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한자:
중국어: 書法/书法[1]
일본어: 書道[2]
베트남어: thư pháp
영어: Calligraphy
아랍어: فن_الخط
1. 개요
2. 한자문화권의 서예
2.1. 한글 서예
2.2. 한글 서체 종류
2.3. 한자 서체 종류
2.4. 관련 인물
3. 이슬람 서예
4. 유럽
5. 현대


1. 개요


'''서예'''(書藝)란 문자를 중심으로 종이와 붓, 먹 등을 이용하여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예술을 말한다(서예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문자가 존재하는 모든 지역에서 발전하였으나, 보통 '서예"라고 말하면 한자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붓글씨 예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새는 캘리그래피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차이점은 해당 문서 참고.

2. 한자문화권의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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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서예의 이미지. (왕희지난정서 행서)
붓을 사용한 서예로, 한자나 그와 겸용되어 사용되었던 문자들을 사용한 서예. 가나(문자), 한글, 심지어는 꾸옥응으도 종종 서예의 대상이 된다.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자문화권중국, 대만,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과거 사대부들의 필수 소양 예술 가운데 하나로 , 서, 중 서를 차지하고 있다. 각국에서 한자 표기도 모두 다른데 한국에서는 書藝(서예), 중국과 베트남은 書法(서법). 일본에서는 書道(서도)라고 쓴다. 서예라는 단어는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만들었다.
서예를 하는데 필수 도구는 종이(紙, 주로 화선지 등의 한지나 갱지), (筆), (墨), 벼루(硯)인데 이를 지필묵연, 또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한다. 기타 필요한 도구로는 종이를 누르는 데 쓰이는 서진(書鎭,또는 문진이라 함), 물을 담아 두는 연적(硯滴) 등이 있다. - 작은 글자는 붓펜 하나만으로 해결된다.
점과 선, 획의 굵거나 가는 정도, 붓누름의 강하거나 약함 또는 가볍거나 무거움, 붓놀림의 빠르거나 느림, 먹의 짙거나 묽음, 문자의 비례 균형 등이 서예의 주요 요소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에게 서도를 장려한다. 학생뿐 아니라, 성인들의 취미로도 인지도가 있다.[3] 연하장이나 혼례 예물 봉투, 전별금 등 봉투 같은 데에는 되도록 붓으로 쓰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다. 일회성 행사나 안내판에도 붓글씨는 여전히 유효하다.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아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3 아미고스가 수사 본부 이름을 종이에 한자로 써서 붙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게, 전통 음식점이나 뭔가 전통있는 가게의 이름 같은 건 대부분 붓글씨로 쓴다. 천에다 가게 이름을 쓴 것을 가게의 상징으로 쓰고, 수제자에게만 쓸 수 있게 할 정도. 물론 젊은 세대는 그런 거 없고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나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프린트해서 쓴다.
베트남에서도 원래 한자문화권이었던만큼 투 팝(thư pháp)[4]이라 불리는 동아시아권 전통적인 서예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한자서예 이외에 한글서예를 하는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한자서예를 가끔 하기도 하지만 현재 사용하는 문자인 '''로마자로 서예를 한다.''' 같은 로마자로 쓰는 서양의 캘리그래피와는 다르게 베트남의 서예는 멀리서 얼핏 보면 한자 서예 같이 보이기도 하는, 한자 필체의 영향이 남아있는 로마자 서예라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좀 멋들어지게 써놓은 투팝 작품은, 분명히 로마자인데 부적 같이 보여진다.
대한민국의 경우 초등학교중학교에서 미술의 한 단원으로 다룬다. 주로 차분함과 집중력을 기르거나, 예술적인 이유로, 아니면 악필을 교정하기 위하여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대학에도 서예학과가 있긴 하지만 굉장히 수가 적은데다가 그나마도 통폐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몹시 안습. 주로 한문학과와 함께 운영하는데 원광대학교 한문서예학과가 그 예. 미술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면 서예 강의를 들을수 있는 경우도 있다.
서예에는 인품이 드러난다거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5]. 그러나 아래의 관련 인물 문서에 최우나 양녕대군, 선조가 있는 걸 보면 이것도 결국 케바케라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현대사로 넘어오면 무려 전두환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전후세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친필 휘호가 이전 역임자들에 비해 딸리는 편이다. 과거에는 서예가 교양인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러한 인식이 많이 퇴색되면서 그런 듯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는 직접 서예를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대중들에게 자신의 교양을 알리는 홍보수단으로 이용하곤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이미지 메이킹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서예를 전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정치계에서 서예의 유행은 확실하게 끝난 것으로 보인다.
취미가 서예인 사람들은 디스크에 걸리는 빈도가 매우 높다. 몸을 기울이고 붓과 종이에 집중하기 때문으로, 서예가들은 작업실에 허리에 부담을 덜 주는 높은 탁자와 높이 조절이 가능한 의자를 설치해두는 경우가 많다.
서예의 최대 금기는 개칠, 즉 한 번 쓴 글씨를 고쳐 쓰거나 덧쓰는 것이다. 서예 선생님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개칠하지 말라고 가르치면 학생들은 “개같이 칠한다”는 속어로 알아듣기도 하지만 개칠은 한자다(改漆). 물론 승정원일기 같은 문서는 워낙 격무에 시달리던 승정원 공무원들의 기록인지라 퇴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개칠의 흔적이 수도 없이 발견된다.(...)
서예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 중 간혹 연필로 글자의 윤곽을 그린 후 안에 색칠을 해오는 경우도 본다(....).

