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조선)

 



이름
김성일(金誠一 )

사순(士純)

학봉(鶴峰)
출생
1538년(중종 32년) 조선 경상도 안동도호부
사망
1593년 조선 경상도 진주[1]
본관
의성 김씨
1. 소개
2. 일생
2.1. 강직한 관료
2.2. 전쟁의 전야
2.3. 임진왜란 발발 후
2.4. 김성일의 사망 관련
3. 여담
4. 김성일의 안경
5. 평가
5.1. 일본의 평가
5.2. 현재의 평가
6. 등장 매체
7. 관련 문서
8. 참고 문헌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류성룡과 함께 임진왜란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2. 일생



2.1. 강직한 관료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희릉(禧陵)[2]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년)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 좌랑·이조 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심지어 선조에게도 직설적으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선조가 하루는 "내가 중국사로 치자면 어느 왕과 맞먹을까?" 라고 자화자찬을 하며 넌지시 '중국 역대 명군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암시하자, 김성일은 주저없이 "학문에서는 명군인 요임금과 같사오나 '''정치로 보자면 폭군주왕 같사옵니다'''."라고 깠다.[3] 당연히 선조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다른 대신들이 "그래도 요왕과 같이 잘하시는 게 있사오니, 그 쪽으로 신경써 달라는 충언입니다."라고 아첨(?)하며 분노를 잠재웠다.[4]
1579년 함경도 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 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전라도 나주 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5]
경연장에서 이이와 다투…었다기 보단 이이의 발언에 분노한 적이 있는데, 이이가 이황의 학문이 훌륭함을 칭찬한 후에 "다만 정신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자 분노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김성일 입장에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인 이황을 비판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긴 힘들었을 터. 이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이는 누구의 제자도 아닌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당대의 거유(巨儒)들을 비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성격 자체도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고치려 했다. 문제는 이 시대의 흐름이 무조건 스승님을 따르고 있어야 했던 시대였던지라…[6]

2.2. 전쟁의 전야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7] 등과 일본과의 통호 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이었다. 1591년 음력 2월 부산으로 귀국하여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류성룡과 김성일의 이 문답은 류성룡의 저서 징비록에서 등장한다. 당시 류성룡 본인도 김성일의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전쟁 이후 이에 대한 정치적 공세에 대해 해명하고자 징비록에 넣은 것으로 추정한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같은 대화가 수록되어 있는데[8], 선조수정실록이 사초의 미비로 징비록을 포함한 민간의 서적을 참고 자료로 삼았다는 점에서 징비록이 출처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서장관 허성[9], 황진,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하여 배척하여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일 등의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언 때문에 후일 서인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김성일은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 해명은 의심스럽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남의 사대부들은 집단으로 반대 움직임을 보였고, 김성일 역시 이에 호응하여 "전쟁 준비는 그만두고 내치에 힘쓰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남의 사대부들에 대한 김성일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김성일은 민심을 다독이는 게 아니라 전쟁 준비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는 쪽이었다. 흔히 전쟁 준비 때문에 민심이 동요되었다고 하지만, 그 동요된 민심의 주체는 사대부들이었다.
김성일이 이런 오판을 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김성일이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예방했을 당시 히데요시는 외교 회담장에 멋대로 어린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데려오는 등 대단히 무례한 짓을 했고, 국서도 허무맹랑한 내용과 형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일본 정부에서 조선을 일부러 자극시키고 그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내심을 숨기고 계획한 행동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히데요시 본인의 편협한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니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일본을 장악한 실권자라면서 외교의 개념조차 모르는 허풍선이에 불과하다. 이런 자가 침략을 행한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성일은 일본의 국력이나 전쟁 준비 및 히데요시의 의도 등에 대한 통찰은 도외시하고 단순히 유교적 예법에 따른 인성 평가만을 하고 온 셈이다. 또한 이 해석이 옳다면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랬다"는 변명은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다.
실록에서 선조는 김성일에 대해 드물지만 드문드문 발언했는데, 선조는 "나는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싶었는데, 김성일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반대하여 훼방을 놓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성일은 당초에 웅천(熊川)을 지켰는데, 적의 예봉이 몰려와 그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무장과 군졸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발사하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꼼짝 않고 앉아서 군관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한 왜졸을 죽이니, 적이 조금 물러나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성일이 있었더라면 진주(晉州)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정경세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진주가 보전될 수 있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창의독전(倡義督戰)하기로는 김성일만한 자가 없습니다. 그의 초모격서(招募檄書)를 보면, 충의가 분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성일이 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자,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성일은 적정(賊情)을 분명히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윤길(黃允吉)은 매우 걱정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간웅(奸雄)이고 평행장(平行長)은 박실(朴實)한데 싸울 때마다 꼭 이기니, 가장 염려된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이다. 성일은 속임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6일 기유 1번째 기사>

