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순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면허 의사, 독립유공자. 본관은 광산(光山). 이명은 김필순(金弼順).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그의 조카이며, 셋째 누이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이다. 넷째 누이 김필례(金弼禮)는 김활란과 함께 YWCA를 설립하는 등 여성운동에 전념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 김염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
1878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의 5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일찍이 배재학당을 졸업하였고,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1900년부터 올리버 R. 에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일하면서 여러 의학 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한편으로 제중원의학교를 다녔다.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를 번갈아 왕래하면서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는데, 평소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절친하여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가입,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하고, 제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협의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1911년 다른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동녕·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치치하얼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을 치료하고, 병원을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는 한편,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1일 일제 특무요원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먹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