2.1. 한글 서예


사실 한글 서예는 오랫동안 한자 서예에 비해 연구가 되어 오지 않았다. 당장 한글 창제만 해도 한자에 비해 훨씬 훗날의 일이다. 또 서예는 오로지 한문만을 취급하던 시절이 있어 용어나 서체의 정의도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경우다.
최초로 나타난 형태는 한글 고체로, 흔히 이야기하는 판본체이다. 고체의 고는 옛 고(古)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한글 서체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한글 서예가 일중 김충현[6]의 정의는 훈민정음용비어천가의 원본을 본받은 글씨. 조선 전기 이후 활자, 현대에는 비석과 각종 현판에 주로 사용되는 상당히 실용적인 서체다. 실제로 배우는 데에도 다른 서체에 비하여 어려움이 비교적 적다.
비교적 정의가 명확한 서체는 궁서다. 본래 궁중 여관들과 내명부에서 사용하는 글씨인데 이는 서간 등 글씨가 필요한 상황이 많음에도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자연 궁중에서만 통용되던 글씨였다. 당시 예법 상으로는 궁중의 물건은 여염 사가로 나갈 수 없어서, 궁중에서 궁체 서간이 나갈지라도 태워 없애든지, 보낸 서간에 바로 답간을 달아 궁중으로 돌려보냄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서민 문화가 발달하고 한글 식자층이 늘어났다. 더불어 한글 소설이 유행을 타면서 궁중 여관들의 서적 필사가 일종의 부업이 되면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진 탓에 궁중에서 부친 서간들도 보존되어 현대에 발견되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순원왕후의 서간인데, 상당히 글씨가 아름답다.
궁중 여인들은 '서사상궁'이라는 여관들이 글을 대필해주거나 글씨 교육을 하기도 했다. 상술한 순원왕후의 서간에도 역시 서사상궁이 쓴 글씨가 많은 편인데, 서사상궁의 글은 서간 말미에 어느 전각 아무개상궁이 서사하였습니다~ 투로 적었기 때문에 구분이 가능하다. 궁체는 획이 섬세하기 때문에[7] 시나 글귀 등을 작품화할 때 주로 사용된다. 흘림과 진흘림 등 변형성도 뛰어나 편지 등을 작성하는 데에도 사랑받아왔다.
민체는 현대의 캘리그라피와 사실상 같은 영역이다. 원광대학교 한문서예학과의 여태명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궁체와 교섭하지 않은 서체''', 즉 서민들이 자유롭게 쓴 모든 글씨체를 민체라고 정의한다. 학자에 따라 '나름체'라는 표현도 쓰며, 막 썼다는 의미에서 '막체'라는 표현도 있다.[8] 한문 서예가나 동양화가도 민체를 익히는 경우가 있는데, 한문에 토를 달거나 동양화 한 귀퉁이에 글귀를 쓰기 위해서다. 전자라면, 한글 서예를 익히지 않은 한문 서예가들이 어려운 한문에 토를 달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고, 후라면 유려한 미로 작품에 미적 완성을 갖추기 위해서다. 이처럼 민체는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드라마 로고 등 현대에 미적으로 활용되는 글씨의 대다수는 민체라고 할 수 있다.