지난 임진년에는 김성일(金誠一) 등이 사설(邪說)을 주창(主唱)하여 "왜노는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내가 너무 염려한다고 비난하면서, 변방의 방비에 뜻을 둔 자를 서로 배척하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보내자는 것을 파기하기까지 하였다.

<선조실록 134권, 선조 34년 2월 16일 을유 2번째 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이 계사(啓辭) 등을 비변사에 말하여 의계하도록 하라. 김성일은 추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에 이미 말하였거니와, 설령 혹 증직하더라도 서서히 의논하여도 늦지 않다."

<선조실록 70권, 선조 28년 12월 28일 병인 1번째 기사>

상은 ‘성일은 타고난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 하고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사면하여 그 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았으며 다시 감사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27일 계축 3번째 기사>

김성일(金誠一)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당시 조대곤(曺大坤)이 노병(老病)으로 체직되자 특지(特旨)로 김성일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성일은 항상 말하기를 ‘왜노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장계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道內)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 하였으므로, 상이 이 때문에 성일이 논한 것을 곧지 못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런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비변사가 ‘성일은 유신(儒臣)이라서 이러한 때에 변방 장수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3월 3일 갑자 2번째 기사>
위의 두 기사에 따르면 선조가 김성일을 국문하려다가 멈추고 특지를 내려 경상 우병사로 임명해 경상도로 내려보낸다. 김성일이 경상 우병사에 임명된 시점은 임진왜란이 터진 바로 직후였으므로, 당시 경상도는 일본이 점령한 상태였다. 따라서 경상 우병사는 최전선의 아주 위험한 직책이었다. 또한 김성일을 내려보낼 때 자금도 병사도 없는 상태로 달랑 직책만 내려서 파견했는데, 따라서 김성일은 왜군의 소굴인 경상도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보급을 자체 조달하면서 왜군과 싸우게 된 것이었다.
위의 기사는 경상 우병사라는 직책이 김성일의 실언에 대한 선조의 문책성 임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즉 선조가 김성일을 국문하는 대신 사실상 사지로 내려보낸 선택을 한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외로 김성일은 해당 임무를 달게 받고 잘 수행한다. 김성일 또한 본인의 과거 발언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이 비변사에 하교하였다.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수정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일 경오 1번째 기사>

2.3. 임진왜란 발발 후


[image]
김성일이 전장에서 지휘할 때 이용하던 철퇴의 복제품. 진품은 의성 김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섬세하게 상감된, 예술성으로도 뛰어난 유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경상도 우병사에 임명되었으나 왜란이 발발한 후 파직되었다. 그러나 류성룡의 변호로 이후 경상도 지역을 수습하기 위해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되어 곽재우 등 경상도 의병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김성일은 자신이 학문에만 능한게 아니라 빼어난 실무관료임을 보여준다.
'''의병장들에 대해 물자와 병력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지 지방관과 의병장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 의병장들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대립을 중재해, 의병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4월 22일 군사 50여명으로 의병장으로의 첫 발을 뗀 곽재우의령 초계의 관곡과 강가에 버려진 조운선에서 세곡을 군량으로 쓰려고 가져갔다 관에 찍혀서 군사들이 거진 이탈해 의병활동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5월 8일 함양에 도착해 곽재우의 일을 전해들은 김성일은 즉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에게 통유문을 발급해 곽재우의 의병활동을 공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삼가[10]의 의병장 윤탁에게 명령을 내려 곽재우 군에 합류하게 하니 50명으로 시작한 곽재우 의병대는 2천여명 규모로 급성장한다. 경상 감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에는 "곽재우의 말이 거칠기는 하나 김수의 잘못도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곽재우가 처벌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쉽게 말해, 김성일의 시기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없었다. 왜군진주성을 공격할 것이란 첩보가 들어오자 전라도 의병까지 원군으로 요청하는 등 방어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 김시민에게 병사한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도록 명했다. 이는 진주대첩의 기반이 된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도 적극적이어서, 도에 징발령을 내리고 바친 곡식의 양에 따라 벼슬을 내리고 면천을 시켰다. 양식을 내놓지 않는 부호들은 잡아다가 볼기를 치고 일장 훈시를 한 다음, 강제로 징수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덕분에 경상도는 남부 지역이 왜군에 점령되고 가장 먼저 전화에 휘말렸으면서도, 임진년 내내 관군과 의병의 공조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전쟁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쟁 2년째인 1593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후손들이 그의 글을 모은 <학봉집>이 있다.

