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

 


'''
神宗
신종 만력제
'''
'''묘호'''
'''신종(神宗)'''
'''시호'''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연호'''
만력(萬曆)
'''성'''
주(朱)
'''휘'''
익균(翊鈞)
'''생몰 기간'''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 (56세)
'''재위 기간'''
1572년 7월 19일 ~ 1620년 8월 18일
(48년 30일)
1. 개요
2. 상세
3. 만력중흥(萬曆中興)
4. 만력태정(萬曆怠政)과 쟁국본(爭國本)
5. 막장 행각의 결과
6. 막대한 낭비
7. 말년
8. 기타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0. 가족 관계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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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 욕해서는 안된다. 그 책임은 만력, 태창, 천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1]

[2]

강희제

명나라의 제13대 황제.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휘는 익균(翊鈞). 융경제의 3남이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들 중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이다.반대로 가장 짧은 기간을 재위한 황제는 다음 황제인 태창제이다.[3]

2. 상세


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톱이자 중국사, 더 나아가 전 세계로 범주를 넓혀봐도 단연 최악으로 꼽히는 인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명나라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손꼽히는 만악의 근원. 나아가 후한 영제, 사마염, 수양제, 당의종, 송휘종, 해릉왕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를 꼽아보라고 하면 반드시 후보로 언급되는 황제. 심지어 청나라 때 쓰인 정통사서 명사에서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서술되어 있다. 명사에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라고 했을 정도. 한마디로 황제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소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만력제는 암군들 중에도 특이 케이스에 꼽히는 사례인데 보통 암군으로 꼽히는 이들은 폭정을 저지르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사례, 혹은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던지거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잘못된 정책을 펼치는 사례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4] 그러나 만력제는 위의 사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데 위의 사례에 속하는 인물들이 좋든, 좋지 않은 방향이건 일을 하다가 그르친 사례라면 만력제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라를 망쳤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황제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어 48년에 달했는데,''' 30년간 업무 거부'''라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였다.[5][6] 만력제가 업무를 거부한 이유를 두고 꾀병, 병, 정치에 대한 환멸 등등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온다. 재위 초반 10년은 장거정의 섭정 기간이기도 했으니[7], 사실상 임진왜란 7년 동안만 일한 셈.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의 조선 출병에 적극적이었다. 그 덕에 중국에서도 명나라가 망한 후 안 올리던 제삿상한국에서, 그것도 사후 300여년 뒤인 20세기 초까지 받았다. 즉 조선 입장에서는 수호천자.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 때문에 나라 재정이 파탄나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무리한 병력 차출은 곧 여진족의 성장으로 이어져 명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8]. 그래서 후대 중국에서는 나라를 파탄낸 머저리 취급을 받는지라 제사도 전혀 받지 못했고 현대에 와서는 아예 시체가 갈려나가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반대로 조선에서는 그야말로 국가의 은인으로 간주하여 사당을 지어 명나라가 망한 뒤 수백 년 뒤까지도 제사를 지냈다. 청나라명나라의 대립 당시 명나라를 편드는 세력의 주요 명분도 임진왜란 당시의 은혜, 즉 만력제의 원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홍위병의 준동으로 만력제의 유골이 불타버려 현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지만, 과거의 연구와 기존의 자료들을 검토하면 만력제는 몸의 윗부분이 눈에 띄게 곱추였고 왼쪽 발이 약간 짧은 기형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0년 동안 업무거부를 하며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이러한 기형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3. 만력중흥(萬曆中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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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력제가 처음부터 암군인 건 아니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만력제는, 즉위 초 10여 년 간 자성황태후 이씨[9]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조헌이 당시의 만력제를 보고 '이번 황제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면서 사행기에 칭찬을 써 놓기도 했다. 또한 만력제는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겨우 10세에 1척(尺) 이상이나 되는 큰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후일의 만력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평가.
명나라 왕조의 통치 체계는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풍보와 장거정은 드물게도 장기간에 걸친 연립 내각을 구축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정리 작업, 황하 하류의 치수 사업, 무엇보다 토지·세제 개혁인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외치로는 척계광·이성량(李成梁)을 요동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또 절강·복건·광동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풍보 또한 환관 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1582년에 장거정이 죽고 2년 후, 만력제는 돌변하여 '언관을 억제하고, 황제의 총명을 막았으며, 정권을 농단하고, 황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불충을 도모했다.'는 조칙을 내려 장거정을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후 가산을 몰수해 버렸으며, 장거정의 장남은 고문받다가 자결하게 하고 유족들이 굶어 죽기까지 했는데도[10]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풍보 또한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만력제가 어긋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장거정과 풍보가 둘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었음이 계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직접 교과서까지 만들어가면서 어린 만력제를 열성적으로, 또는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가르쳤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어제 학습한 경서나 역사에 관한 내용을 외우도록 시켰는데, 외운 내용이 물 흐르듯이 나오면 칭찬을 했으나, 더듬거리거나 잘못 이야기하면 분노하여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갈궜다. 특히 장거정은 재물 축재나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심취하다가는 송휘종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다.', ''황제가 그림에만 지나치게 빠지면 조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의 참화를 불러온다.' 운운하며 자제를 요구할 정도였다.
이런 장거정에 대한 어린 만력제의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했는데, 장거정이 집을 신축한다고 하자 자신의 용돈에서 1천 냥이나 뽑아서 스승께 드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장거정 개인 계좌에서만 1만 냥이나 되는 돈을 인출해서 저택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파가 비난했듯이, 장거정은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처신이 지나치게 오만하고 불손해서, 그의 행동은 만력제한테는 거의 횡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11]
그래서 장거정 사후 정적들의 고발로 인해 만력제는 장거정의 자산 조사를 명령하니, 청렴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전국 곳곳에 그의 이름으로 건립된 대저택들이 즐비했다거나 장거정의 재산이 황제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거나 할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장거정이 귀향 길에 척계광이 보내준 관군으로 자신의 가마를 호위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군대를 사적(私的)으로 이용하고, 장거정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목으로 척계광에게 면직 처분을 내렸고[12], 제대로 장거정의 일족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사실 전근대의 중국에서 황제의 권위나 권력에 대등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부정부패와는 달리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인터라 구족을 멸할 대죄 중의 대죄다. 장거정의 반대파는 '장거정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만력제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장거정은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윤·곽광과 같은 명신에 비유해 아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확실히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주군이 정치를 게을리한다는 명목으로 주군을 그 자리에서 내쫓은 신하들이다. 군주인 만력제가 이런 비유를 듣고 그러려니 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장거정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측근을 기용하고 정적들을 탄압하며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사람들의 불만이 컸는데, 그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반대파가 일거에 터졌고, 이들의 모함성 떡밥을 만력제가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장거정은 집권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황제에게 탈정[13]을 명 받고 계속 현직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의 성리학 세계에서 매우 큰 반발을 사야 했다.[14] 장거정의 일파였던 사람조차도 탈정을 취소해야 된다고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는데, 탈정 중에 치러진 만력제의 국혼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면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되지 않은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스승으로서 숨통이 막히게 만력제를 다스렸던 장거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특히 아버지 융경제가 태자의 사부로 붙여준 장거정과 융경제의 측근 환관이었던 풍보는 만력제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만 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에도 매달 3·6·9가 들어가는 날 오전에만 신하들의 상주를 받고 나머지 날은 공부를 시켰다. 거기다 이들은 자성 황태후의 후원을 받았기에 만력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들에게 기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만력제가 놀자판을 벌일라 치면 옆에 붙은 환관들이 풍보에게 이를 알리고, 풍보가 다시 이를 장거정이나 자성 황태후에게 고해서 지성 황태후가 만력제를 불러내서 이를 질책하였고 만력제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여러 번 쓰게 한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자성 황태후가 심하게 화났을 때는 "노왕(潞王)[15]을 황제 시킬 걸 그랬다." 하면서 조상들에게 석고대죄를 하여 만력제로 하여금 싹싹 빌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만력제는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만력제가 탈선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장거정이 죽고 나서야 만력제는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풍보 또한 장거정과 마찬가지로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적 이익을 많이 챙겼고, <풍보전>에 의하면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고 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적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장거정 사후 강서도 어사 이식, 절강도 감찰어사 왕국칙에 의해 탄핵당하고 남경으로 유배가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불신하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에 이후로 황제의 업무에서 손을 놓아버렸다는 해석이다.
한편으론 핑계가 아니라 만력제가 진짜 아파서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만력제는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비만이나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만력제의 유해를 조사한 결과 등이 심하게 굽었음은 사실이라고 확인되었다. 여기에 아편에 중독되어 무기력증에 걸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또는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만력제가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문화대혁명홍위병에 의해 유해가 훼손되어 이쪽으로는 더 이상 연구가 불가능하게 됐다.

