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운
1. 소개
한국의 수필가, 번역가. 본명은 김교중, 호는 삼오당, 소운이다. 1907년 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나 1981년 11월 2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1919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시대신조에 시 <신조>를 발표했고, 29년, 매일신보 학예부원이 된 뒤, 아동 교육과 한국 문학 번역에 힘썼다.
1950년대부터는 일본 생활을 바탕으로 여러 수필들을 저술했고, 대표작으로는 피딴 문답, 마이동풍첩, 물 한 그릇의 행복등 이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 등 3편이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외되었다.
사실 친일활동은 80년대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거주하는 번역가 도다 이쿠코는 한국 유학 당시 "김소운 글을 좋아한다"고 하다가 동창생에게 그 색히는 친일파 매국노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다.
3. 여담
그가 쓴 《목근통신》에는 하가쿠레에 실려있는 설화라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그러나 실제 하가쿠레 원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원래 저 이야기는 아카이맘마(赤いまんま)라는 아키타현의 지역 설화가 와전된 것이다.(일본어 원문) 실제 주인공도 무사가 아니라 평범한 농부이며, 떡이 아니고 팥밥을 훔쳐먹었다는 의심 끝에 결백을 증명하려고 아이의 배를 부잣집 주인이 보는 앞에서 '''낫'''으로 갈라버린 것이다.떡집 이웃에 무사와 어린 아들이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가게에서 놀고 간 뒤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 떡집 주인이 아이를 의심하자 무사가 말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아들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떡집 주인이 계속 의심하자 무사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칼로 떡집 주인을 베어 죽인 뒤 자신도 할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