2.2. 한글 서체 종류



2.3. 한자 서체 종류



2.4. 관련 인물


신라~고려에서 제일가는 명필 중 한 명으로 손꼽히던 인물.
유배가서 추사체를 만들었다. 70세 평생동안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한석봉 다음으로 유명한 명필이다.
서예에 취미가 있어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휘호가 많은데, 본인이 글씨쓰는 것을 좋아한 데다가 통치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서체를 구사했으며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까지 풍긴다’는 평과 함께 사령관체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그의 서예 솜씨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리는데 1968년 광화문 준공식에서 현판이 공개되자 서예가이기도 했던 국회의원 윤제술이 대통령의 글씨인 것을 모르고 큰소리로 "저걸 글씨라고 썼냐"고 했던 일화나[9], 박 대통령의 글씨를 20여 점이나 새긴 각서장(刻書匠) 오욱진이 훗날 그의 글씨를 두고 "시골 선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고 한 평가가 전한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에서 가장 명필은 이승만이지만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되는 작품은 그의 글씨라고 한다.[10]
명필이였으며 그림에도 능숙했다.
조선의 왕 중 최고 명필이다. 명나라의 장수들도 선조의 글씨를 얻어갔다. 반대를 무릅쓰고 한석봉에게 사자관(寫字官) 벼슬을 내린 장본인이면서 그의 글씨를 두고 "비록 액자(額字)에는 능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고 평할 정도로 본인의 글씨에 자부심이 있었다.
감옥에서 서예를 배워 자신의 서체를 개발했다.
숭례문경복궁 경회루의 현판 글씨를 썼다.
서예라는 장르를 창시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 중 가장 명필이라 평가받는다. 단순히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서예가 일상이었던 시대를 살아서가 아니라 정말 명필. 보신각관동팔경 중에 청간정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우리가 아는 그 매국노 맞다.
당나라의 안진경체를 당대의 대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金忠顯) 선생(1921~2006)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실제로도 명필로 평가받는다.
그의 글씨는 거의 안 남아 있지만, 명필로 일컬어졌다.[11]
마오쩌둥의 베리야. 문화대혁명 시기에 수많은 사람의 숙청에 간여했다.
붓 하나만으로 관직까지 오른 사람. 한국에서 아예 명필의 대명사가 되었다.
야인시대의 그 상하이조가 맞으며 말년에 서예가였다고 알려져 있다.
  • 김충현
독립기념관의 현판을 썼다.
화투 11월 비광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의 방계 황족 가문으로, 지금은 단절되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대대로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리스가와 류 서도' 라는 서예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마지막 당주 다케히토(威仁) 친왕의 자녀들 중 미에코(實枝子) 여왕만이 살아남았고, 그녀는 자신의 딸 도쿠가와 키쿠코에게 '아리스가와 류 서도'를 전수했다. 키쿠코는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에게 시집갔으나 자녀를 낳지 못했고, 대신 조카손자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이 서법을 전수해 주었다.