4. 만력태정(萬曆怠政)과 쟁국본(爭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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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만력제는 이후 병을 핑계 삼아 '''30여 년 간 사실상 직무 수행을 거부한다'''[16][17]. 일을 하면 지는 거라 생각했는지 매일 수천 건씩 쏟아져 올라오는 상소를 방치하고, 그 위에 엎어져 잤다고 한다. 이를 본 신하들이 모여 땡볕에서 직무 복귀 데모를 벌이다 픽픽 쓰러져 나가는 이까지 속출하기도 했다. 이에 환관들이 물과 얼음, 얼린 오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황제는 쿨하게 방치했다.
만력제와 관료들의 충돌은 특히 후계 문제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활달한 성격의 후궁 정 귀비를 총애했는데, 이 때문에 정 귀비 소생인 셋째 주상순(朱常洵)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맏아들인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늦추면서 기회를 노렸다.[18] 그렇게 무려 19년이나 미루고,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태자에 책봉하니 그것이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일이다. 만력제의 어머니인 자성 황태후조차 "너 큰 아들이 20살인데 왜 태자 책봉을 안 하니?"라고 물었는데, 만력제는 "애 엄마가 궁녀 출신이라서요.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요."하고 대답했다. 문제는 자성 황태후도 융경제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이었다는 것. 그래서 만력제의 어머니는 "너 또한 일개 궁녀의 아들이란 것을 잊지 말라."하며 일갈했다고 한다. 만력제의 모후이자 황실의 제일 웃어른인 황태후까지 버럭하자 만력제도 어쩔 수 없이 주상락의 태자 책봉을 승인하게 된 것.
참고로 이 사건은 동쪽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니, 광해군의 세자 책봉 승인도 늦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장자 지지 신하들의 견제 때문이다.[19] 이것은 광해군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되고, 크게 보면 광해군의 성격이 삐뚤어지는데도 영향을 제법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임해군이 평범한 인격을 갖기만 했어도 광해군을 제치고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임해군이 워낙 개또라이 싸이코라서 신하들조차 대놓고 죽이자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나중에 선조가 뒤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더 문제가 꼬여버렸다.
여튼 이 사건을 국본의 쟁,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한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2가지 뿐이었는데, 황제가 신하들에게 굴복하거나, 황제가 유혈 사태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만력제가 둘 다 할 생각이 없었던 것. 특히 만력제는 신하들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으나, 정작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보유했다고 평해지는 명나라의 황제인만큼,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아예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지 그 대신 선택한 것이 황제로서의 업무에 대한 파업이었다. 만약 만력제가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겠으나, 애초에 그런 의지를 보여주질 못했다는 게 문제다. 좀 심하게 말해서, 진짜 태자 책봉을 마음대로 하려 했다면 어떤 사건에서든 둘 중 하나를 걸어서 날려 버리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만력제가 파업한 30년 동안 민란도 많고 혐의를 걸 만한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딱히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만력제 자신도 9살때부터 황궁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커온 인물이었기에 성리학 바깥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층과 타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리학 사회에서 장자 계승의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은 사회의 근본 질서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 그렇다면 만력제가 자신의 고집을 꺾으면 되는 일이였지만, 진짜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진 몰라도 만력제는 30년 동안이나 그러질 않았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하윤이(夏允彛)는 '귀비가 총애를 얻은 때로부터, 황상은 점차 만사를 귀찮아 했고, 조회에 임하는 것이 드물어졌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지 못하고 30년을 끌게 되는데, 장거정 사후 이를 조정의 공론을 이끌어갈 뚜렷한 리더 또한 존재하지 않아서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임금이 별로 일을 하지 않은 경우를 보면 제갈량을 비롯해 장완, 비의, 동윤등의 뛰어난 재상들이 조정을 이끌었다. 아무리 명나라의 '내각대학사'가 이전의 재상과 동등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다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장거정 이후 실권을 잡은 사람은 대학사 신시행이라는 인물로 온건파였는데, 대체로 신하들과 황제 사이에서 온건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신시행도 태자 책봉 사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신하들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고,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권력의 공백.
어쨌든 이후에도 태자의 지위는 확고하지 못했던 모양. 주상순은 복왕(福王)에 봉해졌지만 임지인 낙양으로 떠나지 않고 황궁에 남았고, 정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정 귀비 쪽에서 손을 썼는지, 주상락이 머리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20], 1615년 '정격안'이라는 태자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보, 오성 두 환관과 장차가 죽었다. 참고로 당시 복왕 주상순은 바로 전 해인 만력 42년(1614년)에야 낙양으로 이동한다. 처형 시에 만력제는 '장자를 세우는 건 고금의 법도. 태자를 모해하려는 이는 용서치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태업 사유로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사유에서든 만인지상이자 지존인 천자의 위에 오른 인물이 업무를 내팽겨쳤다는 것이 실제 역사이며, 예나 지금이나 이는 그의 사후 제국의 멸망에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목된다. 그렇게 만력제는 나라에 사르후 전투 같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개조차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닥치지 않고서 했다. 이런 막장적인 수전노 정책으로 인해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그의 몸집처럼 불어만 갔으나, 국고는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돈만 밝혀대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간신배들이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나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자기 취미와 재산 증식에만 열성을 보였다.
이때 만력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는 대신 무덤 공사 하는 것과 보물을 감상하기를 즐겼고, 여자까지 밝혀서 막장이 따로 없었다. 이 낙천적이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자금성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채 무려 궁녀 10만 명과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상상조차 힘든 차원 속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만력제는 후궁들과 목욕을 하거나 각종 연회를 즐겼으며, 나비 놀이와 반딧불 놀이를 즐겼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배에 부채를 든 궁녀들을 태우고서 자신이 연못 한 가운데서 나비를 풀어 그 나비가 부채 위에 앉으면 그 궁녀와 그날 밤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력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었다. 잉어를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면 눈물을 흘리는데 이 눈물을 받아 먹었으며, 주둥이가 긴 병 속에 고기를 넣고 여우에게 주면 먹지는 못하고 침만 흘리는데 그 여우의 침을 먹었다고 한다.[21] 그리고 정력에 좋다며 산딸기복분자를 밤마다 거의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력제는 단지 노는 것만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궁녀들과 내시들을 가죽 채찍으로 쳐서 패 죽이는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또 취미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라, 모든 환관들과 궁녀들이 벌벌 떨었다고. 특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관이나 궁녀들을 불러서 몽둥이로 또는 사람을 패 죽이는 것을 즐기며 즐거워했다.[22] 실제로 명의 신하들이 만력제 즉위년부터 1592년까지 죽은 후궁의 숫자를 계산해 본 결과, 제위 20년 동안 내시, 궁녀들 약 1천여 명이 만력제의 가죽 채찍과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다. 따져보면 1주일에 1명 꼴로 궁녀와 환관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5. 막장 행각의 결과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신이 통하지 않으며, 이익을 쫓는 소인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서로 다퉜다. 명나라는 실로 만력제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명사(明史)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고 무지막지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ㆍ태창[23]

