 히데이에)같은 이들에게 퍼준 게 많아서 의외로 본인의 석고는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44]
단순히 정복자로서의 짬밥만 따지면 히데요시는 하리마국에서 시작하다시피 해서 친구들을 잘 사귀어서 오다가의 영토를 사실상 제패하고 규슈, 칸토 일대는 아예 정복했고 주고쿠, 시코쿠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다시피 해서 일본을 통일한 달인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히데요시가 억지로 이에야스와 동생을 결혼시켰다는 것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최대 위협이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석고가 250만 석 이상이라고 해도 그 중 150만 석은 일문중이나 가신들에게 배분했기 때문에 직할령은 약 100만 석 전후였다. 물론 이 정도의 직할령만으로도 다른 오대로 중 2, 3번째로 석고가 많았던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전체 석고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한 세력이긴 하지만 도요토미의 220만 석이 히데요시의 직할령이고 중신들의 영지는 따로 분리된 것을 감안하면 세력비로도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45]
다만 도요토미는 날 때부터 다이묘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올라간 경우라 완전히 믿을만한 가신이 많지 않았다.[46] 오대로라 해도 내전이 벌어질 때에는 도요토미가 완전히 믿을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도요토미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전력은 직할령 220만 석, 마에다 토시이에의 100만 석, 기타 중소 규모의 다이묘 몇몇과 칠본창 정도였다. 오히려 칠본창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죄다 동군으로 붙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밑에 들어갔으니,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목숨걸고 충성을 다한 이는 고작 이시다 미츠나리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에 도쿠가와의 가신들은 대대로, 혹은 수 십년 이상 도쿠가와를 섬긴 가신들이라 250만 석 전체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 때문에 도요토미가 도쿠가와보다 강대한 건 물론 맞지만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아무튼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 다이묘들이나 마에다, 모리 등 다른 오대로급 다이묘들 전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었고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단 1명의 병력도 조선 정벌에 파병하지 않게 되었다.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4성에 달하는 고위장성이 고작 1~2개 연대급 병력만을 주둔시킨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요식행위다.)을 히젠나고야에 예비대 형태로 주둔시킨 게 전부였다. 그 덕분에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 안정을 위해 전후 처리를 할 당시 이를 빌미로 조선과 화친할 수 있었다.

7.3. 감도는 전운과 막고자 하는 세력의 술수


1590년,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통신사의 파견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 전쟁을 막고자 했던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항복하라고 한 히데요시의 말을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간파하고 전국통일 축하 기념으로 통신사를 파견하라 속였고, 이에 조선이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고자 파견한 것이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항복하러 온 줄 알았고 통신사를 무례히 대했지만,[47] 통신사는 전국통일 축하하러 온 건지라 당연히 말이 엇갈렸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답서로 보낸 국서에서 조선 국왕이 입조할 것이며, 명을 칠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정명향도(征明嚮導))고 주장했는데, 문서 전달 도중 이걸 본 당대 쓰시마의 도주인 소 요시토시는 조선측이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해 자기 나름대로 문장을 순화해서 통신사를 파견할 것이며, 명에 들어가는 길을 빌려 달라(가도입명(假途入明))고 문서 조작을 가했지만[48] 길을 빌려달라는 것도 조선 측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위여서 이를 묵살했다. 조선은 일본의 부하가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해당 노력들은 모조리 헛수고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7.4. 전쟁의 시작과 진행


마침내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하는 것으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image]
조선 쪽에서도 전쟁에 대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규모를 오판한 데다(아무리 많아도 1만~2만 정도로 여겼다) 전쟁 경험이 없고 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이라 초기에는 떡발리게 된다. 일본 측의 압도적인 무력에 조선이 연패를 거듭하여 평양 또는 함경도까지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진격하는 과정에서 주 진격로에 있는 도시만 점령한지라 조선군이 다시 재집결할 수 있었고 보급선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대활약과 각지에서 의병 등을 흡수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의 전방위적 반격이 개시되었다. 거기다 악명 높은 1592년의 겨울을 나면서 수많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였고, 여기에 명나라의 원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이 확실히 불리해진다. 결국 침공군 중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개전 1년만에 증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본국에 대기 중이던 예비대를 급히 투입하고 남해안을 요새화하여 버티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협상을 시작한다.

7.5. 엇갈린 과의 강화협상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명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49]

그러나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조선과 명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 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실권자인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50] 조선의 경우에도 태종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에 의향을 전했고, 명나라 사신 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기뻐했지만, 양국 간의 내부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한 사례가 있다.[51]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으로 취급하겠다는 건, 명나라 입장에서 오랑캐에게 황녀를 으로 내준다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이 무례한 요구였다. 설령 대등한 관계였다고 해도 후궁으로 황녀를 내준다는 건 패전을 인정하라는 수준의 국가 모독이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상식이 부족한 인물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 3.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그나마 명나라 측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부분.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랑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즉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명나라 측에선 그나마 타협이 가능한 부분이다.
4.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 특히 조선에게 제일 무리한 조건'''. 명나라가 강화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더러 종전을 하는 대신 깔끔하게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설령 명나라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극히 일부도 아닌 절반을 통채로 빼앗길 판에 '''조선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or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조선에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가장 많은 핵심 지역이다. 이런 걸 내놓으라는 건 보통 승전국이 패전국한테 아예 멸망시켜 버리지 않는 대신 '나라는 보존시켜 줄 테니 살을 다 내놔라'는 의미로 내놓는 조건이며, 1번과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패전 인정을 요구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임진왜란은 일본이 패전은 아니었어도 승전 분위기와도 한참 멀었으니 히데요시가 전황을 제대로 읽고는 있는지도 의심되는 대목.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국가 간의 협상에서 씨도 안 먹힐 만한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먹힐 턱이 없는 것이었고, 이 정도로 국제적 현실성이 결여되고 자기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다.''' 그래서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치자. '''맨날 일어나는 반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명국임을 자처했던 조선인들이 야만인이라 멸시했던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리 절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은 센코쿠 시대라서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할거 상황이었고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 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 뻔하다.
5, 6.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다른 나라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 후자는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하여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7.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이는 2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히데요시는 선조도 군주가 아니라 자신처럼 '천황'의 아래에서 실권을 가진 신하라고 여겼다. 이는 선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52] 또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루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알탄 칸)의 예가[53] 있다.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주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임명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고 허위 보고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강화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코니시 죠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54]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임명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과 화해하고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 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55]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56]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식에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57]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의 선재고, 유럽의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왕환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한 기록들에서는 히데요시도 명나라의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재고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인을 받고 명나라 옷을 입고 만세삼창을 했다'''고 씌어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고 기록되었다.
조선 측 기록은 2가지이다. 조선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서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봉작례가 행해졌으며, 관백이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명이 모두 차등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덕수의 보고에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황신과 다르게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58]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59]
어쨌든 1596년 9월2일,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히데요시는 신종 황제(만력제)의 칙서에 '''‘5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만세까지 불렀다.'''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공순한 태도를 취한 셈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 ‘현실’을 깨닫는다. ‘명나라의 황녀도 올 것이고, 조선이 사도를 떼어주고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이며, 무역도 허용할 것’이라고 믿었던 히데요시는 달랑 ‘책봉 칙서’ 1장밖에는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격노한다. 결국 속았다고 생각한 히데요시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재침략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
이렇게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은 후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명나라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책봉하니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60]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나라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한마디로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을 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과 감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

