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열
金圭烈'''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3년 2월 14일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color=#fff> '''사망'''
1968년 5월 2일
전라남도 구례군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규열은 1893년 2월 14일 전라남도 구례군산동면 관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11월 서울 권농동에 소재한 황종화(黃鍾和)의 집에서 이영봉(李永鳳)·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수차 독립운동을 의논하다가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견원인 강태동·이정래(李丁來)로부터 '수십원의 월급을 받음으로써 천고(千古)에 매국노가 되기를 거부하라'는 내용의 일제 관공리 동포에게 보내는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명의의 격문과 '포고 제1호 남녀학생에게'·'포고 제2호 사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로 된 격문 인쇄물 수백 매를 인수받았다.
이후 그는 숙소로 돌아가 고순흠에게 건네주면서 전라남북도 각지에 배부토록 하였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0년 10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 공갈,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0년 12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구레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8년 5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김규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