천계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24]

강희제

여하간 30년이나 파업을 한 덕분에 많은 관리들, 심지어 재상도 황제의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고, 중급 이하의 관리 중 황제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조정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만력 34년(1607)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는 재상직을 때려쳤다. 그도 그럴게 당시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자리가 비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으며, 도찰원과 대리사는 도장마저 없었다. 재상이 다 땜빵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동림당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다.
문제는 만력제가 사직서를 처리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정기는 자기 집은 복건성으로 다시 이사해 절에 묵으면서 사직서를 5년간 152번 보냈지만, 황제는 또 묵묵부답. 동림당에선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반응까지 나오면서 더욱 모함이 심해졌고, 결국 참지 못한 이정기는 황제를 씹고 스스로 낙향해서 살다가 4년 만에 사망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제를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사형감이었으나, 만력제는 시크하게 그에게 바로 문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끝냈다. 이처럼 정부기구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경우는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만력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심지어 장엄한 국가제사의식도 불참하며 생략했고, 비슷한 귀찮은 일들은 모두 관리들이 대행하게 하였다. 제국의 정치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지만 황제는 이런 생활이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에게는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만력제의 재위기간은 특이하게도 현재까지도 사형을 유지하고 실행하는 중국 대륙에서 사형이 사라진 시기였다. 사실 만력제의 성품이 어질어서가 아니라, 명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닦아놓은 시스템은 크고 작은 나랏일 하나하나를 황제가 직접 승인해야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 황제가 국정을 내팽겨친지라 사형 집행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형을 받아야 할 중범죄자들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재판을 받지 못해서 그냥 20년 넘게 복역하다가 풀려났다.[25] 게다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으므로 투옥된 죄수들 대다수가 재판도 못 받고 죽어갔다. 거기다 사후에 무덤 건설 비용으로 재정을 또 다시 무지막지하게 까먹었다. 그의 송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이러한 양식은 무자송덕비라고 해서, 황제에 대한 칭송과 역설적인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며 동양에서는 아예 전례가 없는 양식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측천무후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를 세웠다. 무자송덕비에는 또 다른 까닭도 있는데, 명 인종 홍희제의 무덤 이후부터는 능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문도 없다. 이후 가정제가 자신의 능을 건설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신하들의 상소로 역대 황제들의 비를 전부 세우게 되었다. 당시 황제의 비문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후대 황제뿐이었는데, 가정제가 귀찮아서 스킵. 그 때문에 가정제 이전 전대 황제 7명의 비석은 모두 글자가 없는 무자비가 되었다. 후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정제의 선례를 따라 무자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만력제의 무자송덕비도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게다가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최종적으로 결재할 사람 없이 산더미처럼 밀려 신하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해져야 했으므로, 간신히 현상유지만 될 정도로 제국 내부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말년에는 만력삼대정과 사르후 전투 등의 대삽질로 제국 동북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상실한 요동 지역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태업하는 동안 명 제국이 겉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30년 동안 어떠한 제도개선이나 사회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시기 동안 장거정의 개혁정치,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인 개혁 운동이 발생하긴 하였으나, 이것도 황제가 받아들여 정치에 포함시킬 때 의미가 있는데 황제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그저 민간 차원의 운동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이 사치스럽거나 음란해서, 혹은 지나치게 잔인해서 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달리 아무것도 안 해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본인도 자기가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말년에는 스스로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말하기도 했다. 무위지치는 도가에서 이상적으로 보는 통치방식이기는 하지만 만력제는 위에서 보시다시피…이 정도면 청나라 황실 아이신기오로 씨 처지에서는, 자손만대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 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6. 막대한 낭비