7.6. 결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잠재적인 국력을 오판하고, 당대의 강대국인 명나라의 의지를 읽지 못했으며, 자기 군대의 능력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200년간의 평화 때문에 조선의 군역은 문란했지만 당시 일본(1800만 가량 추정)과 조선(1300만 가량 추정)은 인구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오랜 전국시대로 사망률이 높아 인구수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은 봉건제라서 인구가 많아도 실제 동원 병력은 총 인구수에 비해 많이 적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조선은 명나라와 더불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제군주제관료제로 중앙집권화를 이룬 나라로 중앙부터 지방의 관리들은 모조리 조정의 임명 하에 파견되어 다스릴 정도였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타 나라보다 총력전에서 최대한 역량을 쥐어짜낼 수 있었고, 전란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17만의 대군을 징집하는 등[61] 그 잠재성을 입증했다.[62]
명나라는 요동 지방의 안보 문제와 동쪽에서 외래세력이 자기나라로 쳐들어올 때 완충제로서 조선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었다. 조선군이 여진족에게 그렇게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것은 조선의 예방전쟁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입장에서도 저들은 귀찮은 존재였기에 동맹국의 손을 빌어 해결하려는 명나라의 의사도 작용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이유가 자기들 치려는 데 교점지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반드시 살려내야만 했다. 또한 가장 관계가 좋은 번국이자 우호 국가인 조선을 지원하고 '천조'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명나라 입장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다 일본군이 히데요시 본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압도적인 건 아니었다. 희대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의 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수군 전력은 한반도의 리아스식 해안 지형과 안 맞았으며 대형 군함은 부족했고 견고함에서 밀렸다.[63] 거기다 육군도 초반에는 전술적 식견과 조총 운용 능력으로 앞섰지만 조선군이 백병전에 익숙해지고 조직도 개편하면서 별 차이가 없게 됐다.[64] 특히 일본 열도에는 제대로 된 기병이 없었기에 조선과 명나라의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조선은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상대했고[65] 명나라도 유명한 기마민족인 몽골과 숱한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이들의 기병부대는 결코 약해빠지지 않았다.[66]
그 결과 전쟁 막판 양측의 전투 양상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바뀌게 되는데, 명군이 활약한 게 크지만 조선군도 상당한 전과를 올린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조선군의 졸전은 거의 다 초창기고 나중에는 사정상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졸전 기록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리한 조선 침공이나 전쟁에 반대한 다인인 센 리큐(1591년 할복),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잔인한 숙청 등을 들어 만년의 히데요시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쇠퇴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특히 히데요시가 주인공이며 그의 업적이나 출세가도를 소재로 한 소설에서 이런 경향이 현저하다. 히데요시의 업적만 조명하려고 '''비판점이나 실책들을 통생략'''해 버리는 경우도 흔한 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며,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노망 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단 한 줄로 끝내 버린다.
96년작 NHK 대하드라마인 <히데요시>에서는 아예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막장 행보를 보이기 전에 드라마를 서둘러 끝내 버린다.''' 히데요시 전문 배우로 인식될 만큼 유명해진 히데요시역 배우 타케나카 나오토는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연기하고 싶었다"며 이것을 아쉬워했는데, 2013년의 <군사 칸베에>에 출연하면서 이 소원을 이룬다. 반대로 히데요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단점을 비판하는 창작물에서는 이 임진왜란을 '일본에게도 불필요했던 전쟁'이라고 간략하게나마 꼭 언급한다.
그래서 현재도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언급할 때 이러이러한 업적과 실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임진왜란을 특별히 신경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임진왜란도 도요토미가 말년에 노망나는 바람에 괜히 가만 있던 조선과 명나라를 건드려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67] 물론 이러한 조선 침공도 미화하는 정치꾼들이나 왜곡 세력들이 있기는 하나,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실책이라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몇 배로 많다.
임진왜란을 겪은 모든 조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이며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서 본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한 작자다.)[68] 선조암군으로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6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은 스스로 안과 밖에서 강적에게 두들겨맞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을 먼저 공략해서 개전 초반기에 학살과 노략질을 일삼고 정발, 송상현, 윤흥신, 신립 등의 장수들과 그 휘하 병력들은 물론, 그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죄다 학살해 악명을 얻었다.
그러나 조선 침공기간 내내 일본 내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선에서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권응수, 송희립, 김완 같은 조선의 장수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였고 피말리는 전쟁 와중에 본인도 사망했다. 더군다나 조선 침공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자신의 세력이 약해져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의 지배권 역시 정적(政敵)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강탈당해야만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임진왜란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백해무익한 짓거리였다. 풍신수길이 사망하자마자 휘하 장수들은 그 '''즉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빤스런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이로 인해 명-조선-일본 3국 모두 질서개편이 이뤄졌는데 명과 조선은 성장하는 여진족에게 압박감 느끼다가 결국 명나라는 멸망하고[70] 조선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받들게 되었고 일본은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운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 한 이들이 제일 큰 이득을 본 셈. [71]

8. 후계자 문제와 죽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부 기록에 나오는 젊은 시절의 아들딸을 제외하면 자식이 오랫동안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기록에 나오는 자들도 잠깐 나오다 만 것을 볼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여럿 들이는데, 여동생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처남의 아들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족 중에서 긁어모은 자들이었다. 이외에 정치적인 이유로 들인 양자도 여럿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유키 가에 보낸 유키 히데야스,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딸인 요도도노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낳지만[72] 츠루마츠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나이가 50대 후반이라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거라 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정하는데, 요도도노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 때문에 방해물이 되어버린 히데츠구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혼약시키는 등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1595년에 히데요시는 모반을 이유로 히데츠구를 고야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하고 히데츠구 일가를 처형하였다. 이 때 어린 처자식까지 공개 처형한 이런 잔인한 처사 때문에[73] 히데요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민중들의 평이 크게 저하되고 후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죽고 손자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붙들려 처참한 죽음을 맞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게 모두 인과응보라는 내용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후계자로 선정되지 않았던 양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고 혈연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는 유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그냥 놔둬서 도요토미氏를 계속 이었다. 임의로 우키타 히데이에라 표현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풍신수가"라 나오는 점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이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츠구만 안습. 사실 도요토미 츠루마츠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외간남자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고 후대에는 거의 정설이 되어버린 걸 생각할 때(에도 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불쌍하다.
전국 최고의 출세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이는 역으로 보자면 다른 유력 다이묘나 무장들과는 달리 그 지지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의미한다.[74] 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와 오봉행(五封行)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의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의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 가지 설로 추측하는데 매독설, 위암설(임진왜란에 의한 스트레스 화병), (심유경에 의한) 독살설 등이 있다.
1598년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의 앞에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퇴를 명령한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왜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종결된다.
사세구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8.1. 히데요시 독살설?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 결핵, 이질, 위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의 주역이 명나라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임상원은 직접 90세 고령의 양부하를 만나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 들은 얘기를 채록했고, 후대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정조대에 <국조인물고> 등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대체로 염헌이 정리한 독살설이 수록돼있다.
양부하[75]는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들었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처음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엄중히 가두고 감시하는 등 일종의 길들이기를 시전했고, 사신들의 하소연에 만나주는 척 응했다.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 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튼 이 설이 맞다면 세 나라를 속이고 더 나아가서 뛰어난 사기로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 골로 가게 만든 심유경은 도대체.

9.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드물게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신격화된 인간, 즉 히토가미(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신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후예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는 등 허영심과 실익을 겸한 효과가 매우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러한 상징을 노려 자기가 죽은 뒤 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유언을 남겼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사를 해체하였고 히데요시의 무덤은 아예 폭탄으로 박살내버렸다.[76]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학자 강항은 히데요시를 기리는 탑에다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해 놓고 죽어 버렸으니 앞으로 내부 분열이 진탕 일어날 텐데 이런 화려한 건물이나 성채가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낙서를 해서 강항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후지와라 세이카가 급히 그 낙서를 떼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히데요시가 사전에 정한 법도를 무시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생전에는 어떻게든 오대로-오봉행 체제가 작동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결국 1년 남짓에 불과 했다. 토시이에 사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오대로-오봉행 체제는 와해된다.
사실 이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잘못인데 완벽하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을 괜히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납치하는 바람에 가라샤가 가신을 시켜 죽었고[77]그게 이유가 되어 오봉행에서 짤리고 만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하지만 이에야스는 몰래 연락하고 있던 무단파의 지지를 얻어내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문치파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해체, 도요토미 가문을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시키고 에도 막부를 연다.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구니마쓰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구니마쓰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도요토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교토로 끌려와 살해당했고,[79] 결국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다만 히데요리의 서녀였던 나아히메는 센히메와 가이히메의 조명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그대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다만 중국을 제외한 당대 국가들의 정적 숙청 대부분이 그렇듯이 히데요시의 일족 및 방계 후손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상당수가 현재 일본에 생존해 있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 제일 먼저 한 일들은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는 일들이었다.[80] 히데요시에게 추증된 신호는 이에야스의 건의에 의해 고미즈노오 덴노에 의해 영구 박탈되었으며[81][82], 히데요시를 위해 세워진 토요쿠니 신사를 폐쇄하고 인근 사찰에 신사 건물을 시주했으며[83] 히데요시의 묘를 파괴해버려 그 행방이 묘연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에도 막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두되고 존왕양이 사상이 커짐에 따라 막부에 의해 평가 절하된 히데요시도 누명을 벗고 신호가 재추증되었으며 토요쿠니 신사와 그의 묘도 재건되어 크게 꾸며졌다.
1998년 때 사가현 나고야 성 터에서 이순신의 직계 15대손인 이재엽(李載燁)씨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19대손인 키노시타 무네도시(木下崇俊)가 서로 만나 화해를 한 적이 있었다.뉴스