2.4. 김성일의 사망 관련


김성일이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진행 중이던 시기에 병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에 시작했고, 김성일의 졸기는 선조실록에서는 4월 29일[11], 선조수정실록에서는 4월 1일에 기록되어 있다. 시기 차이가 이상하게 많이 나기는 한데, 선전관 이춘영의 장계에 따르면 4월 29일에 죽은 것이 재확인 되기 때문에 4월 29일로 봐야할 듯하다[12]. 어느 쪽이건 진주성 전투와는 1개월 이상의 시간 차이가 난다.
참고로 조카 류복립에게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라는 유언을 남기었다고 한다.
김성일의 사망 시기를 제2차 진주성 전투 도중으로 보는 것은 선조수정실록 중 김성일 졸기 중에서

일로의 군사와 백성들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라는 내용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선조수정실록이 뒤에 편찬되면서, 사관 기준으로 시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성일과 함께 연이어 죽었다는 내용이 있는 김면만 해도 음력 3월 11일에 죽었으니 김성일과 다시 1개월 차이가 난다. 즉, 1개월 정도의 시간 차이는 당대 사관들은 신경을 안 쓴 것이다.
유성룡징비록에서 김성일의 사망을 2차 진주성 전투의 패전 요인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워낙에 왜군이 작정한 전투라서 김성일이 있었다고 해도 패전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배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김성일은 1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에 머물면서 성벽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김성일과 김면이 연이어 죽으면서 진주성 인근에 머물던 경상도 의병병력이 대폭 감소한다.

김면과 김성일이 잇따라 죽으니 집합된 군병들이 많이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다. 한효순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군정이 김성일에 미치지 못했다. 최경회가 거느린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도 굶주리고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서로 잇따랐다

선조수정실록

실록에 언급된 최경회는 원래 의병장 출신으로 관군으로 포함되면서 경상우병사라는 직책을 달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그가 이끌고 입성했다는 병력은 300, 전사자는 420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진주성 전투 총병력이 1만이 안되는 것으로 추정되니 병력규모 자체가 감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지휘권 관련이다. 진주성 전투 시기 조선군의 지휘권은 진주목사 서예원과 창의사 김천일의 대립구도가 컸다. 김천일은 심지어 서예원이 제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주목사직을 의병 부장이었던 장윤에게 임의로 주기도 했다. 그나마도 원래 무관인 충청병사 황진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를 중심으로 수성이 이뤄졌지만, 황진이 6월 28일 전사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서 29일에 진주성이 바로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유성룡은 진주성 전투의 패전을 지휘권의 분열로 봤기 때문에, 김성일의 죽음을 아쉬워 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전라도 의병 관련해서는 정말 자주 벌어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왜군이 너무 많았다는 것 때문에 그냥 김천일을 비판하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느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3. 여담


사후 그와 동문이었던 류성룡 중 누구를 더 높여야 하는지를 두고 약 400년 동안 후손들이 대립한 사건이 있는데 이를 병호시비라고 한다. 이에 대해선 류성룡 문서 참조. 생전에 김성일과 류성룡은 서로를 동문으로 존중했다.
후손 중에는 독립운동에 힘쓴 김용환이 있다.