6.1. 만력삼대정


임진왜란 이외에 지방의 이민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를 많이 움직였는데, 이 중 큰 3가지를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한다.
  •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묶어 만력동정(萬曆東征)으로 부르는데, 이 기간에 다른 두 정벌도 연달아 일어났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오르도스(鄂爾多斯)의 발배가 반기를 들었고,
  •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귀주(貴州)·파주(播州, 명대 사천성 지금의 구이저우성)의 세습 된 선위사(宣慰使)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켜 1600년에 진압당했다.
만력 20년(1592년) 영하 지역 몽골 출신 부총병이었던 발배(푸베이)가 아들 발승은, 수양 아들 발운 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영하의 난을 일으켰다. 발배는 몽골 달단의 장수였다. 가정 연간에 달단의 왕이 부친과 형을 죽이자 100명의 무리와 함께 영하의 명나라 군영으로 투항했다. 당시 명나라는 북방의 만리장성을 따라 군사 주둔지를 아홉 곳에 설치했다. 그곳들은 구진이라 했다. 영하는 몽골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영하진과 고원진 두곳에 설치했다. 몽골은 명나라의 숙적이었다. 명나라 황제 영종이 몽골에 참패하고 끌려가 치욕을 당한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명나라 조정은 뜻밖에도 발배가 투항하자 그를 우대했는데, 이이제이의 전법으로 몽골의 세력을 억제할 속셈이었다.
명 조정의 의도대로 발배는 전공을 쌓아 도지휘로 승진했으며 만력 연간에 이르러서는 유격 장군, 부총병 등의 직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만력 17년(1589년)에는 발배의 직책을 발승은이 세습했다. 이때 발배 부자는 몽골에서 망명한 부족들을 은밀히 규합하여 사병을 양성했고, 명군의 군기가 문란한 것을 보고 반란의 마음을 품었다. 만력 19년(1591년) 조주에 일어난 반란을 기병 3천으로 평정하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은 발배 군한테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하였다. 결국 피꺼솟한 발배는 만력 20년(1592년) 3월 마침내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한족 유동양, 허조 등과 함께 병력 4만 8천을 이끌고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발배는 하투[26]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영하 지역에 독립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반란군은 하서 지역의 47개 보를 점령하고 황하를 건너 하투 지역으로 진출하여 섬서성 전 지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고변을 접한 신종은 대신들에게 반란을 진압할 계책을 요구했다. 병부상서 석성은 황하의 제방을 일시에 터뜨려서 반란군의 핵심 근거지인 영하성 안의 반란군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하성은 황하 유역에 있기 때문에 수공 작전으로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사 매국정은 백전 노장 이성량을 영하로 보내 반란군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사중 왕덕완이 이성량의 복직을 완강히 반대했다. 너무 부패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성량이 거느리던 요동 군대의 막강한 전투력이 절실히 필요한지라 이성량 대신에 그 아들 이여송을 총병으로 임명하고 영하로 보냈다. 감숙순무, 엽몽태,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영하로 출정했다.
만력 20년(1592년) 6윌 위학증의 지휘 아래 매국정, 엽몽태, 이여송 등이 이끄는 명의 대군이 영하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영하성의 반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위학증은 한 달이 다 지나도록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종이 분노하여 위학증을 파면하고 엽몽태에게 지휘권을 넘기면서 엽몽태가 수공 작전을 펴게 했다. 엽몽태는 영하성 주위에 물샐틈 없는 긴 제방을 쌓고 난 뒤 황하의 물을 끌어들어 성안으로 쏟아지게 했다. 이여송도 하투에서 반군을 구원하러 온 몽골 기병을 물리쳤다. 성안의 반란군은 양식이 떨어지고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지만 명군은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침 기름장수 이등이라는 자가 나타나 매국정이 쓴 서찰을 각각 발승은과 유동양 허조에게 보내 이간질시켜, 발승은이 그 둘을 죽이고 명군에 투항하자 발배는 자살했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는데 실패하여[27] 병력 4만과 대포 400문을 동원해서 7개월이 걸려 겨우 진압한다. 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명은 200여만 냥을 소진했는데, 은 200만냥이면 명나라 6개월 국가 예산에 해당된다. 참고로 일조편법 이후 어림잡아 파악한 명의 1년 국가 예산이 400만냥이었다.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이냐면, 명나라 자체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단순 충치가 났을 때 치과에 빨리 가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이가 썩어서 감염되기 직전 상태까지 가서 수술 비용으로 1년 연봉의 반을 날린것과 같다'''
또한 명나라 서남 지방의 파주[28]에서 묘족의 수장이자 파주선위사 양응룡이 난을 일으켰다. 사실 명나라 역대 조정은 서남 지방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파주에 선위사를 설치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선위사의 우두머리, 선위사는 소수 민족의 족장을 임명했는데 소수민족을 회유할 목적이었다. 이때문에 파주의 선위사는 지역 족장인 양씨 일족이 대대로 세습했다. 그들이 중앙 정부를 대신해서 파주 지역의 통치를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말기까지 올라간다. 당 대력 5년(770년) 산서성 태원 출신 양단이 파주에서 할거한 이래 양씨 일족이 무려 송, 원, 명에 이르는 29대 800여 년 동안 관직을 세습하여 지역 패자로 군림했다. 융경 5년(1571년) 양응룡이 부친 양렬의 관직을 세습했다.
그런데 양응룡은 서남 지방의 명나라 관군들이 군기가 빠지고 전투 경험이 없는 약졸임을 간파하고는 그들을 멸시하며, 언젠가는 스스로 독립하여 서남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그의 저택은 왕궁을 흉내내어 호화롭게 그지없었고 심지어 수하에 환관을 두어 왕처럼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 위세를 과시했으며 다른 토호들을 억압했다. 나중에는 그가 애첩이 이간질한 말을 곧이듣고 처와 장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때문에 처숙부 장시조가 양응룡의 만행을 견디다 못해 조정에 양응룡이 저지른 행패와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양응룡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만력 27년(1599년) 귀주 순무 강동지가 도지휘사 양국주에게 관군 3천여 명을 이끌고 가서 양응룡을 토벌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양응룡은 이를 눈치채고는 묘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이르켰고 위계로 그를 토벌하러온 양국주의 관군을 삼백략으로 깊숙이 끌어들어 전멸시켰다.
양응룡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기강[29]을 공격했다. 유격 장량현이 기강성 사수를 결심했지만 이미 8만여 명이 넘는 반란군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기강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고 성안의 관군과 백성들은 모조리 살해당하며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양응룡의 반란 세력이 커지자 신종은 크게 당황했다. 마침 명군이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귀국하고 있어 그들에게 양응룡 토벌을 명령했다. 그래서 만력 28년(1600년) 호광과 천귀 총독 이화룡의 총 지휘 아래 명나라 대군 20여만 명이 8개 방면에서 출정했다.[30] 이때 조선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던 총병 유정의 군사가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토벌했다. 유정의 별명이 유대도였는데 반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였다. 반란군은 유대도가 나타낸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기 일쑤었다. 양응룡은 천혜의 요새인 누산관[31]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양군이 2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유정의 군사가 양응룡이 저항하던 누산관(지금의 귀주성 귀주시)을 함락하여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양응룡은 애첩 주씨, 하씨와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양씨 일족의 29대 800년 세습 통치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명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도 수백만 냥이 들었다.
이렇게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영하의 난 + 임진왜란 + 정유재란 +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들어간 돈이 은자 1200만 냥이 넘어가는데, 이때 명나라의 1년 전체 국가예산이 은자 400만 냥에 불과했기에 재정적자가 심각해진다. 만력삼대정뿐만 아니라 활동이 거세진 여진족, 몽골족들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32] 막기 위해서 명나라는 매년 전체 국가 예산의 3분의 2를 국방비에 퍼부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는 부활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장거정은 '''일단은 부패는 했어도 일은 멀쩡하게 처리해서 명나라가 어느 정도 돌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력제는 애초에 '''황제 본인이 일 안 한다고 파업을 해서''' 외부적으로 북로남왜 및 여러 반란군의 창궐도 문제도 문제지만, 내부적으로 부정부패나 매관매직 역시도 판을 치고 있었다.

6.1.1. 임진왜란


전쟁을 한동안 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모든 왜군은 돛을 올려 모두 돌아갔으며, 조선의 난리 또한 평정되었다. 그러나 관백이 조선(東國)을 침범한 이후, 전후(前後)로 7년, 잃은 병사가 수십 만, 수백 만 석의 군량이 소진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

명사(明史)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력제의 조서[33]

만력제가 행한 사실상 유일한 황제로서의 일.[34] 어떤 중국 학자는 명 군대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견해로 30년 휴무 만큼이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그의 낭비벽. 사실 만력제가 세금을 많이 거둔것이 문제인것은 그 세금을 마구잡이로 써서 낭비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낭비가 그냥 낭비도 아닌 것이, 전비 지출에다 무덤 공사에 자녀들 결혼 비용까지 추가되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임진왜란. 명의 영토가 아직 공격 받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까지 병력을 보내 도움을 주는 것은 강렬한 조선 보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동아시아)정벌이라는 목표를 감안하면 그 판단은 의외로 옳았다. 만력제는 단지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조선 출병을 강행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일본군의 전투력을 봤을 때는 조선에서 싸운 것이 오히려 명나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오닌의 난 이후 150여 년간 지속된 센코쿠 시대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3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원정 직전에 실시한 간토 원정(호조 우지마사 정벌)에 20만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것이 가능했던 나라는 세계에서 명과 오스만 정도밖에 없었다.[36]
게다가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 정복이었다. 조선이 정복되었다면 일본군은 병참 기지를 확보하고, 산해관을 넘을 필요도 없이 수군을 동원해 황해를 건너 중국 동해안에 상륙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내에서 전쟁이 불가피했다. 거기에 북경은 해안이나 만주와 멀지도 않다. 물론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명 정복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면 승리해도 본전도 못 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기왕 싸운다면 조선에서 싸우는 게 확실히 명에 유리한 것은 사실. 명군 참전에 따른 세력 균형은 일본이 전쟁에 주저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명군은 보급 문제와 외교로 일본군을 물리치겠다던 심유경 때문에 1593년 이후로는 잠시 남진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이었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20만의 대군을 파견해 일본군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사로병진책 참고) 또한, 병력만 파병한 것이 아니다. 조선 백성들이 수확을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산둥성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경신대기근급 참사가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37]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38]

