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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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每日申(新)報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중 일본어판인 경성일보와 영어판인 서울 프레스와 함께 발행된 조선어 + 일본어판 기관지였다. 오늘날 서울신문.
이 신문의 전신은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단 하루만에 동시에 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에서 ''''대한'을 뺀 뒤'''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재출범하여 1910년 8월 30일자부터 발행을 시작했다.
일제에게 강제로 인수 합병된 신문사인데, 우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베델과 양기탁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이후[1] 약화된 상태에서 한일 합방 이후 인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가 국채 보상 운동 횡령 사건을 조작한 다음 베델과 양기탁의 위치를 흔들었고, 이후 베델은 일본과 영국의 비밀 외교로 영국 영사관에서 체포되어 옥살이를 살았기 때문.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가장 반일적인 논조를 가졌던 대한매일신보였던 만큼 일제에겐 큰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신문을 인수하여 오히려 이를 총독부 기관지로 바꾼 것도 일제.
1938년부터 경성일보로부터 분리되었다가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 조선총독부가 해체되면서 좌익 계열 사원들이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던 중 미군정과 충돌을 빚어[2] 그해 11월 10일 정간 되었다.
이후 1945년 11월 22일 속간하면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다.
1959년 3월 23일에 갑자기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 이어지던 지령을 폐기했다.
1998년 11월 11일에는 대한매일신보 지령은 다시 추가했다. 그러면서도 친일 기관지 시절이던 매일신보 시절은 자신들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매일신보 지령은 빼고 계산하는 괴상한 계산법을 선보였다. 일종의 친일 역사 세탁. 2020년 현재까지도 이 희한한 지령 계산법을 쓰고 있는 중이다.
1910년 ~ 1945년 8월 14일까지 매일신보
2. 역대 사장
1938년 분리 이전까지 매일신보의 사장은 경성일보의 사장이 맡았다. 분리 이전까지는 일본인만 사장이었던 것이 눈에 띈다.
- 오오타 치카라 (1910년)
- 요시노 다자에몽 (1910년 ~ 1913년)
- 아베 미쓰이에 (1913년 ~ 1918년)
- 가토 후사조 (1918년 ~ 1921년)
- 사장대리 오하라 토시타케 (1921년)
- 아카츠키 사토오 (1921년 ~ 1924년)
- 소에지마 미치마사 (1924년 ~ 1927년)
- 마츠오카 마사오 (1927년 ~ 1931년)
- 이케다 히데오 (1931년 ~ 1932년)
- 도키사네 아키호 (1932년 ~ 1936년)
- 다카다 모토이치로 (1936년 ~ 1938년)
- 최린 (1938년~ 1941년)
- 이성근 (1941년 ~ 1945년)
- 출처 : 관훈클럽 <관훈저널> - '제2의 조선총독부: 경성일보 연구'
3. 여담
- 임종국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를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 관보와 함께 참조한 자료이다. 현재에도 어떤 인사에 대한 친일 행적 관련 자료를 예시할 때 자주 매일신보 내용이 인용, 언급된다.
- 한국 언론 최초의 여기자인 이각경이 활동했다. 여성 계몽 기사, 가정 방문 기사, 인터뷰 등을 썼으나 1921년 기사를 끝으로 기사를 쓰지 않아 한동안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1925년 여러 언론 매체에서 수면제를 치사량이나 복용했다는 기사들이 실린 후 제적부 기록에는 1936년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3] #
- 흔히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창간, 폐간 전후로는 한글 신문이 없었다고 알려져있고, 이 사실이 거짓이라는 말 또한 퍼져 있지만, 관점에 따라 전자와 후자 둘 다 옳은 말이다. 매일신보는 국한문(한문 + 한글)으로 작성되었고 약간의 일본어가 섞여있었다. 따라서 "순한글로 작성된 신문"이란 기준으로는 한글 신문이라 할 수 없으며, 단순히 한글이 쓰인 신문이라면 한글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4][5]
-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처음 소개한 주요 언론 매체로 한동안 추정되어 왔었다.# 이후에 최초로 소개한 언론 매체는 1906년에 소개한 조양보라는 잡지로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세이구스비아라고 소개했음이 밝혀졌다. 일본식 발음에 가깝게 소개하긴 했지만, 친일과는 상관없고 1907년까지 12권을 발행하고 폐간되어서 매일신보에 비해선 규모가 작은 매체라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듯 싶다. 그리고 이후 소년이란 잡지에서 1909년에 그나마 영어식 표기에 가깝게 쇠익쓰피여라고 소개했다. 소년이란 잡지도 1908년에서 1911년까지 23권을 끝으로 폐간되었으니 결국 매일신보가 최초는 아니다. 대형 언론 매체 중에서는 매일신보가 최초로 소개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애초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1920년에야 창간되었다.)
- 의외로 꽤 많은 소설이 연재되어 화제가 되었다. 1917년 이광수의 무정, 개척자가 대표적이다. 938년 최린이 사장이 된 이후로 월탄 박종화가 역사소설가로 거듭나 금삼의 피 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 1930년까지는 번안, 번역 문학 연재가 주를 이루었다. "일반 대중을 위한 번역물들은 국문체로 연재했지만, 지식인을 위한 번역물들은 국한문체로 발표되었다." 장편소설 모집, 즉 일종의 신춘문예도 행했는데 최대 걸작은 1930년대 후반 박계주의 작품 「순애보」이다. 매일신보는 대중 취향의 소설을 주로 연재했지만, 역사소설의 경우 지식인 독자를 겨냥한 국한문체로 연재되었다. #
4. 관련 문헌
5. 관련 문서
[1] 양기탁은 이후 동아일보 창간 멤버가 된다.[2] 해방일보로 제호를 바꾸려다 저지당했다. 그러나 또다른 '해방일보'라는 신문사도 있는데, 이는 조선 공산당 기관지. 이 '해방일보'는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에 연루되어 정간당했다.[3] 이미 음독 당시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기사가 실린 바 있기는 하나 그 시절에도 기레기들은 있었고 , 사생활 보호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스캔들 등은 최대한 과장 보도하던 시절이었다. 사망했으면 사망기사와 함께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후속편으로 나왔을 텐데 그것이 없으므로 어찌어찌 소생한 것으로 보이긴 하나, 그 이후부터 자세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다.[4] 다만 이 신문은 국한문 중에서도 한자가 많이 쓰인 편이기에, 국한문이 아니라 한문에 한글을 끼얹은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5] 20-30년대 신문 중 조선일보가 가장 순한글 위주였으며 동아일보는 매일신보 수준으로 한자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