4. 김성일의 안경


[image]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안경은 김성일이 지니고 있던 것이다. 이는 1984년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그의 14대손이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것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김성일의 안경은 끈으로 꿰어 귀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거북이의 등껍데기로 만들어 졌으며 접었다 폈다할 수 있는 정교한 경첩이 달려있는게 특징이다.

5. 평가



5.1. 일본의 평가


에도 막부 시절 일본에 넘어간 조선 문헌은 징비록이 대표적이었는데 17세기 들어서 김성일의 <학봉선생문집>과 <해사록>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김성일의 여러 저작을 번역한 쓰시마 번의 가신인 마쓰라 마사타다는 1725년에 쓴 조선통교대기 9권에서 김성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저들은(김성일) 우리 주(州)를 그들의 번신(藩臣)과 같이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저들을 접대할 때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저들은 “이는 저들이 교만하여 우리를 저들 아래에 두려는 것이다.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는 말을 듣게 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미 이러한 의심이 있었으니 끝끝내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와 일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떤 일에 임하여서는 특히 우리가 하는 말에 어긋나게 마음대로 해서 우리에게 위엄을 보여 교만한 기세를 굴복시키려 했다. 이후 (일본에 오는) 통신사는 모두 이러한 생각을 하기에, 우리가 이에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대저 성일의 사람됨은 지나치게 거만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으므로 사정에 어두웠다. 중봉 조헌의 사람됨과 백중(伯仲)을 이룬다.[13]

<은봉야사별록>에서 임진년의 일로 그 나라를 잘못되게 한 죄는 오로지 성일에게 있다 고 한 것이 전적으로 거짓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강압적 자세를 보인 김성일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마쓰라는 "우리 나라의 위세를 빌어 저들을 멸시하는 일 없이 오로지 양국의 화호와 생민의 안도(兩國和好 生民安堵)를 꾀하여 성신으로 교섭하는 결실이 있게 함에, 힘껏 마음을 다하 여 양국 간을 주선하면 저들이 어찌 진실로 기뻐하며 심복하여 우리와 의논하니 무사함이 없을까 걱정하는 일이 있을 것인가. 무릇 두 나라의 일은 모 두 이로써 미루어 생각할 것이다."란 말도 남김으로써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에게 위세로 압박하는 일 또한 있어선 안될 것"이라고 덧붙이는 등, 여러모로 조선과 일본을 조율하던 쓰시마인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외에 17세기의 일본 문헌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세를 무서워한 조선이 세 사람의 '내조사'를 보냈다는 식으로 언급함으로 김성일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역시 일본에서 대유행한 명나라의 제갈원성이 지은 <양조평양록>은 명나라 군대를 띄워주기 위해 조선을 워낙 깔아뭉개서, <양조평양록>을 참고했던 일본의 저작들은 김성일에 대해 "조선이 투항하기 위해 보낸 대인 중 한 사람" 정도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징비록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여러 가필 작업을 통해 김성일이 충신이었음을 강조한 바가 있는데 징비록의 일본 유행으로 인하여 충신 김성일 이미지는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1705년 교토에서 나온 <조선태평기>는 5권, <고니시 유키나가와 김성일이 싸우다. 성일이 우도 초유사가 되다> 편에서 김성일을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직 국사만 걱정하여 그 충절을 잃지 않는 진정한 충신"이라는 평가를 옮김으로써, 김성일에 대해 높이 평가하게 된다.

5.2. 현재의 평가


영남학파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성일은 조목, 류성룡, 정구와 함께 퇴계 문하 4고제의 한 사람으로 인식됨으로써 영남학파(퇴계학파) 내에서는 학통상의 지위가 매우 확고했다. 김성일을 퇴계학파의 적통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사림계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 김학수, 한일관계 사학회, 2012년.

"무조건 반대해야지!" 이게 붕당의 변질이에요.

-설민석.