10. 가족관계


정실
  •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84]/코다이인(高台院)[85] 네네(寧々)
측실
자식
도요토미 히데카츠와는 다른 인물로,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의 성주였던 시절에 생긴 아들이다. 생년은 1570년,1573년,1574년 등 이설이 많지만, 1576년에 요절했다.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해당 문서 참조.)
  • 도요토미 츠루마츠(豊臣鶴松)[86]
  •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87]
양자
  •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88]
  •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89]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秀秋秀詮)[90]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91]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92]

11. 불임 의혹


히데요시는 여자를 꽤 좋아해서 전국에서 미인을 끌어모았는데 그럼에도 밝혀진 자식은 세 명이며, 두 명은 요도도노 소생이다.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 시절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첩을 맞이하고 첫 번째 측실이 된 여인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후계자 아들을 얻기 위해 히데요시는 이후 15명의 측실을 두었고, 그 가운데 5명은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였다. 그런데도 자식을 낳은 사람은 요도도노뿐이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시절 때 부터 있었고, 첫 번째 측실의 자식도 히데요시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가 아니라 그녀가 데려온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도요토미 히데요리 항목 참고.

12. 색욕마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색을 매우 밝혔다. 원래 본인 정처인 네네는 젊은 시절 연애결혼을 한 사이였는데, 너무 허구한 날 바람을 피워댄 데다 자식도 없던 탓에 부부 사이는 갈수록 안 좋아졌다. 네네는 연애결혼을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전국시대 최고의 현모양처이면서 동시에 괄괄한 여걸이었던지라, 전국 통일 이후에도 부부끼리 있을 때는 고향 사투리를 사용하며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반쯤 가족같은 사이였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마츠가 네네에게 자기 딸을 양녀로 보내서 중재해주기도 했다.
네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남편의 바람기를 가지고 하소연하자, 이에 상관인 오다 노부나가는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히데요시) 녀석이 그대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라는 서신을 보내 네네 편을 들어줬다. 상관 눈으로 봐도 지나치기는 했던 모양.
주라쿠다이 저택에 수백명의 첩을 둘 정도였는데, 의외로 취향은 건전해서 오로지 성인 여성들뿐이었다고 하며 측실 중에 과부 출신도 꽤 많은 편이었다. 그 중에는 오랜 친구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도 있었는데, 나이차는 당연히 30세 이상이지만 일본 통일 시점에 이미 히데요시의 나이 자체가 50세가 넘었다.
출세한 이후에는 낮은 신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고귀한 여성들이 취향이었고 전국통일 이후 측실들 중에는 과거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혈연이 몇몇 된다. 노부나가의 딸,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의 딸 요도도노, 노부나가 남동생의 딸 등. 특히 요도도노는 전국시대 최고 미녀였던 이치히메를 닮아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최고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가장 총애했다.
본인도 호색한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지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너는 여색만큼은 나를 닮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반면에 출신 때문인지 당시 다이묘나 무장 중에선 드물게도 남색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일본 상류층에는 미소년들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으며 이를 '와카슈도'라고 했는데[93], 히데요시는 전혀 즐기지 않아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천한 출신이라 풍류도 모른다"'''고 깠다. 한 번은 이러한 평판을 불식시키려고 부하들이 미동 수십 명이 있는 방에 히데요시를 데리고 갔는데, 히데요시가 미동 중 하나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그 미동에게 '총애'를 받았냐고 물으니까 미동 曰, '''"누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13. 히데요시와 천주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매우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선교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려서,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94]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1587년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쿠마모토 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간 이유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딱히 없었던 일본이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95]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큐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으며[96],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일직히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툰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그때문에 히데요시는 16세기 말에 천주교 금압과 함께 일본내에서 노예매매 또한 금지시키게 된다. 다만 노예 장사를 완전히 금지시킨 건 아니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로 바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노예무역은 17세기 초 에도막부 시절에 가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면서 조선인 노예들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노예들만큼 많이 팔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제재에 나선 것은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이후의 에도 막부의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키리시탄 박해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바테렌 추방령의 내용은 신토나 불교에 대한 배척[97] 그리고 강제개종(하거나 혹은 시키거나)을 금지하되,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자기 의사로 믿는 것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다이묘가 키리시탄이 되려거든 내 허락 받고 되라'''고 해서 예수회가 다이묘들에게 종교 전도를 빌미로 접촉해 연계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사 자체는 이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보아왔던 것이었지만, 그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달리 보게 된 것은 대체로 규슈 정벌(1586.7~1587.4)을 전후해서였다. 당시 규슈 지역에는 고니시 유키나가[98], 아리마 하루노부[99], 타카야마 우콘[100], 오토모 소린[101], 오무라 스미타다[102], 가모 우지사토[103] 같은 키리시탄 다이묘들이 꽤 많이 있었다.[104]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남만이라 불리던 유럽 국가들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105] 동시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종교적 지도자로써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덴쇼 14년(1586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료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나한테 좀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엘료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죠'''”라고 제안했다.[106][107] 코엘료로써는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더욱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도리어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코엘료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놈들 봐라? 위험한데?'''” 하는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한마디로 '''센고쿠 시대 불교 세력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양상이 기독교와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덴쇼 15년(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가스파르 코엘료는 다시 자신이 타고 온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는데,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본 히데요시는 “이거 군함 아니냐?”라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 선교사로써 코엘료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전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진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걸 “'''우리 예수회는 이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히데요시 네가 권력자랍시고 함부로 나대지 마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소헤이의 기독교 버전.'''[108]
이후 가스파르 코엘료는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호하고(1587년) 나가사키 등 일본 내의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히데요시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며 무력으로 몰수당한 예수회 영지를 되찾기 위해 키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으려 했지만, 키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109]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뇨는 덴쇼 18년(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즉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고,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선 침략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10]