을 우리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전주·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이 때문에 관련 야사가 꽤 많다. 만력제가 평범한 수준 이상의 황제였다면 당연한 일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평소에 일 안하고 논 인간이다보니 뒷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는 조선 사신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하기도 하고, 꿈에서 삼국지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한 바람에 '나는 유비, 선조는 장비'라고 철석같이 믿었고 군사를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의 관우 신앙이 조선으로 전래되었는데, 관우 신앙의 영향이 소설에 반영된 듯하다.
다른 야사는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수행하던 조선의 역관 홍순언에 얽힌 설이다. 그가 명나라 관원들의 접대를 받아 연경의 초호화 기방에 갔는데, 거기 접대하러 나온 기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명문가 딸인 것을 알고 가진 돈을 털어 건네 주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 기녀는 그 돈으로 기방에서 몸을 빼내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나중에 병부 상서였던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다(!). 그때 받은 고마움을 갚기 위해 석성에게 계속 조선에 출병해 달라고 졸랐고, 석성은 애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다른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파병을 주장했다는 야사.
그 덕에 훗날 청나라 만주족의 심각한 지배를 받는 중국인(한족)들에게 분노를 사는데, 정작 조선에서는 만동묘까지 만들어 칭송받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조선에서는 당파를 막론하고 상당한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와 대보단을 숙종 대에 조선 땅에서 세우게 되어 영조, 정조 대에도 제삿밥을 먹게 된다.만동묘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대보단은 국가에서 세운 것이다. 즉 당시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숭명 사상과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풍조가 있었다는 것.
나중에는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세도를 부리게 되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서원에 있는 만동묘가 바로 만력제를 모신 사당으로,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폐지되었다가 대원군 실각 후인 1874년에 복구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까지 만력제에 대한 제사가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이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파괴하고 제사를 금지하면서 명맥이 끊긴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상태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여길 여지를 차단하고, 명목상의 전통 문화의 계승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
사실 명나라군도 고의적으로 처음부터 조선 민중에 민폐를 끼치고 약탈하고 그런게 아니라 나름대로 보급선을 구축한 다음 최대한 민폐를 주지 않고[39] 병사들이 명나라에서처럼 은자를 준비해서 현지에서 사다먹으려고 했다. 특히 물자를 현지에서 구매하면 군수 부담도 줄고 지역상권에도 이득이기 때문. 하지만 문제는 당시 조선이 화폐제도가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어서 돈으로 사다 먹을 수 없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조선에서 이 양반의 제사를 계속한 것을 사대주의라며 비웃기는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면(제정신으로 했든 미쳐서 했든) 만력제의 강한 의지에 의해 조선이 도움을 받은 면도 있는게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 재조지은이라며 좋은 취급을 받은 것. 당장 임진왜란 한참 뒤인 정조 대에 왕인 정조 스스로가 이순신을 칭찬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데도[40] 서두부터 신종 황제께서 나라를 도와 구한 은혜가 크다고 시작하고 있다. 현대에 만력제를 어떻게 생각하든 당시 조선에서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는 증거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청나라의 보복성 조치를 부를 소지가 다분함에도 이미 망해 없어져 눈치 볼 것 없는 명나라의 황제를 찬양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황제인 것은 인지하고 있었는지 송시열의 경우 만력제에게 사르후 전투의 책임이 있다고 악평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한 프랑스 왕국과 일부 비슷한 면이 있다. 프랑스영국 골탕먹이려고 이 짓을 하다가 나라 재정을 말아먹었고, 미국서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배워온 병사들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 다만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식민지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프랑스 식민지들을 공격해 빼앗을 수 있었으므로 행위에 충분히 수긍은 가는 편. 무엇보다 당시 프랑스 수뇌부들은 만력제처럼 태업하고 논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세력을 몰아내면서 북미대륙에서 루이지애나를 획득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이 루이지애나는 현재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미국 중부 대부분이며, 미시간에 있는 디트로이트와 같은 프랑스어에 기원을 둔 지명에 흔적이 남아 있다. 돈만 쓰고 아무것도 못 얻은 명나라와는 전혀 다르다. 다만 루이지애나는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훗날 미국에 팔아버린다. 당시에는 사실 제대로 지도도 그려지지 않은 척박한 미개척지였다.
게다가 여기에서 만력제의 일생이 만력제가 이렇게까지 조선에 애착을 보인 이유 중 하나였다. 일찌기 만력제는 대신 장거정의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훈육방식으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이 반면 장거정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이른바 '만력중흥'이라 하여 만력제가 명군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다. 문제는 장거정이 죽은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지 장거정이 죽은 것만으로 끝났으면 만력제가 삐딱선을 타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장거정의 비자금이 어마무지하게 많이 발견되었다는 점'''이었다. 만력제는 자신에게는 그렇게나 자나깨나 청렴만 강조하던 양반이 정작 본인은 전혀 청렴하지 않고 돈에 환장한 놈으로 보였다. 여기서 만력제는 생각했다.

'장거정 정도가 이지경이니 다른 대신들은 얼마나 더 심할까?'

이에 만력제는 문무백관들에게 치를 떤 나머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그만두는, 이른바 '천자파업'이라는 전무후무한 짓을 벌였다. 그런데 이러는 동안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렇게 되어서야 만력제는 '천자파업'을 그만두고 첫 정사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는 일이었다. 만력제의 입장에서 보면 뒤가 엄청나게 구린 자신의 문무백관들보다 말이라도 잘 듣는 조선 임금이 훨씬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력제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조선 임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6.2. 그 외의 낭비


만력삼정 진압에 든 비용만큼이나 만력제의 무덤 건설 비용[41]은 엄청났다. 깊이 67 m, 총 면적 1200 m2나 되었으니. 게다가 자녀에겐 더 후했다.[42] 황태자와 황자의 책봉비와 혼인비로 930만 냥, 의복비 등으로 280만 냥, 대략 1200만 냥을 사용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에. 이쯤 되면 만력삼정은 핑계로 보인다.
태창제 때 풍부한 내탕금을 근거로 만력제 때 재정이 흑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일 뿐이었고,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그 결과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맞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황제가 일을 안 하니 이런 낭비를 막으려는 어떤 정치적 개혁이나 보완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43] 게다가 장거정부터 시작해서 당대 명나라 문무백관들은 심각하게 부패하여 백성들한테 어떻게든 뜯어먹을 궁리나 하니 궁중 유지비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광세를 효율적으로 부과하지도 못했다. 광세사들이 궁중에 바친돈이 대략 3백만 냥 정도였는데 그 외 광세사가 6백만 냥, 수행원이 9백만 냥, 광세사 휘하 깡패 무리가 1천2백만 냥을 각각 착복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매년 83% 이상 세금을 더 착취당한 셈이다. 결국 만력제의 광세는 농부들이 세금을 지불할 능력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호부가 징수하는 국가의 조세가 대폭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여기에서 병력을 풀어 광세사 휘하의 깡패들만 정리했어도 세금이 줄줄 새는 것만큼은 크게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602년 만력제가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한다.'는 어명을 내려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전날 내린 명령을 뒤엎었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자금성에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하여 중건하라는 명을 내렸다. 궁전 건축의 결과 총 930만 냥이 들었는데 당시 명나라의 2년 예산을 웃도는 금액이다.
심지어 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 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44]까지도 거부했다.

7. 말년


야사 한 토막. 만력 41년(1613) 9월의 어느 아침에, 튼튼한 말을 탄 한 이민족 여인이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 같았다고 하며, 말발굽 소리는 그의 신경을 밟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였다고 한다. 말이 뛰어오자 먼지가 일었는데 먼지가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으며 말은 멀리서 가까이 다가오다가 순식간에 만력제 앞에 나타나서 만력제가 말에 타 있는 기수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서, 손에는 긴 창을 들고 만력제를 향해서 돌격해 왔다. 만력제는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으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이었던 것이다.
만력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말년에 들어서 허약해진 몸은 아파왔다. 곁에 있는 환관은 그를 위하여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고, 그는 환관에게 명령하여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대신들은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황제와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신하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처음 보는 만력제의 용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하자, 사관은 황제의 말에 따라서 적었는데, 만력제는 신하들에게 꿈을 이야기해주고 이 꿈의 뜻을 풀이해 주라고 신하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대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기탄없이 말해 달라.

