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쿠레

 


1. 일본의 고서
2. 인명


1. 일본의 고서


'''"무사도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실현된다. 즉,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죽음을 택한다는 뜻이다. 다른 생각의 여지는 없다." - 야마모토 츠네토모'''

葉隠, 또는 葉可久礼라고도 쓴다. 사무라이무사도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서적이다. 총 11권으로 저자는 에도 시대 하급 사무라이 야마모토 츠네토모[1]이다.
하가쿠레는 삶이나 사무라이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서술했는데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武士道と云ふは死ぬ事と見付けたり)'''는 문구로 유명하다. 에도 시대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에 대해서 비평적이기 때문에 겐로쿠 아코 사건에 대해서도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은 점이나 주군원수를 갚은 다음에 바로 할복하지 않았음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기록했다. 즉, 이론 중심의 무사도보다 '''행동 중심의 무사도'''를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에도 막부다이묘들은 하가쿠레의 내용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면 사적인 결투복수가 횡행할까 봐 하가쿠레를 좋지 않게 여겼고, 사무라이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분서처분했다. 하가쿠레는 주자학자(성리학자)들도 비판했는데, 하가쿠레에서 강조하는 무사도라는 개념은 센고쿠 시대에서도 적용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쟁이 없는 시대의 직업군인이 전쟁터에서의 마음가짐을 '''상상'''하여 쓴 무사도 추종 책이었던 것. 더 노골적으로 까자면 진짜 전국시대의 전쟁에서 싸워 보거나 아니면 하다 못해 전쟁 당시 상황을 겪어보기라도한 경험은 하나도 없는 '''치킨호크'''가, (실제 전쟁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헛소리만 가득한) 자기만의 망상만으로 무사도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입만 살아서 쓴 불쏘시개(...)나 다름 없다. 17대 일본 총리였던 오쿠마 시게노부도 "낡아빠진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평화에 질리고 막부사무라이 홀대[2]에 지친 소수의 과격한 사무라이들은 하가쿠레를 애독했고 그들이 남긴 사본에 의해서 그 내용이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나베시마[3] 논어>.
이 불쏘시개가 그냥 그렇게 소수의 과격한 꼴통 사무라이들만 애독하는 수준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훗날 일본 제국이 세워지고 이 하가쿠레가 재평가(?!)를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일본 제국이 '''이 하가쿠레에서 주장하는 전문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이비 무사도를 진짜 무사도라고 착각하고 국가적으로 밀어주면서, 하가쿠레에 쓰여진 "무사도(현실성 없는 망상)"가 국가적인 이념으로까지 승격된 것.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군국주의 국가에서 국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는 병사는 매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정신교육의 교재로 하가쿠레를 퍼트렸고 실제로도 미시마 유키오 같은 극우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애독되었고, 애독되고 있다. 그들은 "무사도=죽음"이라는 해석을 했기에, 자폭 특공을 무사도 정신이라고 미화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실전 경험에서 우러난 노하우가 담긴 진짜 전국시대 기록들이나 명언들을 냅두고, 전국시대가 끝나고 몇십년 후에 태어나서 전쟁 경험은 커녕 진짜 전장 근처에도 안 가본 좆문가가 현실을 무시하고 망상만으로만 써갈긴 이딴 불쏘시개를 재평가랍시고 국가적으로 권장하고 빨아 댄 일본 제국 높으신 분들의 멍청함을 보면, 왜 일본 제국이 망할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다(...).
사에키 신이치의 저서 <전쟁터의 정신사 - 무사도라는 환상(戦場の精神史―武士道という幻影―)>(한국 출판본 제목: 무사도는 없다)에서는 이 하가쿠레의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토대로 한 일본 제국의 "무사도"를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 #2)
전쟁 경험도 없는 인간이 전쟁에 대해 제멋대로 떠드는 것도 문제지만, 내용 자체도 뭔가 윤리의식과는 담을 쌓은 듯 제정신이 아니다. 가령, 전국시대 초기에 여러 실전들을 겪은 베테랑이었던 아사쿠라 소테키는 "무사는 개라고 불리든, 짐승이라고 불리든, 이기는 것이 본분이다" 라고 말은 했지만, 그런 그조차도 거짓말에 대해서는 "무인이 되고자 하는 자, 첫째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늘 성실하게 규율을 지켜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평소에 거짓말을 일삼아 불성실한 자로 낙인이 찍힐 경우, 정작 필요할 때 바른말을 하여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嘘をつかず、義理堅く、恥を知ることが大切だ。'''なぜなら、重大な任務を命じられたとき、普段からいいかげんなことをしていると信用されない。''')" 