14. 히데요시의 능력


[image]
미친한 신분이라서 글을 거의 읽지 못하는 문맹으로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으나 철저한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고 한다.[111] 특히 공성전에 능하여 수공을 성공하거나 포위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곡량을 긁어모아 두는 등 용의주도했다. 또한, 인물을 씀에는 노부나가를 본받아서 실력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설이나 게임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적지 않은데 전국시대의 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원래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항목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그의 참모로 알려진 구로다 간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신분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적 아군 할 것 없이 인재를 끌어모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횡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장 눈앞에 모리의 군이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대로 교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분명히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당장에 모리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서 히데요시를 캐발살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던 히데요시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진언한 것이 바로 귀모(鬼謀: 귀신같은 모략)이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였다.[112]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113]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이 외에도 정치력 역시 특기할 수 있다. 흔히 히데요시는 오다의 업적을 날로 먹은 먹튀로 평가받지만 사실 혼노지의 변당시만 해도 히데요시는 오다 사천왕에도 들지 못한 일개 방면군 사령관[114]에 불과했다는 걸 보면 자기보다 급이 높은 시바타 가츠이에를 비롯한 이들을 제치고 사실상 오다의 영토를 회복하다시피 한 것도 녹록하진 않았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주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것 외에 명목상 사령관으로 오다 가문 사람을 앉힌 것부터 시작해서 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같은 오다 노부나가 생전 자기보다 급이 높았던 거물조차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부하로 만든 점, 이 외에 모리, 오토모, 류조지 가문, 그리고 넓게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되도록이면 정벌에 따라 국력 소모를 막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고 시마즈, 호조 정복에서 보이듯이 이른바 다굴 형상을 만드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습했으나 되려 역관광당해 군대로는 도저히 이에야스를 굴복시킬 수 없자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끌어들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도 그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자신의 정권을 지켜내긴 했다.
장사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 여정 때문인지, 만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할 때는 물건이나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만화에서는 생선장수로 나오는데, 말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내고 그 지역의 입맛에 맞게 소금간을 해서 인기를 끄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인으로서도 대성했을 것 같은 모습이 긍정적인 면으로 자주 부각되는 인물.
미천한 출신 때문에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인적 기반이 없었다'''. 이건 심각한 결점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임명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세력을 맡기는 등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초 병크를 터트리고, 같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기존 후계자이자 많은 가신들을 거느리고 인망도 높았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일족들을 몰살시키면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많은 신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계기를 만드는 등 정치적으로 실책을 많이 저질렀다.
권력자로 등극하고 나서는 과대망상적인 언행이 자주 보이는데, 후시미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거나 다치고 후시미 성과 함께 조영하고 있던 대불이 무너지자 대불에 활을 쏘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네 몸 하나 못 지키냐!"라고 화를 냈고, 자기가 어머니가 태양 꿈을 꾸고 낳은 태양의 아들이라느니, 제국의 영토를 넓혀서 억만 년을 다스리겠다느니 하는 몹시 자뻑스러운(...) 구절을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집어넣기도 했다. 조선에 보낸 국서 자체가 외교문서로서의 기본적 서식이나 의전 등의 격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중2병에 가까운 내용으로, 히데요시의 당시 배경이 부족했음을 나타내준다.
이외에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는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정이대장군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천황의 후손에[115] 명문 가문의 출신이므로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따랐지만, 나는 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내 능력만으로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 내가 낫다'''"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도 자주 엿보인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후 반드시 황실로부터 태정대신과 간파쿠 직을 제수받으려 한 것도 사실은 그것이 본래 황실로부터 노부나가에게 주어질 지위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노부나가는 생전에 일본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종2위 우대신과 우근위대장직을 제수받았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정1위에 올라 태정대신, 간파쿠, 정이대장군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제수받기 위해 우대신직과 우근위대장직을 사퇴한 상태였다.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 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사후추서되었으므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생전에 태정대신이나 그 이상의 관직을 얻어야 하는데 정이대장군은 황족, 하다못해 10촌 이상이라도 좋으니 황실 방계의 피가 들어있어야 하므로 농민이나 다름없는 아시가루 출신의 히데요시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관직이라 간파쿠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요도도노 즉 차차히메를 첩으로 들이고 과할 정도로 총애했던 것도 본래는 그 모친인 오이치 부인을 맞아들이고 싶어했으나 오이치 부인이 남편과 자결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데 대한 보상심리이며, 오이치 부인을 탐한 것도 부인의 미모도 물론 한몫했지만[116]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사실상 오다의 친족으로 편입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사실 성이라 하기에도 뭐한 뼈대만 세우고 외형만 그럴싸하게 한건데, 그걸 본 적장이 일하는 속도를 보아 엄청난 대군일거라 지레짐작하고 도망갔다는 일화가 점점 부풀려져서 정말로 하루만에 해냈다는 식으로 뻥튀기가 되었다고.
그러나 임기응변에 능하여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 반면 대국적인 안목도 없고 한마디로 '''인스턴트'''라는 단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는 영단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기응변의 천재'''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매사를 순간적인 기지로 해결했지만 사전에 긴 시간을 두고 뭔가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일절 없었으며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무력으로 맞붙었다가 고전한 끝에서야 오다 노부카츠를 꼬드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맞설 명분을 없애버려서야 겨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켰을 정도이다.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청 건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한들 그가 어린 나이에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높아서 이미 장성하고 수많은 휘하를 거느린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시키는 것보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배제하는 게 더 나았다.[117] 물론 사람 마음이 양자보다 친아들을 더 삼고 싶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그의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말이 많아서 그조차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정 친아들을 배제하기 싫으면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히데요리를 차차기로 지명하고 히데츠구를 징검다리 후계자로 남겨두는 게 나았다. 이중의 권위라는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히데츠구 본인도 히데요리와 자기 딸을 약혼시키는 등 타협을 시도했고 어쨌든 도요토미 친족이니 불가능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이 훗날 무슨 파장을 불렀는지 생각한다면 그가 장기적인 시야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118]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엄청나게 뛰어났기에 빠르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만큼은 이만한 전투지휘관도 없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력은 '''그게 전부'''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뛰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임진왜란 역시 천하를 얻은 이후 시종일관 임기응변에만 능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갑자기 대폭 불어난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매우 잔인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최대한 이용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몰락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너무 강하자 그 힘을 약화시키려고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험지였던 간토 지방으로 전봉시켰지만[11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아직 기반이 닦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으면서 간토 지방을 그 특유의 극에 달하는 정치능력으로 안정시키고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몰래 힘을 키우며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여타 다이묘들과 비교도 안 되는 250만 석을 초과하는 유일한 다이묘로 성장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옛 영지에 대한 영향력마저 그대로 보존했으니 '''사실상 전 일본의 절반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권'''이 되고 만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장의 크고 강력한 적이라서 전봉으로 세력을 깎는 임기응변을 감행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되려 그걸 핑계로 힘을 키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전봉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아무 명분이 없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에서 전사시키기만 하면 도요토미 가문이 근대화 이전까지 세력을 누릴 수도 있었다.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제하는 게 불가능한 유일한 다이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기 때문이다.[120]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의 능력은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일본 전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이며, 일본 역사상 최초로 중국과 인도를 무력으로 지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복군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이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꺾이며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다. 자신의 적이었던 선조와는 반대로 난세에는 명군이었으나 치세에는 암군이었던 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에 히데요시를 유일하게 패배시켜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 겨우 항복을 받아내게 한 사람. 본거지를 내주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를 개간하여 차근차근 힘을 길러온 인내심의 대가. 평소 안하무인의 독재자인 히데요시의 출병요청도 거부할 만큼 정권내의 압도적인 2인자이며,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재통일한 걸물이다. 비록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조차도 히데요시에 대한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했지만[121] 반면 이에야스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122] 이에야스보다 나은 사람은 아니다.

15. 후세의 평가



15.1. 일본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조선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123]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그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고 (명분상이지만) 천황을 중시하여 관백 직위를 받은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상적인 공무합체(公武合體)[124] 사례로 여겨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에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125] 대외 침략에 매진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던 점도 주효하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이 대륙 침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그 나름의 국위선양을 이룬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126]
일본의 패전 후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평가가 수직상승하며,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임진왜란 전의 업적은 인정한다. 이래저래 이데올로기에 따라 평가가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이지만 말년에 시원하게 말아먹은 걸 제외하면 분명 저마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점은 한국에서도 인정하는 부분.
특히 오사카 성을 쌓고 오사카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그런지,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127]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128]
[image]
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는 일본 내부에서도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놓였다. 실제로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서는 일본 사극으로서는 최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고의 역린임진왜란을 슬금슬금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측 제장들이 쓸데없이 춥기만 한 썩어빠진 조선을 굳이 점령해야 하냐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주 장난이 아니게 난장판인 상황으로 묘사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대극으로 정면 비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라고 불리우고 있다...[129]
사실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130] 히데요시가 죽자 마자 일본군이 철수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왜군의 대다수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 전쟁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1] 또 임진왜란에 동원된 물자와 병력들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일본의 백성들을 고스란히 쥐어짜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132] 히데요시가 서민적인 이미지[133]이니 출세의 상징[134]이니 하는 것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히데요시에 대한 존숭이 이루어지게 되면서[135] 생겨난 인식으로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당시 일본의 귀족, 영주, 무사들, 심지어 천황보다도 더한 권세를 누렸고 임진왜란을 위해 '''자국'''의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였는데 당시 오늘날과 같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을 리 만무하며,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창출했다는 일본 정부의 공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 있다. 심지어 이에야스가 파괴했다던 히데요시의 묘도, 사실은 이에야스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혹한 수탈과 폭정에 치를 떨던 농민들이 부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현대의 일본 서민들이야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세대도 아니니 히데요시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을 구실은 적을 것이므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 현재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혐한 일본인들에게는 신으로 숭배받다시피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유는 알다시피 이걸로 한국을 때렸다는 이유에서이다.

