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명(조선)

 

이름
김대명(金大鳴)
본관
울주(蔚州)
생몰년도
1536년1593년

성원(聲遠)

백암(白巖)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3(1570) 문과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1]이 되었다.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칭송받았으며, 늙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천(泗川)의 현감이 되었다. 선조 10(1577) 예조정랑,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만력제로부터 옥용연(玉龍硯)과 묵화(墨畵) 병풍을 하사받았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괴산, 풍기, 봉산군수 등을 역임하며 외직에 머믈렀다.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자제들과 후진을 양성하였다.
하동군 두류산 묵계동에서 병든 몸을 수양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그를 도소모장(都召募將)으로 삼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고성에서 의병들과 함께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 1593년에 사망하였으며, 1610년에 학문,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의로 경남 진주에 대각서원(大覺書院)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1] 성균관의 종6품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