그러자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는데, 그 해석은 이러했다. 꿈 속의 이민족 여자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대명(明)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45] 그러나 만력제는 그 해몽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듣고도 계속 놀아제꼈다. 그러다가 만력 44년(1616)에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자리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 전의 꿈을 기억해 냈을지는 참 궁금한 사실이다. 자신의 꿈에 나왔던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나타났지만, 만력제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변방의 분란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고, 명나라는 망국의 길을 걸었다.
만력 47년(1619) 9월, 이부 상서 조환의 호소에 의해, 조정 백관은 문화전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부탁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게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관리들은 모두 모였으나, 오로지 황제만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냈고, 침묵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 종일 동안 황상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아서, 항의하던 관리들도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나이들고 약한 관리들은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고, 결국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파악하고는 환관을 보내서 문화문에서 자신의 뜻을 낭독하게 하는데, 그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 즉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다. 조환은 어이가 없어 만력제에게 상당히 패기있는 글을 올려서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북경 서쪽)이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서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집이 더럽게 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주는 관리들을 더욱 미워했다. 그렇게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은 만력제는,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48년이 지난 1620년, 아주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다. [46] 그는 자신이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定陵)에 묻혔다. 그의 관은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 사이에 놓였다. 묘호는 신종. 보통 딱히 업적이 없거나 한일이 없는 군주에게 묘호를 안주기도 뭐하니 어쩔 수 없이 갔다붙히는 묘호라는 걸 감안하면 나름 잘 어울린다.

8. 기타


  • 당시 만력제가 재위할 당시 대월남북조시대로 치열한 전쟁 중이었다. 여씨막씨가 대립하는 와중에 막씨가 결국 패해 우두머리 막무흡이 처형당하고 멸망 위기에 몰리자 만력제는 이 상황에 개입하여 막씨 일족에게 고평 땅에 막무흡의 4촌 막경공을 봉해 그들을 보호하였다.
  •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3남 복왕 주상순은, 명나라 말기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자 이자성 군대가 투실투실 살이 찐 그를 붙잡아 연회를 열고 사슴고기와 섞어 술안주로 삶아 먹었다. 살해당한 복왕의 몸에서 나온 기름도 술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사슴 록(鹿)'과 '복 록(祿)' 자가 발음이 같은 걸 노린 언어유희로 '이놈이 누리던 복록을 우리가 누리자'란 생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47]
  • 만력제의 묘인 정릉(定陵)[48]은 1956년 발굴된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이다.[49] 발굴 이후 저우언라이, 천이, 쑹칭링 등 중국의 고위 정치가와 호찌민 등 세계의 명사들이 두루 관람하였고 천이는 유물 보전을 위해 6만원을 따로 기부하는 등 상당한 업적으로 선전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우한이 요청한 영락제의 장릉 발굴에 대해서 금지하는 등 추가 발굴 사업은 유보하였다. 뒤의 문혁을 생각하면 이게 천운이었다.
  • 당시 정릉에서 발굴된 부장품의 일부와 만력제,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은 문화대혁명 때 봉건의 잔재로 규정되어 홍위병들에 의해 바위로 찍혀 부숴지고 불태워진다.[50] 원래 발굴 의도는, 정말 만력제가 아파서 30년간 정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때 그가 한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과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질환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유골과 부장품이 모두 불타버리면서 정확한 진상은 오늘날에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신뢰성 있고 자세한 기록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력제의 유골은 오늘날 전혀 남아 있지 않다.[51] 참고 자료, 당시 파헤쳐진 만력제의 유골 혐짤 주의, 만력제 유골1, 만력제 유골2, 만력제의 옷 그러나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아마 심각한 훼손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정릉과 같은 대형 무덤을 발굴하여 조사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능 안에 있던 유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명 황실의 비단은 탈수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며 냉동실 하나 없어서, 많은 유물들이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고 말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는 발굴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대부분 하방당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발굴대원 조기창은 발굴 보고서 작성 중인 1959년에 농장으로 하방되어 10년이나 중노동을 해야 했는데 이유는 '독가스를 살포한 죄'였다. 사실 그 독가스란 유물의 부식을 막기 위한 포르말린이었지만, 포르말린의 독한 향에 불쾌해진 공산당원들에겐 그건 알바가 아니었다. 덕분에 정릉은 지금까지 발굴 보고서가 단 한 부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 당시의 경험으로 중국 고고학계는 황릉 발굴이라고 하면 바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차라리 발굴하지 않았다면 땅에 묻힌 채 후대를 기약할 수 있었을 천금같은 유물과 학술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중국 서안 일대에 수많은 황릉이 발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 만력제의 유골이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타버려서 완벽한 연구는 못하지만, 발견 당시 상체가 눈에 띄게 심하게 구부러져 있는 등 심각한 육체적 질환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에, 사실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치를 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즉 각종 질환이 심각한 수준이라서 애초부터 나라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 복왕의 아들 주유숭명나라 멸망 후 남명 정권의 초대 황제인 홍광제가 되면서 복왕도 황제로 추존되었다. 결국 만력제가 은근히 바라던 대로 사랑하던 아들이 황제가 됐으니 소원 성취는 했는데 문제는 나라가 무너지고 북경이 황폐화되고 홍광제도 무능하여 겨우 1년 만에 청군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 만력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와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재위 기간과 겹친다.
  • 1616년 중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남경교안이 일어난다. 흔히 교안(敎案) 하면 청나라 말기 서구 세력의 유입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기부터 시작한다. 생각보다 꽤 이른 시기임에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아닌데, 이미 당나라 시대의 불교 박해 때 경교(네스토리우스파)가 꼽사리 끼어 박해당했기 때문이다.
  • 관우 신앙을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1614년 관우를 신격화하는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고 했고, 이후 청나라 순치제는 이 어려운 시호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간단화했다.
  •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이 자국 내에서는 항상 줄기차게 욕을 먹었는데, 엉뚱한 한국에서 한때 북미정상회담 관련해서 이념적으론 오히려 반대성향인 현 문재인 정권과 손발이 잘맞는 모습을 보여주니, 한국 국내에선 가끔 그를 트력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방위분단금 문제와 미국 내 코로나바이러스 등 실정을 통해 한국 내에서도 트럼프에 대한 평가가 낮아진 지금은 보기 힘든 밈이다.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웹툰 호랭총각뎐에 등장하는 명나라 황제가 만력제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5부가 끝난 후 호랭총각에게 요청만 하면 군사든 경제든 지원할 것이라고 하고, 그것 때문에 황후에게 조선 황제 납셨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기 때문.[52]
  • 베르나르 베르베르 3권 말미에서 호랑이국의 황제와 그 제국이 묘사되는데 자세히 보면 진시황과 만력제를 섞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기계로 된 황제를 세워뒀는데도 국가가 시스템에 맞게 잘돌아간다며 거대한 구심력[53]에 의해 국가가 활력을 잃고 경직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54]
  •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서 특유의 찌질하고 무능한 군주로 등장한다.
  • 불멸의 이순신 26화에서 명나라와 일본의 정세를 내레이션으로 설명할 때 옥좌에 앉아 정치에 관심없다는 표정을 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 2015년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출연했는데, 대신 중 한 명이 '조선일본과 손잡고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경고하는 와중에도, 자기가 궁녀들과 함께 갖고 놀던 사슴벌레를 보내 목을 물어뜯게 하겠다고 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다. 거기에 후궁들과 내기를 하면서 은을 퍼다주기까지…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허나 따져보면 이마저도 만력제를 미화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최소한 징비록에서의 만력제는 일을 하기는 하고, 신하들도 만나주는 데다 그 말을 충실히 따라주기까지 하기 때문. 기묘하게도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별로 없다(!). 만력제를 연기하는 배우 장태성이 전작 정도전(드라마)에선 천민 황천복을 연기했는지라, '비참한 삶을 살아간 천복이가 대국의 황제로 환생했다.'는 드립도 있었다.
  • 임진왜란 1592에서도 잠깐 잠깐 등장. 첫 화가 방영되었을 때 대신들과 탁상에 겸상하고 차담회를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CCTV판 방송을 본 후 중국 웹에서는 "엥? 만력제가 일을 하다니?"라는 충공깽스러운 반응이 나왔다.[55] 다만 이는 만력중흥을 이끌었던 초기의 만력제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 화부터는 천하에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로 묘사되지만, 임진왜란 정세에 대해서는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미디어에는 그래도 일은 하는 황제로 나오지만, 실제로 고증을 따지자면 신하들은 텅 빈 용상을 두고 자기들끼리 일을 하는 장면이 나와야 한다. 아무래도 묘사하기도 어렵고, 묘사해봤자 독자와 시청자들의 혼란만 가져오기 때문인 듯. 물론 만력제 집권기가 임진왜란 시기만 나온다면 그나마 이해는 된다.
  • 영화 동방불패가 만력제 시기로 설정되었다.
  •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도 원역사처럼 암군이면서 또한 조선황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조선 사신들과 접촉하던 중, 만력제가 경인왜란 중 조선에 지원한 물자의 양에 대해 들으면서, 이전에 생각했던 중국 정복 계획을 포기하기도 한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능력치 0/3/4의 황제로 등장해 완전한 암군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사실 상술한 것만 봐도 능력이 없었던 황제는 아니다. 다만 엄청나게 태업했던 것 뿐.