위는 학계의 평가고 밑의 대중의 평가라고 보면 되겠다. 학계에서도 학문적인 업적에 대해 쳐주는 것이지, 왜란 대비에 대한 면죄부를 준게 아니다. 그러나 김성일의 후손들은 김성일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황의 애제자로 학계에선 영남 지역의 퇴계 학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건만 대중에게 있어서는 "임진왜란 때 졸렬한 당리를 위하여 거짓 보고를 올린 간신, 소인배"로 오랫동안 매도되어 왔다. 수많은 위인전, 학습 만화에서 동인의 이익을 위해 거짓 보고를 올리는 간사한 김성일의 이미지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었고, 현대에도 대중적으로 김성일의 나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희진은 <징비록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김성일을 시종일관 비겁한 인물로 묘사하며 임진왜란 발발 후 초유사로 임명되어 각오를 하는 순간도 옆에서 보는 사람이 '저걸로 후세엔 강직한 인간인 것처럼 포장하겠구나.' 생각하는 장면을 넣어 노골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책이 끝나기 때문에 김성일이 전쟁 중 세운 공로는 자연스럽게 안 나온다. 서강대학교 계승범 교수가 내놓은 책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선 김성일을 대놓고 효수감이라 비난하는가 하면, 어쩌다 어른에 등장한 설민석은 김성일을 "서인이 '일본이 쳐들어온다'고 했으니,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해 '일본이 안 쳐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소인배"로 묘사했다. 관련 링크들. 그나마 설민석은 1년 후의 강의에서 김성일에 대해서 "민심 혼란을 막기 위해 그런 보고를 한 것이었다", "이후 의병을 도왔다" 등의 얘기를 언급하면서 김성일에 대한 평가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선조 임금과 김성일에게도 다소 억울한 부분은 있다는 관점이 있다. 전쟁 준비를 안 했다는 주장부터가 틀린 게, 조선은 '''니탕개의 난 이래 계속 준전시 상태'''로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에 맞춰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 시기의 삼포왜란, 명종 임금 대의 을묘왜변 등 2차례의 왜군 소요를 겪어본 조정에서는 10,000명 이상의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 우도에 전선(戰船)을 집중 배치해 경상 우수사 원균의 지휘 하에 '''유사시 전선 80척 ~ 100척을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준비까지 갖춰놓은 상태였다. 임란 9년 전(1583년) 전국을 준전시 상태로 몰아넣은 북방 니탕개의 난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선조 임금이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도, 이런 복안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예상을 훨씬 벗어난 대규모 왜군의 침범과 조총의 편의성[14], 제승방략과 같은 군사적 문제점과 장수들의 자질과 실책 등이 왜란 초 연전연패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조선은 전쟁의 규모를 니탕개의 난 규모로만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거기에 맞춰서 준비하면 되었던 것이지, 그 이상의 전쟁 준비를 할 이유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반박도 있는데, 사실 김성일이 통신사로 방문해서 본 일본은 갓 전국통일을 끝내고 관백이 된 히데요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궁궐을 짓는 등 토목공사를 한창 진행 중인 등 제정신이라면 대규모 전쟁을 벌일 나라가 아니었다. 누가 '''중상을 입고 갓 퇴원해서 재활 중인 격투기 선수가 붕대 풀고 바로 복귀 시합에 나가리라 생각하겠는가.'''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대중들 중에서도 "전쟁은 없다"라는 주장만 아는 이들은 김성일을 '''무능한 정치꾼''' 따위로 취급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정말 열심히 발품을 팔고 뛰어다니면서 의병들을 지원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실수는 했지만 그걸 고칠 능력도 있고 양심도 있었던 A급 행정관료이자 S급 유학자'''"로 평가한다.

6. 등장 매체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박철호가 연기했다. 통신사 부사로 갔을 당시의 강직한 모습을 묘사[15]하고, 황윤길의 보고에도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것으로 그리는 등[16] 강직한 선비의 모습으로 나와 처음으로 김성일의 진면목을 묘사하는 듯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후 초유사로 임명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등장하지 않고, 그가 크게 기여한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을 중재한 것도 주인공 류성룡의 공으로 넘어가고 진주대첩에 기여한 바도 안 나오는 등, 중요한 전쟁 중 행적이 그냥 생략되어 버렸다.
그외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이 나오는 서적, 영화, 만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언급된다.

