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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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焰.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한 배우. 본명은 김덕린(金德麟)이다. 김염이란 예명은 중국어로 진옌(Jin Yan)이라 읽는다.
1. 생애
2. 출연작


1. 생애



1910년 4월 8일 대한제국 서울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필순 의사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의해 수배가 되자 1912년에 만주로 이주하였다. 국적은 1912년부터 중화민국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첩자에 의해 살해 되었고 김염은 혼자 남아 고아가 되었다.
1927년에 김염은 상하이로 갔고 영화사에서 기록원으로 일하다가 출연한 게 인연이 되어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김염이 배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시절부터 배우가 되기위해 밤낮없이 노력해왔던 사람이었다. 배우로 성공한 그는 1930년대에 상하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게다가 외모도 수려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성공한 후 갑작스런 발표를 하게 된다. 유명한 배우로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한 멜로영화를 그만 두고 앞으로 항일 영화만 찍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버지가 일본첩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어린시절부터 결심했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배우가 된 이유도 영화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항일 영화 출연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 수는 40편에 이르렀다. 하지만 후에 중국을 점령한 일본에 의해 김염은 제국주의 영화 출연을 강요받지만 그는 그 순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국적도 바뀌었다. 1966년 국주의 영화 출연을 강요받지만 그는 그 순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도 순수예술가이기를 고집하며 공산당 가입을 하지 않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1983년 12월 27일에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1930년대 이후엔 영화 활동이 뜸했는데 1950년대말부터 위 관련 질환에 시달렸다. 아내는 중국의 배우인 친이(秦怡, 1922-)인데 생존 중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는 그의 사촌 누나이며, 셋째 고모는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으로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한 김순애이다. 즉, 집안이 독립운동가 가문인 셈이다.

2. 출연작


  • 연애여의무(戀愛與義務, Love and Duty):1929년작. 위의 여배우는 루안링위(阮玲玉, 완령옥, 1910-1935)이다.
  • 일전매(一剪梅, A Spray of Plum Blossoms): 1931년작.
  • 도화읍루기(桃花泣血記, Peach Blossom Weeps Tears of Blood): 1931년작.
  • 삼개마등여성(三個摩登女性, Three Modern Women): 1933년작.
  • 성시지야(城市之夜, Night in the City): 1933년작.
  • 대로(大路, The Big Road): 1934년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