3. 이슬람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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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12](Bismillāhi r-raḥmāni r-raḥīm)' 라고 쓰여있다.
링크 참조
이슬람권에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몇 안되는 예술 분야 중 하나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의 전통상 이슬람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서예가 발달했는데, 특히 인물을 그리는 게 금기시되었고 점차 그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서예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된 것. 이는 '그림이 아니라 글자라서 괜찮다'라는 식으로 규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그림이라고 인식은 하지만 아랍 문자는 신성하기 때문에 아랍 문자로 그린 그림은 우상숭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허용되는 것이다.
이슬람 예술 분야에서 아라베스크건축같이 발달할 수 있던 몇 안되는 물건. 오스만 제국 시대 황제들은 공식 문서나 화폐에 투으라(Tuğra)라는 서명을 했는데 이 또한 서예를 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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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뒬하미트 2세의 투으라. 본문에는 Abdulhamit han bin Abdülmecit el-muzaffer daima (항상 승리하는 압뒬메지트의 아들 압뒬하미트 칸)이라고 쓰여있고, 오른쪽 위에는 el-gazi (신앙의 수호자)라는 별칭이 쓰여있다. 투으라는 파디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쉴레이만 대제 이후 정형화되어 본문 오른쪽에 두 줄로 나 있는 가로선은 '술탄'과 '칼리파'로서의 왕권을, 왼쪽의 고리 두 개 중 작은 고리는 '흑해', 큰 고리는 '지중해', 위쪽의 세로선 세 개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함을 상징한다.
그때문에 서양에서는 다른 서예를 제치고 더더욱 유명해진 물건. 곡선이라는 특징 때문에 예술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그림도 다른 글씨보다 훨씬 더 다양하며 다른 지방보다 훨씬 더 의의가 크다는 점 때문으로 보인다.
자사의 로고에 이슬람 서예를 사용한 예로 알 자지라에미레이트 항공이 있다.

4. 유럽


흔히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는 서예에 해당하는 예술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그냥 서양 전통 문화, 특히 중세 문화가 국내에 제대로 안 알려진 탓이다. 가톨릭과 정교회 모두 시각예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문자도 예외가 아니다. 펜 캘리그래피 자체가 바로 깃털펜을 널리 쓰던 시절부터 있던 것이며 흔한 편견과 달리 금속활자가 서양에 보급되기 전까지 성경 등의 사본을 적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 박물관에 가서 중세의 성서 필사본들을 전시해놓은 것들을 잠깐만 봐도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아무래도 유럽 서예는 서예라고 안 하고 원어 그대로 캘리그래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https://www.kb.nl/en/resources-research-guides/kb-collections/medieval-manuscripts
https://www.fitzmuseum.cam.ac.uk/research/im
또한 블랙 레터도 본질적으로는 유럽식 캘리그래피에서 유래한 글자꼴이다.

5. 현대


가장 비슷한 형태로는 '''타이포그래피'''가 있으며, 유래는 다르지만 상세히 따져보면 서예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 서법[2] 서도[3] 덕분에 붓과 물감을 만들고 파는 회사가 100년 넘게 잘 운영되고 있으며, 간단하게 붓글씨를 쓸수 있는 붓펜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4] 그냥 '서법' 이라는 뜻이다.[5] 벼루에 물을 부어서 먹으로 그어 먹물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번거로운 작업이다. 또한 그렇게 먹물을 만들고 난 후 붓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옮겨다 글씨를 한자 한자 적는 것 역시 정성들여 천천히 써야한다. 자칫 잘못하단 먹물이 종이에 번져서 글자를 망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예라는게 대부분 한자를 위주로 쓰는 일이다보니 획 하나 하나가 중요하고 이는 현대적인 필기방법으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일이다.[6] 한글뿐 아니라 한문 서예에도 정통하여 많은 글씨를 남겼고, 한글 서예는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금석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업적을 남겼는데 '''최초로 한글 서예로 비석을 제작할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위당 정인보는 생전에 '''나는 일중이 쓰지 않는 글은 짓고 싶지 않다.''' 는 말을 한 바도 있다.[7] 달리 표현하자면 큰 글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8] 딱히 비하적인 표현은 아니다. 막사발도 막 만들어서 막사발.[9] 박통의 글씨인 것을 안 다음에는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외치는 임기응변으로 화를 모면했다고 한다.[10] 다만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1억 5,500만원에 낙찰되었다.[11] 현대에 확인된 건 한중 공방전에서 양평관에 갔을 때 쓴 곤설(衮雪)이라는 두 글자 뿐이다. 현판에는 '위왕' 두 글자가 더 써져 있지만 당시 조조는 위왕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가 덧쓴 것이다.[12] 쿠란의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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