7. 관련 문서



8. 참고 문헌


  • 임란기 학봉 김성일의 구국 활동, 최효식, 동국대학교, 2004년.
  • 학봉 김성일과 안동 지역의 퇴계 학맥, 권오영, 경북대학교, 2000년.
  • 학봉 김성일의 삶과 시, 여운필, 학술 저널, 2002년.
  • 근세 일본의 김성일 인식에 대하여, 김시덕, 경상대학교, 2014년.
  • 임진왜란 발발기의 관군과 의병 -당파적 인식의 청산을 위하여-, 이태진, 경상대학교, 2014년.
  • 조선 후기 향전을 통해 본 양반층의 친족, 혼인 : 안동의 병호시비를 중심으로, 한상우, 성균관대학교, 2013년.
  • 조선 후기 사림계의 김성일에 대한 인식과 평가, 김학수, 한일관계 사학회, 2012년.
[1] 제2차 진주성 전투때 병사하였다.[2] 인종의 어머니이자,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의 능[3] 넌지시 까긴 했지만 한마디로 "왕이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 너는 주왕같으니 왕 때려쳐라, 학문만 잘하면 학자가 되어야지. 왕 노릇은 뭐하러 하냐?"라고 엄청나게 깐 말이다. 물론 좀 충성심 어린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면 "전하께선 요 임금처럼 많이 배우셨는데 주왕처럼 실천하십니다.!"(=배운 대로 하십시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진짜 전자의 의미였다면 거의 역모에 준하는 행위였던지라 선조가 이놈의 목을 쳐라 라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전자의 의미는 양위선양을 요구하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4] 참고로 류성룡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선조가 "내가 요순 같은가, 걸주 같은가?" 라고 했는데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문제는 요순은 좋은 의미인데 걸주는 나쁜 의미인지라 선조의 표정이 일그러졌는데 류성룡이 "둘 다 맞다"면서 "요순이라 함은 '전하께서 요순처럼 잘 하고 계신다'고 하는 말이고, 걸주라고 함은 '걸주처럼 되지 말라고 경계해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둘러댔다.[5] 참고로 김여물이 누구냐면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밑에 있던 인물이자(이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된다.)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중 투톱인 김류이귀 중에서 김류의 아버지다.''' [6] 이이첨의 스승은 정인홍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이첨은 독학 출신이다. 그런데 학맥이 없으면 안 되다 보니 정인홍에게 제자 되기를 청해 제자가 된 것이다. 다행히도(?) 정인홍은 곁다리 들어온 셈인 이이첨을 꽤 마음에 들어했고, 광해군이 이이첨을 총애하고 본인도 왕 비위를 맞춰서 이이첨의 입지가 커졌는데 인조반정으로 몰락 크리.[7] 혹은 平義智라고도 불림[8] 선조수정실록 권25, 선조 24년 3월 1일(정유) 3번째 기사[9] 허균의 형으로써 이 사람은 동인이었음에도 황윤길과 같은 주장을 했다.[10]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지역[11] 그외에 5월 15일에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졸기가 2번 등장하는 기괴한 사례.[12] 선조수정실록은 기록이 애매하면 그 달 1일에 몰아서 기록을 적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 경과 보고가 6월 1일자에 적혀 있다.[13] 여담으로 조선통교대기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반응을 보인 조헌에 대해서 "망령된 자"라고 비판하고 있다.[14] 이전에는 화력이라고 적혀있었지만, 기실 화력 면에선 조선이 더 강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총은 화력보다는 편의성이 뛰어난 무기였고, 비교 대상도 개인 원거리 무기인 활이지 최소 2~3인 이상이 붙어야 하는 화포나 화차가 아니다. 게다가 당시 왜군은 전국 시대를 거쳐 사람 잡는 데에는 이골이 난 병사를 갖추고 있었고, 조선군은 오랜 평화로 실전감각이 떨어지는 병사가 상당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대체로 왜군을 얕보고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15] 가토 기요마사가 일부러 조선 사신단을 조롱하고 위협할 겸 칼춤을 추어 대부분의 사신단 일원이 질색이 되었으나, 김성일 홀로 이에 격분해 "이게 무슨 짓이냐"며 크게 호통을 쳤다.[16] 징비록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류성룡과의 대화를 잘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