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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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왜구 토벌
3. 여담


1. 소개


戚繼光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
명나라의 명장. 척경통(戚景通, 1473~1544)의 아들. 자는 원경(元敬), 호는 남당(南塘), 맹제(孟諸), 시호는 무의(武毅).
산동 등주 사람으로 대대로 등주의 지휘첨사를 하던 집안으로 1549년에 무거시에 합격해 등주의 지휘첨사를 지냈으며, 1553년에는 서도지휘첨사가 되어 북쪽의 타타르족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훈련을 강화하고 규율을 엄격히 하면서 삼촌이 군율을 어기자 이를 엄격히 적용했으며, 1555년에는 절강도사첨사가 되어 영파, 소흥, 대주 등을 총괄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1556년에 참장으로 승진했으며, 1559년에 금화현, 의오현 등에서 4천명을 모집해 척가군을 조직했다.

2. 왜구 토벌


원앙진을 고안하여 1561년 왜구가 대주에 상륙하자 원앙진으로 대항해 1달 넘게 싸워서 5천명 이상을 죽였고 1562년에는 온주, 대주를 공격하자 2년을 싸운 끝에 격파했으며, 왜구가 남하해서 여러 지역을 노략질하자 추격해 횡서에서 2600명을 죽이고 60여개의 진지를 초토화시켰다.
그래서 척계광은 왜구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그가 개발한 일명 절강병법은 3수병 체계이며, 조총을 운용하는 포수, 을 쏘는 사수, 장창과 검으로 조총병을 엄호하는 살수의 3개 부분 병력이 협력하는 체계였다. 그리고 보병 부대 대부분을 조총 및 총의 선조뻘인 삼안총 등으로 무장시켰고 기병에도 조총을 도입해 총기병을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군의 남병 부대들도 다들 이 절강병법을 도입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1563년에는 평해위에서 유현, 유대유 등과 함께 왜구의 주력군을 토벌하고 그 공으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564년에는 광동 성 지역에서 왜구의 잔당까지 토벌해 왜구의 자취를 감추게 했다.
왜구가 토벌된 후에는 1568년에 계주로 부임해 내몽골에 대한 대비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건설했고 몽골군의 침략을 대비했다. 이로 인해 내몽골의 튀메드부의 알탄 칸이 입조해서 공물을 바치게 되었으며, 척계광은 장거정에게 중용받았지만 1582년에 장거정이 죽자 참소를 당해 1583년에 광동으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고[1] 1588년에 등주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저서로는 기효신서, 연병실기, 지지당집 등이 있다. 특히 기효신서가 유명하며, 이 책에 나온 전법이 조선 중기 군제의 핵심이 되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 인지도에 비해서는 영상작품에 등장하는 경우가 적은 편인데, 2017년작 중국영화 풍운대전(원제는 탕구풍운. 영제는 God of war)에선 척계광의 대주 전투를 다루고 있다. 척계광 역은 조문탁이 맡았는데 전투묘사의 스케일은 그리 크지 않고 조문탁, 홍금보(유대유 역이지만 초반에 해임되어 중반부터는 미등장), 쿠라타 야스아키 등의 액션 전문배우들이 나온 것 치고는 액션도 화려하진 않지만 원앙진을 포함한 육탄전 묘사는 볼만한 편이다. 덕분에 일곱 도시 이야기에서도 이게 언급되어 나올 정도. 90년대 후반에 대만에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척계광이 주역으로 나온 게임도 나온 걸 국내 게임 월간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 전법과 전투에 능했던 전설적인 장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처가 중 한 명이다. 대부분 야사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좀 의문이지만 척계광의 공처가 에피소드는 정말 차고 넘친다. 덕분에 중국 미디어에서 척계광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아내와 벌벌떠는 척계광이다. 척계광의 부인은 왕씨로 무관인 만호(萬戶)[2] 왕동(王棟)의 딸이고 둘사이에서 딸하나를 낳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출처1] 한국에서는 한국어 위키피디아나 기타 몇 군데에서 척계광의 아내가 가정제의 후궁인 회영현비 정씨(懷榮賢妃鄭氏)의 딸 청교공주(淸嬌公主)로, 이름은 주여화(朱如華)라는 글이 보이지만 중국어 위키피디아나 중국 웹에서는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가정제의 공주는 모두 다섯 명으로 상안공주, 사유공주, 귀선공주 세 명은 시집가기 전에 죽고 두 명만이 하가할 때까지 살아 남아 영안공주는 이화에게 가선공주는 허종성에게 하가했다. 즉 가정제는 청교공주라는 딸이 없었다.[출처2] 아무래도 영웅지애라는 척계광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정보가 역사적 사실로 잘못 퍼진 듯 보인다.
  • 전설적인 공처가 주제에 첩을 세 명이나 들여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다. 아들들의 이름은 척조국(戚祚國), 안국(安國), 창국(昌國), 보국(報國), 흥국(興國)이다. 이름을 보면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름있는 무관으로 성장해 주길 기대한 것 같지만 척계광의 희망과는 달리 이 아들들은 이후 역사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출처3]
  • 아버지 척경통의 나이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늦둥이이다. 척경통의 나이가 50살이 넘어서 낳은 것.
  • 척계광이 만들었다는 광병(光餠)은 일종의 빵으로서 가운데 구멍을 내고 줄로 줄줄이 묶어 목에 두르거나 허리에 묶어서 운반했다.

[1] 근본적인 이유는 척계광이 장거정의 중용을 맏았고 그와 가까운 관계였기에 장거정의 정적들에게서 공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2] 명대에는 만호라는 직위가 없었지만 만호라 불리는 기록이 제법 보이는데 명나라의 군사 조직인 위소제(衛所制)에서 소(所)의 장관이 천호(千戶)였으므로 위(衛)의 장관인 지휘사(指揮使)의 별칭으로 보인다.[출처1] 맹제척공묘지명(孟諸戚公墓志銘), 척계광연보(戚繼光年譜)[출처2] 명사(明史) 공주열전 세종오녀[출처3] 맹제척공묘지명(孟諸戚公墓志銘), 척계광연보(戚繼光年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