라고 하면서 거짓말은 좋지 않다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런데 반면에 우리의 치킨 호크(...) 야마모토 츠네토모는 본인의 아버지라는 인간부터가 '''"큰소리를 쳐라, 노름을 해라,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사내답지 못하다(博打を打ち、嘘をいえ。一丁歩むうち七度ほらを吹かねば、男でないぞ)"''' 라는 헛소리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고 하며, 그래서 하가쿠레 안에서도 아버지의 저 말을 고대로 따라서 당당하게 도박과 거짓말 같은 짓들을 하라고 권장한다(...). (하가쿠레의 내용을 분석하여 소개하는 사무라이브(SAMURAI'VE)의 칼럼(일본어)) 참고로 자기 아들에게 저렇게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노름을 해야 한다는 저 막돼먹은 소리를 했던 야마모토 시게즈미(山本重澄, 다른 이름은 야마모토 진에몬 시게즈미 山本神右衛門重澄 - 1590-1669)가 얼마나 잘난 인간이냐면.....기껏해야 오사카 전투시마바라의 난 정도가 종군경험의 전부. 그나마 오사카 전투에서도 했던 일은 전투도 아니고 보청(普請), 그러니까 '''시설직'''이라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실전경험은 시마바라의 난 하나뿐이다(...). #
전후에는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기피되었지만 쇼와 시대 말기에서 헤이세이 시대경부터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도 11권 중에는 할복을 비롯한 죽음이나 폭력에 대한 미화를 제외하고도 저자의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재평가된 것. 그렇기에 현대에는 처세술 서적이나 비즈니스 서적으로도 읽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판 자체가 합리주의나 제정신과는 담쌓은 물건인지라 이런 하가쿠레에 대한 일본 기업인들의 숭배가 '''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저 유명한 "무사도는 죽는 것이라고 보았다."라는 문장은 츠네토모가 본디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기존의 "무사도=죽음"이라는 해석을 부정하고, "기본적으로 생명을 중시해야 하지만, 무사에게는 올바르게 사는 것 이외에도 올바르게 죽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무사가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의 대처법에서 무사도가 드러나는 법이다."라는 해석이 나왔다.[4] 또는, 정말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일이던지 죽을 각오로 임해야한다" 또는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말고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에 대해 감사하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라는 해석도 있다. 사실 이런 서적의 성격상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제목인 하가쿠레는 '잎'을 뜻하는 '하'와, '숨다'의 명사형인 '가쿠레(숨음)'의 합성어이다. 이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도, "무사그림자처럼 숨어 주군을 받들라."라는 의미에서 지었다던가, 헤이안 시대의 와카집 <산가집(山家集)>에서 유래했다는 설, 츠네토모가 '하가쿠레'라고 이름 붙인 감나무를 키워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무사의 아이가 떡을 훔쳐먹었다고 의심받자 무사가 직접 아이의 배를 갈라서 결백을 증명한 뒤 떡집 주인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는데, 정작 '''하가쿠레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
원래 이 이야기는 아키타 지방의 전통 구전 설화들 중 하나인 '팥밥'(赤いまんま)이며 제목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이가 근처에 있는 부잣집에서 몰래 팥밥을 훔쳐먹었다는 의심을 받자 그 농부는 부잣집 주인이 보는 앞에서 직접 아이의 배를 '''낫'''으로 갈라 결백을 증명했다는 이야기다.(일본어 원전, 번역기 필요) 어째서 이 이야기가 한국에서 하가쿠레 속 무사들의 이야기처럼 와전되었는지는 불명. 위에 나왔듯이 하가쿠레 자체가 낡아빠진 무사도를 담은 책이므로, 그런 무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출처를 찾다가 하가쿠레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먼 미래 23세기를 다루는 미니어쳐 게임 인피니티 세계관 속에서 일본 분리주의군 군사 교리와 정신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2. 인명


[1] 山本常朝. 생몰년은 1659년 ~ 1719년. 사가번(佐賀藩) 출신. 42세 때 출가한 이후에는 '常朝'를 훈독이 아닌 음독으로 바꾸어 '야마모토 조초'라고 하였다.[2] 당장 막부의 통치자인 쇼군부터 사무라이지만 에도시대는 사무라이에게 까다롭고 힘든 시대였다. 사무라이는 개인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수입이 녹봉으로 제한되는데 녹은 모두 로 지급되었고 이것을 으로 바꾸어 살림을 꾸렸다. 그러나 상인들이 사무라이가 급료를 받는 시기에 맞춰서 쌀 값을 조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실제로 갖게 되는 수입은 명목의 7할 정도였다. 또한 지방세력이 힘을 키워 다시 한 번 전국시대가 되는 것을 우려한 막부는 사무라이나 다이묘의 힘을 깎는데 열심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3] 鍋島. 사가번은 나베시마씨의 영지였다.[4] 죽음을 두려워해서 비겁한 선택을 하면 안된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