10. 가족 관계


  • 아버지: 12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 어머니: 효정장황후 이씨(孝定莊皇后 李氏)
  • 황후(아내): 효단현황후 왕씨(孝端顯皇后 王氏) - 만력제와의 사이에 딸 한명을 두었다(장녀가 황후 소생이다.)
[image]
(좌)효단현황후 왕씨 (우)만력제
  • 후궁들
    • 공각황귀비 정씨(恭恪皇貴妃 鄭氏): 만력제의 귀비, 주상순의 어머니. 손자인 주유숭의 즉위 후에 효연태황태후로 추존되었다.
    • 공순황귀비 이씨(恭順皇貴妃 李氏): 만력제의 경비, 주상영의 어머니. 손자인 주유랑의 즉위 후에 효경태황태후로 추존되었다.
    • 온숙황귀비 왕씨(溫肅皇貴妃 王氏): 만력제의 공비, 태창제의 어머니. 손자인 천계제의 즉위 후에 효정황태후로 추존되다.
    • 소비 유씨(昭妃 劉氏): 천계제 때 태비가 되어서 숭정제 때에 사망하기까지 황태후의 인장을 관리했다.
    • 이외에도 다른 후궁들이 많았다.
  • 아들
아들이 모두 8명 있었지만 요절한 이들이 많다.
  • 광종 태창제 주상락: 만력제의 장남. 효정현황후 왕씨 소생, 명나라 14대 황제가 된다.
  • 복충왕 주상순: 만력제의 3남. 공각황귀비 정씨 소생, 남명의 황제 주유숭의 아버지로, 나중에 공종으로 추존된다.
  • 계단왕 주상영(桂端王 朱常瀛): 만력제의 7남. 공순황귀비 이씨 소생, 남명의 황제 주유랑의 아버지로, 나중에 예종으로 추존된다.
장녀와 차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사망했다.