15.2. 한국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역사의 인물 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 수위를 다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등 임진왜란 때 참여했던 무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우두머리인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대개는 부정적인 쪽으로, 특히 임진왜란에 관해서는 살인광전범 같은 인식.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136][137]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일부 이본에서는 평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병권을 장악한 뒤 왜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관백이라 칭했다는 설정이 나온다.(경판본) 근데 좀 뜬금없게도 사쓰마 출신이고, 어머니는 납치당한 중국인(...).[138]
조일 관계가 정상화되고 상당히 악감정이 해소되어 일본에 대해서 꽤나 좋게 평가하게 된 이후의 조선 통신사들도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139]
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를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노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얼버무리기 위해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연회가 재개됐다고 한다.[140][141]

16. 대중매체에서




17. 둘러보기



'''오다 5대장'''
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케치 미츠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1] 모자가 칸무리가 아닌 , 조선풍의 복두사모인 도칸무리(唐冠)다. 자세히 보면 금사로 수까지 놓아 매우 화려하다.[2] 1536년 2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3]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통일이라는 밥을 만들었는데, 그의 사후 히데요시 밑에서 조용히 야망을 키워가던 '''3대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부 꿀꺽해 에도 막부를 열어 버렸다. 자세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 문서 참조.[4] 五三桐[5] 쓰쿠바대학의 로고와 매우 비슷하다. 현재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인장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고시치노키리(五七桐)이라고 하며, 사실 이 문장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문장이 아니라, 본래는 일본 황실이 쓰던 문장 중 하나였는데,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이래 재상이나 주요 정치가에게 하사되는 문장이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은 적(다만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은 초기에만 이 문장을 사용했고 이후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이 있으며 노부나가 항목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고시치노키리는 주로 조정이나 중앙 정계의 정치적 유력자에게 수여되는 문장이고, 이외에도 각 가지의 잎 수가 2개씩 적은 고산노키리[4]를 비롯해 키리몬은 평민과 무가를 불문하고 폭넓게 쓰인다(다만, 일반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도요토미와 관련된 신사의 천막이나 기와, 깃발은 이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고, 일부 사극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였던 시절에 이 문장을 사용하는 고증 오류가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6] 역직은 군정직이고, 관백은 조정직, 그리고 관백은 품계 없는 관위로 품계가 가장 높은 관위는 태정대신. 다만 품계가 없다는 의미와 히데요시의 권력을 감안하면 최고의 자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무가 출신으로 관백이 된 이는 자기가 물려준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외에는 유일하다. 정일위는 죽어서나 되었고 생전에는 종일위였으니(살아서 정일위는 역대 일본사 인물 중 6명만 했다.) 위계 기준으로는 사실상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7]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통일 이후 대륙침략을 하려 했다는 설이 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사망하여 결과적으로 조선과 엮이지 않았고, 임진왜란 당시 조용히 몸을 사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 그 일파의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전쟁의 수습을 하고 조선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서 국교를 회복하는 등, 상대적으로 조선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8]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9] 한국에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다.[10] 당시 일본에선 아시가루는 말이 좋아 무사이지(전국시대에는 하급 보병단 역할) 하졸이며, 사실상 일반 백성 출신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11] '''그런데 히데요시는 그런 어머니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 다음으로 인질로 보냈다.''' 효자인 히데요시는 이 일로 평생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사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어머니를 인질로 보낸 이유는 천하를 거의 먹어치운 자기가 전투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관대한 내가 너를 감싸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너는 어째서 내게 항복을 하지 않으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항복해라."'''라는 경고였다.[12] 당대 일본의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겐지(源)나 헤이지(平)의 일원으로 칭했기 때문에 그 표현이 조선으로 유입된 것이다. 일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는데, 실제 도쿠가와 가문뿐만이 아니라 쇼군가는 대외 공식 문서에 미나모토를 자칭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꽤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어느 집안에 속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가문에 따라 수여받을 수 있는 직책 또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이를 조선식 성/씨 개념으로 오인했던 것. 자세한 것은 쇼군 항목 참조.[13] 이때 얻은 이부(異父)동생이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여동생 아사히히메. 이에 대해 이설도 있지만, 아무튼 히데나가는 그의 영지였던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설까지 있는 거물,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을 하여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14]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배신, 즉 가신의 가신의 가신이었다.[15] 정말로 지었다고 한다면 현대 공법으로도 불가능하므로 제대로 된 성일 리는 없고, 목책을 세워두고 로마군식 숙영지 정도로 꾸며뒀을 가능성이 높다.[16] 62대 무라카미텐노의 7대손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源季房)의 아들 아카마쓰 히데노리(赤松秀則)을 시조로 하는 가문. 무로마치바쿠후의 창건에 힘쓴 가문이지만 가키쓰의 난을 일으킨 대가로 멸문당하기도 했다.[17] 아카마쓰 히데노리의 5대손인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의 4대손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를 시조로 하는 가문. 흔히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쓰시류 마쓰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라고 불린다.[18] 아카마쓰 노리무라의 증손자 벳쇼 아츠미쓰(別所敦光)를 시조로 하는 가문. 이렇게 1579년까지 멸망했던 가문 중 아카마쓰·마쓰바라·벳쇼의 세 가문은 같은 혈족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19] 훗날 히데요시의 군사가 되는 구로다 간베에가 고데라 가문의 가신이었다.[20] 성내 약탈을 금지해 달라는 성주 무네하루의 요청도 받아들였다.[21] 고대 로마군이 잘 정비된 가도에서 강행군을 해야 이것과 근접한 숫자가 나온다. 도로 사정도 별로 좋지 않던 당대 일본의 형편과 당시의 기후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피로와 피해를 무릅쓴 강행군인 셈이다.[22] 츠츠이 야스타카가 이것을 소재로 <야마자키>라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초반에는 진지하게 상황 묘사를 하는 듯 하더니 히데요시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들고 신칸센을 예약, 신칸센과 전세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다.''' 이에 황당해하는 가신에게 히데요시가 '설명 따윈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백미다.[23]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사극 공명의 갈림길에서도 퇴각하는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길에 늘어서 있던 주민들이 건네는 주먹밥을 말 위에서 곧바로 받아 먹으면서 진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24] 우츠미로 발음하는데, 노부타카가 죽은 곳의 지명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의 아버지였던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기도 한데, 이를 빗댄 구절이다.[25]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지쿠젠노카미였으므로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고 불렀다.[26] 좌근위권소장. 근위부의 차관급[27] 태정관의 차관급, 조선의 도승지에 상당. 단 권관이므로 정원 외.[28]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록 약소하긴 해도 다이묘 출신이라 겐지의 후손이라는 뻥을 쳐도 먹힐 수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신분이 미천했다.[29] 과거 일본의 성씨#s-2는 씨와 성 두 개가 별개였는데, 본래 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은 작위와 관직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였다. 이 때 를 이름에 쓴 경우 혈족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격조사 노(の)를 붙여서 읽는다. 즉 엄밀하게 따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올바른 표기는 '도요토미'''노''' 히데요시'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 참조.[30] 이 신분 덕분에 관백이 될 수 있었다. 양자로 들어가기 실패했으면 관백조차 얻을 수 없었다. 사실 쇼군이 될 수 있는 혈통의 양자로 들어가서 인정을 받으면 쇼군도 될 수 있었겠지만 그 혈통을 가진 사무라이들이 당연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31] 다만 농민과 무사를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32] 전국시대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를 우상숭배라 하여 때려부수는가 하면, 일본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했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일본인 50만 명이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려 동남아와 인도 등지로 끌려갔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히데요시나 그 이후에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기독교가 일본에 크나큰 해가 된다고 간주하여 기독교 금지령을 내려 서양인 선교사들을 모두 내쫓고 일본인 기독교도들한테 기독교를 버리라고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면 필리핀 같은 해외로 추방하거나 모두 죽여버렸다.