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판소리)

 

'''대한민국 판소리 명창'''
[image]
'''이름'''
김소희(金素姬)
'''영문이름'''
Kim So hee
'''국적'''
[image] 대한민국
'''생년월일'''
1917년 12월 1일
'''출생지역'''
[image] 전라북도 고창군
'''사망'''
1995년 4월 17일
'''사망지역'''
[image] 서울특별시
'''신체'''
155cm
'''직업'''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1. 소개


김소희(金素姬, 1917년 12월 1일 ~ 1995년 4월 17일). 아호는 만정(晚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가성을 쓰지 않고 상청, 중청, 하청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소리의 특징이다. 근, 현대 명창들을 통틀어 개인이 지닌 음악성, 대중적 인지도, 판소리사에 끼친 영향력 등을 고려하였을 때 국창(國唱)[1] 으로 칭해지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2]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으로, 아명은 옥희, 호적상 본명은 김순옥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모가 '소희'라는 이름을 다시 지어주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조선권번 소속의 동기로써 노래, 춤, 기악을 두루 배웠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여러 스승들에게 배웠는데 특히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과 정정렬의 소리를 많이 배웠고, 그 외에 박동실에게서도 많이 배웠다. 해방 후에도 박록주, 김여란 등 선배 소리꾼들에게 조금씩 소리를 배워 자신만의 소릿제를 짰는데, 속칭 '만정제'가 그것이다. 여러 스승들 중 그의 예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송만갑과 박동실, 정정렬로, 만정이 주특기로 삼았던 심청가와 춘향가가 각기 이들의 자장 아래에서 나왔다.[3] 1962년 유럽, 1964년 미국 등 세계를 두루 다니며 공연을 통해 판소리를 알렸다.[4]
서예 솜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해방 이후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5]에게 지도를 받은 적도 있으며, 1967~1970년 내리 국전 입상 경력을 갖고 있다. 현재 김덕수가 소장하고 있는 '四物놀이'라 쓰여진 만장 역시 김소희의 작품이다.[6]
동시대 여류명창이었던 박귀희(가야금 병창 예능보유자)와 평생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로 지냈는데, 김소희의 제자들 중 다수가 박귀희의 제자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가야금 병창의 예능보유자 안숙선과 서공철류 가야금 산조의 예능보유자 강정숙이 모두 김소희와 박귀희의 문하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신영희, 안숙선, 강정숙 등 3사람의 인간문화재를 길러내었고, 오래 배우지는 않았지만 역시 인간문화재였던 오정숙, 남해성, 박송희, 성우향, 성창순 등도 배우기도 했던 만큼 비중 있고, 실력있는 소리꾼들을 많이 양성했다. 서울국악예술학교(일명 '국악예고', 現 국립전통예술학교)[7]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8]
현재 김소희의 뒤를 이어 수제자였던 신영희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배우 오정해가 마지막 제자로 유명하다. 그래서 영화 서편제에서 오정해가 직접 판소리 연기가 가능했던 것. 서편제에서 일부 창은 위에 언급한 김소희의 다른 제자인 안숙선 명창이 부르기도 했다.
한편, KBS 1TV 토요 단막극 <인간극장>에서 김소희의 생애를 다룬 2부작 특집드라마 '명창 김소희'가 95년 6월 10일 1부, 6월 17일 2부 편성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서울시장 후보 투표 분위기 등의 이유 탓인지 무산됐다.
안타깝게 30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당대최고의 여류명창으로 평가받는 안향련도 김소희의 제자이다. 김소희는 원래 제자들이 자만에 빠질까봐 칭찬을 극도로 절제하는 엄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안향련을 가르치면서 "일찍이 나를 뛰어넘은 유일한 제자" 라고 극찬한 바 있었다.

[1] 국창(國唱)이란 나라의 명창이란 뜻으로 판소리 명창 중에서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빼어난 명창을 일컫는 말이다. 즉 레전드 오브 레전드.[2] 김소희와 감히 비교할 수 있는 동시대 인물은 박록주, 박초월 정도밖에 없다. 그야말로 넘사벽...[3] 정가풍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었던 김여란의 영향도 받았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김소희는 정가 공연을 가진 적도 있는 등, 그쪽으로도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소리 역시 정가를 연상시키는 맑고 우아한 음성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4] 특히 이시기에 했던 카네기홀 공연에서 그는 범피중류를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전한다.[5]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찾아온 그 양반이다. 문제는 정치에 뜻을 두면서 재산을 다 들어먹는 바람에 세한도가 저당잡힌 일화도 있다는 흑역사가(..)[6] 민속학자이자 민속극 전승자인 심우성에 의하면 당시 자신이 이름을 정해주고, 공연을 앞둔 어느날,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 등과 함께 만정을 찾아가 글씨를 청해 받은 것이 이것이라고.[7] 김소희가 설립에 관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시절의 국악예고는 국립이 아니었다. 이곳이 국립으로 전환된 것은 최근의 일.[8]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 그러니까 이후 국립국악고등학교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국악 교육 기관으로 국악고등학교가 정악과 정재를 주특기로 하였다면 국악예고는 민속악과 민속무용을 주특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