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태동은 1889년 6월 13일 함경남도 리원군 리원읍 문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했다가 발각당한 김가진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함경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해 7월 1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회가 조직되자 상위원(常委員)을 맡아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9월엔 권태용, 이을규(李乙奎)와 동반하여 서울로 돌아와서 임시정부의 격문, 포고문 등을 전국에 배포했다. 또한 대동단(大同團) 단장 전협과 상의하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협력할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김가진으로부터 받아온 밀서를 의친왕에게 전달했고, 이에 따라 의친왕의 망명 계획이 진행되어 11월 8일 의친왕이 서울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행은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신의주를 통과하여 만주까지 갈 수 있었지만, 일경 요네야마 경부의 끈질긴 추격으로 의친왕이 안동현 정거장에서 연행되어 국내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강태동은 다시 상하이로 도피하여 대동단 총재 김가진과 함께 했다. 1921년 9월에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청원하는 진정서에 자유당의 대표로서 서명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에 참여해 광복 때까지 계속 활동했으며[1] , 8.15 광복 후 서울로 귀환했지만 1946년 2월에 사망하여 임시정부장(臨時政府葬)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태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