[33] 야사나 민간설화에서는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짝사랑했다는 설이 많고, 오이치의 딸 중 그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 요도도노라고 한다.[34] 이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기 상투를 칼로 잘라버렸을 정도라고 하며, 또한 이 때의 충격으로 히데요시가 잔혹하고 의심많은 성격으로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35] 단순히 일본을 자기가 차지하면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교류가 끊어진 대륙에 진출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현대에도 경제적인 의미로 외국과 새로운 교역을 하면 진출이라 표현한다. 현재는 임진왜란 이전의 약 100년 동안 일본 전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국시대를 거의 평정한 인물이 대륙에서는 진출이 아닌 침략시 그런 피들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만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전국시대를 거의 평정하고 대륙을 침략하겠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다며 침략은 히데요시가 혼자 고안했다는 것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36] 본래 필리핀에스파냐가 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로 만든 곳으로 20세기 초에 미국에게 빼앗긴 곳이라, 사실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시절이 더 길다.[37] 류큐는 오래전부터 일본에게 시달린 것이 많아서 적대관계였고, 태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에게 복속해서 명나라를 치라고 계속 협박하자 열받아서 명나라에게 같이 일본 공격하자고 제안했다.[38] 가마쿠라 막부타이라 호조씨가 아니라 센고쿠시대후호조씨다.[39] 우키타 히데이에는 준양자, 히데아키는 양자였다가 파양했다.[40]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도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논공행상을 할 때 줄 상이 없었기에 그랬던 측면이 있다. 싸움에서 이기긴 했는데 방어전 성공일 뿐 정복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서 줄 보상이 없었던 것.[41] 한마디로 패튼이나 몽고메리 정도는 되겠지만 아이젠하워나 니미츠 수준에는 못미치는 정도?[42] 다만 이건 마냥 헛소리는 아닌 게, 미천한 출신으로 천하인에 오른 몸이고, 수도에서 관백과 태합 직책으로 활동한 그의 특성상 기존 기득권층과 권력 다툼이 벌어졌을 것이다.[43] 옛날 고수전쟁수양제의 백만대군 준비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피본 것과 같은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44] 훗날 에도 막부 역시 쇼군이 직접 약 300~400만 석 규모를, 그 외에 하타모토 등 쇼군 친위세력이 또 300~400만 석의 영지를 거느려 다른 다이묘들을 압도하는 식으로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킨 바 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군국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듯.[45] 그런데 히데요시 생전에는 이게 먹혔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정말로 도쿠가와 가가 도요토미 가보다 석고에서 우위였던 점이 그대로 군사력으로 발휘된다. 이때쯤에는 명목 뿐이었던 석고도 도쿠가와 가가 간토의 영지를 결국 안정시킨 데다가 과거의 영지였던 미카와 일대 또한 영향력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으로 인해 실질적인 힘으로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반면, 말년 히데요시의 삽질 때문에 생전 히데요시가 배분한 석고가 도요토미 가문의 힘으로 응집되지 못하게 되었다.(대표적으로 임진왜란과 양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처형 등) 이 또한 어찌보면 미래를 보지 못한 히데요시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46]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이 현대의 회사원처럼 여기저기 이직할 수 있다고는 하나 개중에서는 한 가문에 대대로 뿌리박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후다이'라 불리며 중신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이것도 가문에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지 도요토미에게는 이것이 가능할 만큼 가문의 역사가 없었다.[47]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 도요토미 츠루마츠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형이다.[48] 쓰시마는 농사가 되지 않아서 거리상 가까운 조선 땅에서 식량공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조선과 전쟁이 일어나면 식량공급은 당연히 끊어지고 그렇다고 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 땅으로 식량을 줄리도 없기 때문. 예상대로 쓰시마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동안 식량공급의 중단으로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전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주작질을 해 가면서 관계 개선을 해내는 데 성공해 겨우 이전 신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49] 참고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훗날 조일국교가 회복되면서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것도 내막을 보면 이에야스가 마냥 평화주의적인 성격이라 사과했다고 보기도 뭐한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나한테..? '라는 반응이었고, 결국 두 나라 사이에 낀 대마도주가 두 나라의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조선에게는 '일본이 사죄했다'라는, 일본에게는 '조선이 일본의 국교 회복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두 나라는 대마도주의 농간을 알면서도 현실적 필요 때문에 속아준 것이라는게 현 학계의 정설. 대마도주의 행각은 명백히 국제적 사기나 다름없지만 빨랑 조일관계가 회복돼야 대마도도 먹고 살 길이 트이는 것이 현실이고 조선은 중국 쪽에서 명나라가 쇠하고 여진족이 흥기하는 과정을 밟고 있어서 더 이상 일본과 으르렁거릴 수만은 없었고 일본도 어쩄거나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으니 모두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한쪽은 속이고 두쪽은 알면서도 속아줄 수 밖에 없던것[50] 또한 화번공주도 진짜 공주만 보내는게 아니고 대충 종실의 여자를 심하면 그냥 궁녀 하나를 적당하게 공주처럼 꾸며서 보내기도 했다. 그랬기에 정 공주를 보내기 싫다면 이런 방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51] 그리고 태종도 이후에는 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는 것이 안 좋다 여겼는지 얼른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다.[52] 오히려 히데요시의 경우 공식직함인 관백 & 태정대신은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좌의정, 높게 쳐봐야 군 정도의 지위이다. 조선의 입장에선 고작 왕 아래 일개 신하 주제에 상대국 국왕을 있지도 않는 존재의 신하 취급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충분히 모욕이었다.[53]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족장()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시집 보내지 않았다.[54]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정정을 요청하여 수정 후 제출되었다.[55]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56]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단의 접견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절들은 명나라 관리들에게 책봉장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57] 명나라에서 순의왕의 예를 따라 '순화왕(順化王)'으로 왕호를 정하려 했으나 전통적으로 일본의 지배자에게 책봉하던 '일본 국왕'으로 최종 결정되었다.[58]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듯 싶다.[59]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논문에서는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히데요시가 책봉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60] 임진왜란과 강화교섭-쓰시마번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임진왜란기 일ㆍ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ㆍ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61] 당장에 용인 전투에서만 해도 '''5만명'''을 끌어모았다. 질도 나쁘고 지휘권도 엉망이라 패배하기는 했어도 적군이 급속도로 밀려오는 상황에서 5만명이 그렇게 금방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62] 다만 조선은 전쟁 초기 정예병들이 너무 많이 죽었고 군사 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해 참패를 당하며 야전 주도권을 잃어 전쟁이 오래 갔는데, 이 야전 주도권은 명나라의 도움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육전은 명나라에게 맞기고 명군에 협력할 2만정도의 군대만 유지하면서 나머지 병력은 전후 복구를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63] 덕분에 조선 군함이 일본 군함과 박치기하면 일본 군함이 깨지기 일쑤였다.[64] 기나긴 전국시대를 거쳐 전투에 익숙한 그들과 정면에서 맞설 수 있던 건 단순히 조선군의 왜놈들 몰아내자는 의지만은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피지컬 소유자였던 것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50도 안 되었지만, 조선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5정도였다고 쓰여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서조차 일본군 평균 신체는 조선인에 못 미쳤다.[65] 탄금대 전투를 제대로 말아먹어 그렇지 원래 신립은 조선 건국이래 최대 침공인 니탕개의 난에서 대활약한 장군이며 기마병이 중심인 여진족을 오히려 똑같이 기마병으로 맞선 장군이다.[66] 훗날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패한 것도 조선군이 약했다기보다는 인조를 포함한 윗사람들이 백성들이 힘들다고 남한산성에 군량을 미리 옮기지 않는 실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포함한 조선의 수뇌부가 제대로 정신차렸다면 조선군이 그렇게 허무하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오히려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다.[67] 임진왜란은 조선이 처음에 밀리긴 했으나 전세가 깊어져가며 오히려 일본 측 실책의 연속이었기에 일본에서는 흑역사 취급되어 매체로 다루지 않으려 들며, 다뤄진다 해도 일본이 잘한 것이 아닌 '''원래부터 일본의 잘못(자국의 실책)'''으로 표현한다.[68] 임진왜란 때의 나름 민간인에 대한 상대적인 온화한 태도와는 달리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학살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사실 임진왜란 때도 조선 백성들의 입장에서 일본군은 도살자 그 자체였다. 동래성과 부산진, 경주성, 진주성, 기타 조선의 여러 성읍에서 일어난 일본군과의 전투와 양민학살로 죽어나간 군민만 수천에 달한다. 저항했냐 안했냐로 죽인 게 아니라 그냥 죽였다. 센고쿠 시대 일본의 전쟁 풍토 자체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69] 선조의 암군목록의 거의 대개가 임진왜란 전후에 생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래 있던 찌질이 기질이 전쟁을 겪으면서 폭발해버린 것으로 많이들 설명하는데 전쟁이 없었다면 그럭저럭 평타는 치는 왕으로 평가받았을 수도 있다. 물론 전쟁을 예상도 못 했고 대비는 했긴 했는데 불충분하다고 평가받는다.(허나 이것은 선조에게는 조금 부당한 평가로 선조는 준비를 어느정도 잘 하려고 했는데 워낙 평화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갑작스런 전쟁준비에 손발도 잘 안 맞고 결정적으로 '''일본이 너무 빨리 침공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의사를 보낸게 1590년인데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다. 