11. 둘러보기



[1] 사실 태창제는 단명해서 그렇지 즉위하자마자 황실의 재산을 풀어 농민을 구제하는 등 명군의 자질을 보여준 바 있고 천계제는 태창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후계자 교육도 받지 못한 체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가 있다. 반대로 말하면 태창제의 불안한 황권과 암살, 천계제의 무지 또한 만력제가 태자 책봉과 후계자 교육을 차일피일 미루며 태업을 일삼은 것이 원인이니 태창제와 천계제가 황제노릇을 제대로 못한것도 만력제의 책임이 크다. 사실 강희제가 이 말을 한 것도 만력제를 두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2] 이 말처럼 만력, 태창, 천계 3명의 황제는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3] 남명의 역대 황제들까지 포함해도 그렇다.[4] 전자에 속하는 사례로는 수양제, 해릉양왕, 연산군 등이 꼽힐 수 있고 후자에는 청의 도광제나 광해군 등이 속한다.[5] 재위 기간 2위는 바로 가정제 주후총. 무능한 인간 2명이 명나라 276년 역사 중에서 34%인 93년 271일을 해먹었다. [6] 반대로 말하면 명 태조 주원장이나 전반기의 명군 라인이 정치체계를 얼마나 잘 짜놓았는지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를 잘 세운 덕분에 막장인 사태를 수습하고 제국의 명맥을 이어갔다면 명나라는 개국 전반기에 국가체계를 너무나도 잘 만들어놔서 대놓고 막장인 황제를 끼고도 10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셈.[7] 즉위 당시 10세에 불과하여 친정에는 무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8] 그래서 당시에도 별명이 고려천자, 조선황제였다.[9] 밑에서도 언급되는 만력제의 생모로, 궁녀 출신이었다.[10] 황제가 구속 영장(?)을 발부하기도 전에 환관들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저택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바람에, 십수 명이나 굶어 죽었다.[11] 특히 명나라가 전제군주제인만큼 장거정의 행동 자체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행태였다.[12] 사표도 받아주지 않고 바로 파직한다. 문제는 이때는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라서 장수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이런 결정을 내렸던것이다. 심지어 몽골군한테 명군이 깨지는 걸 보다 못한 하남도 어사 부광택이 척계광 좀 다시 불러 달라고 애원했으나 오히려 부광택의 2달치 월급을 빼앗았다.[13] 군주가 신하의 3년상을 제하고 벼슬을 계속하게 하는 것.[14] 명나라에서는 대부분 신하들이 탈정 명령을 조용히 거부하고 고향에 물러나 3년상을 지냈다. 황제도 신하가 당연히 거절하고 3년 상을 지내러 갈 것을 알기에 훌륭한 신하에게 "너는 정말 능력있는 신하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겉보기식 명령이다. 그러니 당연히 탈정이 순수한 만력제 본인의 뜻이라고 보는 사람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15] 자성 황태후의 차남이며 만력제의 동복 동생인 주익류(朱翊鏐)를 말한다.[16] 이를 만력태정(萬曆怠政)이라 한다.[17] 핑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고 논란이 많다.[18] 예법을 무시해도 인품이나 재능 면에서도 주상락이 주상순에 비해서 월등히 유능했다.[19] 무슨 말이냐면, 명나라 신료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 요청을 인정할 경우, 당연히 만력제가 '장남이 아닌 조선 왕자의 세자 책봉은 인정하면서 왜 내 셋째 아들 주상순의 태자 책봉은 안돼?'라고 할 게 뻔하기 때문.[20] 하도 어이없는 사건인데다가 태자가 최대 수혜자였기에 동림당과 태자 측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방종철의 대처 역시 어이없긴 마찬가지.[21] 그런데 여우의 침은 호연법(狐涎法)이라 해서 고독#s-2의 재료였다. 여우의 군침은 동양에서 상당히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정력을 위해 먹었다는 것은…[22] 사실 이건 사디즘으로 보기도 어렵다. 사디즘, BDSM/오해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무분별한 가학을 한다고 다 사디즘이 아니다.[23] 재위기간이 심하게 짧아서 그렇지 암군은 아니었다. 쇠퇴기의 임금이었다는 까닭으로 나머지 둘과 같이 책임을 추궁받자니 태창제는 아무래도 억울한 감이 있다. 다만 전제군주제에서는 군주가 바뀌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치적 혼란을 가져오기 쉽고, 바뀌는 사이클이 짧으면 짧을수록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만 끼치는 암군이 아닌 이상 군주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오래 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난한 군주가 29년 집권하는 것과 유능한 군주가 29일(태창제 즉위기간)마다 갈리는 것, 어느 쪽이 국가가 평화로울지를 생각해보면... 일각에서는 태창제의 죽음이 명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을 두고, 황제가 암살당할 정도로 황실관리, 즉 권력이 중추에 있는 인간들의 관리를 똑바로 못했음을 비판하는 의도가 아니었겠냐는 해석도 있다. 즉위하자마자 선대에 결원되었던 관리들도 충원하였고, 국고를 열어 빈민구제 및 군대 보급품을 챙겨서 보내는 등 비록 1개월만 재직했지만 이런 조치만으로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황제가 왔다는 반응이었다.[24] 위의 황제들은 명말 3대 의안으로 묶여 명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손꼽힌다.[25] 명나라에서 준용한 대명률에 따르면 죄가 정해지지 않고 20년이 지나면 사면하고 석방 조치하였다.[26] 지금의 내몽고 서부와 영하[27] 특히 변방의 요새인 중위(中衛), 광무(廣武), 옥천영(玉泉營), 영주(靈州)가 발배의 반군에게 함락당했다.[28] 지금의 구이저우성 쭌이[29] 지금의 사천성 중경시 남부[30] 특히 이때 만력제는 군비가 모자라다는 말에 자신의 내탕금을 풀어서 군비를 지원해주었다.[31] 지금의 귀주성 귀주시[32] 대부분은 지배층의 착취와 횡포, 갈수록 무거워지는 세금을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런 민란에 농민뿐만 아니라 유랑민과 제때 급여를 받지 못해 탈영한 병사들, 도적 집단까지 가세하여 세력을 갖춘 반란군이 되자 '민란 따위'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33] 텍스트 출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0일 정묘 4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34] 도움을 받은 조선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에 병력을 보낸 덕에 전쟁이 명나라까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만 밑에도 있듯이 명나라 입장에서도 (지리적으로 조선이 일본과 명의 완충지대라) 조선에 병력을 파병함이 이익이므로 굳이 만력제가 아니라 다른 유능한 황제였어도 명나라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35] 임진왜란 300년 전인 1270년 ~ 1280년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 일본군은, 몽골군이나 고려군에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후진국이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무가(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씨족이 거느린 사병으로 수백 ~ 수천 명 규모의 전투 수준에서 고립되어 외부의 적과 전혀 싸운 적이 없는 섬나라 육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난세의 도래와 신무기 조총의 도입으로 군소영주가 몰락하고 대영주만 살아남으면서 수만 명 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육전의 실력이 향상된 것이다.[36] 절대 왕정이 확립되지 않은 당시의 유럽 국가들도 이 정도 동원은 불가능했다. 임진왜란보다 조금 뒤에 벌어진 유럽의 30년 전쟁(1618년 - 1648년)에서 가장 많이 병력을 투입한 합스부르크군(스페인 + 오스트리아)이 30만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스웨덴군프랑스군이 각각 15만 정도를 동원했다.[37] 다만 경신대기근은 과장된 측면도 있는데 경신대기근 시기의 참혹함을 언급할 때, 임진왜란을 겪어봤던 노인들이 "임진년 병화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언급하나 경신대기근은 왜란 끝난지 70년도 더 지난뒤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수명을 생각하면 임진왜란을 겪고 경신대기근 시절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 드는데 따라서 저 기록은 신빙성이 의심되며 애초에 만력제는 무상으로 준것도 아니라서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또한 임진왜란의 조선인 사상자가 최소 18만명~최대 1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최대치로 볼 경우 전근대 전쟁은 주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다는걸 감안하면 조선이 정말 만력제 덕분에 경신대기근급 참사를 버텨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38] 100만석이라는 말은없고 1592~3년 40만석그이후로 계속해서 명나라의 양식을 가져왔다는 기록과 1596년 10개창고에서 16만석 병사가많아 모자르다면 회안과 등,래의 곡식30만석을 주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걸 합쳐도 최소 70만 석이다.[39] 특히 조선에 파견된 명군 사령관 송응창은 장수들한테 조선인들에게 약탈, 강간, 살인 등을 저지른 병사들은 참수형에 처하라고 지시했다.[40] 정조는 매우 강렬한 이순신 지지자였다. 이순신의 전공을 높게 평가하고 큰 관심을 보이며 이순신의 관직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41] 800여만 냥, 명나라 국가예산의 2년분에 해당한다.[42] 본인이 장거정에게 거의 학대라고 봐도 무방한 훈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해서 자녀들에게 관대했으며 아주 돈을 퍼발랐다.[43] 심지어는 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를 물렸다.[44] 황제 개인이 가난했으면, 신하들이 이런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만력제 개인 재산이 명나라 국가 예산을 웃돌았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인지했기에 이런 의견이 나올 수 있었다.[45] '여진(女眞)'에는 여자 '녀(女)'가 들어 있다. 오랑캐 여인이 꿈에 나온 게 우연이 아니었던 것.[46] 그리고 24년이 지난 1644년, 꿈의 해몽대로 청나라가 명나라의 강산을 빼앗았다. 공교롭게도 이 해가 만력제 탄생 80주년을 갓 넘긴 시점이기도 하다.[47] 사실 복왕 주상순은 탐학질이 심했기에, 이자성이 그를 생포해서 백성들 앞에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묻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씹어먹을 기세로 '죽이라.'는 말만 했다. 주상순이 끔살되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탐학질이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48] 명 13릉에 가면 흔히 지하 궁전이라는 곳을 가는데, 그 지하 궁전이 바로 정릉이다.[49] 후일 그가 쓴 희곡이 바로 해서파관. 그리고 이 희곡은 해서파관 사건으로 비화되어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우한도 체포되어 옥사한다.[50] 그날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재도 사라졌다.[51] 머리카락의 일부만 남아 있다.[52]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정덕제와 많이 닮아있다. 황궁에 동물원을 만들거나 궁궐이 아닌 정원 인근에 천막을 치고 산다거나 황제 스스로 1인2역 놀이를 하는건 죄다 정덕제가 하던 행동이다.[53] 다만 책에서 의미하는 구심력 - 원심력의 관계와 실제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자세한건 구심력 항목 참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구심력 항목에 적혀있는 원심력 ↔ 구심력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추측된다.[54] 행정학적으로 해석하면 과도한 관료주의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것이 레드 테이프 현상과 무사안일주의로 흘러간 것으로 해석된다.[55] 상술한 바와 같이 만력제는 신료들이 그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다.

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