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1892)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연통부를 설치할 것을 지시받은 회령야소교학교(會寧耶蘇敎學校) 교사 김인서(金麟瑞)와 박원혁이 함북 감독부를 설치할 때 관여했고, 그들로부터 함북 경성군 주북면에 함북 감독부 산하 사감부(司監部)를 설치할 것을 지시받았다. 그는 이에 따라 주북면 곡동 자택에서 장병일(張丙日)·이춘백(李春白) 등 7인과 함께 주북면 사감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명령과 공문 전달, 구국재정단원(救國財政團員)의 모집, 군자금의 수합과 납부, 공채 발매,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통신 연락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19년 12월 함북 경성총감부 삼향동 사감부 서기 박대욱(朴大郁)과 임정발(林正發)이 나남경찰서에 체포되면서 조직 전체가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20년 1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8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치안범죄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그해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3년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23년 10월 27일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동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동식은 1892년 4월 24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북면 곡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6월 그러나 1919년 12월 함북 경성총감부 삼향동 사감부 서기 박대욱(朴大郁)과 임정발(林正發)이 나남경찰서에 체포되면서 조직 전체가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20년 1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8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치안범죄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그해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3년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23년 10월 27일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동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