상식적으로 오랫동안 평화를 누린 나라가 단 2년만에 대규모 외침에 맞선 준비를 뚝딱 끝내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또한 까임거리이기도 하다.[70] 다만 명나라가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임진왜란도 아니고 여진족의 침략도 아니라 명나라 내부의 모순때문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쓴 전비조차도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의 사치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고 또, 천하의 누르하치도 죽을때까지 원숭환이 지키는 산해관 뒤의 진짜 명나라 영토는 구경도 못했다. 사실상 이자성의 반란으로 망한 거지, 임진왜란이니 여진족의 압박이니 하는건 그저 여러가지 원인 중에 하나였울 뿐이다. 물론 임진왜란과 여진의 성장만 비교해본다면 후자쪽이 명나라 멸망에 타격이 컸지만..[71] 물론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큰 욕심 없이 자국 내부 일에만 신경썼기 때문이었다.[72] 조선 통신사 앞에서 무례를 범했다 나오는 아이가 츠루마츠.[73]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이고도 뭐가 못마땅한지 이들의 시체를 묻은 무덤을 축생총이라 하였는데 직역하면 '짐승 무덤'이다(...) 문제는 이렇게 죽은 이들 중 '처'는 정략혼에 의한 유력 다이묘의 친족이라 이들은 이로 인한 불만을 후일 이에야스쪽에 붙어버리는 것으로 풀었고 그 외 이 일에 연루되어 죽은 자들은 엉뚱하게도 정적이 아니라 그나마 도요토미를 오래 섬겨온 가신들이었다(...) [74] 당장은 힘으로 누르고 있는 이에야스만 하더라도 미카와에서 누대에 걸친 충성스러운 가신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자신의 일부 친척이나 측근을 육성하기도 하고, 타 가문의 어린 인물을 어거지로 자신의 가문에 편입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고, 그의 사후...망했어요.[75] 남원 양씨로 히데요시 사후 모리 테루모토 휘하에 있었다가 35세의 나이로 조선인 백여 명을 데리고 조선에 귀환 후 95세까지 장수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에도 나와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별개로 양부하는 오랜 일본 생활로 히데요시 전후의 일본 사정을 꿰차고 있어서 강항의 간양록처럼 당시 일본이 이랬다 정도로만 알아두자.[76] 메이지 유신 시대 히데요시를 조정을 중시한 천황숭배 사상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면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77] 가톨릭 신도인 가라샤는 자살하지 못했다.[78] 다만 쿠니미츠는 이에야스와는 혈연이 없다. 쿠니미츠는 히데요리의 정실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의 자식이 아닌 측실의 자식이기 때문[79] 당시 히데요리의 아내가 이에야스의 친손녀임을 생각하면 잔인한 조치였지만[78] 하필 히데요시는 조카를 상대로 더 잔인한 짓을 행해서인지 별로 욕은 안 먹었다.[80] 조선과의 교류 재개를 위하기도 했고, 자신의 가문을 확장시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그를 무시했던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수도 있다.[81] 천황은 신토의 수장이므로 신호를 추증하고 박탈하는 권한은 쇼군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82] 히데요시에 대한 천황과 교토 귀족들의 시선의 속내는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에게 출정을 알렸을 때 고요제이 덴노가 그것을 극구 반대하며 무모함을 비난하는 글이 남아있으며,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미천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고셋케의 최고 가문 코노에 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혈통과 고귀함의 자부심이 높던 귀족들이 그를 좋아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그에게 신호를 추증한 것도 고요제이 덴노이지만 히데요시가 죽었을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그도 도요토미 가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의 아들 고미즈노오 덴노가 히데요시의 신호를 박탈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83] 히데요시는 불교의 폐해와 부패가 심하다고 보아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신토를 중시했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를 싫어했다. 이에야스의 이 행동을 했던 것은 불교를 탄압했던 히데요시를 격하하고 불교계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84] 관백의 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태합으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85] 출가한 이후의 법명.[86] 요도도노의 장남.[87] 요도도노의 차남.[8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 토모의 아들.[8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 토모의 아들이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90] 정처 네네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째 아들.[91]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92]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첩 오만노카타(於万の方)의 아들이자 이에야스의 차남.[93] 에도 시대 조선 통신사에서 조선 측 서장관인 신유한이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남자가 여자와 서로 어울리지 않고 같은 남자와 어울린다니 괴이하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아메노모리는 "학사님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시나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유한은 "'''성리학자인 아메노모리도 저런데 보통 일본인들은 오죽하겠나.'''"라는 식으로 평했다. 그러나 당대 일본에서도 저런 문화는 상류층이나 즐기는 것이었고 전 백성이 즐기는 문화는 아니었다.[94] 물론 프로이스의 평가는 프로이스의 극도로 천주교적인 종교적 멘탈리티나 그의 이해관계를 감안해서 분석해야 한다. 가령 프로이스는 불교 코스프레를 하던 무신론자인 오다 노부나가를 냉소적으로 보고 오토모 소린처럼 인간성 면에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 사람을 마구 칭찬하기도 했는데, 오토모 소린이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네네의 경우는 선교사 등 이방인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변을 돌보아 줬기 때문에 칭찬한 것. 반대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반기독교적인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지나치게 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인데 당시에는 평민들은 육식을 하지못해 키가 작았다. 또 그때는 요즘처럼 육손을 수술로 바로잡던 시절도 아니었고.[95] 심지어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96] 대가로 조총화약등을 받기도 했다.[97] 키리시탄 다이묘들의 경우 자신의 영지 내에 있는 신사나 사찰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헐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98]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o).[99] 세례명은 돈 프로타시오(Don Protasio).[100] 세례명은 유스토(Justo).[101] 세례명은 돈 프란시스코(Don Francisco).[102] 세례명은 돈 바르톨로메오(Dom Bartolomeu).[103] 세례명은 레온(Leon) 또는 레오(Leo).[104] 시코쿠의 토사 이치죠 씨의 당주인 이치죠 카네사다도 키리시탄이 되어 돈 파울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하리마의 쿠로다 요시타카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키리시탄이었다.[105] 오토모 소린 같은 경우는 아예 불랑기포의 제조 기술까지 자체 보유하고 있었다.[106] 가스파르 코엘료는 이미 이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덴쇼 13년(1585년) 규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과 이들을 앞세운 기독교 전도 활동을 지원하고자 루손(필리핀)에 일본으로의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107]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도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겠다'''”며 회유하려 했지만, 애초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을 치고 명나라까지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거창한 계획에 대해서 “이건 미친 짓이야”라고 전쟁 내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성직자로써의 양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선교사 본인들이 일본보다 명나라에 먼저 들어가서 선교하면서 '''명나라와 일본의 국력은 서로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자칫 히데요시의 명나라 침공 계획에 어떤 식으로든 예수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명나라에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었다.[108] 이런 히데요시의 예수회에 대한 위기감이나 불쾌감이 마냥 편집증적인 망상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게 당장 히데요시는 주군을 모시던 시절부터 군사력을 가진 종교가 세속의 정치 권력에 맞서 얼마나 강력하고 위협적인 반대 세력이 될 수 있는지를(그리고 그걸 자기 주군이 얼마나 힘들게 밟아 조졌는지) 본인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은 말할 것도 없고.[109]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로 '흑인 사무라이'로 유명한 야스케를 소개한 인물이다.[110] 출처: 윤재필 《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및 조용준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111]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이 서양과의 교역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인데 노예장사로 일본에 끌려온 자에게 이름을 주고 사무라이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야스케 문서 참조.[112] 일설에 따르자면 이때 구로다는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로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지략을 몹시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구로다 간베에 참조.[113] "노부나가가 진을 치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진을 치면 시장이 들어선다"란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상업 장려 외에도 히데요시가 즐겨쓰던 '기동전'과 '기만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오다와라의 호죠가를 정벌할 당시에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뒤 뒤에 목책을 쌓고 그 너머에 시장과 '''유곽'''을 세워 비번인 병사들과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의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고 전한다.[114] 정확히는 하리마 일대의 다이묘.[115] 미나모토/겐지(源氏), 타이라/헤이케(平氏), 타치바나(橘氏), 후지와라(藤原氏)는 고대 일본 황실로부터 갈라진 분가로 일명 4대본성(겐페이토키츠)으로 불린다.(이 중에서 타치바나는 유일하게 모계에서 기원한 성씨다.) 종법상 왕과 촌수가 멀어지면 신하의 신분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 나라가 다른 조선시대에도 전주 이씨의 공파에서 갈라져나간 자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에도 적용되는데 증손자까지 왕족이고 고손자부터는 평민이 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세습친왕가와 화족들의 몰락과 여자들만 태어나면서 다들 해당 경우가 적용되기도 전에 평민이 되었다.