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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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순흠은 1893년 1월 14일 전라도 제주목 조천리에서 능봉(菱峰) 고성겸(性謙)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성겸은 성균관 교수(敎授)를 역임했으며, 칠봉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고순흠은 사실 고성겸이 41세의 과부 송씨와 비밀리에 교접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이때문에 정통 유가의 집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며 집안 어른들이 대거 반발했다. 설상가상으로, 고성겸은 칠봉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석유 등불로 인해 화재가 일어나자 문하생들을 구하려다 그만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마저 잃어버린 고순흠과 친모는 10여 곳을 숨어다녀야 했다.
하지만 송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기필코 아들을 대성시키겠다고 다짐해 아들의 교육을 필사적으로 도왔고, 제주 성안으로 유학가는 아들을 위해 <훈언육조(訓言六條)>를 지어 남편의 영혼에게 고유제(告由祭)를 드린 뒤 글을 건넸다. 훈언의 내용은 첫째 집에 금품을 두지 말 것, 둘째 안일하게 지내지 말 것, 셋째 도박을 하지 말 것, 넷째 무당 점쟁이를 멀리할 것, 다섯째 부친이 석유 등불로 인하여 타계했으니 불을 조심할 것 등이었다. 고순흠은 평생 이 훈언을 지켰다고 한다.
고순흠은 향리에서 한문을 익히고 사립 의신(義信)학교를 거쳐 1912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또한 그는 송산(松山) 김명식, 매원(梅園) 홍두표(洪斗杓)와 함께 송매죽(松梅竹) 혈맹결의(血盟結義)를 맺고 국권 회복을 다짐했다. 1914년 3월, 그는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敎, 서울법대 전신)를 졸업하고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했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의 동지들이 결성한 신민회 계통의 비밀결사단체였다. 한편 그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으며, 대동청년당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17회에 걸쳐 토의회를 가진 뒤 조선노동공제회(共濟會)의 전신인 조선 노동문제연구회를 1919년 7월에 조직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고순흠은 김규열, 황종화(黃鍾和), 이영봉(李永鳳), 최익무(崔翼武) 등과 함께 임시정부로부터 "일제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 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해 다수의 독립 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전달받아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조선 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서무 책임자가 되고 1921년 제3회 정기총회에서 김명식(金明植)이 회장이 되고 그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조선 통신중학관을 개설, 학감(學監)에 취임하여 통신 중학강의록을 발행, 독학자로 하여금 실력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제주 해녀조합 설립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1922년 8월 조선 노동공제회 내부의 볼세비키파에 반대해 이들을 폭행하고 회관 간판과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그는2주간 구금되었고 노동공제회에서 제명되었다.[1]
1924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절대 자유를 이념으로 하는 아나키즘을 신봉하고 오사카에서 조선인의 아나키즘 단체 남흥여명사(南興黎明社)에 참여했다. 또 그해 6월 '조선무산자 사회연맹'을 결성하고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인 언론 집회 탄압 탄핵대회"를 개최했다. 1923년 이래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노동 운동 열기가 대두, 각지에서 노동 운동 단체의 창립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사카 노동동맹회를 통하여 조선인 여공(女工) 보호연맹을 조직했다. 여공의 태반은 제주도 출신어어서 고순흠의 영향력이 매우 컸으며, 1924년 사카이(堺) 조선 자유노동연맹과 오사카 자유노동연맹 등을 창립하여 노동 운동과 사상 계몽을 수행했다.
1928년 말, 고순흠은 제주 항해조합과 기업동맹 기선부를 설립, 일본 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간의 독립 항로를 개설,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으나 일제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무정부주의 운동이 퇴조되면서 그의 항일 활동도 점차 후퇴되어 신진회(新進會)를 조직, 오직 사상 운동에만 전념했다. 1936년 5월 일본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던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이 오사카에서 병사하자, 그는 김문준의 유해를 제주도로 안장하게 했다. 그리고 1937년 3월 조선서도 연구회를 마련, 추사체(秋史體), 창암체(蒼體) 등 민족 서체 보급에 힘썼다. 그는 한시에 능했고 서필 수준이 훌륭해 김문준의 묘표, 해강(海岡) 김운배(金培)의 묘비, 김시성(金時成)의 묘비, 김시숙(金時淑)의 묘비 등 항일인사들의 비문을 적었다.
8.15 해방 후, 고순흠은 1946년 2월 재일본 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공산주의자들의 외곽 단체로 전락하자, 그는 이를 탈퇴하고 1946년 9월 25일 재일 한국거류민단 결성에 앞장섰고 준비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10월 3일 창단 대회를 개최하고 단장에 박열을 선출하고 자신은 중앙 총본부 의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세기(世紀)신문 사장에 취임했으며, 1947년 10월 1일 민단 부단장에 피선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이 중앙청 앞에서 거행될 때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고 민단 단장 박열과 함께 '건국 축전 참가 경축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다. 1950년 여름 박열과 함께 재일교포의 동향을 조국에 알리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반면 박열은 북한군에게 납북되었는데, 고순흠은 죽을 때까지 박열을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963년 조국으로 완전히 귀국한 그는 서예 활동에 몰두해 제주, 부산에서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1977년 11월 28일에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그곳에 묻혔다가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