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원(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도원이 언제 태어났으며 가계가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출생지가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월곡동이었다는 것은 기록에 남아 있으며, 학계는 그가 태어난 연도를 1895년으로 추정한다. 김도원은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고 만주 철령육영학당(鐵嶺育英學堂)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김도원은 이규, 강희, 이동주, 조동식 등이 안도현 내도산에 수립한 정의군정사(正義軍政司)에 가담해 출납 과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여름에는 김동식, 백운기, 박초식, 김중량 등이 중심이 되어 의주군 월화면에 있는 동암산에서 조직한 보합단에 가담했다.
김도원은 보합단 조직원으로서 단원 모집, 일제 앞잡이 처단, 군자금 모금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해 10월, 철산에 사는 정덕인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했고, 뒤이어 박초식, 이광세 등과 함께 최형렬, 전석원, 전윤영, 정창학 등으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10월엔 무장계획단원인 조상백과 제휴하여 군자금 모금을 결의하고, 김동식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은 후 이광세와 같이 상경하여 무장계획 책임자인 이종영을 만나 군자금 모금 계획을 협의했다.
1920년 12월 4일, 김도원은 이광세, 이종영, 조상백 등과 함께 운니동에 사는 부호 변석연(邊錫淵)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3만원을 요구했다. 이때 변석연의 맏아들 변덕영(邊德永)의 밀고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습격했다. 그는 종로경찰서 형사 한 명을 사살하고 곤도 경사를 부상입혔다.[1] 다음은 당시 사건 심문조서 내용 중 일부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 12월 6일 <전율할만한 대음모 발각> 기사를 실으면서 보합단 도적떼가 부자들을 약탈하려다가 검거되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김도원은 3차 신문을 거쳤고 1922년 김경로, 허헌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공판을 받아 1922년 2월 4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923년 4월 6일 사형당했다. 그의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문: 그래서 그대가 그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우선 필요한 것은 자금이다. 따라서 돈을 모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운동자금의 모집은 권총이라도 사용해서 부호에게 협박이라도 가하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권총을 손에 넣고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려고 하는 일까지 진행시켰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한가.
답: 그렇지 않다. 권총을 가지고 협박하여 돈을 모은다고 하는 것이면 조선에서 부호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므로 그와 같은 수단이 아니고 제1부호와 연락하여 돈을 내도록 한다. 어쨌든 부호와 마음을 합쳐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고 한다는 것이며, 묻는 바와 같이 협박수단으로써 돈을 모은다고 하는 계획은 없다. 따라서 그런 일에 착수한 일도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김도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곤도 경사는 총상 후 복막염과 폐렴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