[116] 원래 오다 가는 남녀 가리지 않고 미인이 많기로 유명했다고 한다.[117]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처럼 타 가문의 견제나 포섭 목적으로 보내는 방법이 있었다.[118] 아예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오고쇼가 되고 히데츠구를 바지사장으로 앉혀서 자신이 실권을 휘두르고 히데츠구를 허수아비로 각인시킨 다음 그 실권을 히데요리에게 온전하게 넘겨주는 방법도 있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처형은 히데츠구에만 한정하고 그 자식들에게는 적당한 자리를 줘서 중앙에서 멀리 떼어놓는 방법도 있고. 단순히 히데츠구를 죽여서인 것만이 아니라 그 처자식마저 잔인하게 죽인 덕에 원래 히데츠구를 따르던 사람들과 히데츠구의 인척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대실책이었다. 오죽하면 오사카 전투 이후에 히데요리의 어린 아들이 처형되자 사람들이 "이게 다 히데츠구 죽인 천벌을 받는 거다." 라는 말까지 했을까?[119] 땅이 미개발지인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에조라 부른 아이누가 당대까지도 혼슈 이북에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120]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전쟁 전만 해도 조선도 명나라도 정복하고 인도 정벌까지 하겠다고 한 인간이 이 인간이다. 자기기 이길거라는 생각이 없고서야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조선에 보낼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 그만큼 땅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며 애시당초 조선 침략의 의도가 자신의 봉신들에게 땅을 나눠주려던 것이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히데요시의 힘으로는 어차피 이에야스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아예 안 보내는 게 나았다. 물론 이에야스는 실패하기 딱 좋은 조선 땅에 굳이 가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121]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을 확보한 덕에 이에야스로서도 어찌 할 명분이 없었다. 원래 히데요시가 포섭한 오다 가의 삼남은 바보로 유명한 인물이었다.[122] 전쟁으로 이에야스를 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또, 이후로는 이에야스에게 전봉 명령을 내리고 이에야스는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몰라도 이 명령을 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더 어떻게 할 수 없었고.[123] 물론 이것도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이 흑화하기 전의 성격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걸로 모자라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하기까지 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코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것을 말년에 흑화했을 때조차 이전과 똑같이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미화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124] 공가, 즉 일본 황실과 무가, 즉 실권을 쥔 무사 가문이 조화를 이룸.[125] 히데요시가 쇼군을 해먹지 않은 건, 본인이 천황가(家)의 후손이 아닐 뿐더러 본인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해봤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이었던 탓에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기반이 없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히려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크게 성공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더러 애초에 본인의 직위였던 관백 자체가 쇼군보다도 훨씬 손에 넣기 어려운 직위였기에 굳이 쇼군이 되기 위해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126]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는데,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는 타락한 구체제 역할을 맡은 것이 에도 막부인데다가 교토 근방이 거점이었던 히데요시에 비해 막부를 세우고 에도에 거점을 둔 이에야스는 일본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천황을 갈아치웠던 무로마치 막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저래도 황실 분가인 세이와 겐지 출신인데 안습.[127]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정도.[128] 정작 관백을 그만두고 태합으로 물러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끝낸 그 영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타락한 뒤였다. 굳이 임진왜란이 아니어도 도요토미 히데츠구 및 그 일가를 잔혹하게 숙청하여 일본 기준으로도 도저히 좋게 평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 제국이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얼마나 심하게 미화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29] 사실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하게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을 가진 전쟁범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들까지 찬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에서 현재까지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긍정적인 업적도 있지만, 일본 강경 우파 세력의 오랜 통치에 따른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통일 이후의 각종 실책으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진시황하나의 중국을 추구하는 중국 공산당대만 국민당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중화권에서의 전반적인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과도 비슷하다.[130] 지금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 일부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평가할 때 그가 '군국주의의 시초였다', '서민들을 착취했다', '천황을 존중하는 듯 하면서 천황을 조종했다'는 등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는 경우도 많다.[131]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호랑이 사냥 일화와 귀무덤의 유래만 보더라도, 일본 장수들은 조선을 정벌하는 것보다는 히데요시의 개인 취향과 비위 맞추기에 바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와중에 그나마 진짜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자신의 할 일을 다했던 장수들은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정도다.[132] 일본2차대전 당시 전시동원 체제에 들어가면서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국민들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133] 출세 이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확실히 서민적인 인물이었지만 통일된 일본을 통치하던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민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국가지도자가 된 졸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본인부터가 서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서민들을 명분없는 전쟁을 위해 마구 착취했으니 말이다.[13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세 과정 자체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우 대단하지만, 그렇게 출세한 후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으로 대표되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도요토미 정권을 단명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엄밀히 말하자면 출세의 상징인 창업군주로서 그다지 적합하다고 보기 힘든 인물이다. 출세의 상징인 창업군주로서는 차라리 자신이 세운 왕조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길게 유지된 유방주원장이 더 적합한 인물이다.[135]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진다.[136]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토론이 있었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이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워낙에 상막장의 시대였으니 이것이 당시 일본에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배려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했다. 중국식으로 보면 이왕삼각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할 수 있을 듯싶다.[137]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명히 오다 가문에게 가야 할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오다 가문에게 무슨 정통성이 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것.[138] 단 완전 뜬구름 소리는 아닌 게 징비록에도 틀리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출신이라는 서술이 있다.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출신이 아닌 중국 출신으로 보았고 때문에 임진록에서도 이런 설정을 넣었을지도 모른다.[139] 그래도 예외가 있기는 있었으니, 1763년 당시 서기(書記)로 파견된 원중거(元重擧)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행 후 일종의 일본 백과사전인 '화국지(和國志)'를 쓰는데, 여기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도요토미를 까면서도 '중국으로 치면 진시황 같은 사람'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도 내렸다. 물론 진시황이 각종 실책으로 혹평을 듣기도 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마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거라고 볼 수 있다.[140] 그 절은 히데요시와 히데츠구가 증축한 덕에 도요토미 가문을 떠받들고 있었다. 철저하게 도요토미 세력과 그 일족을 몰살한 이에야스였지만, 그 지지자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방치한 것이다. 즉 새빨간 거짓말.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봐 거짓 자료를 가지고 와서 출전이라면서 증거로 제시해 통신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연회를 취소하고 국교를 파토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141] 여담으로 이때 조선 통신사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가짜 문서를 가져와 보여준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였는데, 신유한의 사행기록인 <해유록>에는 그때 아메노모리는 조선 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조선통신사들에게 그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 날에도 실무 맡은 일본 측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마구 갈구고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리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너무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였던 아메노모리로써는 조선통신사들의 강경한 태도는 쓰시마 번이나 실무 관료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에게 화살이 다 돌아오는 만큼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