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학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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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1. 개요


兵學指南.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기에 척계광기효신서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한국의 군사 교범. 총 5권. 현재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일본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가 도입되었으나 이 책은 순수한 한문이 아니라 명나라 절강 지방의 사투리나 속어를 많이 사용해 해독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당시 조선의 사정에 맞춰 재정립한 병서이다. 기효신서의 내용을 단순히 재정립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진법과 야전 신호법, 가로로 배치된 2개의 층을 기초로 싸우는 층진(層陣), 병사들을 5열로 배치한 후 조총을 5단으로 연속 사격하는 방법 등이 배치도와 함께 추가로 기록되어 있어 기존의 책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좀 더 체계화한 병서라고 할 수 있다.
병학지남의 편찬자는 확실하지 않은데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류성룡의 주도로 기효신서를 번역하고 무예제보, 연병지남 등을 편찬했던 한교가 실무를 맡아서 편찬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1694년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던 최숙에 의해 1차 개정이 이루어졌고, 1787년에 정본(定本) 어정 병학지남이 간행되었다.
병학지남은 조선 후기의 대표 병서로 삼강행실도와 함께 동일한 문헌의 판본이 대단히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1] 누판고에 따르면 장용영, 훈련도감, 남한산 개원사(開元寺) 등 13개소에 병학지남 책판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판본들이 모두다 현존하는 것은 아니며 거기 나타나지 않는 강화도 등에서 간행된 책도 현존하므로 지금 전해지는 실제 판본은 그보다 훨씬 많다.
현존하는 병학지남의 판본들은 18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과거에는 간기(刊記)가 없고 '乙丑中秋武庫開頒'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 판본에서[2] 乙丑을 1649년으로 해석하여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최근의 국어학계의 판본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해당 판본의 내용은 초기 판본의 내용을 계승하고 있지만 간행시기로만 따지면 1734년 경에 간행되고 1769년에 인출된 판본으로 밝혀졌다. 간행 시기를 기준으로 현재 확인된 가장 오래된 판본은 '康熙四十三年 三月'(1704년)이라는 날짜가 붓으로 적힌 개인 소장 판본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대표 병서로 판본이 다양했기 때문에 각 판본마다 내용 차이가 매우 심했고 이에 22대 왕 정조는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 판본의 장단점을 분석, 1787년에 정본(定本) 어정 병학지남을 만들었다. 이 표준형 판본은 현재 육군 사관 학교 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소장되어 있다.[3]
병학지남의 편찬 이후 이에 대한 해설서로 병학지남연의, 병학지남주해 등의 책들이 추가로 나오게 된다.
비록 우리나라의 고유 진법서는 아니지만 조선 후기에 중국의 새로운 병법을 우리나라가 어떤 식으로 수용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병학통, 속병장도설, 이진총방, 연병실기, 융원필비, 악기도설, 진법언해, 신기비결 등의 다른 병서들과 함께 한국의 고전 진법 체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또한 17세기 한글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3. 바깥고리



[1] 그리고 대부분의 판본이 판각이 정교하지 않으며, 간기가 떨어져 나가서 정확한 판각 연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2] 무고판(武庫版) 혹은 무고본(武庫本)이라고 불리는 판본이다.[3] 정확히 말하자면 1787년의 정본 판본도 2종류가 있다. 새로 확인된 두 번째 정본 판본은 내용상으로는 첫 번째 정본과 거의 차이가 없으며 극소수가 조선 시대의 국가 주요 기관에 보존용으로 보관되었지만 전국적인 보급은 되지 않았다. 육사 박물관의 정본판본은 첫 번째 정본이다. 두 번째 정본판본은 서울대, 고려대, 한국학 중앙 연구원의 장서각, 경북대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